피에르 라발(Pierre Laval)은 프랑스의 정치가로서 2차대전이 터지기 이전에 이미 두차례에 걸쳐 프랑스의 수상을 역임하였다. 수상으로 재임중이던 1931년 라발은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사주간지 타임의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1940년 프랑스의 패배가 확정되어 휴전협정이 체결된 다음날 페탱은 라발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 라발은 1940년 7월 10일 휴전협정 비준을 위해 비시에 의회를 소집하고 페탱 원수에게 새로운 헌법을 공포할 권한을 부여하도록 대의원들을 설득했는데 결과는 찬성 569명, 반대 80명, 기권 18명이었다.
독일과의 항구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할 것을 주장하던 라발은 1940년 12월 페탱에게 해임되었으나, 1942년에 다시 비시정부의 수반으로 임명되었다.
독일이 패배한후 잠시 스페인으로 피신했던 라발은 1945년 7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드골은 그를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하였으며 억압적인 법정에서 라발의 변론은 무뢰배들과 드골의 앞잡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되고 중단되었다. 이에 수치를 느낀 라발은 음독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1945년 10월 15일 총살형에 쳐해졌다.
아래는 1942년 6월 22일 라디오를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행해진 라발의 연설문이다.
프랑스 국민과 국가에 대한 애정과 유럽의 평화에 대한 절절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좌측 사진 왼쪽은 페탱 오른쪽은 라발
전쟁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당분간 이 어려운 시기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 수반인 제가 우려하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통과 어려움의 이 시기를 잘 버텨낼 것입니다. 제가 보다 두려워하고 보다 우려하는 것은 장기적 전망에서 본 프랑스의 운명입니다.
우리 세대가 패배자로 전락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우리 프랑스인들이 현재 겪고있는 대사건들의 수준에 걸맞게 높이 올라가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이 순간은 우리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중 하나로 기록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1939년에 전쟁을 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또한 1918년의 승리 직후에는 독일과 평화조약을 맺지 않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독일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완전한 화해의 기반을 마련해야 합니다. 저는 25년 내지 30년마다 우리 청년들이 전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합니까?
정부에서의 저의 존재는 프랑스에서나 외국에서나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독일 및 이탈리아와 정상적이고 신뢰 있는 관계를 재개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유럽이 탄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될 것입니다. 현재 유럽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거론되고 있지만 프랑스에서 유럽이라는 말은 아직까지도 그리 익숙치 않은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고장에 애착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의 나라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인으로서 저는 장차 우리가 유럽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며 프랑스는 이런 유럽에서 자신에게 합당한 지위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유럽을 건설하기 위해서 독일은 거대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독일은 다른 나라들과 함께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자국 젊은이들의 피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독일은 공장과 농촌에서 청년들을 끌어 모아 전장으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독일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왜냐하면 독일이 승리하지 않는다면 곧 도처에서 볼셰비즘이 뿌리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난 4월 20일의 연설에서 제가 말씀 드렸듯이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명예와 우리의 사활이 걸린 이익을 보장받으면서 새롭고 평화로운 유럽에 합류할 것이냐, 아니면 우리 문명이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것이냐가 그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진실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없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도 무기력하거나 고집센 국가를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민 전체의 참여만이 분별 있는 정책에서 풍부한 결실을 거두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몇이 이러한 정책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울여야 할 노력이 어떠리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온 교육 때문에 우리는 이처럼 반드시 필요한 협조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인기에 연연하기에는 너무도 조국을 사랑해 왔습니다. 이제 저는 정부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제가 이 정책이 프랑스의 구원을 보장할 수 있고 장차 도래할 평화 속에서 프랑스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러분께 말씀드릴 때 여러분은 저를 믿고 따라야만 합니다.

라발과 힛통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루이 14세까지 프랑스의 왕들은 부왕의 장례식 휘장을 아헨으로 보내서 샤를마뉴의 무덤을 덮었답니다.
프랑스 출신 지원병을 모은 친위대(?)의 명칭도 샤를마뉴 뭐라고 들었는데요.
진정한 프랑스는 북부 프랑스구요. 드골조차도 리옹부터는 아프리카라고 말했습니다.
경위야 어떻든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를 했으니까 독일이 침입했고 독일이 점령한 국가 중에 휴전 협정을 맺은
곳은 프랑스 뿐입니다. 프랑스가 빨리 빠지고 독일과 러시아가 피터지게 싸워서 프로이센이 망하게 된 것은
프랑스로선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Y 염색체 haplogroup을 기준으로 볼 때 일본인과 한국인의 근친성이 60%라면
프랑스인과 영국인은 90% 이상, 프랑스인과 독일인은 85% 이상입니다.
http://en.wikipedia.org/wiki/R1b
http://en.wikipedia.org/wiki/Haplogroup_R1a_(Y-DNA)
http://en.wikipedia.org/wiki/Haplogroup_I_(Y-DNA)
어족을 기준으로 했을 때도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만 한국어와 일본어는 공통의 어족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일종의 고립어입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도 서유럽인들은 고대부터 꾸준히 혼혈을 해왔지만 일본인과 한국인은 혼혈을 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히틀러는 서구 문화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 핸섬하고 젠틀한 군인들을 파리로 보냈습니다.
당시의 독일군들은 파리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다수의 프랑스 남성들이 포로나 노동자로 사라졌어도
출생율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와 보브와르도 독일군을 호평했을 정돕니다.
독일군은 파리를 그대로 프랑스에 반환합니다. 런던, 베를린, 드레스덴이 파괴되었지만 파리는 무사했지요~
http://www.dailymail.co.uk/femail/article-1035804/Sleeping-enemy-New-book-claims-Frenchwomen-started-baby-boom-Nazi-men-Vichy-regime.html
슬라브계통인 러시아와 폴란드도 독일보다 금발이 많구요. 호주의 원주민들 중에도 금발이 있습니다.
금발 = 게르만족이 아닙니다.
1700년대에는 베를린 인구의 1/4이 프랑스계 위그노였고 현재 영국인들의 1/4이 위그노 혈통이 섞였습니다.
서유럽들은 국경에 상관없이 피가 섞였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가 항복했다는 점이 드골의 심기를 거슬렀는 지는 우리의 평가 기준은 될 수 없고, 그 뒤에 독일에 붙은 자들이 자국민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보는 게 더 우리에게 가까울 것 같습니다. (라발은 이완용따위와는 많이 다르다고 봅니다. 이완용은 왕이 신경써서 선발해 키운 신세대 중 하나였는데, 그대로 왕을 배신한 케이스)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은 경우가 다르지요. 독일은 전쟁을 시작했고 프랑스는 동맹(or 협정)에 따라 행동했죠.
그리고 요 근래 어느 정부 지원이 깎인 시민단체들이 정부와 정권은 별개라는 논리를 드는데 꼭 프랑스만의 일은 아니죠.
이 사람들은 여자(쟌다르크), 외국인(나폴레옹)이 없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급할 때는 영국에게 병합하자고 매달리기나 하고...
독일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해군이야 미국 영국 일본 다음으로 강국이었고
프랑스가 진 것은 프랑스 병사들이 군기가 빠졌거나 그랬다기 보다는 '알랑 바탈'과 '마지노선'으로 대표되는 육군 수뇌부의 경직성에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후에는 세계 4번째 핵보유국에 무기시장 큰손이 되었지요.
그리고 히틀러와 스탈린도 그렇게 따지면 외국인 아니겠습니까?(히틀러 오스트리아, 스탈린 그루지야)
역사 공부를 하는데 매체를 이용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너무 애용하지는 마세요. 거기다가 상대는 골수독빠 일본놈들 아닙니까?
그래뵈도 세계 5대 해군국 중 하나였고(독일보다 우월했음)잠수정 3개를 동원해 알렉산드리아의 영국 배 3척을 중파하는데 성공시킨(이라고 쓰고 승무원은 탈출해 영웅될 수 있었다. 잽과는 다르다고 읽는다.)놈들도 있습니다.
실제 1차대전의 경우 이탈리아군은 비록 시간이 조금 지나 독일군이 쳐내려와 북부를 다 잃어버리지만 똑같은 게르만 민족의 나라인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상대로 해서 거의 빈까지 쳐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전략 폭격의 선구자인 두헤가 이탈리아인입니다.


문제는 이 후방에 영국원정군과 함쳐 많은 병력이 있었는데, 이를 조직화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군을 조직화해서 맞선다는 것은 일단 제 2, 제 3의 전선을 마련해야하는 것인데, 독일군의 진격속도가 워낙에 빨라 이를 마련하고 자시고 할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제 1선과 마찬가지로, 제 2, 제 3마저도 결국 포위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른 전쟁이지만, 김일성의 난이라 불리우는 6.25를 보면 부산교두보가 한창 위험하던 8월에서 9월사이의 기간 부산에 모인 유엔군 병력의 수와 질은 북한군을 배이상 앞질렀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럼에도, 인천상륙작전 이후 시간이 지나기까지 공세로의 전환이 힘들었고, 인천상륙작전의 여파가 전선에 영향을 끼치기전까지 공세를 겨우겨우 돈좌시키는 정도에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아무리 병력의 수와 질이 앞선다해도 수세에 몰려있는 상황에서는 공세로 전환하는 것이 한방에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일종의 기세 싸움인데, 전쟁에서, 그리고 전투에서 이 기세라는 것이 공세를 유지하는 것의 가장 큰 요소중 하나라고 합니다.
뭐 가장 쉽게 말하면, 제 1선(마지노선을 위시한 방위라인) 뒤쪽의 병력은 전투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마무리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전략, 전술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무기도 있고, 사람도 있는데 당면한 전투와 관련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역시... 아르덴숲이 대단하긴 대단했다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