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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소련의 국가 원수는 최고 인민회의 의장이다.

서기장이란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의 우두머리 자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스탈린이 서기장의 위치에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이후 '소련의 최고 권력자 = 공산당 서기장'.  '명목상 국가 원수 = 최고 인민 회의 의장' 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되었다.

김정일이 국방 위원장 자리에서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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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 레닌(Vladimir Ilich Ulyanov Nicolai Lenin/1870.4.22~1924.1.21)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ich Ulyanov)이며, 공식명인 니콜라이 레닌은 190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筆名)이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중심인물로서, 독일파 마르크스주의자 K.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립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후진국 러시아에 적용함으로써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이자 사상가이다. 볼가 강변의 심비르스크에서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나, 1887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계획에 참여하여 처형된 맏형 알렉산드르의 영향으로 혁명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카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1870년대에는 플레하노프에 의하여 러시아에 도입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혁명운동에 투신하여 체포와 유형의 세월을 거친 뒤 1900년 국외로 망명, 1903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에서 당원 자격문제로 마르토프와 맞서 직업혁명가주의를 관철시킴으로써 볼셰비키(다수파)가 되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직후 일단 귀국하였으나, 1907년 다시 망명하여 주로 스위스에 머물면서 연구와 저술에 종사하다가, 1917년 2월혁명 직후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封印列車)로 귀국하였다. 같은 해 11월 7일 무장봉기로 과도정부(過渡政府)를 전복하고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혁명정권을 수립한 다음, 러시아의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하여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인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1922년 뇌일혈 발작으로 와병, 마지막 1년은 실어증(失語症)까지 겹쳐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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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1879.12.21~1953.3.5)

레닌의 후계자로서 소련공산당 서기장·수상·대원수를 지냈다. 

본명은 그루지야어로 Ioseb Dzhugashvili. 그루지야의 고리(Gori)에서 구두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일찍이 비밀결사 ‘메사메 다시(Mesame Dazi)’에 가담하여 티플리스의 그리스도 정교회신학교에서 추방당하고, 1901년 직업적 혁명가가 되어 카프카스에서 지하활동을 하였다. 이후 10년간에 체포 7회, 유형 6회, 도망 5회의 고초를 겪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라는 논문으로 인정을 받아 1912년 당중앙위원이 되었고, '러시아 뷰로'의 책임자로서 처음으로 스탈린(강철의 사나이)이란 필명(筆名)을 사용하였다. 1913년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어, 1917년 그곳에서 2월혁명을 맞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4월 레닌이 망명에서 귀환하자 그의 ‘4월 테제’를 재빨리 지지하였고, 신정권의 민족인민위원이 되어 제(諸)민족 공화국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인 ‘소련방’의 결성에 진력하였다. 1919∼1922년 국가통제위원, 이어서 초대 당 서기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반세기 동안 독재적으로 전(全) 소련을 통치하였다. 

레닌은 유서에서 그의 재능을 평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성격적 결함(난폭 ·불관용)도 지적하여 당 서기장직에서 경질할 것을 시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체카(VCHK:비밀경찰)와 당기구를 통하여 1만 5000명 이상의 자기 부하를 전국에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1924년 제13차 당대회 때 유임을 인정받았다. 이 사이 1936년 이른바 ‘스탈린헌법’이 제정되었다. 스탈린헌법은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를 법적으로 확인한 것이었으나, 이 무렵 국제적 파시즘의 대두로 ‘대소전쟁(對蘇戰爭)’의 위기에 직면하자, 3차에 걸친 대숙청을 감행하여 잇따른 ‘반혁명재판’(1936∼1938)에서 G.E.지노비예프 등 반대파 뿐 아니라 충실한 당원·군인·관료와 무고한 많은 민중이 처형·투옥·제명되었다.

1939년 제18차 당대회에서 그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문제를 제기하여 소위 ‘일국(一國)사회주의론’을 전개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긴박한 국제정세하에서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어 파시즘의 총구를 일시 서유럽 쪽으로 돌려놓았다. 1941년 V.M.몰로토프 대신에 인민위원회 의장(수상)을 겸하여 비로소 정치정면에 나섰는데, 그로부터 l개월 후에 독일의 기습을 받아 독·소전쟁(1941∼1945)에 돌입하였다.

그는 국방회의 의장, 적군(赤軍) 최고사령관이 되어 개전 초에는 패배하였으나 급속히 국내의 임전체제를 갖추고, 주코프 등 소장 장군들을 이끌고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모스크바 전선에서 우세한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의 시간을 마련하였다. 또 테헤란·얄타·포츠담 등의 거두회담에 참석, 연합국(미국·영국)과의 공동전선을 굳혀, 독일을 굴복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45년에 대원수가 되어 그 명성은 레닌을 능가하였고 동구(東歐)제국에 대해 헤게모니를 잡고 미국과 대항함으로써 냉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1953년 뇌일혈로 급사하였다. 그가 죽은 뒤, 1956년 제20차 당대회에서 N.S.흐루시초프의 ‘스탈린비판’은 복잡한 반응을 일으켜 ‘중 ·소논쟁’ ‘헝가리사건’ 등을 유발하였고,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심각한 혼란 속에 몰아넣었다. 특히 1991년의 소련정변 이후 스탈린에 대한 인민들의 평가는 종전의 신(神)적 숭배에서 독재자로 격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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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 말렌코프(Georgij Maksimilianovich Malenkov/1902.1.13~1988.1.14)

 오렌부르크 출생. 1920년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국내전(國內戰)이 끝난 후 모스크바고등공업학교에 들어가 당세포서기(黨細胞書記)를 맡았으며, 스탈린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1925년부터 당중앙위원회에서 근무하였다.

 대숙청기에 당관료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그 이후 1939년에 당중앙위원과 당중앙서기국원, 그리고 1941년 당정치국원후보, 1946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1952년 제19차 당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의 보고를 맡아, 스탈린의 후계자로서 유력시되었다. 1953년 총리가 되었으나, 곧 당내의 지도권 다툼에 패배하여 1955년 2월에 총리를 사임하였다.

 그 후 얼마 동안 발전소(發電所) 담당장관으로 있다가, 1957년 V.M.몰로토프, L.M.카가노비치와 함께 ‘반당(反黨)그룹’이라 하여 당중앙위원회에서 추방당하여 벽지의 수력발전소장으로 좌천되었으며, 1961년 당에서도 추방되어 복권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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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 흐루시초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yov/1894.4.17~1971.9.11)

 크루스크주(州)의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돈바스에서 판금공(板金工)이 되었으며, 1918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공장노동자학교를 거쳐 1929년 모스크바의 스탈린공과대학에 입학, 교내의 당위원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1931년 모스크바에서 당기관 서기로 근무하였고, 1932∼1934년 모스크바 당위원회 제1서기, 1934년 당 중앙위원, 1935년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후보위원, 1936년 헌법위원회 위원, 1937년 소련 최고회의 외교분과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38년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후보가 되어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키예프에 파견되었고, 1939년 당 정치국원이 되었다.

 1941년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자 키예프 특별군관구 남서방면군, 스탈린그라드, 남방 및 제1우크라이나 정면군의 군사위원으로서 공훈을 세우고, 독일군의 우크라이나 철수와 함께 우크라이나 각료회의 의장을 겸임하였다. 1949년 중앙에 복귀, 모스크바시 당위원회 제1서기 겸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원에 임명되었다.

 1953년 3월 I.V.스탈린 사망 후 최초의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이 때부터 총리 G.M.말렌코프의 농업정책을 계속 비판하여 마침내 1956년 사직하게 하고, 또 유고슬라비아 문제로 V.M.몰로토프와 대립,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무원칙적이고, 사실의 확증이 결여되어 있어 도리어 많은 의문을 남겼다. 그 결과 당내에서 몰로토프, 말렌코프, 불가닌, 주코프, 셰피로프 등 유력간부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그들을 ‘반당 그룹’이라 하여 1957년 요직으로부터 추방하고, 친척이나 자파(自派)의 신인들로 대체하였다.

 한편, 대외적으로도 ‘중소논쟁’ ‘헝가리사건’ 등을 도발하여 공산진영 분열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1958년 불가닌을 몰아내고 총리도 겸직하면서 당과 국가의 전권을 장악하고, 1961년 제22회 당대회를 주재하여 ‘신노선’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공장관리기구 개편, MTS 개조, 7년 계획, 당조직 개편 등 일련의 정책은 혼란만 가중되었을 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동서긴장 완화의 ‘공존외교(共存外交)’도 일관성(一貫性)이 결여되어 마침내 중국 ·알바니아 이반(離反)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고, 1964년 실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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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 브레즈네프(Leonid Ilyich Brezhnev/1906.12.19~1982.11.10)

 스탈린 이후 최장기인 18년 동안 소련을 통치하였다. 금속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나 1931년 공산당에 입당한 후, 1935년에 도네프로젠스키 야금대학을 나왔고 제2차 세계대전에는 정치장교로서 참전하였다.

 1946∼1947년에 자포노레주(州)당 제1서기가 된 이후, 여러 당직을 거쳐 1956∼1960년에 당중앙위원회 서기(書記), 1960년 최고회의간부회 의장을 맡았다. 1964년 10월 14일 흐루시초프가 그의 내정(內政), 특히 농업정책의 실패로 당중앙위원회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당 제1서기직에 올랐다.

 그의 시대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1965∼1970년의 제1단계는 브레주네프(당 제1서기), 코시긴(수상) 및 포드고르니(최고회의간부회 의장)의 집단지도체제였으나, 1970년 이후 제2단계에서는 점차 실질적인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안정된 권력을 구사하였다. 그는 통치기간 동안 극적인 정책변화를 피하며 지도적 당간부의 지위안정화를 도모하여 당내의 갈등을 최소한으로 줄였으나, 그 결과 그의 집권 말기에는 정치국 정위원 평균연령이 70세에 이르렀다.

 1977년 6월 포드고르니의 후임으로 국가원수직인 소련최고회의간부회 의장직도 맡아, ‘도전받지 않는 지도자’로서 권력지위를 굳혔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브레주네프 헌법’이라 불리는 새 헌법을 발효하여 브레주네프 체제를 완전히 굳혔다. 브레즈네프도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외교정책의 기본적인 목표를 혁명기지로서의 소련의 국익(國益) 보호와 확대에 두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데탕트 설계의 주역으로서 동서 긴장완화에 미친 그의 공로는 적지 않았다.

 그는 집권기간 동안 미국과의 군사력 균형에 크게 관심을 두어, 상대적으로 미국에 크게 열세였던 대륙간탄도탄(ICBM)과 해 ·공군력을 대폭 증강시킴으로써 미 ·소 군사력의 균형을 가져왔다. 아울러 아프리카 및 중남미에 대한 계속적인 영향력 확대, 다원화(多元化)되는 공산세계 속에서의 종주권(宗主權) 고수 등 소련의 입장에서 볼 때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또한 브레주네프는 1971년 소련공산당 제24차 대회에서 6개조의 평화안을 제안하여, 전유럽안보회의 개최를 촉구하였다. 이 제안은 1975년 7월 30일 헬싱키선언이 조인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유럽의 현재 국경선 및 분단상태의 고정화를 바탕삼아 평화정책 ·상호교류를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그후 전세계의 관심을 끌었던 SALT(전략무기제한협정) I ·II를 타결함으로써 미국과의 협력관계를 더욱 다졌다.

 그러나 그는 데탕트의 노력 속에서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고수, 소련의 국가이익추구 및 자국 내의 반체제운동 탄압 등 기득권(旣得權) 보장과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단호함을 보였다. 1968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추구하자, 이른바 브레주네프독트린으로 알려진 ‘제한주권론’을 내세우며 무력저지를 강행하였다. 1978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1980∼1981년에는 폴란드 사태에 우회적으로 개입하는 등 치열한 대국주의적 이기주의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브레주네프는 그의 집권시기 중 계속된 동유럽의 자유화운동과 탈소(脫蘇) 노선을 추구하는 유로코뮤니즘의 대두, 계속되는 국내의 반체제운동 때문에 적지 않은 곤혹을 겪었다.

 1970년 《레닌주의적 노선에 관하여 On a Leninist Course》라는 연설문집 2권을 출판하였으나, 공산주의 교의상(敎義上)에 커다란 변화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당의 주도적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및 긴장완화 등의 개념을 새롭게 정리하였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18년간의 장기집권에도 불구하고, 개인숭배형 독재자의 영상(映像)을 남기지 않고 체제의 안정화를 구축하였다는 것이 주요한 특징으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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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 안드로포프(Yuri Vladimirovich Andropov/1914.6.15~1984.2.9)

 나구초코예에서 출생했다.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나, 1935년 수운(水運)기술전문학교와 페트로자보드스크 주립대학 및 당 간부학교를 졸업하였다. 

 1939년 소련공산당에 입당,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에서 활약, 1940년 카렐로핀 자치공화국의 콤소몰 제1서기가 되었고, 1953∼1957년 헝가리 주재 대사관의 참사관에 이어 대사를 역임하였다. 1957∼1962년 당 중앙위 사회주의국 당 연락부장, 196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 1962∼1967년 당 중앙위 서기, 1963년 중소(中蘇)회담 대표, 1967∼1973년 당 정치국원 후보, 1973년부터 정치국원을 지내는 한편, 1967년부터 국가보안위원회(KGB) 의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 상급대장(上級大將)이 되었으며, 동유럽 및 중국문제 전문가로 활약하였다. 1982년 5월 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고, 11월 L.I.브레주네프가 사망하자, 전격적으로 공산당서기장에 선출되었으며, 1983년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국가원수)에 선출됨으로써 1인체제를 굳혔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완전장악하기까지는 5년이 걸렸고, 1964년 흐루시초프 실각 후 브레주네프가 1인독재체제를 굳히는 데는 무려 13년이나 걸렸던 전례에 비추어 보면, 안드로포프의 7개월 만의 1인체제 구축은 크렘린 권력투쟁사에 하나의 ‘신화(神話)’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83년 8월 갑작스런 중병으로 일선에서 물러났고 K.U.체르넨코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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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 체르넨코(Konstantin Ustinovich Chernenko/1911.9.24~1985.3.10)

 1931년 공산당에 입당하고, 1945년 공산당 상급학교와 키시뇨프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5∼1948년 벤젠스키 지역위원회 서기, 1948∼1956년 몰다비아 중앙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있다가 L.I.브레주네프에게 발탁되어 1956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1964년 L.I.브레주네프가 당권을 장악하자 그의 참모장이 되었다.

 브레주네프의 지원하에 1971년 당 중앙위원, 1976년 당 서기국 서기, 1977년 당 정치국 후보위원, 1978년부터 당 정치국 위원을 지내면서 차기 정권의 후계자로 주목을 받았으나 브레주네프 사후 당내의 지지기반이 없어 Y.V.안드로포프에게 서기장직을 빼앗겼다.

 안드로포프가 죽자 1984년 2월 소련공산당 서기장, 4월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으로서 사망 전까지 소련의 최고 정치지도자의 지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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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 고르바초프(Mikhail Sergeevich Gorbachev/1931.3.2~)

 카프카즈 산맥 북쪽의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블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콤바인을 운전하며 5년간 농장일을 하다가 19세 때인 1950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 2학년 때인 1952년 공산당에 입당하여 교내의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 조직원으로 활약하였다. 5년간의 대학과정을 마치고 1955년 고향 스타브로폴로 돌아와 콤소몰 서기로 일하다가, 1968년 지구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8년 농업담당 당서기로 취임한 후, L.I.브레주네프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농업투자정책을 수행하였다. 

 1980년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권력의 핵심권에 접근, Y.V.안드로포프가 집권하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K.U.체르넨코의 집권기간 중에도 제2인자의 위치를 굳혔다. 1985년 3월 체르넨코의 사망으로 당서기장에 선출되자,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여 소련 국내에서의 개혁과 개방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질서에도 큰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1988년 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을 겸하고, 1990년 3월 소련 최초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91년 7월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계급투쟁 포기의 소련공산당 새 강령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의지는 1991년 8월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를 유발시켜 한때 실각하였다가 쿠데타의 실패로 3일만에 복권하고, 공산당을 해체, 소련의 970년 공산 통치사에 종막을 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B.M.옐친 등의 주도로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연합이 탄생하자 1991년 12월 25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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