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0월 14일 비밀리에 열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舊정치국)에서 모종의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다음날인 1964년 10월 15일 모스크바에서는 공산당 제1서기겸 각료회의 의장인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시초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가 '고령과 건강의 악화'라는 이유로 당과 행정부의 직책에서 물러났다라는 성명이 발표되었다. 


흐루시초프에 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결의문(1964년 10월 4일)

집단 지도체제라는 레닌주의 원칙을 파괴하는 흐루시초프 동지의 오류와 잘못된 행위의 결과로 인해 최근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에서 당과 국가의 지도에 따른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 요원들의 의무 수행이 어려워지게 되는 완전히 비정상적인 상황이 발생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흐루시초프 동지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최고 서기장, 소연방각료회의 의장의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거대한 권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집중시키고, 여러 경우에 있어서 당 중앙위원회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야 할 집단 논의도 하지 않고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면서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와 당 중앙위원회 위원들의 견해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흐루시초프 동지는 간부회와 당 중앙위원회의 동지들에 대한 편협함과 불손함을 표하고 그들의 견해를 무시하면서 20차, 21차, 22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의 결정에 의해 계획된 노선을 실제 실행하면서 상당한 오류를 그냥 지나쳤다.

중앙당 간부회가 보기에는 위원으로서 부정적인 개인적 자질, 고령, 건강 악화로 인해 흐루시초프 동지에게는 지나간 오류와 업무에 있어서 반(反)당적인 방식들을 개선할 능력이 없다. 흐루시초프 동지의 성명을 고려하여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1. 노쇠와 건강상태 악화로 인해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 최고 서기장과 소연방 각료회 의장직에서 사임한다는 흐루시초프 동지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한다.
2. 향후 한 인물에게 당 중앙위원회 최고 서기장과 소연방각료회 의장의 지위를 맡기는 것은 부적절함을 인정해야한다.
3. 1964년 10월 14일 당 중앙위원회 총회의 소집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비에트 연방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거대한 변화의 바람을 불러온 거인 흐루시초프는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났다.

소련의 최고 지도자 중에서 죽기 이전에 권력을 빼앗긴 사람은 흐루시초프와 고르바초프.. 두명의 대머리 지도자 뿐이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레닌, 금새 쓰러질 것 같던 스탈린, 반은 관에 발을 담근 상태로 마네킹 역할만 했던 브레즈네프, 몇달 동안 인공신장에 의지한채 꼼짝 못하던 안드로포프, 명확하게 의사표시할 능력도 없었던 체르넨코.. 이들 모두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최고권력을 움켜잡고 있었던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1964년에 경질되었으나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이미 1957년에도 있었다. 최고 간부회의(정치국) 멤버들은 흐루시초프의 개혁 정책과 스탈린에 대한 공격을 불안해했다. 그들은 모두 스탈린에 의해 발탁되었고 대숙청에 어떻게든 관계했던 것이다.


- 어린 시절 -

초창기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대부분 중산 계급 출신인 것과 달리 흐루시초프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짜르의 군대에서 복무한 농노였으며, 니키타는 당시의 보통 아이들처럼 기초교육을 받은후 가족과 함께 도네츠 의 광공업 중심지 유조프카로 이사하여 배관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던 덕분에 그는 1차 대전에 소집되지 않았다. 니키타는 일찍부터 노동자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고, 1918년 우크라이나를 놓고 붉은 군대와 백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투쟁이 벌어졌을 때 볼셰비키에 가입하였다. 흐루시초프는 1919년 1월에 붉은군대의 하급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에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백군과 폴란드군에 맞서 싸웠다.

1921년 흐루시초프는 마침내 동원에서 해제되었지만, 심한 기근으로 첫 아내인 갈리나가 2명의 아이를 남겨놓고 죽었다. 그는 1922년 유조프카에 있는 새로운 소비에트 노동자학교의 입학을 허가받아 공산당 교육을 받으며 중등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학생정치위원이 되었고 공산당위원회 간사가 되었다. 1924년에 2번째 아내 니나 페트로브나와 재혼했다.


- 권력으로 가는 길 -

1925년 흐루시초프는 유조프카의 페트로브스크-마린스크 지구당 서기로 활동했다. 곧 니키타는 정력적인 활동과 광산과 공장의 사정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인 카가노비치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25년 12월 스탈린이 트로츠키파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제14차 공산당 전당대회에 그는 카가노비치를 따라 투표권 없는 대표로 참석했다.

그뒤 4년 동안 흐루시초프는 유조프카, 하르코프, 키예프에서 당간부로 활발한 활동을 계속했다. 1929년에는 모스크바의 스탈린공과대학에서 야금학을 공부했고 이 대학 당위원회의 서기로 활약했다. 1931년부터는 모스크바 시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1933년에는 카가노비치의 지도 아래 모스크바 시당위원회의 제2서기가 되어 마침내 공산당의 이너서클 안으로 진입했다.

1930년대 초반 흐루시초프는 모스크바에서 확고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 지하철 건설을 감독했으며 그 공로로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해 흐루시초프는 마침내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34년에 있었던 제17차 전당대회에서 그는 70명으로 구성된 소비에트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숙청작업에 가담했다. 그는 내무인민위원 예조프의 대숙청 광풍을 살아남은 3명의 지역 서기장 중 한명이었다.

1936년 8월 22일, 모스크바에서 당원대회가 열렸다. 흐루시초프는 열광하는 대중을 향해 격렬한 연설을 하였다.

스탈린 동지께서는 우리 조국의 모든 건설과정에서 그의 날카로운 레닌주의적 시각으로 항상 우리에게 당이 가야할 길을 정확히 제시해 주셨고, 어디가 막힌 길인지를 가르쳐 주셨으며, 비열한 악당들이 어디로부터 기어나오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비열한 악당이란 당시 재판중이던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그 밖의 '인인의 적'들을 말하는 것임.)
이러한 파렴치한들은 총살시켜야 마땅합니다. 뿐만 아니라 트로츠키 또한 총살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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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노동절 행사 - 흐루시초프, 드미트로프, 스탈린, 몰로토프, 미코얀

훗날 스탈린의 테러를 비난하고 위대했던 지도자를 부관참시했던 흐루시초프는 1935년에서 38년 사이에 모스크바 시당 제1 서기로서, 그리고 1938년 이후에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1서기로서 스탈린의 종교재판에 열렬히 가담했던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1935년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후보위원, 1936년 헌법위원회의 위원, 1937년 소련 최고회의 외교분과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938년에는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후보가 되어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서 키예프에 파견되었고 다음해에 열린 제18차 전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선임되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1938년 6월 13일, 제 14차 우크라이나 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제 1서기의 자격으로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우리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구성원 대부분이 인민의 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조프는 이곳으로 부임하여 적들을 분쇄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우리들의 적을 찾아내어 박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흐루시초프는 겉으로 드러나는 농부같은 친절함과 단순함, 들창코와 당나귀 귀, 넓고 납작한 얼굴, 쾌활한 성격과 끊임없는 에너지 등으로 인해 제 2의 스탈린으로 보일만한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이런 흐루시초프를 좋아했다. 덕분에 그는 스탈린 시기의 숙청을 피해 용케 살아남을수 있었다.


1940년 히틀러와 야합한 스탈린이 동폴란드를 점령한 후 흐루시초프는 이 지역을 소련에 통합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 일은 1941년 6월 독일군의 소련 침공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전쟁중 흐루시초프가 첫번째로 맡은 임무는 우크라이나의 산업시설을 가능한 한 동부지역으로 소개시키는 것이었다. 그후 그는 육군중장 대우의 인민위원이 되어 우크라이나 방면군에 배속되었다.

그의 임무는 시민들의 저항의식을 고취시키고 스탈린과 그외의 정치국원과의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안드레이 예레멘코의 정치고문을, 1943년의 쿠루스크 전투에서는 니콜라이 바투틴 중장의 정치고문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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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 - 스탈린그라드 전선

1944년 독일에서 우크라이나를 되찾은 흐루시초프는 황폐해진 지역 주민들의 생계를 복구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1946년의 기근은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악이었다. 흐루시초프는 다른 지역으로 보내기 위해 우크라이나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곡물생산의 회복과 식량의 배급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이 시기에 그는 소련 농업의 여러가지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1949년 스탈린은 흐루시초프를 모스크바로 소환하여 시당위원회 제1서기로 복귀시켰으며, 동시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국원으로 임명하였다.


- 스탈린의 사망 -

1953년 3월 1일, 스탈린과 그의 측근들은 별장에서 새벽 4시에 헤어졌다. 심야의 만찬에서 스탈린은 그루지아산 포도주를 약간 마셨을 뿐이지만 몹시 취해 있었다. 지도자는 들뜨고 흥분했다. 그는 참석한 사람들 모두를 강하게 질책했으며, 간부회의 멤버들의 행태를 꾸짖었다. 푸짐한 음식상을 앞에두고 모두들 싸늘하게 긴장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이탈과 한국전쟁에서의 실패로 위대한 지도자는 격노해 있었다. 그는 또한 유대인 의사들의 음모가 거대한 규모의 적대활동의 징후라고 단정했다. 측근들은 스탈린의 말이 잠시 멈출 때마다 지도자를 진정시키려 진땀을 흘렸다.

"방안을 강구하겠습니다. 당신의 명령은 틀림없이 완수될 것입니다. 상황은 나아질 것입니다."


대원수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본 후 힘겹게 일어나 냅킨을 던져버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측근들 역시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스탈린은 하루종일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호출도 전화도 없었다. 점심식사조차 걸렀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스탈린의 방에 들어가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에 지도자의 집무실과 식당에 불이 들어왔지만 여전히 호출을 알리는 벨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밤 11시경이 되어서야 경호원들은 충직한 하녀 마트레나 페트브나와 함께 스탈린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의식을 잃은채 방바닥에 쓰러진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소파에 옮겨졌다.

다음날 아침 베리아와 간부회의 멤버들이 한무리의 의사를 몰고 도착했다. 진땀 흘리게 하는 오랜 진찰이 끝난후 의사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스탈린 동지의 건강상태에 대한 진찰 결과보고

크렘린 의료실 겸 요양기관의 의사협의회는 3월 2일 오전 7시에 스탈린 동지의 건강상태를 검진했습니다.
오전 7시 첫 검진시 환자는 소파에 똑바로 누워있었고 머리는 왼쪽으로 돌아가 있었으며 눈음 감겨있었습니다. 얼굴색은 보통이었으며 소변을 본 상태여서 옷이 젖어있었습니다.

좌측 동맥에서 맥박을 측정하려 했을때, 왼손과 왼발이 불안정하게 움직였습니다. 호흡은 고르지 않았습니다. 1분에 78이었던 맥박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심작의 박동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혈압은 190/110이었습니다. 폐의 전엽에서 수포음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측 손가락 부근에서 타박상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환자는 무의식상태였습니다. 우측 코 아래 입술이 밑으로 처져 있었습니다. 눈꺼풀을 쳐들자 눈알이 좌우로 움직였습니다. 동공은 중간 크기였으며 빛에 대한 반응이 저하되어 있었습니다. 우측 손발은 움직이지 않았고 좌측의 움직임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정해졌습니다.

- 진단소견 -
고혈압. 두뇌혈관 손상에 의한 전반적인 동맥경화증. 좌측 뇌동맥의 중앙부에서의 출혈로 인한 우측 전신마비. 신장기능 마비와 동맥경화로 인한 심근경색. 환자의 상태는 매우 위중함.

- 지시사항 -
절대안정. 환자를 소파에 뉘여 놓을 것. 귓부분에 치료용 거머리 8마리 부착. 머리를 차게 하고 고혈압에 대비한 관장을 할것. 틀니를 빼고 금일은 음식물 공급을 삼가할 것. 정신과 의사, 내과 의사, 간호원이 24시간 상주할 것. 사레에 걸리지 않도록 차숟가락으로 미음을 조심스럽게 떠넘길 것.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사망 예고였다. 3월 3일이 되자 스탈린의 상태는 더욱 악회되었다. 

술에 잔뜩 취한 지도자의 아들 바실리가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홀에 나타났다.

"개같은 자식들! 아버지를 죽였어." 흐루시초프가 술취한 그를 껴안고 방으로 데려갔다.

딸 스베틀라나는 슬프게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고위원회 멤버들 모두 침묵을 지켰다. 30년동안 이들은 파이프를 물고 어슬렁거리는 작은키의 콧수염 사나이가 내리는 명령에 익숙해 있었다. 이들은 단지 그의 지시를 시행하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흐루시초프 회고록에는 죽어가는 스탈린이 보인 마지막 재치와, 베리아의 참으로 믿기 어려운 행동이 묘사되어 있다.

꼭 한번 스탈린이 의식을 회복했다. 여전히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그의 얼굴은 움직였다. 사람들이 숟가락으로 수프와 달콤한 차를 떠먹였다. 스탈린은 왼쪽 손을 들어올려 벽 위의 무엇인가를 가르켰다. 그의 입술에는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흐루시초프는 그가 가르키는 것을 알아챘다. 벽에는 어린 소녀가 새끼양에게 뿔통으로 먹이를 주고 있는 그림이 붙어 있었다. 스탈린은 그림에서 소녀에게 먹이를 얻어먹는 어린양과 같은 처지라는 것을 말하려 애썼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측근들 하나하나와 마지막 악수를 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이 병석에 쓰러지자마자 베리아는 그에 대한 증오를 내뱉기 시작하고 스탈린을 비웃었다. 베리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으로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탈린의 얼굴에 의식 회복의 기미가 보이면서 그가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자, 베리아는 무릎을 꿇고 스탈린의 손을 쥐며 입맞추기 시작했다. 스탈린이 다시 의식을 잃고 눈을 감자 베리아는 벌떡 얼어나서 침을 뱉았다. 이것이 베리아의 참모습이었다. 그가 존경하고 숭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스탈린까지 배반하여 이제 그의 얼굴 위에 침을 뱉고 있는 것이다.


3월 5일 21시 50분, 마침내 스탈린의 심장이 박동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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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지도자의 마지막 모습

스탈린이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채 거대한 제국을 유산으로 남기고 사라지자, 독재자의 주변을 맴돌던 난장이들이 권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지도자의 장례식에 관한 사항을 결정하기 위한 간부회의 석상에서 그들은 "단결하자", "레닌의 지도하에 굳게 뭉치자!", "레닌과 스탈린의 사업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자." 등등의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메아리가 가시기도 전에 바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 권력장악 -

스탈린에게서 해방된 후계자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옹립하기 위해 서둘지 않았다. 그들은 독재에 완전히 지쳐 있었다.

1953년 3월부터 9월까지 흐루시초프는 단지 중앙위원회의 1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니키타는 결코 현재의 상황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첫번째 타겟은 바로 베리아였다.

베리아는 내무인민위원회라는 철권을 휘두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로 이점이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흐루시초프는 베리아 거세를 위한 음모를 비밀리에 꾸몄다. 평소 NKVD를 두려워하던 동료들은 순순히 흐루시초프의 의도를 따랐다. 상황이 무르익자 각료회의가 소집되었다.


말렌코프는 개회선언과 함께 발언했다.

"당사업에 대해 논의하도록 합시다. 우리에게는 시급한 해결을 요구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말렌코프는 주역 흐루시초프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불길한 예감에 베리아는 몸을 떨며 흐루시초프를 향해 손을 뻗고 말했다.

"니키타 무슨 일이요?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거요?"

"당신은 그냥 듣기만 하시오! 곧 알게 될테니.."

흐루시초프는 곧 베리아가 영국 정보부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엉터리 주장을 의기양양하게 늘어놓았다.

"그는 여러 소비에트 공화국의 당사업에 간섭하였다. 소비에트 인민의 단결을 분쇄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며 티토와 장난을 쳤다. 독일 민주공화국 내부에 비합리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기도했다."

횡설수설하던 흐루시초프는 결국 베리아가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모두가 흐루시초프와 굳게 단결하여 발언하자 말렌코프는 투표를 통해 사안을 의결하자고 주장했다. 그때 문이 열린후 주코프를 비롯한 여러 장군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진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하던 말렌코프는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의 자격으로 고소한 혐의사실에 대한 심리가 끝날 때까지 베리아를 체포하여 무장경비대의 감시하에 둘 것을 제안합니다."

"손을 드시오!" 주코프는 새파랗게 질린 베리아에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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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된 베리아는 말렌코프와 흐루시초프, 그리고 모든 간부회의 멤버들에게 편지를 썼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말렌코프 동지에게.

친애하는 게오르기.
간부회의에서의 그 엄청난 비판으로부터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취해야만 할 그 어떤 결론을 얻었고,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해 유용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중앙위원회는 다른 방식으로 결론을 내렸고, 나는 중앙위원회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해야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항상 레닌-스탈린 당과 우리 조국에 무한한 충성을 바쳐 왔으며, 항상 내가 할 일을 적극적으로 해왔습니다. 업무의 성격에 맞게 요원들을 선출하려 노력했으며 이는 곧 제 1순위의 주요 사업으로서 특별위원회가 관계하고 있었으며.. 그 다음오르논 국소적인 사업과 기관요원 배치를 위한 업무에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말렌코프, 몰로토프, 바체슬라프, 보로실로프, 흐루시초프, 카가노비치, 불가닌, 미코얀..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친애하는 동지들. 레닌-스탈린의 사업에 큰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게오르기. 부탁이 있소. 만약 당신과 친분이 있는 나의 가족과 아들 세르게이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면, 무관심 속에 방치해 두지는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1953년 6월 28일, 라프렌티 베리아


흐루시초프가 모든 종이를 압수하도록 명령할 때까지, 2주 내내 베리아는 편지를 쓰고 또 썼다.

그러나 크렘린의 지도자들은 두터운 입술에 안경을 쓴 변덕쟁이를 한시바삐 사형시켜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감옥에 있어도 여전히 베리아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재판관들은 베리아의 여성편력을 파헤쳤다. 여러 보고서에서 베리아가 어린 소녀들과 처녀, 그리고 유부녀들을 강간해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베리아는 마지막 순간까지 애원하였다.

나는 우리 조국의 충성스러운 아들. 레닌과 스탈린당의 충성스러운 아들. 그리고 동지들, 당신들의 충성스러운 친구입니다. 어떠한 사업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가장 부담없는 일을 당신들이 맡으세요.

보십시오. 나는 아직 한 10년은 충분히 일할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 정성과 정력을 담고 말입니다. 2~3년이 지난 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것이고 당신들에게 유용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당신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숨을 거둘 때까지 우리의 사랑하는 당과 우리의 소비에트 정부에 충성할 것입니다.

라프렌티 베리아. 빛도 흐리고 안경도 없고. 그래서 졸필이 된 나의 편지를 이해해 주시오. 동지들.

대답은 총살 선고였다.


베리아 제거의 1등공신인 흐루시초프는 공산당 제1서기 자리에 올랐다. 주코프도 중앙위원회 후보자리를 떠나 정식 회원이 되었다.

마침내 흐루시초프가 소련 체제의 정상에 서게 되었다.


- 집단지도체제 -

베리아를 처치하고나서야 소련의 지도부는 자유롭게 숨을 쉴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 소비에트 연방의 권력을 당과 국가로 나누었다. 말렌코프는 정부를 흐루시초프는 당을 맡게된다.

스탈린이 죽기 직전까지 말렌코프는 명백한 2인자였으며, 그가 스탈린의 신임을 받는 후계자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었다. 따라서 스탈린이 죽은후 말렌코프가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자리를 꿰어찬 것에는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베리아와 친밀한 사이였던 말렌코프는 흐루시초프의 베리아 제거 음모에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1953년말에는 이미 중요한 결정사항에 대해서 각료회의 의장인 말렌코프 뿐만 아니라 중앙위원회 제1서기인 흐루시초프의 인가도 받아야 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다.

흐루시초프는 점차 당의 역할을 강화함으로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려했다.

크림 반도를 양도하여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수립하는 문제에 있어서 흐루시초프는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1953년 12월 이 문제를 놓고 말렌코프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치자 제1서기는 각료회의 의장에게 명령조로 제의했다.

"이런 결정을 오래 끌지 맙시다. 조만간 열릴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문제를 논의해 봅시다."

말렌코프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흐루시초프의 선심은 소련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크림반도를 놓고 영토분쟁을 벌이는 원인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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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을 떠나다! -

베리아의 제거는 스탈린 체제를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이제 대숙청의 뒷정리를 할 때가 되었다.

대원수의 죽음 이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편지가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죄인들은 자신의 억울함이 재검토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흐루시로프는 이들이 친척과 면회도 거절된 상태로, 1년에 단지 두차례의 편지만 쓸수 있었음을 알았다.

강제수용소 여기저기로 동요의 물결이 쳤다.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셰로프 등은 이 모든 것들을 내무인민위원회가 독자적으로 처리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흐루시초프는 생각이 달랐지만 아직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밝힐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1956년 2월 14일 크렘린에서 제 20차 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평상시와 별다를바 없이 진행되었다. 레닌의 방침에 대한 승인, 요란스러운 기립박수, 당과 인민의 단결을 강화하자는 호소 등등.

2월 25일 아침에 열린 회의에서 흐루시초프는 마침내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해서'라는 놀라운 보고서를 낭독했다.

4시간여에 걸친 이 연설을 듣고 참석자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스탈린 격하연설로 역사에 기록된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인민의 적들을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투옥시키거나 유형을 보낼 수도 있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의 예를 들어보자. 그들은 혁명을 배신했지만 레닌은 그들을 총살시키지 않았다.

어떻게 자백을 받아왔는가? 단지 하나의 방법만이 존재했었다. 구타하고 고문하고 의식을 빼앗고, 분별력을 잃게하고.. 물리적인 탄압과 강제를 동원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함으로써...

스미르노프는 스탈린을 치료했다. 그리고 그는 체포당했다. 그런일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정치국원들은 각자 다른 시기에 다른 관점에서 스탈린을 바라보았다. 처음 시기에는 의식적으로 스탈린을 찬양했다. 왜냐하면 스탈린은 실제로 위대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그의 논리성과 힘, 그리고 의지는 당을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형벌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 사람은 사상적으로 육체적으로 쇠약해졌다.

흐루시초프는 드디어 스탈린을 부정하고 걷어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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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의 반당그룹 음모 -

1957년 여름 몰로토프, 말렌코프, 카가노비치는 비밀리에 흐루시초프 축출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보로실로프와 불가닌, 페르부힌, 그리고 사부로프가 이들의 입장을 지지했다. 투표권을 가지지 못한 간부회의 후보들은 이 모임에 초대되지 못했다.

1957년 6월 18일, 크렘린에서 최고간부회의가 시작되었을 때 몰로토프와 말렌코프는 느닷없이 제1서기직에서 흐루시초프를 쫓아내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간부회의에 대한 무시, 경제관련 분야에 대한 무지, 충동적이며 짧은 생각에 치우친 행동 등등을 제시하며 흐루시초프를 비난하였다.

서로에 대한 비난과 모욕이 오가며 격렬하고 분노에 가득찬 논쟁이 불타올랐다. 키릴렌코(Kirilenko), 미코얀, 수슬로프 그리고 간부회의 후보들이 흐루시초프를 지지했다. 마침내 몰로토프는 이 사안을 투표에 붙였고 7대 4의 결과로 '제1서기직에서 흐루시초프의 경질'이라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제1서기는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본인은 이러한 결정에 굴복할 수 없소. 본인을 선출한 것은 중앙위원회 총회이며, 따라서 오직 총회만이 본인을 경질할 수 있소. 총회를 소집하시오.

몰로토프는 흐루시초프의 논거에 정면으로 맞섰다.

우리 또한 총회에서 선출되었소. 그리고 우리는 총회의 이름으로 지도부의 개편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소.


간부회의는 6월 19일에도 계속되었으며 몰로토프는 제1서기직 자체를 없애버리자고 제안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안 흐루시초프와 절친한 KGB 의장 셰로프와 레닌그라드 제1서기 코즐로프 등에 의해 지방의 중앙위원회 구성원들이 모스크바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간부회의를 주도하던 불가닌은 이들에게 "문제는 다 해결되었으며, 더이상 이를 지연시킬 이유가 없다."라고 설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군부와 경찰을 대표하는 주코프와 셰로프가 "지도부에 대한 문제를 간부회의에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시오."라는 말을 하여 불가닌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크렘린에서 중앙위원회 임시총회가 열렸다.

60명이 연단에 나가 자신의 의견을 밝혔으며 그들 모두 흐루시초프를 지지했다. 이들은 몰로토프들의 결정이 스탈린 시대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몰로토프와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등도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청중들은 발표자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거친 항의와 질문이 쏟아졌으며 반당그룹에 대해 살인적인 평가가 내려졌다. 속기록에 따르면 말렌코프는 연설하는 동안 질문과 고함으로 117차례나 발언이 중단되었으며, 카가노비치는 112회, 몰로토프는 214회 발언이 중단되었다.

이들중 오직 몰로토프만이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지켰다. 나머지 사람들은 차츰 주장을 번복하고 과오를 인정했으며, 분파적 행동의 범죄성까지 인정하였다.


주코프는 다음과 같은 연설로 반당분자들에게 일침을 날렸다.

1937년 2월 27일부터 1938년 11월 12일까지 내무인민위원회는 스탈린과 몰로토프, 카가노비치로부터 38,679명에 대해 총살형을 선고한 판결에 승인을 받았다. 1938년 11월 12일,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단 하루만에 3,167명에 대해 총살형을 집행하는 것을 승인했다.
1938년 11월 21일, 내무인민위원회는 229명의 총살형 집행에 관해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승인을 받았다. 그 가운데 중앙위원회 정-후보 구성원이 23명, 당 통제위원회 성원 22명, 지역위원회 서기 12명, 인민위원회 성원 21명, 인민위원부 직원 136명, 군인 15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과거의 숙청에 대해서는 흐루시초프도 떳떳하지 못했음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때로는 적반하장격의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이에 말렌코프는 "흐루시초프 동지! 당신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찔리는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겁니까?"라고 일침을 날렸다.

반당그룹의 진술이 진행되는 동안 회의장에서는 계속 야유가 쏟아졌다.

"끔찍한 일이다!. "잔인한 사람들!", "사실이 아니다!",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마시오!"

카가노비치는 자신의 최후 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955년 10월 당대회가 있기 4개월 전에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에 관한 제안을 내놓았다. 당대회가 있기 5개월 전만 해도 흐루시초프는 '우리에게 승리를 보장해준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레닌과 스탈린'에 대해 연설했다. 전부해서 그 5개월 동안 그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의 교시에 대해 얘기했고, 스탈린은 레닌의 과업을 승계한 위대한 계승자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비판받고, 그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 의해 비판되는...  나는 커다란 아픔을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스탈린을 좋아한다.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스탈린을 좋아한다.


흐루시초프는 이 모든 소동을 조용한 목소리로 잠재웠다.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오!"

결국 총회는 몰로토프,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그리고 셰필로프에 대한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구성원 자격을 박탈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5명의 후보들이 새롭게 간부회의 멤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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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의 흐루시초프


- 통치 -

공산주의는 당과 인민의 위대한 목적이오.

공산주의는 풍요롭게 담을수 있는 술잔이오. 그것은 항상 가득 채워져 있어만 하오. 각각의 사람들은 그곳에 자신의 공헌을 담을 수 있으며 또한 각각의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이 퍼낼수도 있소. 과학적인 전망에 따라 우리는 엄격한 지도를 받게 될 것이오. 이런 사고들은 20년동안 우리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여 왔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오.

1961년 10월 18일 제 22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연설

흐루시초프의 과학적인 전망에 따르면, 이후 10년동안 소련은 1인당 생산량에 있어 미국을 월등하게 능가할 것이며 그 10년간의 결산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완성하게 될 것이었다. 당은 모든 인민을 위해 물질적, 문화적 부의 풍성함을 보장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공산주의의 완성을 위한 흐루시초프의 계획과 개혁은 끝이 없었다.

제1서기는 일단 농업에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1949년부터 53년까지 곡물수확량은 심각하게 감소했다. 어떤 곳에서는 1헥타르당 불과 800kg의 곡물을 수확했다.

 연도

 조달 

 지출 

7월 1일 국가비축량

 1940

 36.4 

 35.1 

 4.1

 1941

 24.3 

 23.0

 5.4

 1942

 12.5

 11.0

 7.0

 1943

 12.3

 14.9

 5.6

 1944

 21.6

 16.2

 2.8

 1945

 20.0

 22.0

 8.2

 1946

 17.5

 18.9

 6.1

 1947

 27.5

 21.7

 4.7

 1948

 30.2

 23.9

 10.5

 1949

 32.1

 28.0

 13.9

 1950

 32.3

 30.5

 16.0

 1951

 33.6

 32.9

 16.3

 1952

 34.7

 34.0

 17.3

 1953

 31.1

 37.3

 17.8

1940년부터 53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곡물 수지     단위 : 백만톤


스탈린은 소련의 산업화 과정에서 농업을 공장을 짓는 자원을 조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농업 생산물의 잉여분 비축을 중시하고 개인들이 집단농장의 곡식을 빼돌리는 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는 법령을 제정하여 국가비축량을 급격히 늘렸다.

반면 흐루시초프는 농업 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하여 공업을 통해 얻어진 재원을 농업부문에 투자하였다. 그는 이윤과 제조원가, 수익성 등 다양한 요인을 분석하여 농촌의 경제력 향상을 위한 일련의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 정부는 집단농장의 기계화와 관개 시설의 정비, 비료 생산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였으며 농촌 지역에 사회간접자본을 대폭 확충했다. 또한 집단농장의 농업 노동자들 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농산물 수매 가격을 지속적으로 인상하였고 정부 공출량은 낮게 책정했다. 

제1서기의 혁신적인 농업정책은 집단농장의 수익이 1950년부터 57년까지 3배나 증가하는 대성공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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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을때 흐루시초프는 오하이오의 넓은 옥수수밭 지대를 둘러보기를 희망했다. 그는 미국의 옥수수 농업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고, 거스트씨 소유의 농장을 방문했을때 소련의 토양이나 기후와 별다를바 없는 땅에서 어떻게 이런 놀라운 수확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이후 대표단이 모인 자리에서 흐루시초프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거스트 농장의 많은 것들은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거스트 농장의 경험을 우리 소비에트 실정에 맞추어 어떻게 이식시킬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대안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1서기에게는 불도저같은 추진력이 있었다. 흐루시초프는 토질과 기후를 고려하지 않고 각지에 옥수수를 재배하도록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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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에 소련의 연구소는 3,200개에 연구원은 28만 명에 달했다. 엔지니어 출신의 제1서기는 소비에트 연방의 과학기술 발전이 결국 산업생산의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우선 기계를 사용한 자동화가 추진되었다. 새로운 공장이 건설되고 체계적인 교육 훈련에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1956년부터 58년까지 3년간 480만건에 달하는 아이디어들이 생산에 도입되어 250억 루블 이상을 절약하는 효과를 얻는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인민들의 생활도 점차 개선되었다. 실업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은 하루 7시간 내지 6시간으로 단축되었으며 토요일과 축제일 전날의 근무 시간도 두시간이 단축되었고, 미성년자에 대해서는 6시간 노동제가 제정되었다. 중고등 교육기관의 수업료도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1956년 7월에는 국가연금법이 제정되어 1,800만 명이 연금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흐루시초프는 공산당 제 22차 전당대회의 결산보고를 통해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최근들어 우리나라는 성장속도에 있어 미국을 훨씬 능가하고 있으며, 많은 중요한 제품생산의 절대적인 성장에서 미국을 앞지르고 있다. 7개년 계획의 완수는 이미 우리 조국을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게 되었으며, 경제적인 면에서 미국을 앞지르는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요구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중요한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동시에 우리 소비에트 연방은 미국과의 국제경쟁 속에서 전세계적이며 역사적인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그러나 제1서기의 눈부신 성공 뒤에서 점차 실패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실패의 원인은 제1서기의 개혁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나태하고 무능한 관료와 과거 스탈린 시대의 어두운 유산에 있었다(고 흐루시초프는 생각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처럼 모든 면에서 일단 통계상으로 미국을 따라잡고 앞지르자라는 생각에 가득차 있었다.

1957년 봄 흐루시초프는 고기와 버터, 우유의 1인당 생산량에서 미국을 따라잡고 앞지르자라는 슬로건을 부르짖었다. 제1서기의 야심찬 계획은 1970년까지 달성될 예정이었다.

흐루시초프는 개인목축업의 축소와 사회적 역할의 강화를 통해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마침내 1958년 8월 20일 '도시와 노동자 부락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개인소유 형태 가축경영 금지에 관하여'라는 법령이 채택되었다.

이처럼 다듬어지지 않고 즉흥적인 법령이 실행된 결과 고통스러운 결과를 빚었다. 축산품의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시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이에 흐루시초프는 1962년 3월 31일 '육류로 만든 생산품과 버터의 가격인상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여 자신의 실수를 간접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잡고 앞지르자!'라는 무분별한 구호가 파산 상태에 이른 것이다.


1962년 6월 1일부터 3일까지 노보체르카스크의 전기기관차 제조공장 노동자들은 '고기와 우유의 공급, 급료의 인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파업에 나섰다.

9시 50분, 작업기피자(약 5,000명)들은 공장 뜰을 떠나 언덕 쪽으로 향했습니다. 노보체르카스크 노동자들은 제1열에 위치한 탱크 엄호부대의 장벽을 뚫고 나갔습니다. 앞쪽에 정렬한 주 종대는 꽃으로 장식된 레닌 초상화를 들고 있었습니다.
특수부대의 보고에 따르면 이미 유포된 '간첩공작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슬로건인 '고기, 우유, 급료의 인상'의 반사회적이고 범죄적인 요소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 세미차스트니의 중앙위원회 보고 -

시당위원회 근처에서 시위대와 경찰간의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경찰의 발포로 23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했다. 시위 진압후 KGB가 주도한 공개재판에서 7명의 범죄자가 사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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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의, 흐루시초프에 대한 글이 가득한 프라우다지를 읽는 모스크바의 연금생활자

제1서기겸 각료회의 의장은 무수히 많은 강연을 했다. 당대회, 총회, 위원회, 다양한 활동가들의 모임, 학술회의, 소비에트 회의... 모든곳에 흐루시초프가 얼굴을 들이밀고 옥수수 도입의 중요성, 우주개발의 발전 전망, 건축술과 로켓개발, 문예작품과 당면한 국제 정세에 대해서 수다를 떨었다.

그는 자신에그는 국가의 모든 영역에 대해 훈계하고 결정할 권리와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훈계는 때때로 다른 나라들에게도 행해졌다. 가령 1969년 유엔을 방문했을 때 제1서기는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연설을 했다.

흐루시초프의 발언은 보통 준비된 연설문을 무시하고 특유의 무례한 언어로 시작되곤 했다. 다른 연설자의 말을 가로채거나 야유를 보내고 연설 도중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다. 그는 자신이 연설가로서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소비에트의 모든 신문들에 매일같이 그의 강연이나 기자회견, 혹은 연설들이 가득찼다.


온갖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제1서기에게 가장 집중력을 발휘하게 했던 분야가 바로 군사력, 특히 로켓과 핵무기 설비였다. 그는 종종 방산업의 엔지니어들이나 과학자, 무기 생산공장의 책임자들을 면담했다. 군사부문에 있어서 흐루시초프는 우쭐할 자격이 있었다. 제1서기는 우주계획이나 무기 연구를 위한 투자를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모든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다.

소비에트 연방은 1956년 6월에 산업용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하기 시작했으며 1957년 10월에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했다. 소련 과학기술의 결정체인 스푸트니크는 흐루시초프 시대의 아이콘이 되면서 인민들의 자부심을 한껏 고조시킨다. 세계가 깜짝 놀랐고 미국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1961년 10월 17일 제 22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한껏 자랑할 수 있었다.

이미 준비된 연설문에서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소. 그것은 새로운 핵무기 실험이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실험을 완수하게 될 것이오. 결론적으로 우리는 반드시 TNT 5천만톤 위력의 수소폭탄을 폭발시키게 될 것이오. 나는 우리가 1억톤의 폭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바 있소. 이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우리는 그 폭탄을 폭파시키지 않을 것이오. 그것을 아주 먼 곳에서 폭파시킨다 하더라도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창문들이 다 박살이 날 것이기 때문이오.  박수..



흐루시초프의 자랑 짜르 봄바(Tsar Bomba) - 제1서기는 이것이 100메가톤급이라고 허풍을 쳤지만 실제로는 57메가톤의 위력임.


흐루시초프는 우주개발에도 큰 관심을 쏟았다. 최초의 유인우주선 발사를 앞둔 1961년 4월 피춘다에 머물던 그는 간부회의 멤버들에게 아래와 같은 지시문을 배포했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내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오전 9시 7분에 유인우주선이 발사될 것입니다. 지구 주위를 1시간 반동안 비행한 뒤 그 우주선은 지구에 착륙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실수없이 진행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주비행사는 모레 모스크바에 도착하게 됩니다. 원래는 13일에 발사하기로 정해져 있었지만 그 날짜는 불길하다고 해서 예정일을 변경했습니다.

가능한 모든 화려한 의식을 준비해서 우리 모두 브누코보 공항에서 만납시다. 이것은 엄청난 대사건입니다.

4월 12일, 우주 계획 담당자인 코롤로프가 흐루시초프에게 피로와 흥분으로 쉰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낙하산이 보이고 있고 지금 착륙하려하고 있습니다. 우주선에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흐루시초프도 다급하게 물었다.

"살아있는가? 말을 해보게. 살아있는가? 살아있는가?"

물론 유리 가가린은 살아서 돌아왔으며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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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와 유리 가가린

4월 14일, 관계자들이 크렘린으로 초청되었으며 취기가 돈 흐루시초프는 몇번이고 축배를 제의했다.

이 아이가 바로 그 유르카인가? 

우리에게 대항해서 발톱을 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합시다. 모두가 보았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유르카가 우주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도록 내버려 둡시다. 그리고 만약 또다시 비행을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가 보강을 요구한다면 다른 사람을 딸려서 보내도록 합시다. 좀더 잘 살펴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이미 유리를 위해 건배햇지만, 그를 위해서 다시 한번 건배를 제안합니다!

유리 가가린을 위해. 모든 학자들, 기술자들, 노동자들, 집단농장원들, 우리 모든 인민들, 그리고 여러분, 우리의 귀한 손님들, 즉 우리 정부에 의해 인정받은 국가의 대사들을 위해 건배합시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 외교 -

이전의 지도자들 중 레닌은 국제무대에 전혀 얼굴을 내민적이 없었다. 스탈린은 2차세계대전중 테헤란과 포츠담에서 회담을 갖기 위해 단 두번모스크바를 떠났을 뿐이다.

흐루시초프는 외국을 밥먹듯이 방문했으며 UN총회에도 10차례나 참석했다. 그러나 제1서기의 기괴한 언행은 항상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1960년 미국, 영국, 프랑스 정상과의 회담을 위해 파리에 도착한 제1서기는 U2기 격추사건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여 협상을 결렬시켰다. 기자들의 악의적인 질문에 그는 선동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할 것이다. 만약 수코양이가 접시위의 우유를 핥으면 우리 어머니는 고양이의 귀를 잡아당긴후 주의를 준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자들의 귀를 잡아뜯을 수는 없는일이 아닌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우리가 서로에게 친구임을 약속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친구에게서 나는 냄새는 완전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교활한 어떤 냄새가... 우리의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압박을 가하고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남의 담장을 슬쩍 넘어다 보고, 제국주의자들은 자신의 주둥이를 놀렸으며 우리는 그들의 주둥이를 때렸다. 1965년에 이르게 되면 소련에서는 한명의 노동자도, 한명의 근로자도 세금을 납부하지 않게 될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직설적이면서도 재치가 있었다.

1961년 7월 4일, 제1서기는 미국대사관의 초청을 받았다. 외국기자들이 그를 에워싸고 대화를 시작했다. 미국 기자 샤피로가 자신의 비밀병기는 만년필이라고 자랑하자, 흐루시초프가 대답했다.

"나의 비밀병기는 언어요."


전임자인 스탈린은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념이나 명분보다 실리를 우선시했다. 반면 그의 후계자는 즉흥적이고 감정에 치우친 외교정책을 펴는 경우가 많았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망쳐버린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 회복을 강조했고, 2차례나 베오그라드를 방문했다. 1956년 9월의 정상회담에서 양국 관계는 긴밀해졌다. 그 댓가로 제1서기는 25만톤의 밀을 제공해야만했다. 그럼에도 흐루시초프는 공산주의 이단자가 스스로의 과오를 깨우치고 모스크바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을 만족스러워했다.

제1서기는 동유럽의 다른 공산주의 형제국에 대한 지원에도 아낌이 없었다. 우정이라고 이름지어진 대규모 파이프라인이 부설되어 동유럽 공산국에 아낌없이 석유를 공급해 주었다. 또한 1959년부터는 평화라는 이름의 고압 송전망이 부설되기 시작하여 전기까지 공급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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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한 흐루시초프


제1서기는 아랍의 새로운 지도자 나세르(Gamal Abdel Nasser)에게도 큰 흥미를 가졌으며 아낌없는 지원을 보냈다. 

1952년 나세르는 자유장교단이라 불린 그룹을 이끌고 부패하고 무능한 이집트 왕정을 폐지했으며 1954년에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농지 개혁을 실시하고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아랍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중앙위원회 멤버들이 반론을 제기했음에도 흐루시초프는 1955년에 이집트로 여러가지 무기를 보냈다.

1956년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라엘을 움직여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에 격노한 흐루시초프는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서 발을 빼지 않을 경우 직접적인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결국 영-프-이스라엘 동맹은 소비에트 연방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수천명의 소련 고문관들과 전문가들이 파견되어 이집트의 군사력을 복원시켜주었다. 이후 나세르가 추진한 아스완댐 건설과 기타 큼직한 건설사업에도 제1서기의 금고에서 수억달러가 지원되었다.

흐루시초프가 실각한후 열린 1964년 10월 14일의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흐루시초프의 헌납외교에 대한 대차대조표가 공개되었다.

아프리카 서해안에 위치한 기니아 공화국에서 소련은 공항과 통조림공장, 제재소, 원자력발전소, 라디오방송국, 병원, 호텔 그리고 정치 기술 연구소를 건설했다. 그곳에서는 지질조사와 석유탐사 사업도 진행되었다. 막대한 양의 기계 및 설비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친구였던 세쿠 투레 수상은 우리에게 곧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거대한 지출은 완전히 무익한 것으로 끝나버렸다. 심지어는 우리가 쿠바로 비행하는 도중에 우리 자신이 건설한 코나크르 공항을 이용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흐루시초프가 통치하던 10년간 소련은 여러 나라에 수억 루블을 투자하여 6천개의 공장을 건설했다. 자카르타에는 십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을. 랑군에는 병원을. 가나에 원자력연구소를. 말리에 종합경기장을. 기니의 병원을 정말로 건설할 필요가 있었던 것인가?

미국과 도처에서 충돌했던 흐루시초프에게 있어서 가장 골치아픈 문제는 뜻밖에도 중국과의 관계였다.

제1서기는 여러차례 모택동을 만났다. 그러나 만남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둘 사이의 긴장도 증가했다.

1954년 북경을 방문한 흐루시초프는 모택동의 자비로움과 굳센 의지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위대한 인물로 추켜세웠다. 그러나 그는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아 자신이 중국 지도자에 대해서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게 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을 것이다.

정치. 이것은 게임이다. 모택동은 아첨과 배신. 끊임없는 복수심. 그리고 거짓이라는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아시아적인 교활함을 토대로 항상 게임을 즐겼다.
그는 오랫동안 우리를 속여왔지만 우리는 그러한 속임수를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소련과 중국의 관계가 갑자기 냉각된 원인은 분명치 않다. 아마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움직임이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제1서기 본인은 모든것을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였던 유진의 책임으로 돌렸다.

나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유진이 대사로 임명된 나라가 다른 어떤 나라였다고 해도 우리와 화목하게 지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를 유고슬라비아에 파견했을 때, 우리는 티토와 싸웠고.. 유진이 중국으로 간 후 우리는 모택동과 싸웠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쨌든 제1서기는 모택동을 냉정하게 몹시 괴롭혔다. 핵분야에서의 기술적 협조를 반대하는 것이 첫 움직임이었다. 모택동은 핵무기를 종이호랑이라고 불렀지만, 내심 그것을 몹시 가지고 싶어했다.

1958년 7월 모택동은 비밀리에 흐루시초프를 초청했다. 양국간의 군사협조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으며, 제1서기는 공동함대의 건설과 중국 항구의 임대를 요구했으나 모택동은 그 제의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만일 전쟁이 벌어진다면 소련은 중국의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으며, 소련해군도 중국의 어떤 항구라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을 것이오."

장시간의 회담은 스탈린 문제에 대한 언급으로 이어졌다.

모택동 : 스탈린의 실책에 대한 비판은 옳소. 우리는 단지 비판의 명확한 한계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뿐이오. 우리는 스탈린의 10손가락중 3개만이 부패했다고 생각하오.

흐루시초프 : 그 이상이었다고 생각하오.

모 : 그렇지 않소. 그의 업적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할 부분이오.

흐 : 스탈린은 스탈린으로서 존재했고 그렇게 기억되고 있소. 우리는 특히 과거에 형성되었던 앙금이나 좋지 못한 영향의 흔적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오. 그러나 티토가 그를 비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오. 20년이 지난 후 사람들은 티토가 누구였는지 사전을 뒤적이게 될 것이오. 그러나 스탈린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모 : 내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그는 우리와 우호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국민당과의 조약을 파기하는 것 역시 원하지 않았소. 페도렌코와 코바레프는 나에게 소련을 둘러보도록 하라는 그의 권유를 전했소. 그러나 나는 할일이 세가지 남아있을 뿐이라고 말했소.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  나는 단순히 스탈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던 것이 아니오. 그래서 나는 말했소. "조약을 체결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는 나의 세가지 과제를 계속 수행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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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와 모택동

우호관계에 대한 형식적 확인에도 불구하고 양국관계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흐루시초프는 1959년 10월 2일에 다시 모택동을 만났다.

회담은 상호간의 비난과 긴장 속에 진행되었다. 대만 문제, 중국과 인도간의 충돌. 미국과의 관계와 미군 전쟁포로에 대한 문제, 그밖의 여러 문제로 논의들이 이어졌지만 양국간의 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흐루시초프는 인도와의 문제에 관한 중국의 견해를 비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5km를 더 가지거나 덜 가지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레닌의 예를 들자면, 그는 터키에 대해 카르스, 아르다간, 아라랏을 양도했소. 그리고 현재까지도 카프카즈의 주민들 가운데 레닌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있지만 나는 그의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하오.

제1서기는 달라이라마를 내쫓은 중국의 티벳정책에 대해서도 꾸짖었다.


격노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당신들은 사사건건 우리를 우롱하고 있소. 인도와의 충돌에 있어서도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 달라이라마 문제도 우리의 실수이다. 이제는 우리가 당신들을 비난할 차례다. 당신들은 야합주의자들이다. 인정하시오!

흐루시초프는 비꼬았다.

인정하겠소. 우리는 원칙적으로 공산주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소.
나는 단지 당신들의 부분적인 실책만을 지적했소. 그리고 당신들의 원칙적인 정치적 실수에 대해서는 비난한 일이 없소. 그러나 당신들은 우리에 대해 원칙적인 정치적 문제에 대해 비난하면서 들고 일어났소. 만약 당신들이 우리를 야합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면 나에게 손을 내밀지 마시오. 나도 당신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오.

최악의 분위기로 양국간의 회담은 종결되었다.


제1서기는 제국주의의 멸망과 공산주의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유엔의 연단에서, 인터뷰에서, 기자회견에서, 면담에서 미제국주의자와 그 앞잡이들에 관해 사정없이 폭로하고 비난했다.

"제국주의는 사망할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미래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분쇄는 사회발전의 근본이 되는 문제이다."

이런 흐루시초프에서 1959년 쿠바로부터 들려온 혁명의 소식은 무엇보다 반가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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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와 흐루시초프 - 1960년 UN

제1서기는 아메리카에 처음으로 출현한 사회주의 국가를 어떻게든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었다. 카스트로 또한 미국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소련에 방어용 미사일을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흐루시초프는 그 요청에 기꺼이 응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핵미사일까지 쿠바에 배치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쿠바섬에서의 소비에트 군대는 바다로부터, 공중으로부터의 침략자들이 쿠바 영토에 상륙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쿠바삼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야 한다. 소련과 쿠바 방위의 근간을 이루는 미사일부대는 모스크바의 신호에 따라 언제든지 미국의 주요 거점에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한다. 미사일 잠수함 부대 역시 모스크바의 신호에 따라 미국 해안의 주요 거점에 핵미사일을 발사할 준비를 갖춰야한다.

흐루시초프의 미사일이 코밑에 건설되고 있음이 알려지자 미국은 발칵 뒤집혔다.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 조치를 단행하였고, 모스크바는 "만약 미국이 핵전쟁을 도발한다면 가장 강력한 대응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워싱턴에 경고했다. 워싱턴 주재 소련 외교관들은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가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미정부에 어떠한 공격무기도 쿠바에 제공한 일이 없다는 보증을 했다.

그러나 U2기에 촬영된 핵미사일 기지는 결코 허상이 아니었다. 핵전쟁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제1서기는 며칠동안 집무실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의 침묵은 전세계에 핵전쟁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1962년 10월 25일 워싱턴의 공식 서한이 모스크바로 전달되었다.

존경하는 의장님.

본인은 24일자 귀하의 서신을 받았습니다. 귀하께서는 아마도 이러한 일에 있어 우리를 이끄는 힘이 무엇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우리 정부는 귀하의 정부와 대표들로부터 쿠바에 대해 그 어떠한 공격용 무기도 제공한 일이 없다는 명확한 보증을 받았습니다. 만약 귀하께서 다시 한번 9월에 타스통신을 통해 발표된 성명서를 살펴보신다면... 이러한 공식적인 보증들은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귀하의 군관계자들은 얼마 전부터 쿠바에서 미사일기지 건설에 착수하였습니다.
귀하의 정부가 이전에 존재했던 관계로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행동을 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흐루시초프는 곧 중앙위원회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모두들 제1서기의 입만 바라보고 침묵하고 있었다. 케네디가 오늘이나 내일밤 중에 쿠바를 습격하려한다는 첩보가 보고되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고, 마침내 흐루시초프는 케네디의 편지를 공개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논의끝에 미국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기로 결정이 내려지고, 제1서기의 장황한 편지가 다시 미국으로 보내졌다.

존경하는 대통령 귀하.

25일자 서신을 받았습니다. 귀하의 서신을 읽으면서 본인은 더욱 복잡해진 상황에 대해 귀하께서 몇가지 생각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본인은 이를 높게 평가합니다.

귀하께서 만약 세계인류의 행복에 대해 진실로 염려하고 계신다면 본인을 올바로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평화는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자본주의자들에게도.. 만약 그들이 이성을 잃지 않는다면 그리고 누구보다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또한 단지 자신의 삶뿐만이 아니라 인민의 삶을 우선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세상을 환하게 비추게 될 평화유지를 위한 사업을 저해하는 국가들간의 그 어떠한 전쟁도 반대하는 바로 그러한 공산주의자들입니다.

그 어떠한 조건하에서도 귀하가 지적하신 쿠바에서의 공격용 무기에 대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통령 귀하. 귀하는 군사분야의 전문가입니다. 설사 다양한 사정거리의 큰 위력을 갖춘 많은 수의 미사일을 자신의 영토 내에 보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진실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00메가톤의 위력을 가진 핵미시일로.. 이러한 미사일로 상대를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로지 사람들과 군대만이 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정말 당신들은 쿠바가 미국을 공격할 것이고, 더구나 쿠바와 함게 우리가 쿠바 영토로부터 귀하의 국가를 침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실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귀하께서는 우리에게 서신을 통해 제기했던 그런 올바르지 못한 행위들을 우리가 과연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쿠바로 항해하고 있는 우리 선박들은 조금도 악의가 없는 평화적인 물자들을 운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귀하에게 보증합니다.

그럼에도 당신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첫걸음을 내딛으려 한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당신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양국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고, 쿠바 상공에서 미국의 U-2기가 미사일에 격추되었다.

이에 미군 장성들은 지체없이 소련에 대한 공격을 요구했다. 각처로부터 압력에 시달리던 케네디는 자신의 동생인 로버트를 통해 소련 대사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만약 소련이 쿠바로부터 미사일을 철수시킨다면, 쿠바에 대한 공격은 없을 것입니다."

10월 28일 간부회의 멤버들은 흐루시초프의 집무실에서 밤을 지샜다.

마침내 흐루시초프는 양보를 결정하였다.

세계 평화를 위하여. 위험한 분쟁의 조속한 해소를 위해, 평화를 갈망하는 모든 인민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본인이 평화를 갈망하듯 그렇게 평화유지를 원하는 미국의 인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소비에트 정부는 무기 배치를 위한 향후의 기지건설 작업의 중단이라는 이미 예전에 결정된 명령에 추가하여 당신들이 공격용이라고 부르는 물건들을 해제하고 본국으로 소환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내립니다.

제1서기는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결정을 쿠바의 카스트로에게 통보해주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물론 그는 후일 이 사태를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쿠바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위대한 승리였다고 자화자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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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와 케네디의 위험한 팔씨름

쿠바사태는 소련 내부에서 흐루시초프의 권위에 큰 상처를 입힌 뼈아픈 패배였다. 1964년 제1서기를 몰아낸 지도자들은 중앙위원회 총회에 제출할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대목을 삽입했다.

흐루시초프 동지는 만약 미국이 쿠바를 건드리면 우리는 그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는 쿠바로 우리 미사일을 보낼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고, 세계를 핵전쟁의 문턱까지 끌고갔다. 이 위기는 결국 위험천만한 계획을 고안해낸 당사자조차 크게 놀라게 만들었던 것이다.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던 우리는 우리 선박에 대한 미국인들의 굴욕적인 검열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제시한 모든 요구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물론 이 모험적인 결정에 간부회의 멤버들도 가담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잘못을 흐루시초프 한사람에게 덮어씌어 자신들의 잘못을 희석하려했다.


- 실각 -

1964년 10월초, 흐루시초프는 1주일간의 휴가를 보내기 위해 피춘다로 떠났다. 그곳에서도 그는 일상적인 업무를 계속했다. 지도자들을 면담하고 장관들의 보고를 듣고 외국의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3명의 소비에트 우주비행사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다. 제1서기는 항상 힘이 넘쳤고 새로운 계획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간부회의 멤버중 그와 가장 가까웠던 미코얀만이 동행했다. 제1서기의 사위인 아주베이는 한 지도자가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흐루시초프를 제거할 필요'를 얘기하고 다닌다는 것을 흐루시초프가 알고 있었다고 후일 회상하였다.

그 지도자는 바로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인 이그나토프였다. 흐루시초프 축출 음모가 다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체주의 체제는 민주주의보다 음모가 훨씬 쉽게 진행된다.

흐루시초프의 휴가기간 동안 모스크바의 브레즈네프 집무실에서는 중앙위원회 간부회 멤버들이 여러가지 사안들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흐루시초프를 축출하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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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즈네프

피춘다로 전화를 걸어 최고권력자를 모스크바로 돌아오게 하는 임무가 브레즈네프에게 주어졌다.

미래의 서기장은 전화기를 몇번이나 들었다 놓았다하며 망설였다. 모두가 격려했지만 브레즈네프의 결심은 여전히 충분치 않았다. 브레즈네프는 자신이 주도자가 되었음을 알았다.

"이 모든 일들이 과연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결국 수슬로프가 전화를 걸었다. 제1서기와 몇마디를 나눈 그는 브레즈네프에게 공을 넘겼다.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브레즈네프의 말을 끊고 흐루시초프는 내뱉았다.

"당신들은 그곳에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두르고 있습니까? 가겠습니다. 가서 이야기합시다."

다음날인 10월 13일, 흐루시초프는 아침 일찍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러나 공항은 평소와 달리 텅비어 있었고, 단지 KGB 의장인 세미차스트니만이 그를 마중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동지! 그들은 크렘린에 있습니다."

이제서야 흐루시초프도 사태를 깨달았다. 자신의 제1서기직에 대한 새로운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까지 10월 12일에 크렘린에서 당최고협의회의 모임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다. 그 회의에는 정위원과 후보위원들이 출석했으며 브레즈네프가 진행을 주관하였다.

결정사항은 아래와 같았다.

흐루시초프가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5개년 계획의 몇가지 문제들을 간부회의에서 논의한다. 흐루시초프가 머물고 있는 피춘다로 전화를 걸고 결정된 내용을 전달하는 임무는 브레즈네프, 코시킨, 수슬로프, 포드고르니에게 위임한다.

별도로 중앙위원회 총회의 소집을 결정하였으며, 1964 7월 18일자 '집약적 경영으로 나아가기 위한 이행과 관련한 농업지도에 대하여'라는 흐루시초프의 지시문을 지방에서 회수한다.


흐루시초프는 곧장 중앙위원회 간부회의가 열리고 있는 크렘린으로 향했다. 회의에서 간부회의 멤버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흐루시초프의 집단적 지도에 대한 경시, 독단적인 자기 방식의 강요, 무능력, 기타 허다한 실패들에 대해 혹독한 비판이 가해졌으며 제1서기직에서 사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오로지 미코얀만이 흐루시초프를 두둔하였고 흐루시초프를 제1서기에서 해임하더라도 각료회의 의장직에 남게 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의는 즉각 거부되었다.

제1서기는 연설자들의 말을 가로채 논의과정을 중단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아직도 제1인자의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는 흐루시초프를 더이상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냉랭한 분위기가 모든 노력을 무위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흐루시초프도 처음에는 1967년과 같이 현재의 난관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반항을 하기도 하고, 반대의사를 표현하기도 했지만 반드시 그를 제거하겠다고 똘똘 뭉친 동료들의 냉랭한 거부에 머리가 멍해졌다.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이 회의에서 사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회의는 아무 성과없이 끝났다. 별장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흐루시초프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KGB의장인 세미차스트니는 흐루시초프의 모든 경호팀을 조심스럽게 교체하고 명령을 내렸다.

"흐루시초프의 그 어떠한 명령, 지령, 지시에 대해서도 간부회의의 결정이 없는 상황에서 수행해서는 안된다."


흐루시초프의 비위를 거슬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많은 사람들이 결국 그를 배신했다. 

10월 13일 아침부터 시작된 간부회의에 참석한 흐루시초프는 이미 준비되어 있던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을 요청한다.'라는 성명서에 바로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흐루시초프는 고개를 숙이고 두팔로 머리를 감싼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조용히 일어나 나갔으며, 아무말없이 차에 올랐다.

누구도 그를 배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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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와 동료들 - 1963년


다음날인 10월 14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가 열렸다. 브레즈네프는 준비된 성명을 낭독하였다.

중앙위원회 간부회의에서의 모든 상황은 비정상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이에 관해서는 당과 국가의 집단지도생활이라는 레닌주의적 원칙을 훼손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눈에 띄게 조장한 흐루시초프에게 우선적인 잘못이 있다.

다음은 수슬로프의 차례였다.

흐루시초프는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다. 그는 간부회의 멤버들이 서로 다투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제멋대로 음모를 획책하는 그의 간계는 오랫동안 지속될 수는 없었다. 결국 간부회의 멤버들은 흐루시초프가 부질없는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1년동안 흐루시초프는 농업제도와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에 있어 티미랴제프스크 아카데미 학자들의 대부분이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아카데미를 없애려 노력했다.


실제 흐루시초프는 아카데미를 없애려한 것이 아니라 농촌지역으로 이전하는 문제를 제안했었지만, 반론을 제기할 본인은 자리에 없었다.

만장일치로 브레즈네프가 새로운 제1서기로 선출되었을 때, 흐루시초프는 여전히 정부 소유의 별장에 갇혀 있었다. 총회에서 돌아온 미코얀은 개각의 내용을 전달하다가 갑자기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동지께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라고 그들이 요구했습니다. 현재의 별장과 아파트는 동지께서 평생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흐루시초프는 얼굴을 찌푸린 채 미코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나에게 이야기한 장소에서 살 준비가 되어있소."

이후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시초프는 거의 20년 가까이 소련 인민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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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와 그의딸 줄리아, 라다 - 1964년 4월 17일


- 연금 생활 -

쫓겨난 지도자는 자신의 패배를 힘들게 견뎌냈다. 그는 작은 숲 속의 풀밭에 내놓은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있거나, 별장 주변의 오솔길을 따라 조용히 산책을 하곤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탓에 차츰 일거리를 찾아나섰다. 

토마토를 키우고 수경재배를 해보기도 했다. 가끔씩 극장이나 전시관을 찾아 모스크바로 갔다. 한가한 생활 덕분에 책도 많이 읽게 되었다. 톨스토이, 레스코프, 투르게네프 등등.. 젊어서 접하지 못했던 놀라운 세계와 만나게 되었다.

이런 생활로 몇년을 보낸후 어느날 갑자기 그는 회고록을 쓰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휴대용 녹음기를 구해 별장의 뜰이나 부엌에서 작은 소리로 녹음했다. 아내인 니나 페트로브나가 녹음된 내용을 정리하고 다듬었으며 나중에는 아들인 세르게이가 도왔다.

흐루시초프가 회고록을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브레즈네프의 명령으로 흐루시초프는 소환되었고 키릴렌코가 심문을 담당하였다.

물러난 제1서기는 항변하였다. "나에게는 정말 회고록을 쓸 권리도 없는거요?"

일단 심문은 끝났으나 안드로포프 KGB 의장은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이 당과 국가에 치명타를 가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따라서 1970년 11월 10일, 다시 흐루시초프는 당통제위원회로 소환되었다.

의장인 폘셰가 곧장 이 연금생활자에게 물었다.

"미국에서 곧 '흐루시초프는 회상한다.'라는 책이 출간될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이오?"

"나는 그 어떠한 회고록을 누구에게 전해준 일이 없으며, 그런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소. 나는 단지 구술하였을 분이며 이것은 모든 시민들이 가질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그것이 이 시기에 출판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그들은 흐루시초프를 장시간 괴롭히고 위협했으며, 회고록이 소련의 이익을 훼손할 수 있다고 협박했다. 마침내 니키타 세르게에비치의 감정이 폭발하였다.

나를 체포해 주시오. 총살시켜 주시오. 나는 사는데 지친 사람이오.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살고 있는 것이 불만스럽다고 말할 수 있소. 오늘 라디오에서 드골씨의 사망소식에 관해 보도했소. 솔직히 나는 그가 부럽소. 나는 정직하고 충직한 사람이었으며 오늘날 같이 당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의 모든 시간을 당업무를 위해 헌신했소.


결국 위원회는 그에게 강제로 다음과 같은 성명에 서명하도록 만들었다.

확실히 보도된 바와 같이 현재 미국과 다른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의 출판사들은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이라 일컬어지는 출판물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은 조작된 것으로 나는 이러한 작태에 분노한다.
나는 그 어떤 회고록이나 회고적 성격을 지닌 자료들을 그 누구에게도 전달한 일이 없다. 타임지에도, 혹은 다른 외국의 출판사에도 건네준 적이 없다. 소비에트 출판사에 대해서도 그 어떠한 회고록도 전해준 적이 없다. 따라서 나는 이 모든 것이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한다. 상업적인 부르주아 언론들은 진작부터 끊임없이 그러한 거짓을 유포하여 왔다.

불쾌해진 연금생활자 노인은 휘갈겨 서명했다.

1970년 11월 10일. 니키타 흐루시초프


간신히 곤경에서 빠져나온 1971년 9월, 흐루시초프는 자신의 딸과 사위를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었다. 1971년 9월 11일 흐루시초프는 크렘린병원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드디어 오랜 침묵을 깨고 흐루시초프라는 이름이 다시 소련 인민들에게 등장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소련 각료회의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전 제1서기, 그리고 소련 각료회의 전의장이자 퇴임한 연금생활자였던 니키타 세르게에비치 흐루시초프가 1971년 9월 11일, 오랜 투병생활 끝에 서거하였음을 애통해 하며 소식을 전합니다.

- 1971년 9월 13일 프라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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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