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다구치 렌야(牟田口廉也, 1888. 10. 7 ~ 1966. 8. 2)는 사가현 출신의 일본 제국 군인이다. 육군 사관 학교 22기를 졸업하였고 육군 대학교를 29기로 졸업하였으며, 노구교 사건 및 태평양 전쟁시 말레이시아와 버마에서 부대를 지휘했다.
키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郎), 토미나가 쿄우지(富永恭次)와 함께 도죠 히데키에게 중용된, 이른바 삼간사우(三奸四愚)로 일컬어진다.
최종 계급은 중장이며 2차대전시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토미나가 쿄우지(永恭次) 과 함께 일본군 지휘관들의 무능함을 지적할 때 제일 첫머리에 오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별명은 무챠구치(無茶口, 헛소리꾼)
- 노구교(盧溝橋) 사건 -
1937년에 일어난 노구교 사건시 연대장이던 무다구치는 터무니없는 독단 교전 명령을 내려 중일 전쟁 나아가서는 태평양 전쟁의 계기를 만들어냈다.

노구교 사건의 지휘 라인
第一連隊(제1연대) 連隊長(연대장) 牟田口廉也(무다구치 렌야)
第三大隊(제3대대) 大隊長(대대장) 一木清直(이찌기)
第八中隊(제8중대) 中隊長(중대장) 清水節郎(시미즈)
1937년 7월 7일 밤 북경 부근 펑타이(豊台)에 주둔한 일본군은 야간 훈련을 실시하는 중이었다.
당시 중대장이었던 시미즈의 증언은 아래와 같다.
오후10시 반 경 훈련이 끝나서 내일 아침까지의 휴식을 위하여 나는 각 소대장과 가상적 전령들에게 연습 중지와 집합 명령을 전달하였다. 나팔을 불면 빨리 집합할 수 있지만, 중대에서는 가급적 야간에는 나팔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집합 상황을 관찰하는 중, 가상적의 경기관총이 사격을 개시했다. 훈련이 중단된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내가 보낸 전령을 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후방에서 수발의 소총 사격을 받았고 실탄이라고 직감했다.
그런데 우리 중대의 가상적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공포탄 사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옆에 있던 나팔수에게 명령하여 급히 집합 나팔을 불도록 하였다. 그순간 다시 오른쪽 후방의 철도교에서 가까운 제방 방향에서 수십발의 사격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성벽과 제방위에서 회중 전등 같은 것이 점멸하는 것 같았다.
시미즈 중대장은 중대원을 집합시키고 인원 점검을 하였는데, 한명이 비는 것을 알아챈다.
그는 즉각 이 사실을 직속상관인 이찌기 대대장에게 보고하였고, 이찌기는 이를 다시 무다구치 연대장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무다구치는 전투 준비를 갖춘후 중국군과 협조하여 실종자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한편 행방불명된 병사의 수색 의뢰를 받은 중국군은 지휘관인 왕냉제의 명령으로 성 안팎을 샅샅이 조사하였으나, 일본군 병사는 없었다.
사실 실종된 일본병은 용변을 보기 위해 부대를 이탈하였던 것이고, 20분만에 발견된 상태였다. 중대에서는 이를 대대에 보고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상급부대로의 보고가 이어지지 않았다.
무다구치의 명령에 따라 이동중이던 3대대를 향해서 다시 3발의 총성이 울렸다. 대장이 이를 보고하자, 무다구치는 "지나군이 두번이나 사격을 한 것은 순연(純然)한 적대행위이므로 단호히 전투를 개시할 것을 허가한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일개 연대장이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외국과 교전 행위를 명령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월권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 중국군의 고문관이었던 사꾸라이 소좌가 중국측과 협상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장 무다구치는 이날 오전 9시 25분, 노구교의 점령을 명령하였다. 또한 오후 1시경에는 자신이 직접 나서 일선에서 지휘를 한다고 설쳐대며, 오후 5시에는 모든 중국군과 주민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고 한다.
이 사태가 일본측에서 지나사변이라고 부르는 중일전쟁으로 이어지고, 태평양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 임펄 전투 -
무다구치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싱가포르 공략전에서 나름대로 명성을 떨쳤지만, 인도의 임펄 공략 작전을 지휘하여 참혹한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1943년 3월 버마에 새로운 방면군(方面軍)이 생겼다. 그리고 가와베(河辺正三) 중장이 군사령관으로 취임한다. 무다구치 중장은 현지 사단장으로부터 방면군 예하의 15군 사령관으로 승진하였다.

河辺正三
가와베 - 무다구치는 노구교 사건의 여단장과 연대장의 관계로서 중일전쟁을 일으켰던 명콤비였다.
18사단장으로 있을 때는 운남을 통해서 중경으로 건곤일척의 진격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던 무다구치는 15군 사령관에 취임한 후 인도의 임펄로 진격하여 버마에 대한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버마 북부와 접한 임펄은 영국군의 군사 요충지이며 원장(援將,장개석 원조)루트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15군의 초대 군사령관이었던 이이다(飯田) 중장 시절에도 이미 인도 진격 작전이 계획된 바 있었다. 일본군의 버마 진공 작전이 너무 수월히 진행된 나머지 여세를 타고 인도까지 쳐들어가려 한 것이다. 소위 21호 작전이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이 허술한 작전 계획 탓에 실행에는 이르지 못했다.
무다구치는 1943년초 18사단장 시절 중국의 운남성 곤명으로 진격하여, 거기로부터 중경으로 쳐들어가 중일 전쟁을 타개한다는 구상을 주위에 떠벌이고 다녔다.
"지나 사변을 일으킨 것은 나였다. 다행히 오늘날 인도지나, 타이, 버마는 일본 세력권으로 들어와 지나의 뒷문은 완전히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건곤일척 중경으로 진격하여...."
이런 비현실적 주장을 늘어놓던 무다구치는 15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당초의 말을 바꾸어 인도로의 진격을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회의적인 상관 가와베를 설득하고, 휘하 막료들에게 구체적인 작전안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막료들은 거의 대부분 이 작전에 반대하였고, 보급부대 출신으로 병참의 권위자인 오바다 참모장은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지휘중인 무다구치
"버마와 인도의 교통로는 모두 남북으로 뻗어 있다. 국경은 험준한 산맥이 버티고 있어, 동서를 잇는 보급로는 단 하나밖에 없다. 이런 실정에서 작전을 개시하려면 해상 보급이나 공중 보급을 바라는 길밖에 없다. 만일 육군 부대만으로 작전을 개시할 경우에는 우선 도로 건설 작전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보고를 듣고 대노한 무다구치는 "군사령관의 명령을 모르겠다는 말이냐?"라고 대갈일성, 벼락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층 고성으로 "막료들이 반대하다니 그게 무슨 꼴인가? 군사령관이 하자는 것이 아닌가? 그런 방대한 계산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황군은 어떤 고생이라도 견디어 낼 수 있다는 걸 모르나?"라고 외쳤다.
참모장 또한 물러서지 않고, "각하의 의견이기는 합니다마는 보급에 승산이 서지 않습니다."라고 간(諫)하였으나, 무다구치는 "식량은 적의 것을 이용한다. 그래도 싸울 수 없다는 말이냐?"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아무리 무대뽀인 무다구치라 한들 인간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기발한 계책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른바 '징기스칸 작전'이었다.
"중앙에 있는 놈들이 전쟁을 아는가? 실전의 경험이 없는 것들이 아무리 책상에 엎드려 전략 전술을 짜봤자 결론이 나올리 없지 않은가? 따라서 보급의 자신이 있느냐? 성공할 자신이 있느냐 하고 바보 같은 질문만 하고 있지. 싸움이란 것은 적을 때릴 필요가 있을 때는 어떠한 고난을 물리치고라도 강행해야 하는 거야."
"적의 식량과 탄약을 빼앗아 쓴다. 이것이 기본 방책이다. 임펄에 들어간 후에는 현지 조달한다. 그동안은 살아있는 소와 양을 끌고 간다. 풀은 언제든지 있으니까, 진격중이라도 사료는 걱정없다. 명안이지 않은가? 자네들은 알고 있는가? 징기스칸이 유럽으로 원정을 나섰을 때 몽골에서 양을 끌고 간 것을. 양식이 떨어지면 양을 잡아먹을 수 있게 말일세. 수송에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이런 희한한 식량이 또 어디 있겠는가?"
바로 징기스칸의 재현이었다. 위대했던 몽골 영웅의 꿈은 20세기 일본 장군의 가슴 속에서 되살아나, 임펄의 비극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잉태되었다.
실제 작전에 들어간 후 버마의 소는 습지를 좋아하고 장시간의 보행에 익숙치 않다는 것이 곧 판명되었고, 심지어 소가 먹을 풀의 준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짐승들은 차츰 버려지게 된다.
징기스칸 작전의 허황된 꿈은 결국 일장춘몽에 그친다.

임펄 작전은 보급의 두절로 인해 대실패로 끝이 났고, 제 31 사단장인 사토 코우토쿠(佐藤幸徳) 중장은 현지 실정을 무시한 무다구치의 현지 고수 명령을 무시하고 무단 후퇴하여 일본군 역사상 전대미문의 항명 사건을 벌이게 된다.
공격에 동원된 3개 사단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사망자 대부분은 굶주림으로 인해 아사(餓死)하였다. 이로써 일본의 버마 방어선은 완벽하게 붕괴되었고, 버마 방면군 사령관인 가와베 중장과 무다구치를 비롯하여 군과 사단 참모진에 이르기까지 단 한명도 예외없이 경질되었다.
한편 전선에서는 보급 물자 부족으로 연일 고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무다구치는 사령부에 기생을 불러들이고, 작전 중에도 5시만 되면 자택으로 돌아가 유카타로 갈아입은채 요리집으로 출퇴근하였다. 영국군은 스피커를 통해 이런 실태를 전선에 방송하였고, 일본군 장병들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무다구치는 패색이 짙어지자 15군의 후퇴를 기다리지 않고 '북방 시찰'을 이유로 도망가버렸다.
이 부분에 대하여 무타구치 본인은 전쟁이 끝난 후 방위청 전사 편찬실에서 "당시 내가 제 1선에 머물러 있는 것에 신변상 위험을 느껴 후퇴해버린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은 솔직히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당시 군 사령관이었던 내가 친드윈 강가에 주둔 중인 부대들의 퇴각를 지휘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친두윈 강 동쪽의 보급 체계를 신속하게 확립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비겁자 소리를 듣다니, 분한 마음에 눈물을 금할 길이 없다"라고 변명하였다.
임펄 작전 실패는 "치중수졸(輜重輸卒)이 군대라면 나비나 잠자리도 새라고 하겠다"라는 일본군 특유의 보급 경시 사상이 원인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지휘관인 무다구치의 졸렬한 작전 입안과 지휘 또한 패전의 원인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무다구치에게 원한을 품은 병사들은 그를 귀축 무다구치(鬼畜牟田口)라고 불렀으며, "무다구치 각하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첫째로 훈장, 둘째로 메이마(버마어로 여자), 셋째로 신문 기자"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무다구치는 임펄 작전의 실패로 예비역에 편입되었고, 직후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종전을 맞는다. 이후 전범 혐의로 영국군에 체포되어 싱가포르에 송치되었지만, 작전 실패로 일본군에 대손해를 끼치고 영국군의 작전 수행을 도운 공로로 불기소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전후에도 그는 임펄 작전 실패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작전의 실패는 내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이 무능한 것이 원인이다."라며 자기 변호로 일관하였다. 라디오나 TV, 잡지 등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일한 주장을 되풀이하였고, 국립 국회도서관이 노구교 사건에 대한 증언 녹음을 부탁했을 때에도, 예정에 없었던 임펄 작전 관련 녹음을 억지로 요구해 녹음에 싣게 하기도 했다.
1966년 사망하였다.
말년의 무다구치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예전 일본 다큐에서 2차대전 참전자가 천왕과 일본전범들을 규탄하고 항의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반합에 밥을 해서 먹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시 대단한 블로그군요.입상이라니!
반면 되니츠는 영국을 너무 악랄하고 성공적으로 괴롭혔기 때문에 어떻게든 보복하고 싶었겠지요. 무제한 잠수함전과 적국의 조난자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구조하지 말라는 명령이 문제가 되었습니다만... 1941년 12월에 태평양의 체스터 니미츠도 똑같은 명령을 미해군에 내렸었습니다.
사실 영국은 되니츠의 사형을 원했고 미국은 무죄를 주장했는데 둘 사이에 절충을 거친 끝에 10년형이 내려졌습니다. 웃기는 짓이지요. 수감 생활도 참으로 터무니없습니다. 되니츠는 독일의 항복 당시 국가원수였는데 적국의 원수에게 강제노역을 시킨 것은 근대 이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