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지 전쟁의 결과 북아메리카의 세력 판도]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북아메리카에 광대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영국은 인디언 보호를 위해서 식민지의 주민들이 애팔레치아 산맥을 넘어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고, 전쟁에 따른 재정적자를 벌충하기 위해 인지법과 타운셴드법을 제정하여 식민지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식민지의 일부 무법자들은 영국이 자신들의 자유로운 삶에 간섭한다고 생각하고 불만에 가득차 세금과 별로 관계없는 일에도 흥분하여 서로 다투고, 폭동을 일으켰다.
챔플레인호수(Lake Champlain) 동쪽 땅을 둘러싼 소유권 분쟁이 벌어져 뉴욕과 뉴햄프셔가 싸웠으며, 결국 분쟁 지역의 주민들은 1777년에 버몬트(Vermont)라는 독자적인 주를 만들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는 변경의 무법자들이 날뛰었다.
[Paxton 청년단의 인디언 학살 사건]
오타와족의 부족장 폰티악의 반란 당시에 퀘이커교도들이 장악한 주의회가 변경을 방어해주었던 것과는 달리 자신들의 문제에는 주의회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에 분개한 팩스톤 청년단(Paxton Boys)이라 불리는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랭카스터 카운티에 살고있던 평화적인 코네스토가 인디언들(Conestoge Indians)을 학살하고 베들레헴 근처에서 모라비아교파로 집단개종해 살고있던 소위 모라비안 인디언들(Moravian Indians)을 위협했다. 모라비안 인디언들이 필라델피아로 피신해오자 약 1,500명의 팩스톤 청년단원들이 필라델피아로 진격해왔고,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그들에게 주의회가 앞으로는 변경의 수비를 강화해줄 것이라고 약속해서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사우스캐롤리나 변경의 이주민들도 소도둑, 말도둑 및 인디언들로부터 주가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나타냈다. 그들은 단속자들(Regulators)이라 불리는 자경단을 조직하여 그 지역에서 법을 집행했으며, 주가 효과적인 행정을 펼칠 때까지 납세를 거부했다. 1769년에 주의회는 그 지역에 6개의 순회법원을 신설하고 세법을 개정했지만, 의회에 대표를 선출할 수 있게 해달라는 변경지역의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행정의 미흡함에 대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동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자행하는 권력남용과 착취에 대해서 항의가 일어났다. 
[Battle of Alamance - 나무 사이에 숨은 Regulators들이 총독의 부대에 발포하고 있다.]
1771년 봄에는 알라만스전투(Battle of Alamance)에서 국왕의 총독과 1,200명의 민병대원들이 약 2,000명의 엉성하게 조직된 단속자들(Regulators)을 격퇴했다. 식민지 내에서 발생한 여러 논쟁과 폭동들은 영국 정부가 식민지들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며 군사력을 사용하여 더 엄격한 관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 아래서 1770년 3월 10일 보스턴 킹 스트리트(King Street)에서 보스턴 학살 - 이라기 보다는 폭동에 가까운 -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실제 규모에 비해서는 후대에 상당히 과장되어 알려졌지만, 미국 독립 혁명의 한 단초가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보스톤에서는 이유없이 불만에 가득찬 폭력단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왕당파 상인들과 그들의 고객들을 협박하는 방법으로 영국제품 불매운동을 실시했다. 이로 인하여 총독은 군사지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캐나다에 있던 영국군 2개 연대가 보스톤에 도착했다.
1770년 5월 5일 대금 지불에 관한 사소한 시비 끝에, 관세사무소 앞 광장에 군중들이 운집하여 영국군 초병에게 조롱을 퍼붓고 눈뭉치와 조개껍질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초병의 구조요청으로 지원병력이 현장에 투입되었고, 그때 누군가가 마을의 화재 경고벨을 울려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폭동을 일으킨 군중들은 몽둥이로 영국군을 때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한 병사가 쓰러졌다. 
[Boston Massacre - Paul Revere가 그린 과장된 삽화]
그 병사는 박차고 일어나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다른 병사들도 함께 발사했으며, 연기가 걷히고 나자 5명이 죽거나 죽어가고 있었고 또다른 8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사건 후, 병사들은 체포되어 서포크 카운티(Suffolk County)지방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배심원들을 전원 보스턴 밖의 사람으로부터 선택했기 때문에, 재판은 1개월 가량 지연되었다.
영국군 병사들은 살인죄로 기소되었고, 변호인 John adams는 병사들이 상황의 희생자였으며 건방진 소년들, 흑인들, 흑백혼혈아들, 아일랜드인들 및 이국풍의 뱃사람들로 구성된 잡다한 오합지졸들에 의해 도발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배심원들은 6명의 병사를 무죄로 판결하고, 몬트 고메리와 Matthew Killroy의 두 병사를 살인죄로 판결했다.
원래대로라면 사형에 처해질 것이지만 성직자의 특권(benefit of the clergy)이라고 하는 영국법의 규정에 의해 감형되어사 엄지 손가락에 낙인이 찍히는 것으로 형벌은 종료되었다.
이 사건은 '보스턴 학살'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독립파는 희생자의 수가 문제가 아니라, 영국 정부가 군대를 상주시키고 영국 의회에 의해서 제정된, 식민지의 법 제도와 반하는 법률을 군대의 힘에 의해서 시행하려고 하는 정책에 있다고 주장했다. 보스턴시 당국은 이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매년 기념식을 거행했고, 후일 미국 독립선언서에도 보스턴 학살 사건에 대한 불만이 기재되어 있다.
[John adams]
한편 이 사건에서 병사들에 대해 변호를 하였고, 후일 미국 제 2대 대통령이 된 존 아담스는, 그 변호에 대해서, "나의 인생에서, 가장 용감하고, 너그러우며 인간적이고, 공평 무사한 행동이었다."라고 술회하였다. 반면 아담스는 동시에 이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서 '미국 독립의 주춧돌이 되었다'라고 술회하였다.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학살자를 변호한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