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0월 14일 비밀리에 열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舊정치국)에서 모종의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다음날인 1964년 10월 15일 모스크바에서는 공산당 제1서기겸 각료회의 의장인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시초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가 '고령과 건강의 악화'라는 이유로 당과 행정부의 직책에서 물러났다라는 성명이 발표되었다.
흐루시초프에 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결의문(1964년 10월 4일)
흐루시초프 동지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최고 서기장, 소연방각료회의 의장의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거대한 권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집중시키고, 여러 경우에 있어서 당 중앙위원회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야 할 집단 논의도 하지 않고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면서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와 당 중앙위원회 위원들의 견해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흐루시초프 동지는 간부회와 당 중앙위원회의 동지들에 대한 편협함과 불손함을 표하고 그들의 견해를 무시하면서 20차, 21차, 22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의 결정에 의해 계획된 노선을 실제 실행하면서 상당한 오류를 그냥 지나쳤다.
중앙당 간부회가 보기에는 위원으로서 부정적인 개인적 자질, 고령, 건강 악화로 인해 흐루시초프 동지에게는 지나간 오류와 업무에 있어서 반(反)당적인 방식들을 개선할 능력이 없다. 흐루시초프 동지의 성명을 고려하여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1. 노쇠와 건강상태 악화로 인해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 최고 서기장과 소연방 각료회 의장직에서 사임한다는 흐루시초프 동지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한다.
2. 향후 한 인물에게 당 중앙위원회 최고 서기장과 소연방각료회 의장의 지위를 맡기는 것은 부적절함을 인정해야한다.
3. 1964년 10월 14일 당 중앙위원회 총회의 소집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련의 최고 지도자 중에서 죽기 이전에 권력을 빼앗긴 사람은 흐루시초프와 고르바초프.. 두명의 대머리 지도자 뿐이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레닌, 금새 쓰러질 것 같던 스탈린, 반은 관에 발을 담근 상태로 마네킹 역할만 했던 브레즈네프, 몇달 동안 인공신장에 의지한채 꼼짝 못하던 안드로포프, 명확하게 의사표시할 능력도 없었던 체르넨코.. 이들 모두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최고권력을 움켜잡고 있었던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1964년에 경질되었으나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이미 1957년에도 있었다. 최고 간부회의(정치국) 멤버들은 흐루시초프의 개혁 정책과 스탈린에 대한 공격을 불안해했다. 그들은 모두 스탈린에 의해 발탁되었고 대숙청에 어떻게든 관계했던 것이다.
- 어린 시절 -
초창기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대부분 중산 계급 출신인 것과 달리 흐루시초프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짜르의 군대에서 복무한 농노였으며, 니키타는 당시의 보통 아이들처럼 기초교육을 받은후 가족과 함께 도네츠 의 광공업 중심지 유조프카로 이사하여 배관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던 덕분에 그는 1차 대전에 소집되지 않았다. 니키타는 일찍부터 노동자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고, 1918년 우크라이나를 놓고 붉은 군대와 백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투쟁이 벌어졌을 때 볼셰비키에 가입하였다. 흐루시초프는 1919년 1월에 붉은군대의 하급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에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백군과 폴란드군에 맞서 싸웠다.
1921년 흐루시초프는 마침내 동원에서 해제되었지만, 심한 기근으로 첫 아내인 갈리나가 2명의 아이를 남겨놓고 죽었다. 그는 1922년 유조프카에 있는 새로운 소비에트 노동자학교의 입학을 허가받아 공산당 교육을 받으며 중등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학생정치위원이 되었고 공산당위원회 간사가 되었다. 1924년에 2번째 아내 니나 페트로브나와 재혼했다.
- 권력으로 가는 길 -
1925년 흐루시초프는 유조프카의 페트로브스크-마린스크 지구당 서기로 활동했다. 곧 니키타는 정력적인 활동과 광산과 공장의 사정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인 카가노비치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25년 12월 스탈린이 트로츠키파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제14차 공산당 전당대회에 그는 카가노비치를 따라 투표권 없는 대표로 참석했다.
그뒤 4년 동안 흐루시초프는 유조프카, 하르코프, 키예프에서 당간부로 활발한 활동을 계속했다. 1929년에는 모스크바의 스탈린공과대학에서 야금학을 공부했고 이 대학 당위원회의 서기로 활약했다. 1931년부터는 모스크바 시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1933년에는 카가노비치의 지도 아래 모스크바 시당위원회의 제2서기가 되어 마침내 공산당의 이너서클 안으로 진입했다.
1930년대 초반 흐루시초프는 모스크바에서 확고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 지하철 건설을 감독했으며 그 공로로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해 흐루시초프는 마침내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34년에 있었던 제17차 전당대회에서 그는 70명으로 구성된 소비에트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숙청작업에 가담했다. 그는 내무인민위원 예조프의 대숙청 광풍을 살아남은 3명의 지역 서기장 중 한명이었다.
1936년 8월 22일, 모스크바에서 당원대회가 열렸다. 흐루시초프는 열광하는 대중을 향해 격렬한 연설을 하였다.
이러한 파렴치한들은 총살시켜야 마땅합니다. 뿐만 아니라 트로츠키 또한 총살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1957년 노동절 행사 - 흐루시초프, 드미트로프, 스탈린, 몰로토프, 미코얀
훗날 스탈린의 테러를 비난하고 위대했던 지도자를 부관참시했던 흐루시초프는 1935년에서 38년 사이에 모스크바 시당 제1 서기로서, 그리고 1938년 이후에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1서기로서 스탈린의 종교재판에 열렬히 가담했던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1935년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후보위원, 1936년 헌법위원회의 위원, 1937년 소련 최고회의 외교분과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938년에는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후보가 되어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서 키예프에 파견되었고 다음해에 열린 제18차 전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선임되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1938년 6월 13일, 제 14차 우크라이나 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제 1서기의 자격으로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흐루시초프는 겉으로 드러나는 농부같은 친절함과 단순함, 들창코와 당나귀 귀, 넓고 납작한 얼굴, 쾌활한 성격과 끊임없는 에너지 등으로 인해 제 2의 스탈린으로 보일만한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이런 흐루시초프를 좋아했다. 덕분에 그는 스탈린 시기의 숙청을 피해 용케 살아남을수 있었다.
1940년 히틀러와 야합한 스탈린이 동폴란드를 점령한 후 흐루시초프는 이 지역을 소련에 통합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 일은 1941년 6월 독일군의 소련 침공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전쟁중 흐루시초프가 첫번째로 맡은 임무는 우크라이나의 산업시설을 가능한 한 동부지역으로 소개시키는 것이었다. 그후 그는 육군중장 대우의 인민위원이 되어 우크라이나 방면군에 배속되었다.
그의 임무는 시민들의 저항의식을 고취시키고 스탈린과 그외의 정치국원과의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안드레이 예레멘코의 정치고문을, 1943년의 쿠루스크 전투에서는 니콜라이 바투틴 중장의 정치고문을 역임했다.

흐루시초프 - 스탈린그라드 전선
1944년 독일에서 우크라이나를 되찾은 흐루시초프는 황폐해진 지역 주민들의 생계를 복구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1946년의 기근은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악이었다. 흐루시초프는 다른 지역으로 보내기 위해 우크라이나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곡물생산의 회복과 식량의 배급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이 시기에 그는 소련 농업의 여러가지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1949년 스탈린은 흐루시초프를 모스크바로 소환하여 시당위원회 제1서기로 복귀시켰으며, 동시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국원으로 임명하였다.
- 스탈린의 사망 -
1953년 3월 1일, 스탈린과 그의 측근들은 별장에서 새벽 4시에 헤어졌다. 심야의 만찬에서 스탈린은 그루지아산 포도주를 약간 마셨을 뿐이지만 몹시 취해 있었다. 지도자는 들뜨고 흥분했다. 그는 참석한 사람들 모두를 강하게 질책했으며, 간부회의 멤버들의 행태를 꾸짖었다. 푸짐한 음식상을 앞에두고 모두들 싸늘하게 긴장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이탈과 한국전쟁에서의 실패로 위대한 지도자는 격노해 있었다. 그는 또한 유대인 의사들의 음모가 거대한 규모의 적대활동의 징후라고 단정했다. 측근들은 스탈린의 말이 잠시 멈출 때마다 지도자를 진정시키려 진땀을 흘렸다.
"방안을 강구하겠습니다. 당신의 명령은 틀림없이 완수될 것입니다. 상황은 나아질 것입니다."
대원수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본 후 힘겹게 일어나 냅킨을 던져버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측근들 역시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스탈린은 하루종일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호출도 전화도 없었다. 점심식사조차 걸렀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스탈린의 방에 들어가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에 지도자의 집무실과 식당에 불이 들어왔지만 여전히 호출을 알리는 벨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밤 11시경이 되어서야 경호원들은 충직한 하녀 마트레나 페트브나와 함께 스탈린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의식을 잃은채 방바닥에 쓰러진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소파에 옮겨졌다.
다음날 아침 베리아와 간부회의 멤버들이 한무리의 의사를 몰고 도착했다. 진땀 흘리게 하는 오랜 진찰이 끝난후 의사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크렘린 의료실 겸 요양기관의 의사협의회는 3월 2일 오전 7시에 스탈린 동지의 건강상태를 검진했습니다.
오전 7시 첫 검진시 환자는 소파에 똑바로 누워있었고 머리는 왼쪽으로 돌아가 있었으며 눈음 감겨있었습니다. 얼굴색은 보통이었으며 소변을 본 상태여서 옷이 젖어있었습니다.
좌측 동맥에서 맥박을 측정하려 했을때, 왼손과 왼발이 불안정하게 움직였습니다. 호흡은 고르지 않았습니다. 1분에 78이었던 맥박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심작의 박동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혈압은 190/110이었습니다. 폐의 전엽에서 수포음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측 손가락 부근에서 타박상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환자는 무의식상태였습니다. 우측 코 아래 입술이 밑으로 처져 있었습니다. 눈꺼풀을 쳐들자 눈알이 좌우로 움직였습니다. 동공은 중간 크기였으며 빛에 대한 반응이 저하되어 있었습니다. 우측 손발은 움직이지 않았고 좌측의 움직임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정해졌습니다.
- 진단소견 -
고혈압. 두뇌혈관 손상에 의한 전반적인 동맥경화증. 좌측 뇌동맥의 중앙부에서의 출혈로 인한 우측 전신마비. 신장기능 마비와 동맥경화로 인한 심근경색. 환자의 상태는 매우 위중함.
- 지시사항 -
절대안정. 환자를 소파에 뉘여 놓을 것. 귓부분에 치료용 거머리 8마리 부착. 머리를 차게 하고 고혈압에 대비한 관장을 할것. 틀니를 빼고 금일은 음식물 공급을 삼가할 것. 정신과 의사, 내과 의사, 간호원이 24시간 상주할 것. 사레에 걸리지 않도록 차숟가락으로 미음을 조심스럽게 떠넘길 것.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사망 예고였다. 3월 3일이 되자 스탈린의 상태는 더욱 악회되었다.
술에 잔뜩 취한 지도자의 아들 바실리가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홀에 나타났다.
"개같은 자식들! 아버지를 죽였어." 흐루시초프가 술취한 그를 껴안고 방으로 데려갔다.
딸 스베틀라나는 슬프게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고위원회 멤버들 모두 침묵을 지켰다. 30년동안 이들은 파이프를 물고 어슬렁거리는 작은키의 콧수염 사나이가 내리는 명령에 익숙해 있었다. 이들은 단지 그의 지시를 시행하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흐루시초프 회고록에는 죽어가는 스탈린이 보인 마지막 재치와, 베리아의 참으로 믿기 어려운 행동이 묘사되어 있다.
스탈린이 병석에 쓰러지자마자 베리아는 그에 대한 증오를 내뱉기 시작하고 스탈린을 비웃었다. 베리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으로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탈린의 얼굴에 의식 회복의 기미가 보이면서 그가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자, 베리아는 무릎을 꿇고 스탈린의 손을 쥐며 입맞추기 시작했다. 스탈린이 다시 의식을 잃고 눈을 감자 베리아는 벌떡 얼어나서 침을 뱉았다. 이것이 베리아의 참모습이었다. 그가 존경하고 숭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스탈린까지 배반하여 이제 그의 얼굴 위에 침을 뱉고 있는 것이다.
3월 5일 21시 50분, 마침내 스탈린의 심장이 박동을 멈췄다.
위대한 지도자의 마지막 모습
스탈린이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채 거대한 제국을 유산으로 남기고 사라지자, 독재자의 주변을 맴돌던 난장이들이 권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지도자의 장례식에 관한 사항을 결정하기 위한 간부회의 석상에서 그들은 "단결하자", "레닌의 지도하에 굳게 뭉치자!", "레닌과 스탈린의 사업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자." 등등의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메아리가 가시기도 전에 바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 권력장악 -
스탈린에게서 해방된 후계자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옹립하기 위해 서둘지 않았다. 그들은 독재에 완전히 지쳐 있었다.
1953년 3월부터 9월까지 흐루시초프는 단지 중앙위원회의 1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니키타는 결코 현재의 상황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첫번째 타겟은 바로 베리아였다.
베리아는 내무인민위원회라는 철권을 휘두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로 이점이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흐루시초프는 베리아 거세를 위한 음모를 비밀리에 꾸몄다. 평소 NKVD를 두려워하던 동료들은 순순히 흐루시초프의 의도를 따랐다. 상황이 무르익자 각료회의가 소집되었다.
말렌코프는 개회선언과 함께 발언했다.
"니키타 무슨 일이요?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거요?"
"당신은 그냥 듣기만 하시오! 곧 알게 될테니.."
흐루시초프는 곧 베리아가 영국 정보부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엉터리 주장을 의기양양하게 늘어놓았다.
"그는 여러 소비에트 공화국의 당사업에 간섭하였다. 소비에트 인민의 단결을 분쇄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며 티토와 장난을 쳤다. 독일 민주공화국 내부에 비합리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기도했다."
횡설수설하던 흐루시초프는 결국 베리아가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모두가 흐루시초프와 굳게 단결하여 발언하자 말렌코프는 투표를 통해 사안을 의결하자고 주장했다. 그때 문이 열린후 주코프를 비롯한 여러 장군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진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하던 말렌코프는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의 자격으로 고소한 혐의사실에 대한 심리가 끝날 때까지 베리아를 체포하여 무장경비대의 감시하에 둘 것을 제안합니다."
"손을 드시오!" 주코프는 새파랗게 질린 베리아에게 명령했다.

감금된 베리아는 말렌코프와 흐루시초프, 그리고 모든 간부회의 멤버들에게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게오르기.
간부회의에서의 그 엄청난 비판으로부터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취해야만 할 그 어떤 결론을 얻었고,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해 유용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중앙위원회는 다른 방식으로 결론을 내렸고, 나는 중앙위원회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해야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항상 레닌-스탈린 당과 우리 조국에 무한한 충성을 바쳐 왔으며, 항상 내가 할 일을 적극적으로 해왔습니다. 업무의 성격에 맞게 요원들을 선출하려 노력했으며 이는 곧 제 1순위의 주요 사업으로서 특별위원회가 관계하고 있었으며.. 그 다음오르논 국소적인 사업과 기관요원 배치를 위한 업무에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말렌코프, 몰로토프, 바체슬라프, 보로실로프, 흐루시초프, 카가노비치, 불가닌, 미코얀..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친애하는 동지들. 레닌-스탈린의 사업에 큰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게오르기. 부탁이 있소. 만약 당신과 친분이 있는 나의 가족과 아들 세르게이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면, 무관심 속에 방치해 두지는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1953년 6월 28일, 라프렌티 베리아
흐루시초프가 모든 종이를 압수하도록 명령할 때까지, 2주 내내 베리아는 편지를 쓰고 또 썼다.
그러나 크렘린의 지도자들은 두터운 입술에 안경을 쓴 변덕쟁이를 한시바삐 사형시켜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감옥에 있어도 여전히 베리아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재판관들은 베리아의 여성편력을 파헤쳤다. 여러 보고서에서 베리아가 어린 소녀들과 처녀, 그리고 유부녀들을 강간해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베리아는 마지막 순간까지 애원하였다.
보십시오. 나는 아직 한 10년은 충분히 일할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 정성과 정력을 담고 말입니다. 2~3년이 지난 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것이고 당신들에게 유용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당신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숨을 거둘 때까지 우리의 사랑하는 당과 우리의 소비에트 정부에 충성할 것입니다.
라프렌티 베리아. 빛도 흐리고 안경도 없고. 그래서 졸필이 된 나의 편지를 이해해 주시오. 동지들.
대답은 총살 선고였다.
베리아 제거의 1등공신인 흐루시초프는 공산당 제1서기 자리에 올랐다. 주코프도 중앙위원회 후보자리를 떠나 정식 회원이 되었다.
마침내 흐루시초프가 소련 체제의 정상에 서게 되었다.
- 집단지도체제 -
베리아를 처치하고나서야 소련의 지도부는 자유롭게 숨을 쉴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 소비에트 연방의 권력을 당과 국가로 나누었다. 말렌코프는 정부를 흐루시초프는 당을 맡게된다.
스탈린이 죽기 직전까지 말렌코프는 명백한 2인자였으며, 그가 스탈린의 신임을 받는 후계자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었다. 따라서 스탈린이 죽은후 말렌코프가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자리를 꿰어찬 것에는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베리아와 친밀한 사이였던 말렌코프는 흐루시초프의 베리아 제거 음모에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1953년말에는 이미 중요한 결정사항에 대해서 각료회의 의장인 말렌코프 뿐만 아니라 중앙위원회 제1서기인 흐루시초프의 인가도 받아야 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다.
흐루시초프는 점차 당의 역할을 강화함으로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려했다.
크림 반도를 양도하여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수립하는 문제에 있어서 흐루시초프는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1953년 12월 이 문제를 놓고 말렌코프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치자 제1서기는 각료회의 의장에게 명령조로 제의했다.
"이런 결정을 오래 끌지 맙시다. 조만간 열릴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문제를 논의해 봅시다."
말렌코프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흐루시초프의 선심은 소련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크림반도를 놓고 영토분쟁을 벌이는 원인을 제공했다.
- 스탈린을 떠나다! -
베리아의 제거는 스탈린 체제를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이제 대숙청의 뒷정리를 할 때가 되었다.
대원수의 죽음 이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편지가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죄인들은 자신의 억울함이 재검토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흐루시로프는 이들이 친척과 면회도 거절된 상태로, 1년에 단지 두차례의 편지만 쓸수 있었음을 알았다.
강제수용소 여기저기로 동요의 물결이 쳤다.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셰로프 등은 이 모든 것들을 내무인민위원회가 독자적으로 처리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흐루시초프는 생각이 달랐지만 아직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밝힐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1956년 2월 14일 크렘린에서 제 20차 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평상시와 별다를바 없이 진행되었다. 레닌의 방침에 대한 승인, 요란스러운 기립박수, 당과 인민의 단결을 강화하자는 호소 등등.
2월 25일 아침에 열린 회의에서 흐루시초프는 마침내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해서'라는 놀라운 보고서를 낭독했다.
4시간여에 걸친 이 연설을 듣고 참석자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스탈린 격하연설로 역사에 기록된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어떻게 자백을 받아왔는가? 단지 하나의 방법만이 존재했었다. 구타하고 고문하고 의식을 빼앗고, 분별력을 잃게하고.. 물리적인 탄압과 강제를 동원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함으로써...
스미르노프는 스탈린을 치료했다. 그리고 그는 체포당했다. 그런일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정치국원들은 각자 다른 시기에 다른 관점에서 스탈린을 바라보았다. 처음 시기에는 의식적으로 스탈린을 찬양했다. 왜냐하면 스탈린은 실제로 위대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그의 논리성과 힘, 그리고 의지는 당을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형벌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 사람은 사상적으로 육체적으로 쇠약해졌다.
흐루시초프는 드디어 스탈린을 부정하고 걷어차버렸다.
- 1957년의 반당그룹 음모 -
1957년 여름 몰로토프, 말렌코프, 카가노비치는 비밀리에 흐루시초프 축출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보로실로프와 불가닌, 페르부힌, 그리고 사부로프가 이들의 입장을 지지했다. 투표권을 가지지 못한 간부회의 후보들은 이 모임에 초대되지 못했다.
1957년 6월 18일, 크렘린에서 최고간부회의가 시작되었을 때 몰로토프와 말렌코프는 느닷없이 제1서기직에서 흐루시초프를 쫓아내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간부회의에 대한 무시, 경제관련 분야에 대한 무지, 충동적이며 짧은 생각에 치우친 행동 등등을 제시하며 흐루시초프를 비난하였다.
서로에 대한 비난과 모욕이 오가며 격렬하고 분노에 가득찬 논쟁이 불타올랐다. 키릴렌코(Kirilenko), 미코얀, 수슬로프 그리고 간부회의 후보들이 흐루시초프를 지지했다. 마침내 몰로토프는 이 사안을 투표에 붙였고 7대 4의 결과로 '제1서기직에서 흐루시초프의 경질'이라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제1서기는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본인은 이러한 결정에 굴복할 수 없소. 본인을 선출한 것은 중앙위원회 총회이며, 따라서 오직 총회만이 본인을 경질할 수 있소. 총회를 소집하시오.
몰로토프는 흐루시초프의 논거에 정면으로 맞섰다.
우리 또한 총회에서 선출되었소. 그리고 우리는 총회의 이름으로 지도부의 개편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소.
간부회의는 6월 19일에도 계속되었으며 몰로토프는 제1서기직 자체를 없애버리자고 제안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안 흐루시초프와 절친한 KGB 의장 셰로프와 레닌그라드 제1서기 코즐로프 등에 의해 지방의 중앙위원회 구성원들이 모스크바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간부회의를 주도하던 불가닌은 이들에게 "문제는 다 해결되었으며, 더이상 이를 지연시킬 이유가 없다."라고 설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군부와 경찰을 대표하는 주코프와 셰로프가 "지도부에 대한 문제를 간부회의에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시오."라는 말을 하여 불가닌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크렘린에서 중앙위원회 임시총회가 열렸다.
60명이 연단에 나가 자신의 의견을 밝혔으며 그들 모두 흐루시초프를 지지했다. 이들은 몰로토프들의 결정이 스탈린 시대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몰로토프와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등도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청중들은 발표자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거친 항의와 질문이 쏟아졌으며 반당그룹에 대해 살인적인 평가가 내려졌다. 속기록에 따르면 말렌코프는 연설하는 동안 질문과 고함으로 117차례나 발언이 중단되었으며, 카가노비치는 112회, 몰로토프는 214회 발언이 중단되었다.
이들중 오직 몰로토프만이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지켰다. 나머지 사람들은 차츰 주장을 번복하고 과오를 인정했으며, 분파적 행동의 범죄성까지 인정하였다.
주코프는 다음과 같은 연설로 반당분자들에게 일침을 날렸다.
1938년 11월 21일, 내무인민위원회는 229명의 총살형 집행에 관해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승인을 받았다. 그 가운데 중앙위원회 정-후보 구성원이 23명, 당 통제위원회 성원 22명, 지역위원회 서기 12명, 인민위원회 성원 21명, 인민위원부 직원 136명, 군인 15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과거의 숙청에 대해서는 흐루시초프도 떳떳하지 못했음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때로는 적반하장격의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이에 말렌코프는 "흐루시초프 동지! 당신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찔리는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겁니까?"라고 일침을 날렸다.
반당그룹의 진술이 진행되는 동안 회의장에서는 계속 야유가 쏟아졌다.
"끔찍한 일이다!. "잔인한 사람들!", "사실이 아니다!",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마시오!"
카가노비치는 자신의 최후 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 모두는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비판받고, 그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 의해 비판되는... 나는 커다란 아픔을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스탈린을 좋아한다.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스탈린을 좋아한다.
흐루시초프는 이 모든 소동을 조용한 목소리로 잠재웠다.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오!"
결국 총회는 몰로토프,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그리고 셰필로프에 대한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구성원 자격을 박탈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5명의 후보들이 새롭게 간부회의 멤버가 되었다.

1964년의 흐루시초프
- 통치 -
공산주의는 풍요롭게 담을수 있는 술잔이오. 그것은 항상 가득 채워져 있어만 하오. 각각의 사람들은 그곳에 자신의 공헌을 담을 수 있으며 또한 각각의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이 퍼낼수도 있소. 과학적인 전망에 따라 우리는 엄격한 지도를 받게 될 것이오. 이런 사고들은 20년동안 우리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여 왔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오.
1961년 10월 18일 제 22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연설
흐루시초프의 과학적인 전망에 따르면, 이후 10년동안 소련은 1인당 생산량에 있어 미국을 월등하게 능가할 것이며 그 10년간의 결산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완성하게 될 것이었다. 당은 모든 인민을 위해 물질적, 문화적 부의 풍성함을 보장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공산주의의 완성을 위한 흐루시초프의 계획과 개혁은 끝이 없었다.
제1서기는 일단 농업에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1949년부터 53년까지 곡물수확량은 심각하게 감소했다. 어떤 곳에서는 1헥타르당 불과 800kg의 곡물을 수확했다.
|
연도 |
조달 |
지출 |
7월 1일 국가비축량 |
|
1940 |
36.4 |
35.1 |
4.1 |
|
1941 |
24.3 |
23.0 |
5.4 |
|
1942 |
12.5 |
11.0 |
7.0 |
|
1943 |
12.3 |
14.9 |
5.6 |
|
1944 |
21.6 |
16.2 |
2.8 |
|
1945 |
20.0 |
22.0 |
8.2 |
|
1946 |
17.5 |
18.9 |
6.1 |
|
1947 |
27.5 |
21.7 |
4.7 |
|
1948 |
30.2 |
23.9 |
10.5 |
|
1949 |
32.1 |
28.0 |
13.9 |
|
1950 |
32.3 |
30.5 |
16.0 |
|
1951 |
33.6 |
32.9 |
16.3 |
|
1952 |
34.7 |
34.0 |
17.3 |
|
1953 |
31.1 |
37.3 |
17.8 |
스탈린은 소련의 산업화 과정에서 농업을 공장을 짓는 자원을 조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농업 생산물의 잉여분 비축을 중시하고 개인들이 집단농장의 곡식을 빼돌리는 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는 법령을 제정하여 국가비축량을 급격히 늘렸다.
반면 흐루시초프는 농업 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하여 공업을 통해 얻어진 재원을 농업부문에 투자하였다. 그는 이윤과 제조원가, 수익성 등 다양한 요인을 분석하여 농촌의 경제력 향상을 위한 일련의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 정부는 집단농장의 기계화와 관개 시설의 정비, 비료 생산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였으며 농촌 지역에 사회간접자본을 대폭 확충했다. 또한 집단농장의 농업 노동자들 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농산물 수매 가격을 지속적으로 인상하였고 정부 공출량은 낮게 책정했다.
제1서기의 혁신적인 농업정책은 집단농장의 수익이 1950년부터 57년까지 3배나 증가하는 대성공으로 돌아왔다.

아이젠하워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을때 흐루시초프는 오하이오의 넓은 옥수수밭 지대를 둘러보기를 희망했다. 그는 미국의 옥수수 농업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고, 거스트씨 소유의 농장을 방문했을때 소련의 토양이나 기후와 별다를바 없는 땅에서 어떻게 이런 놀라운 수확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이후 대표단이 모인 자리에서 흐루시초프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그러나 제1서기에게는 불도저같은 추진력이 있었다. 흐루시초프는 토질과 기후를 고려하지 않고 각지에 옥수수를 재배하도록 지시하였다.
1958년에 소련의 연구소는 3,200개에 연구원은 28만 명에 달했다. 엔지니어 출신의 제1서기는 소비에트 연방의 과학기술 발전이 결국 산업생산의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우선 기계를 사용한 자동화가 추진되었다. 새로운 공장이 건설되고 체계적인 교육 훈련에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1956년부터 58년까지 3년간 480만건에 달하는 아이디어들이 생산에 도입되어 250억 루블 이상을 절약하는 효과를 얻는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인민들의 생활도 점차 개선되었다. 실업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은 하루 7시간 내지 6시간으로 단축되었으며 토요일과 축제일 전날의 근무 시간도 두시간이 단축되었고, 미성년자에 대해서는 6시간 노동제가 제정되었다. 중고등 교육기관의 수업료도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1956년 7월에는 국가연금법이 제정되어 1,800만 명이 연금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흐루시초프는 공산당 제 22차 전당대회의 결산보고를 통해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그러나 제1서기의 눈부신 성공 뒤에서 점차 실패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실패의 원인은 제1서기의 개혁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나태하고 무능한 관료와 과거 스탈린 시대의 어두운 유산에 있었다(고 흐루시초프는 생각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처럼 모든 면에서 일단 통계상으로 미국을 따라잡고 앞지르자라는 생각에 가득차 있었다.
1957년 봄 흐루시초프는 고기와 버터, 우유의 1인당 생산량에서 미국을 따라잡고 앞지르자라는 슬로건을 부르짖었다. 제1서기의 야심찬 계획은 1970년까지 달성될 예정이었다.
흐루시초프는 개인목축업의 축소와 사회적 역할의 강화를 통해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마침내 1958년 8월 20일 '도시와 노동자 부락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개인소유 형태 가축경영 금지에 관하여'라는 법령이 채택되었다.
이처럼 다듬어지지 않고 즉흥적인 법령이 실행된 결과 고통스러운 결과를 빚었다. 축산품의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시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이에 흐루시초프는 1962년 3월 31일 '육류로 만든 생산품과 버터의 가격인상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여 자신의 실수를 간접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잡고 앞지르자!'라는 무분별한 구호가 파산 상태에 이른 것이다.
1962년 6월 1일부터 3일까지 노보체르카스크의 전기기관차 제조공장 노동자들은 '고기와 우유의 공급, 급료의 인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파업에 나섰다.
특수부대의 보고에 따르면 이미 유포된 '간첩공작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슬로건인 '고기, 우유, 급료의 인상'의 반사회적이고 범죄적인 요소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 세미차스트니의 중앙위원회 보고 -
시당위원회 근처에서 시위대와 경찰간의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경찰의 발포로 23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했다. 시위 진압후 KGB가 주도한 공개재판에서 7명의 범죄자가 사형을 선고받았다.
흐루시초프의, 흐루시초프에 대한 글이 가득한 프라우다지를 읽는 모스크바의 연금생활자
제1서기겸 각료회의 의장은 무수히 많은 강연을 했다. 당대회, 총회, 위원회, 다양한 활동가들의 모임, 학술회의, 소비에트 회의... 모든곳에 흐루시초프가 얼굴을 들이밀고 옥수수 도입의 중요성, 우주개발의 발전 전망, 건축술과 로켓개발, 문예작품과 당면한 국제 정세에 대해서 수다를 떨었다.
그는 자신에그는 국가의 모든 영역에 대해 훈계하고 결정할 권리와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훈계는 때때로 다른 나라들에게도 행해졌다. 가령 1969년 유엔을 방문했을 때 제1서기는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연설을 했다.
흐루시초프의 발언은 보통 준비된 연설문을 무시하고 특유의 무례한 언어로 시작되곤 했다. 다른 연설자의 말을 가로채거나 야유를 보내고 연설 도중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다. 그는 자신이 연설가로서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소비에트의 모든 신문들에 매일같이 그의 강연이나 기자회견, 혹은 연설들이 가득찼다.
온갖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제1서기에게 가장 집중력을 발휘하게 했던 분야가 바로 군사력, 특히 로켓과 핵무기 설비였다. 그는 종종 방산업의 엔지니어들이나 과학자, 무기 생산공장의 책임자들을 면담했다. 군사부문에 있어서 흐루시초프는 우쭐할 자격이 있었다. 제1서기는 우주계획이나 무기 연구를 위한 투자를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모든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다.
소비에트 연방은 1956년 6월에 산업용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하기 시작했으며 1957년 10월에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했다. 소련 과학기술의 결정체인 스푸트니크는 흐루시초프 시대의 아이콘이 되면서 인민들의 자부심을 한껏 고조시킨다. 세계가 깜짝 놀랐고 미국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1961년 10월 17일 제 22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한껏 자랑할 수 있었다.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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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나중에 원고비는 받았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