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3년 12월 16일 벌어진 보스턴 차 사건 (Boston Tea Party)은 미국 독립 전쟁의 직접적인 불씨가 되었다.
이 사건은 역사란 과격한 소수와 우연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불타는 Gaspee호]
1772년 로드 아일랜드의 프라비던스(Providence) 근처에 밀수업자들을 단속하기 위해 순찰중이던 영국의 범선 개스피(Gaspee)호가 좌초했다.
어둠을 틈타서 약탈자들이 배에 올라타 선원들을 죽이고 배에 불을 질렀다.
사건에 대한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목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Thomas Hutchinson, 1711 ~ 1780]
방화사건 나흘 뒤에 메사츄세츠의 총독 토마스 허친슨(Thomas Hutchinson)은 지역의회에게 앞으로 자신의 봉급은 관세수입에서 지급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고등법원 판사들의 봉급도 관세수입으로부터 지급될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 수입때문에 주의회에 의존적이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주의회는 이것이 독재정부를 예고하는 것이라며 하였다.

[Samuel Adams, 1793 ~ 1797]
1772년 11월에는 샘 아담스가 보스톤 시민대회에서 사람들을 설득하여 통신위원회(Committee of Correspondence)를 구성했는데, 이 위원회는 권리와 불만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다른 도시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하도록 권유했다. 메사츄세츠는 물론 다른 식민지주들에서도 통신위원회가 생겨났다.
1773년 3월에는 버지니아 주의회가 식민지주들 사이에서 그러한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으며, 위원회의 네트워크가 사로 연락을 취하고 여론을 조성하고 식민지 주민들의 적개심을 고취시키면서 식민지 전체로 퍼져나갔다. 한 영국의 왕당파는 그 위원회들을 "선동이라는 알에서 일찌기 부화한 가장 비열하고 교활하며 악독한 뱀"이라고 부름으로써 스 효율성에 무의식적인 찬사를 보냈다.
한편 영국의 재무부장관이던 노스 경(Lord North)은 1773년 5월에 그는 경영난에 허덕이고있던 동인도회사를 구제할 방안을 마련해냈다. 동인도회사는 영국의 창고에 팔리지 않아 쌓아둔 차의 재고가 1천 7백만 파운드나 있었다.
1773년의 차법(Tea Act)에 따라서 정부는 식민지로 운송되는 모든 차에 대하여 파운드당 12펜스의 영국관세를 되돌려주고 식민지 항구에서 지불할 수 있는 기존의 3펜스 관세만을 징수할 것이었다. 이렇게하여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인들보다 더 싸게 차를 구입할 수 있었다.

[Frederick North, 1770 ~ 1782]
그러나 노스경은 식민지 주민들이 차의 가격에만 반응을 보일 것으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인도회사가 식민지의 도매상인들을 건너뛰어 독자적인 대리점이나 수탁판매인을 통해 소매상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일단 그런 종류의 독점이 확립되자 식민지의 상인들은 그 전례가 다른 품목들에게 적용되는 시기가 언제 닥쳐올 것이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상인들의 지지를 받는 통신위원회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그들은 영국정부가 값싼 차를 가지고 그들의 충성과 복종을 얻어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해가 다 가기 전에 대량의 차가 식민지의 항구들로 쏟아져 들어왔다. 식민지의 상인들이 그 차를 구입하기를 거부하자 그것은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찰스톤에서는 그것이 창고에 보관되었는데 - 나중에 판매되어 혁명자금으로 쓰였다.
보스톤에서는 허친슨 총독과 샘 아담스가 담력싸움을 벌였다. 차를 실은 배의 선장은 폭도들의 반대에 놀란 나머지 영국으로 되돌아가고자 했지만, 허친슨은 차를 부두에 내려놓고 관세를 받아내기 전까지는 출항을 허가해줄 수 없다며 버텼다.

1773년 12월 16일, 일단의 식민지 과격파들이 모호크 인디언(Mohawk Indians)으로 변장을 하고 3척의 배에 올라타서 차 342 상자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 해안에서 구경하던 군중들은 이에 갈채를 보냈다.
개스피호에 불을 지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담자가 후일 샘 아담스와 존 핸콕(John Hancock)이 그곳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메사츄세츠주 브리스톨에서 열린 한 시민대회는 극단파들의 난폭한 행동을 규탄했다.
또한 후일 대륙회의 펜실베이니아 대표와 독립선언 기초위원까지 역임하였으며 평생을 통하여 자유를 사랑하고 과학을 존중하였으며 공리주의에 투철한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일컬어진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또한 당시에는 보스톤 시민들에게 차값을 변상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Benjamin Franklin - 100달러 지폐의 앞면
이 사건은 역사란 과격한 소수와 우연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불타는 Gaspee호]
1772년 로드 아일랜드의 프라비던스(Providence) 근처에 밀수업자들을 단속하기 위해 순찰중이던 영국의 범선 개스피(Gaspee)호가 좌초했다.
어둠을 틈타서 약탈자들이 배에 올라타 선원들을 죽이고 배에 불을 질렀다.
사건에 대한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목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Thomas Hutchinson, 1711 ~ 1780]
방화사건 나흘 뒤에 메사츄세츠의 총독 토마스 허친슨(Thomas Hutchinson)은 지역의회에게 앞으로 자신의 봉급은 관세수입에서 지급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고등법원 판사들의 봉급도 관세수입으로부터 지급될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 수입때문에 주의회에 의존적이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주의회는 이것이 독재정부를 예고하는 것이라며 하였다.

[Samuel Adams, 1793 ~ 1797]
1772년 11월에는 샘 아담스가 보스톤 시민대회에서 사람들을 설득하여 통신위원회(Committee of Correspondence)를 구성했는데, 이 위원회는 권리와 불만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다른 도시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하도록 권유했다. 메사츄세츠는 물론 다른 식민지주들에서도 통신위원회가 생겨났다.
1773년 3월에는 버지니아 주의회가 식민지주들 사이에서 그러한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으며, 위원회의 네트워크가 사로 연락을 취하고 여론을 조성하고 식민지 주민들의 적개심을 고취시키면서 식민지 전체로 퍼져나갔다. 한 영국의 왕당파는 그 위원회들을 "선동이라는 알에서 일찌기 부화한 가장 비열하고 교활하며 악독한 뱀"이라고 부름으로써 스 효율성에 무의식적인 찬사를 보냈다.
한편 영국의 재무부장관이던 노스 경(Lord North)은 1773년 5월에 그는 경영난에 허덕이고있던 동인도회사를 구제할 방안을 마련해냈다. 동인도회사는 영국의 창고에 팔리지 않아 쌓아둔 차의 재고가 1천 7백만 파운드나 있었다.
1773년의 차법(Tea Act)에 따라서 정부는 식민지로 운송되는 모든 차에 대하여 파운드당 12펜스의 영국관세를 되돌려주고 식민지 항구에서 지불할 수 있는 기존의 3펜스 관세만을 징수할 것이었다. 이렇게하여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인들보다 더 싸게 차를 구입할 수 있었다.

[Frederick North, 1770 ~ 1782]
그러나 노스경은 식민지 주민들이 차의 가격에만 반응을 보일 것으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인도회사가 식민지의 도매상인들을 건너뛰어 독자적인 대리점이나 수탁판매인을 통해 소매상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일단 그런 종류의 독점이 확립되자 식민지의 상인들은 그 전례가 다른 품목들에게 적용되는 시기가 언제 닥쳐올 것이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상인들의 지지를 받는 통신위원회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그들은 영국정부가 값싼 차를 가지고 그들의 충성과 복종을 얻어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해가 다 가기 전에 대량의 차가 식민지의 항구들로 쏟아져 들어왔다. 식민지의 상인들이 그 차를 구입하기를 거부하자 그것은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찰스톤에서는 그것이 창고에 보관되었는데 - 나중에 판매되어 혁명자금으로 쓰였다.
보스톤에서는 허친슨 총독과 샘 아담스가 담력싸움을 벌였다. 차를 실은 배의 선장은 폭도들의 반대에 놀란 나머지 영국으로 되돌아가고자 했지만, 허친슨은 차를 부두에 내려놓고 관세를 받아내기 전까지는 출항을 허가해줄 수 없다며 버텼다.

1773년 12월 16일, 일단의 식민지 과격파들이 모호크 인디언(Mohawk Indians)으로 변장을 하고 3척의 배에 올라타서 차 342 상자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 해안에서 구경하던 군중들은 이에 갈채를 보냈다.
개스피호에 불을 지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담자가 후일 샘 아담스와 존 핸콕(John Hancock)이 그곳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메사츄세츠주 브리스톨에서 열린 한 시민대회는 극단파들의 난폭한 행동을 규탄했다.
또한 후일 대륙회의 펜실베이니아 대표와 독립선언 기초위원까지 역임하였으며 평생을 통하여 자유를 사랑하고 과학을 존중하였으며 공리주의에 투철한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일컬어진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또한 당시에는 보스톤 시민들에게 차값을 변상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Benjamin Franklin - 100달러 지폐의 앞면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새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