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ights Templar

성당기사단(Knights Templar, Order of the Temple)은 공식적으로 해산된지 700년 가까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무수한 문학 작품과 전설에 등장하고 있다.


history became legend, Legend became my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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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lar of Starcraft - 정신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프로토스족의 유닛 'High Templar'


제 1차 십자군 원정으로 1099년 예루살렘(Jerusalem)이 기독교계의 수중에 들어온 이후 십자군들은 종교적 열정을 잃고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버린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여전히 무슬림들 사이에 포위된 상태였다. 수많은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성지를 찾았지만, 예루살렘 중심부를 제외하고는 치안이 좋지 않아서 도적들에게 금품을 갈취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1118년 십자군 원정의 베테랑이자 프랑스의 기사였던 위그 드 파옌(Hughes de Payens)은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사단의 창설을 제안하였고,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볼드윈 2세(Baldwin II)와 기타 동지 8명이 파옌의 뜻에 동의하여 서약을 맺는다. 이들은 본부를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사원(Al Aqsa Mosque)에 두었고, 알 아크사 사원은 솔로몬(Solomon)왕의 신전이 있었던 자리라는 설이 있었기에, 기사단은 공식 명칭을 '주님과 솔로몬 신전의 가난한 신도 병사들(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olomonici)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들을 부르는 또다른 이름으로 ‘청빈의 성당기사단(pauvres chevaliers du temple : Poor Knights of the Temple)이라는 명칭이 있었는데...

이름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가난했기 때문에 자선이나 구걸에 의지해 생계를 꾸렸다.


성당기사단의 표식(Sign)은 말 한마리를 함께 탄 두 기사의 모습인데, 이것은 기사단의 가난한 모습을 상징하였다.(아이러니하게도 이 모습이 이후 이단 재판에서 동성애를 상징한다고 고발된다.)


또한 9명에 불과한 인원으로 실질적인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요르단 둑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이 시기 까지 성당기사단에는 아직 뚜렷한 관습이나 규약이 없었다. 
 

Grand Master 위그 드 파옌(Hughes de Payens)은 기사단 설립후 서유럽에서 강력한 여러 후원자들을 얻는데 성공한다. 게다가1128년 트루아(Troyes) 회의에서 교회도 이들을 공식 인정하였다. 자금과 영토가 이들에게 주어졌고, 유럽 각지의 귀족 자제들이 기사단에 가입하여 성지 수호의 임무에 동참하였다. 

1139년 이들에게 치외법권을 인정해 준다는 내용의 교황령이 발효되면서, 이후 이들은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되었고 교황령 이외의 어떠한 법으로도 규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성당 기사단은 빠르게 성장하였다. 기사단의 전사들은 당시 최고의 장비들로 무장하였으며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 성당기사단원들은 십자군 원정의 주요 전투에서 최선봉을 담당하였으며 이들의 돌격은 적의 전선을 돌파하는데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였다. 그러나 최전선에 선 단원들의 수는 전체 성당기사단원들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대다수의 단원들은 기사들에 대한 지원과 헌금으로 재정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의 일을 수행하였다.

예를 들어 성당기사단은 순례자들에게 수표를 발행하여 이들이 직접 금품을 지니지 않고도 자국과 성지 사이에 있는 은행을 통하여 자금을 입출금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사상 최초의 수표 제도로 알려지고 있으며, 도적들이 순례자의 금품을 노리지 못하게끔 하는데 일조하였다.


성당기사단의 정직과 신뢰는 널리 퍼졌다. 이들은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지만 공정하게 다루었고, 개개의 단원들은 자선활동에 힘썼으며, 사기와 기만 행위는 최고 사형으로 다스려졌다. 귀족들조차 원정에 참여할때 이들에게 자신들의 재산과 토지를 맡길 정도가 되었다. 성당기사단은 이렇게 축적된 부를 통하여 유럽과 중동 각지에 많은 교회와 성채를 건축하였고, 농장과 포도밭을 구매하여 생산 활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이렇게 생산된 농작물들을 자체 함대와 상선을 통하여 교역하였다. 이들의 재정 네트워크는 전 기독교 국가에 걸쳐 구축되었으며, 이는 최초의 국제적 은행 조직이 되었다.


Saladin II

그러나 살라딘(Saladin)과 같은 유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연합한 무슬림들은 수차례의 전투를 통하여 결국 1187년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성당기사단은 본부를 북부로 이동시켜야 했으며 영토를 잃고 점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아크레(Arce)로 이전한 이들의 본부는 1291년 함락되었고, 결국 성당기사단의 중동 내 영토는 해안가로 국한되게 되었다.


성지를 잃고나자 성당기사단의 일차적 존재 이유가 사라졌다. 유럽 각국의 지원은 줄어들어갔고 성당기사단은 2백여년 간의 활동을 뒤로하고 유럽에서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들은 각국 정부에 자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사업도 하였지만 사실 이들은 어떤 정부의 소속도 아니었기에 세금을 내지 않았고, 각국 정부는 점차 이들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성당기사단을 둘러싼 여러 소문들이 생겨났고, 특히 이들의 비밀스러운 의식은 악마숭배나 신성모독의 오해를 사게 되었다.

교회는 이들에게 구호기사단(Hospitaller)과 합병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두 기사단 모두 이를 거절하였다.

1285년 왕좌에 오른 프랑스 왕 필립 4세(Philip IV)는 자신의 재정을 충당하고자 성당기사단에 대한 뜬소문을 이용하였다. 그는 영국과의 전쟁으로 이미 성당기사단에 많은 부채를 진 상태였으며, 교회를 압박하여 성당기사단을 부정하게끔 하였다. 또한 필립 4세는 교황 보니파체 8세(Boniface VIII)를 납치하기도 하였고, 자신의 수족인 기욤(Guillaume de Nogaret)을 통하여 교황 베네딕트 11세(Benedict XI)를 독살하였다고도 한다.


베네딕트 11세 사후 추기경들은 콘클라베(conclave)를 통하여 1305년 필립의 오랜 친구인 베르트랑(Bertrand de Goth)을 새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로 선포하였다.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13일의 금요일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는 이 날에 필립은 성당기사단들에 대한 체포령을 발부하였다. 수많은 성당기사단원들이 이곳 저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체포되어 이단의 죄목으로 신성 모독을 인정할 때까지 고문을 받았다. 필립은 유럽의 다른 국왕들에게도 체포에 동참하라며 압박하였지만, 이를 정면으로 거부한 영국왕 에드워드 1세(Edward I)는 물론 다른 국왕들은 이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립의 설득에 굴복한 교황은 11월 22일 교황령(Pastoralis Praeeminentiae)으로 전 유럽 내에서 성당기사단원들을 체포하고 이들의 재산을 몰수할 것을 명령하였고, 전 유럽에서 수많은 성당기사단들이 체포되었지만 이들이 유죄라는 어떠한 혐의도 찾지 못하였다.

성당기사단에게 씌워진 혐의중 가장 큰 것이, Baphomet라고 불리는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인데...

공정왕 필립(Philip the Fair)의 증언에 따르면 "성당기사단원들은 자신들의 예배당에서 긴 턱수염을 기른 사람의 두상에 대고 입맞추며 숭배하였다. 하지만 모든 성당기사단원들이 이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기사단장과 고위 관료 몇몇만이 알고 있었다." 라고 한다.


Baphomet

어쨌든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낸 필립은 수많은 성당기사단원들을 말뚝에 묶어 화형에 처하였다.

1312년 교황 클레멘트는 빈 회의(Council of Vienne)에서 성당기사단을 공식적으로 폐기하였다. 3월 2일 교황의 칙령에 따라 기사단은 공식 해체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뒤따른 칙령에 의하여 성당기사단의 자산은 구호기사단에게 넘겨졌지만 이 자산중 일부는 전직 성당기사단원들의 연금으로 제공되었다.


화형당하는 Templar

1314년, 단장 자크 드 모레이(Jacques de Molay)와 기사단 지도부가 파리(Paris)에서 산채로 화형을 당하였다. 생존자들은 체포되거나 교황의 재판을 받았고, 일부는 구호기사단과 같은 타 군사 조직으로 흡수되었으며, 스코틀랜드와 같이 교황의 세력권 밖으로 도주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유럽 전역에서 수천명에 달하였던 성당 기사단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으며, 이들의 자산 목록과 거래 장부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성당 기사단의 규율은 이들의 후원자였던 세인트 버나드(Saint Bernard of Clairvaux)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다. 각국에는 성당 기사단을 관장하는 지부장(Master)이 한명씩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단장(Grand Master)으로부터 임명을 받았다. 단장의 임기는 종신이었으며, 이들은 동부의 군사활동과 서부의 경제활동을 동시에 관장하였다.

성당 기사단은 다음의 네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 기사(knights) : 중무장 기병대.
2) 사관(sergeants) : 기사보다 사회 계급이 낮은 경기병대.
3) 수사(serving brothers) : 기사단의 재정적인 활동을 전담.
4) 군종(chaplains) : 기사단 내부의 사제단.


기사들은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흰색 로브(robe)를 걸쳤으며, 나머지 단원들은 검정 또는 갈색의 외투를 입었다. 각각의 기사들은 약 10명의 종자를 대동하였다.


Cross of the Knights -  Templar의 상징


성당기사단에의 가입은 비밀 의식을 수반한다. 이 의식에 대한 내용이 거의 알려지지 않다보니 중세 종교재판관들은 여기에 많은 의혹을 가지기도 하였다.

기사단 가입을 위해서는 귀족 출신이어야 했으며, 귀족의 자제라도 서출이어서는 곤란하였다. 가입을 희망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와 재산을 기꺼이 기사단을 위해 헌납할 수 있어야 했으며, 검소, 금욕, 신앙, 그리고 복종의 덕목을 준수해야 했다.


성당기사단원들은 추기경령으로 항복이 금지되었다. 이 단호한 원칙은 단원들의 용기와 혹독한 훈련, 그리고 강력한 무장과 더불어 이들을 당시 가장 가공할 전력으로 인식되게끔 하였다.


성당기사단은 수많은 고대 비밀과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 묘사되어왔다. 이러한 소문들은 이들이 활동할 당시에도 있어왔으며 이후 프리메이슨(Freemason) 작가들의 상상력이 더해지고, 근대에 접어들어 소설과 영화 등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또한 이들의 몰락 이후 수많은 단체들이 이들의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프리메이슨은 1700년대부터 성당 기사단과 유사한 상징과 의식을 행하였으며, 성당기사단이라는 명칭도 사용하곤 하였다. 그 외에 예루살렘 기사단(Sovereign Military Order of the Temple of Jerusalem) 등의 단체에서 계승을 자처하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단체들과 성당기사단의 사이에 놓인 4백년이라는 시간 공백을 잇는 어떠한 역사적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FreeMason 입단식

성당기사단에 대한 전설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들이 예루살렘에 본부를 두었을 당시 성배(Holy Grail)나 성궤(Ark of the Covenant)를 입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이러한 신물을 소유하였는지의 여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많은 교회들이 성자의 유골이나 성인이 걸쳤다던 천조각, 심지어는 악마의 해골 따위를 전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성당기사단 또한 어느정도 그러한 신물 또는 신물로 믿어지는 물품들을 소지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신물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들로, 운명의 창(Spear of Destiny)이나, 예수를 못박았던 십자가 조각(a Piece of the True Cross), 성배 등이다. 1180년 '성배 이야기(Le Conte du Graal)'에 처음 성배를 등장시킨 크레티앙 드 트루아(Chretien de Troyes)는 성당기사단이 정식 인가된 그 트루아 출신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갈라하드 경(Sir Galahad)이라는 영웅이 성당기사단과 유사한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이로 인하여 성배와 성당기사단의 연계에 대한 전설이 생겨났다.

그러나 성당기사단이 성배를 보유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다만 마지막 단장 자크 드 모레이 사후, 그와 가까이 지냈던 제프리(Geoffrey de Charney)라는 사람의 후손이 1357년 튜린의 수의(Shroud of Turin)를 공개하였다. 그러나 이 수의 역시 진품이라는 증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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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기사단 이단 재판에 관한 증언들 -

"아비뇽은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의 권좌였다. 클레멘트 5세는 1305년에 리용(Lyons)에서 교황 위에 올랐으며, 당시 프랑스는 필립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1307년 전체 기독교 국가에서 성당기사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클레멘트 5세였다. 필립 왕이 즉위한지 (1306년) 일년이 안되서 성당기사단을 박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또한 그 해에 필립왕이 이 일을 교황 클레멘트와 상의했다는 몇몇 증거들도 있다."

- Graham Hancock, The Sign and the Seal


"프랑스의 공정왕 필립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기독교 제국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강한 재력이 필요하였다. 그는 먼저 자신의 왕국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붙잡아 그들의 한쪽 눈을 없애서 미래를 포기하게 하였으며, 다른 한쪽 눈마저 없애겠다고 위협하였다. 다음으로는 성당기사단의 재산을 약탈하려는 시도를 행동을 옮겼다."

- Peter Tompkins, The Magic of Obelisks


자끄 드 몰레이는 마지막 성당기사단장이었다.
“1307년 10월 12일 목요일 밤, 필립 왕의 군대는 몰레이와 60명의 동지들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다. 필립 왕은 이들을 체포하여 몇몇은 왕실 감옥에 가두었고, 다른 자들은 성당기사단의 자체 감옥에 가두었다.”

13일 금요일 아침까지는 일만 오천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에는 기사들도 있고, 군목도 있었으며 일반 군인들과 종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심지어 성당기사단에서 고용한 일반 노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정식 기사단원이었던 자는 채 500이 안되었다.

주말 경에는 벌써 대중 설교자들이 성당기사단이 프랑스 전역에서 대중들을 겁에 질리게 한다고 비난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체포는 불법적이었다. 공권력은 성직자들을 체포할 수 없었으며, 성직자들은 단지 로마 교황청에만 제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필립은 성당기사단에 대한 몇가지 죄목들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으며, 동성애를 했다는 것 등이었다.


프랑스에서 성당기사단에 대한 심문은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담당했다. 이들은 당시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는데 아주 능숙하였다. 비교적 교육을 덜 받은 형제단원들은 반대심문에 능숙한 법률가들과 손톱을 뽑고 사지를 늘여뜨리는 고문기구들로 가득찬 고문실을 직면하게된 것이다.

성당기사단원들은 사지를 길게 늘려 고문대에 묶인 뒤 무거운 납덩이에 눌리거나 혹은 질식하기 직전까지 목구멍으로 물이 부어지곤 했다. 또한 ‘발바닥을 태우는’ 고문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가장 심한 고문은 오히려 가장 간단한 고문이었던 듯 하다. 즉 손톱위로 망치를 내리 찍고, 이빨을 잡아뽑아 드러난 신경을 찔러대는 것 등이다.

성당기사단원들은 십자군 전쟁에서 무슬림들의 고문에도 꿋꿋이 버텨냈었지만, 동료 기독교인들이 그들에게 가한 이러한 고문에는 그만 절망하고 말았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보니파체 8세(Boniface VIII)와 프랑스의 공정왕 필립 사이의 다툼은 중세시대의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긴장과 관련이 있다. (당시 보니파체 8세는 1302년 교회권력이 국가권력의 우위에 선다는 것을 교서를 발표하자, 필립 왕이 이에 반기를 들고 교황을 처단하려 나선 것이다.) 필립 왕의 명을 받고 길라모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라는 이름의 프랑스 관리가 소규모의 사병을 이끌고 교황을 체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들은 교황을 프랑스로 데려와서 프랑스가 관할하는 교회에서 재판을 받게 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불발로 끝났으며, 이 일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교회법에 의해 파문당하게 되었다. (보니파체 교황이 죽고 후임자인 베네딕투스 11세에 의해) 필립 왕의 파문은 곧 취소되었지만, (교황을 직접 체포하려 했던) 노가레의 경우는 파문이 취소되지 않았다.

필립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죽은 보니파체 8세가 이단, 불신자, 마술사이며, 마녀들을 보호했었다는 비난을 퍼부어댔다.

성당기사단의 재판과정에서 가장 모순적인 것은 바로 그 재판 전체를 관할했던 관료, 즉 길라모 드 노가레가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추방당한 인물이라는데 있었다."

- Peter Partner, The Murdered Magicians

이와 대조적으로 성 베르나르도 영적인 완전성으로 가기 위한 단계를 묘사하기 위해 성스러운 “세 번의 입맞춤”이라는 상징을 사용하였다. 성당기사단의 입문의례에서 남색혐의를 받았던 입맞춤이라는 것이 당시에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그런 것은 중세시대 주군과 가신 사이의 충성의 서약과 거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서약을 할 때 가신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주군의 손을 맞잡고 선언한다. “주인님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충성의 서약을 한다. 그러면 주군은 그를 일으켜 세운 뒤 의례상에 정해진 대로 입맞춤을 해준다. 이렇게 되면 가신은 “주군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해야 하며, 주군이 싫어하는 것은 그도 싫어해야 하며, 말로든 행동으로든 결코 그를 슬프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 Noel Currer-Briggs, The Shroud and the Grail - A Modern Quest for the True Grail


성당기사단에 뒤집어 씌워진 온갖 혐의들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신성모독과 이단 혐의였다. 즉 십자가를 부정하고, 짓밟고 그 위에 침을 뱉았다는 것이다.

- Baigent, Leigh & Lincoln, The 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1311년 6월 영국의 심문관들은 스테판 드 스트라펠브루게(Stephen de Strapelbrugge)라는 한 성당기사단원에게 아주 흥미로운 정보를 듣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성당기사단으로 입문할 때 예수는 그저 사람이지 신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존 드 스토케(John de Stoke)라는 이름의 다른 기사는 자끄 드 몰레이가 자신에게 예수는 그저 사람일 뿐이며, 하늘과 대지의 설계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어야지, 십자가에 못박힌 자를 믿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고 진술했다.

- Christopher Knight & Robert Lomas, The Hiram Key: Pharaohs, Freemasons and the Discovery of the Secret Scrolls of Jesus


성당기사단에 대한 심문 끝에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죄목이 밝혀졌다.

- 새로 입문하게 되는 자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때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부정하고, 때로는 예수를 부정하고, 때로는 하느님을 부정하고, 때로는 성모를 부정하고, 때로는 주님의 모든 성인들을 부정하였도다.
- 이들은 기사단 전체의 이름으로 이러한 짓을 했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그러한 죄를 저질렀도다.
- 그들은 입문의례를 받은 뒤에 이러한 짓을 했으며, 신참자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 혹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진실된 신이 아니라고 배웠다고 말하였다.
- 그들은 예수가 거짓 사도라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였다.
- 또한 예수가 고통을 받지도 않았으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지도 않았으며, 단지 자신의 죄 때문에 그리 되었노라고 말하였다.
- 이들은 십자가에 침을 뱉거나 혹은 십자가의 조각 혹은 그리스도의 그림 위에 침을 뱉았다. 또한 십자가를 발밑에 놓고 깔아뭉개기도 하였다.
- 이들은 심지어 십자가 위에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성당기사단 고발문 요약]


“여지껏 알려진 모든 고문 방법을 동원하라”

심문관들은 ‘여지껏 알려진 모든 고문 방법을 동원하라’는 엄명을 내렸고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이 넘치는 데로 무엇이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몇몇 성당기사단원들은 질문을 하나 받을 때마다 이빨이 하나씩 뽑혀나갔으며, 이빨이 뽑혀나간 자리에는 다시 고문이 가해졌다. 한쪽 손톱 밑으로는 나무못을 쑤셔대었으며, 다른 쪽 손톱은 뽑아버리곤 했다. 가장 자주 쓰던 방법은 침대처럼 생긴 강철 판에 성당기사단원을 맨발로 거꾸로 누인 다음에 불에 달군 숯을 기름 바른 발 위로 미끄러트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 끝에 몇몇 기사들의 경우는 미쳐버리기까지 했다. 또 많은 기사들은 발이 다 타버려서 마지막 심문 때는 발이 없는 기사들이 타버린 발에서 삐져나온 검은 뼈들을 봉지에 싼 채로 심문장에 나오곤 했다. 쇠를 달구어서 고문하는 방법도 무척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었는데 온 몸 어느 군데건 계속해서 쉽게 가할 수 있는 고문이었기 때문이다.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달군 쇳덩이를 몸 위에 대고 있다 대답이 늦게 나오거나 틀린 대답이 나오면 곧바로 눌러서 지져버리는 것이었다.

- John J. Robinson, Dungeon,Fire and Sword (1991)


파리에서는 10월 달에 조사받은 138명의 기사들 중 105명이 스스로 입문의례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했노라고 자백했으며, 123명은 침을 뱉었다고 자백했다. 103명은 척추의 끝자락 혹은 배꼽위에 입맞춤을 했노라고 자백했다. 그리고 102명은 동료기사단원들 사이에 동성애적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자백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자신이 동성애를 했다고 자백한 자는 3명이었다.
기사단장인 자끄 드 몰레이를 포함해 거의 모든 성당기사단원들이 이렇게 스스로 유죄를 자백한 것은 곧 바로 기사단의 파멸로 이어졌다. 비록 이러한 자백이 심한 고문에 의한 것이었고, 나중에 교황의 조사단이 재조사를 할 때 전에 했던 자백을 부정하기는 했지만 성당기사단원들은 제 입으로 자신들에게 유죄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Gabrielle M. Spiegel


프랑스에서는 36명의 기사단원이 죽고, 조사받은 138명중 123명이 유죄라고 자백을 하였다. 심지어 자끄 드 몰레이조차 이러한 엄한 심문 앞에 몸을 수그리고 동성애를 했다고 자백하였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이를 다시 부정한다.
한편 까르까손느(Carcassone)에서는 두 명의 기사단원들이 자신들이 바포메트(Baphomet)라는 우상을 만들어 섬겼노라고 자백했으며, 피렌체의 기사들은 마호메트(Mahomet)라는 이름으로 이 우상을 섬겼다고 했다. 그러자 왕실의 조사단원들은 미친 듯이 바포메트에 대한 증거를 찾아다녔고 결국 성골함을 닮은 이상한 금속제 해골모양을 발견하였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영국, 아라곤(Aragon), 나바르(Navarre, 공정왕 필립의 장남인 루이가 다스리던 곳), 마요르카, 까스띠야(Castile), 포르투갈,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진행되던 재판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오로지 프랑스 혹은 프랑스의 영향력에 있던 곳에서 행해진 재판에서만 성당기사단원들이 고문에 못이겨 자백을 하였다.

- Gabrielle M. Spiegel


영국에서는 성당기사단원들이 자신들의 죄상을 인정하고 성당기사단의 이단성을 인정한다면 가벼운 처벌만을 받고 풀려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당기사단원들이 그렇게 했다. 이렇게 자백을 한 기사단원들은 속죄를 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가거나 혹은 몇몇은 병원기사단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교회가 허락한 최소한의 옷과 음식만을 가진 채 세속의 삶으로 돌아갔다.

- John J. Robinson, Dungeon, Fire and Sword (1991)

 

십자군 전쟁에서 성당기사단이 얼마나 열심히 싸우다 죽어간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무죄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당기사단에 대한 가장 심한 고발이 카타리 이단의 중심지역에서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성당기사단의 몰락 1세기 전, 카타리 이단이 한창 기세를 올릴 때 이러한 지역에 있던 기사단원들은 쉽게 카타리 이단에 빠져들곤 했다. 더욱이 성당기사단의 은행가들은 1244년 카타리 이단이 몰락하던 당시에 사라진 이 교단의 보물들을 얻기 위해 도망친 이단자들을 보호해주고는 했다.

카타리즘이 1307년에는 거의 완전히 사라졌지만, 아직 그들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들이 남아서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었고, 결국은 이러한 카타리 이단의 악마숭배, 비밀스런 의례, 성적 타락 등이 그대로 성당기사단에 덮어씌워지게 되었다.

성당기사단이 카타리 이단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이러한 생각은 성당기사단장이었던 베르트랑(Bertrand de Blanquefort)과 카타르 이단에 속했던 베르트랑(Bertrand de Blanchefort)의 이름을 혼동한 것에서 비롯한다. 게다가 이 둘의 이름은 모두 라틴어로 쓰면 브랑카포르티스(Blancafortis)가 된다.

- Noel Currer-Briggs, The Shroud and the Grail - A Modern Quest for the True Grail

1305년에 교황이 된 클레멘트 5세는 교황의 재판정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교황은 프랑스에서 1307년 10월 27일에 있었던 성당기사단의 심문결과에 대해 크게 항의했지만, 공정왕 필립이 11월 말경 몇몇 성당기사단의 자백을 발표하자, 클레멘트 교황도 결국 모든 성당기사단의 체포에 동의하게 되었다. 성당기사단의 재판은 거의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 벌어졌다. 1308년 1월 영국도 자국 안의 성당기사단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영국에는 118명의 기사단의 사병들, 11명의 군목, 그리고 오직 6명의 기사들이 있었으므로 모두 합쳐 성당기사단에 속하는 사람은 135명이 있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란드의 성당기사단원들도 모두 잡혀갔다. 하지만 아무리 심문해도 별다른 결과를 낳지 못하자 결국 클레멘트 교황도 이들에게 고문을 사용할 것을 승인하였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영국에서는 성당기사단에 속하는 200여명이 극심한 고문을 당했으며, 이중 4명은 십자가에 침을 뱉었노라고 자백했다. 파리에서는 1310년 말경 120명의 성당기사단원이 화형당했다. 아마도 성당기사들이 가장 좌절한 것은 정신적인 측면이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죽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많은 동료들이 미쳐갔다.
프랑스에서 여론은 성당기사단이 유죄라는 쪽으로 흘러갔다. 프랑스 인들은 성당기사들이 지옥에서 여자 악마를 불러내어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고 믿었다.
카스띠야의 몇몇 성당기사들은 너무나 겁에 질려 그라나다로 도망쳐서 무슬림이 되었다. 1312년 3월 마침내 클레멘트 교황은 '솔로몬의 성당의 청빈한 기사들'(성당기사단의 정식명칭)에게 씌워진 모든 죄명이 확실함을, 즉 성당기사단이 유죄임을 선언했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노르망디의 성당기사단 지부장이었던 죠프리(Geoffroy de Charnay)는 기사단장인 자끄 드 몰레이에게 가서 저항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이 둘은 자신들의 무죄를 큰 소리로 외쳐대면서 산 채로 불에 태워졌다. 그때 모인 군중들은 이들에게 동정적이였으며, 이들이 순교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화형식이 있은 뒤 전설이 만들어져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전설에 따르면 자끄 드 몰레이가 죽어가면서 필립왕과 클레멘트 교황을 하느님의 정의 앞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화형식이 있은 뒤 한달이 안되서 클레멘트 교황이 죽었으며 그해 8월에는 필립왕도 죽었다. 또한 필립왕의 세 아들들과 후계자 또한 젊어서 죽었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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