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갑사건(海軍甲事件)이란 1943년 4월 18일 연합 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기체가 격추된 사건을 구일본군 내부적으로 부르는 명칭이다.
미군측이 입안한 야마모토 살해 작전의 명칭은 복수 작전(Operation Vengeance)

山本五十六
일본 해군은 1943년 4월 7일부터 14일까지 이호(い号) 작전을 실행하여 솔로몬 제도, 뉴기니 방면의 연합국 전력에 공격을 개시했다. 연합함대 수뇌부는 이 작전이 일단 성공한 것으로 평가했고 야마모토 사령장관이 직접 솔로몬 제도와 뉴기니 일대를 시찰하고 장병들을 격려하게 되었다.
4월 13일 방문이 예정된 각 기지에 4월18일의 분단위 시찰 계획이 암호로 통지되었다.
4월 17일 미국 해군 정보부는 코드명 Michael (Twan) Antoine로 명명된 암호문을 도청하고 이를 해독하는데 성공하였다. 수신인은 제 11 항공대와 제 26 항공대의 지휘관이었으며, 해독 결과 야마모토 사령장관이 도착할 시간과 장소, 탑승할 항공기 및 호위 전투기의 기종과 숫자까지 알아내었다.
이 내용을 보고받은 대통령 루즈벨트는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에게 야마모토를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다.
녹스는 니미츠에게 다시 이 지시를 하달하였고, 니미츠는 남태평양 사령관 윌리엄 할지에게 다시 이를 전달하여 바로 작전의 승인이 이루어졌다.

P-38G
암살대는 일본군에게 감지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과달카날에서 저공비행으로 690km를 비행해야 했다. 이는 해군과 해병대의 주력 전투기 F4F Wildcat이나 F4U Corsair의 작전 반경을 초과하였기 때문에, 이 작전은 P-38G를 장비한 미 육군 항공대 소속의 제 13 공군 347 전투단 339 전투편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총 18대의 P-38G가 동원되었으며, 이중 4대는 야마모토의 기체를 공격하고 나머지 14대는 호위 임무를 담당하였다.
4월 18일 오전 7시 25분, 18기의 P-38G가 과달카날의 핸더슨 비행장을 날아올랐다. 임무에 참가한 승무원들 중에서 목표가 야마모토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일부였으며, 나머지는 어떤 일본의 고위급 장성이 탑승한 항공기 요격 정도로 알고만 있었다.
4월 18일은 도쿄에 둘리틀 공습이 있은지 딱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야마모토의 마지막 모습 - 해군항공대 승무원들을 사열하고 작전 출격을 전송하고 있다.
야마모토는 도쿄 시각으로 4월 18일 오전 6시 라바울을 떠나 오전 8시경 부겐빌의 발라레 비행장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야마모토와 참모들은 2기의 1식육공(一式陸上攻撃機)에 탑승하고 있었고, 6기의 제로센(零式艦上戦闘機)이 이들을 호위하였다.
야마모토의 1식육공은 2,000미터 고도로 비행하였고, 호위 전투기들은 3대씩 V자 대형으로 후방 2,450 미터 상공에서 비행하였다.
야마모토의 항공기를 공격할 4기의 P-38G는 오전 9시 34분에 요격 예정 지점에 도착하였고, 야마모토 탑승기를 발견하였다. 이들은 즉시 보조연료탱크를 떼어내고 최대 출력으로 상승하여 야마모토의 우측으로 따라붙었다.
호위 제로기들도 즉시 연료탱크를 떼어내고 P-38G를 향해 급강하하였다. 혼전이 벌어졌고, 야마모토 탑승기는 양쪽 엔진을 공격받아 후미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정글로 추락하였다. 마토네 우가키 참모장이 탑승했던 1식육공도 곧 해상으로 격추되었다.

一式陸上攻撃機
레이몬드 하인(Raymond K. Hine) 소위는 전투중 격추되어 실종되었으며, 베스비 홈즈(Besby F. Holmes)의 기체는 귀환 도중 연료 부족으로 러셀 제도에 불시착하였다. 레이몬드 하인에게는 해군 십자 훈장(Navy Cross)과 비행 수훈 십자 훈장(Distinguished Flying Cross), 비행 훈장(Air Medal), 그리고 부상장(Purple Heart)이 수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해군은 즉각 수색대를 보냈고, 19일 북쪽 해안에서 야마모토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야마모토는 비행기 잔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나무 아래에서 좌석에 앉은채 군도의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고 한다. 야마모토는 두 군데의 총상을 입었는데 하나는 왼쪽 어깨 뒷편, 다른 하나는 왼쪽 아래턱에서 오른편 눈 아래쪽으로 관통하였다.
야마모토의 1번기에 탑승했던 인원은 전원 사망하였고, 아가키 참모장이 탑승했던 2번기는 참모장 이하 3명이 구조되었다.
야마모토의 사망은 전군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관계자들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야마모토의 사망은 그의 시신이 도쿄에 도착한 5월 21일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고, 6월 5일에 성대한 장례식이 치뤄졌다. 일본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야마모토의 장례식
미국은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격추 다음날 샌프란시스코 방송으로 야마모토의 이름 없이 격추 사실만 간단히 보도하였다. 또한 이날 브겐빌섬을 폭격하여 야마모토기 공격을 이 공격의 일부인 것으로 위장하였다.
반대로 일본 해군은 사건이 벌어지기 2주일전에 암호표를 갱신하였기 때문에 암호가 해독되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고, 이는 이후 일본군의 졸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야마모토의 무덤과 생가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