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대리석이 깔린 장엄한 홀로 키가 작고 무뚝뚝한 한 남자가 지나갔다.

그가 지나가는 앞으로 긴 복도가 펼쳐져 있고 황홀함과 찬탄을 보내는 시선이 뒤를 따랐다.


아첨꾼들은 그의 한마디 말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그의 나라는 황폐하고 굶주림으로 인해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러나 비계살이 찌고 보드카와 승리에 취한 그의 장군들은 이미 유럽의 반을 짓밟고 있었다.

그는 이들이 다음번에는 나머지 반을 짓밟아주리리 믿었다.


자신이 역사상 최대로 잔인한 전제적 인물이란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역사의 의지를 수행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바로 스탈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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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연구서적들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주목해볼 것은 스탈린 시대의 권력자이자 스탈린의 후계자이면서, 스탈린 격하 운동에 앞장선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이다.

인자한 인민들의 아버지라는 이미지의 스탈린은 흐루시초프의 폭로로 인해 벌거숭이가 되었다.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은 그가 권력투쟁에서 패해 은둔 생활을 할 당시에 쓰여졌는데, 자기 변명과 합리화로 일관하여 앞뒤가 안맞는 부분도 많고.. 불리한 사건은 구렁이 담넘어가듯 어물쩍 넘어간 기술도 많다. 한마디로 인상적인 책이다.

한달전부터 슬슬 읽기 시작해서 오늘 저녁에 마지막장을 보았다.


여러가지 재미있는 내용들이 있는데 스탈린의 말년에 대해서 묘사된 한 부분을 요약, 발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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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와 스탈린



- 스딸린 동무와의 영화감상 -


스탈린과 보낸 마지막 몇 년은 어려운 시기였다. 정부는 실질적인 기능을 잃고 있었다. 스탈린은 항상 그에게 붙어있는 소수 측근 그룹을 선정했다. 스탈린의 부하들은 그 소수 그룹에 속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어졌다.


스탈린은 후자에 속한 인간들을 벌주기 위해 그들을 무한정 부르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누구든지 하루는 이 그룹에, 다음날은 저 그룹에.. 이런 식으로 스탈린에게 휘말렸다.


공산당 19차 전당대회 후 스탈린은 신설된 최고회의 간부회 멤버 중에서 갖가지 사건에 대한 조사를 위한 대규모의 위원회를 창설했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위원회는 유명무실했다. 위원회들은 아무 행동 지침이 없었다. 이들은 조사할 일을 지시받지 않았기 때문에 각자 자기들 마음대로 할 일을 정했다.


오케스트라에 소속된 구성원들이 생각날 때마다 잠깐씩 각자 악기를 두드리고 지휘자는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는 격이었다.



우리는 대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치국 회의를 열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 제대로 형식을 갖춘 공식 회의는 아예 없었다. 스탈린은 당시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시내로 내려올 때면 당 중앙위 서기를 통해 우리를 소집하고는 했다.


우리는 크레믈린에 있는 그의 서재에서도 모였으나 크레믈린 극장에서 더욱 자주 모였다. 우리들은 영화를 보면서 한편이 끝나는 사이에 갖가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탈린은 저녁 7시나 8시쯤, 낮잠에서 깨어 극장으로 왔다.


우리는 보통 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대개 그 자신이 우리가 볼 영화를 선정했다. 그 영화들은 거의가 서방에서 탈취해 온 것으로 전리품이라 부를 만했다. 그것들 중에는 미국 영화가 많았는데 그는 특히 카우보이 영화를 즐겼다.


그러나 그는 그 영화들을 비난하면서 그 비난에 알맞은 이론을 늘어놓다가 즉시 다른 영화를 틀라고 명령하기 일쑤였다. 이 영화들에는 자막이 없어서 영화 담당상인 볼샤코프가 큰 소리로 통역하고는 했다. 그는 각국어로 통역했지만 사실은 어느 나라 말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리 이야기 줄거리를 들어두었다. 그리고는 간신히 그 이야기를 외워 스토리를 통역했다. 우리는 종종 그의 통역에 대해 농담을 즐겼다. 베리아가 특히 한두 더 떴다. 많은 장면에서 볼샤코프는 이야기를 잘못 전하거나 누구든지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설명만을 했다.


"자. 이제 그가 방을 나갑니다. 이제 그가 길을 건너고 있습니다."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베리아가 중간에 뛰어들어 볼샤코프를 도와주었다. "보십시오! 그가 뛰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제 그가 달립니다."라는 식으로


스탈린은 크레믈린 극장이 아닌 곳에서는 절대 영화를 보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면 스탈린은 "자, 이제 뭣좀 먹으러 가지?"라고 제안하는게 보통이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실상 배고프지 않았다. 그때쯤이면 새벽 1시나 2시였다. 취침해야할 시간이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출근해야만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오전 중에는 사무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도 배가 고프다는듯이 대답했다. 이 배고프다는 거짓말은 무슨 반사작용 같았다.



얄타회담 만찬 석상에서의 스탈린



- 스딸린 동무와의 만찬 -


우리는 모두 차를 타고 스탈린 별장으로 갔다.


베리아와 말렌코프는 늘 스탈린 차에 함께 탔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마음대로 차를 탔다. 나는 대개 불가닌과 동승했다. 우리 일행은 보통 크레믈린에서 모스크바강까지의 길을 샛길로 돌아갔다.

내가 때때로 스탈린의 차에 탑승한 자들에게 "왜 큰길을 두고 돌아가는거야?"라고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한테 묻지마. 우리가 길을 정하는게 아니야. 스탈린 자신이 고르거든."


스탈린은 모스크바 시가 계획도를 들고서 빈번히 다른 길을 지적하였다. 그는 경호원에게조차 미리 어떤 길로 가겠다고 지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별장에 갈때마다 자물쇠가 더 늘어난 것을 보았다. 대문에는 각종 자물쇠가 잠겨 있었고,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별장 주위로는 이중 담이 둘러 있고 담과 담 사이로는 경비견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전자 경보 장치와 무수한 종류의 보안 장치가 설치되었다.



별장에 이르러 그 회의(감히 이것을 회의라고 할수 있다면)는 계속되었다.


이것도 사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런 사무 체계는 전쟁이 끝난후 스탈린이 사망할때까지 유지되었다. 당중앙위도 정치국도 전체 회의국도 정규적인 활동 능력이 없었다. 단지 스탈린이 측근들과 벌이는 회의만이 시계처럼 정확히 열렸다. 그가 만일 2~3일씩 우리를 소집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가 병이 났든지 무슨 일이 난 줄 알았다.


그는 미칠듯이 고독해 했다. 언제나 그의 주위에 항상 사람을 필요로 했다. 그는 늘 아침에 잠을 깨자마자 당장 우리를 불러모았다. 영화를 보자거나 아니면 단 2분도 안걸리는 이야기를 시작해서 장장 시간을 끄는 바람에 우리는 한참씩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우리로서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오락이었다. 그 자리에서 때때로 당과 행정에 관한 중요 사항이 결정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한 시간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주요한 일은 스탈린과 함께 시간을 보내서 그가 고독의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독으로 말미암아 절망 상태였고 또한 그 상태를 두려워했다.


그는 단순한 고독을 넘어서서 별장에 이르는 길가에 적이 매복해 있다는 깊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와 같이 식사할 때마다 그는 전채나 술 한잔, 어느 음식 하나도 누가 먼저 맛보기 전에는 결코 손대지 않았다. 그가 정말 갈데까지 갔다는 증거였다.


그는 심지어 몇년씩 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충실한 하인들까지 믿지 않았다. 그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스탈린의 집에 식사하러 갈때면 우리는 언제가 그가 즐기는 음식들을 대접받았다. 요리사들은 꽤 훌륭한 솜씨를 가졌기 때문에 음식들은 모두 맛이 좋았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음식을 먹어야 했다.


스탈린이 무엇을 하나 먹고 싶다고 하자! 그러면 누구든지 먼저 스탈린이 그 음식을 맛보기 전에 시식해볼 음식을 한그릇 할당받았다.


"이봐, 니키타. 여기 거위 내장 요리가 있군. 자네 이걸 먹어봤나?"


"아, 깜빡 잊었습니다."


그 음식을 그가 먼저 먹고 싶지만 겁이나서 못먹고 있는 것을 알수 있었다. 내가 그것을 먹어본 후에야 그는 요리 접시를 들기 시작했다.


그는 곧잘 "야, 이봐! 이것 청어 아냐?"라고 외쳤다.


훈제 청어 요리를 그는 무척 좋아했다. 스탈린만이 언제나 청어에 소금을 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취미대로 소금을 쳐 먹었다. 내가 스탈린의 청어를 입에 대봐야 비로소 스탈린은 자신의 몫을 먹었다. 모든 요리가 그런 식이었다. 모든 음식마다 독이 들었는지 확인할 당번이 할당되어 있었다.


스탈린의 식탁에서 이 시식가 노릇을 하지 않는 자는 베리아 뿐이었다. 그는 절대로 우리들이 먹는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면제받았다. 스탈린과 같이 식사를 할 때라도 베리아는 그의 별장에서 만든 음식을 날라다 먹었다. 스탈린의 오랜 하인인 마트리오나 페트로브나가 베리아의 시중을 맡았는데 그는 굵고 코먹은 소시로 "베리아 동무. 당신의 풀을 갖고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베리아는 정말 중앙 아시아 사람들의 습관처럼 풀을 먹었다. 때로는 손가락으로 풀을 입속에 쳐넣기까지 했다.



어쨌든 이런 식사판은 정말 질색할 노릇이었다. 우리는 새벽녘에 잠깐 집에 들렀다가는 이내 출근해야만 했다. 낮 동안 나는 대개 점심 시간을 이요애서 자 두었다. 낮잠을 미리 자두지 않으면 스탈린이 초대한 식탁에서 졸기 십상이었고 그 식탁에서 잠이 들면 좋지 않은 끝장을 보게 마련이었다.


때때로 지독한 술내기가 벌어졌다. 베리아, 말렌코프, 미코얀 등이 스탈린의 음주 실력을 따라갈 수 없어서 미리 웨이트리스에게 술 대신 술빛깔의 물을 부어달라고 부탁하던 기억이 난다.


전쟁 전부터 스탈린의 식탁에서는 과도한 술타령이 벌어졌다.


스탈린은 사람들이 당황해하고 불명예스러운 처지에 빠지는 것을 오락으로 알고 즐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타인이 창피를 당하는 것을 무척 재미있어했다.


언젠가 스탈린이 당고위층이 모인 앞에서 내가 우크라이나 민속춤을 추게 한일이 기억난다. 나는 엉덩이를 땅에 대고 웅크리고 앉아 무릎을 차야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건 쉬운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흔쾌한 낯색을 하고 그 춤을 추었다.


흐루시초프가 춘 춤 - 카자끄 댄스





- 스딸린 동무와의 휴가 -


스탈린과 식사를 같이하는 것보다 더 지겨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와 함께 휴가를 보내는 일이었다. 그와 식사를 같이하거나 휴가를 함께 보내는 것은 물론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지독한 육체적 시련이었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 스탈린은 카프카즈로 휴가를 갈때 곧잘 나를 초대하여 동반케 했다. 이처럼 자주 나를 부른 것은 순전히 혼자 있기가 두려워서였다. 휴가를 떠나기 전이면 그는 나를 전화로 불러 "남쪽으로 가세. 자네도 휴가가 필요해!"라고 말했다.


"좋습니다. 모시고 가게 되어 기쁩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늘 그를 따라가서는 고통을 당했다. 언젠가는 한달 내내 그와 함께 휴가를 보냈다. 그는 그의 방 바로 옆에 내방을 정했다. 그것은 전율끼치는 고문이었다. 나는 끝없이 계속되는 음식상 앞에 앉아 그와 함께 모든 시간을 보내야만했다.


내가 이 희생물로 바쳐질 때마다 베리아가 이런 말로 나를 위로했다.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해보게. 누군가가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데, 그게 바로 당신이 된 것이라고 말이야."


스탈린은 대개 소치로 휴가를 갔다. 그럴때면 그는 옛날을 생각해서 보로실로프를 소치로 내려오라고 불렀다. 보로실로프는 인민 국방위원장의 위치에서 스탈린의 총애를 받고 있던 당시, 얄타의 리바디아 궁전을 모방하여 거대하고 화려한 자신의 별장을 건축했다.


한번은 내가 소치에서 나혼자 휴가를 즐기고 미코얀이 수후미에 있을 때였다.


스탈린이 보르조미에 있는 그의 휴양지에서 우리에게 전화를 했다. 그 장소에서 그가 휴가를 지낸 것은 그때 한번 뿐이었다. 그는 당시 모스크바에서 일하고 있는 베리아까지 합쳐 카프카즈에 휴가중인 우리 모두를 소집했다. 우리는 모두 보르조미에 모였다. 그 집은 크기는 했지만 초라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전에는 박물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침실이 따로 없었으므로 우리는 모두 한데 모여 잘수밖에 없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스탈린이 하라는 대로 따라서 움직였다. 우리와 그는 별개의 스케줄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마칠 때까지도 스탈린은 잠을 잤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야 비로서 공식적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스탈린이 그곳에 얼마간 더 머물러 있는 바람에 미코얀과 나는 그의 벗으로서 한참동안 그곳에 억류당했다. 우리는 마침내 풀려나서 원래의 휴가지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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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