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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의 대리인 루돌프 헤스(Rudolf Walter Richard Heß)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복한 독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프리츠 헤스(Fritz Heß)는 대단히 독일적이며 민족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집무실에는 독일황제 빌헬름2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황제의 생일에는 상점을 닫아걸고 집에서 가장 질이 좋은 포도주로 잔치를 벌였다.

루돌프는 1894년에 태어났는데 프리츠는 아들이 자신의 가업을 잇는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루돌프는 1908년 라인강 유역의 바트 고데스베르크의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그는 평범하며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으나 나름대로 자연과학과 수학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프린츠는 아들이 인문고등학교 대신 가업을 잇기위해 스위스 노이샤텔에 있는 상업학교로 진학하기를 원했다.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했던 루돌프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 1차 세계대전 -

아마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면 루돌프 헤스는 한명의 정직한 상인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1914년의 유럽은 민족주의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스무살의 어린 루돌프도 이 열기속에 빠져들어 아버지의 의사를 거스르며 군에 입대했다. 그는 훈련을 받는중 자신이 전선에 투입되기 이전에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닌지 조바심을 냈다.

헤스는 바이에른 보병 제 7연대에 소속되어 서부전선에서 전투를 치루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전선이 고착되어 참혹한 진지전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루돌프는 열정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1915년 여름 하사로 진급하였다. 1917년에는 루마니아 전선에서 폐에 관통상을 입어 거의 죽을뻔 했다가 간신히 회복되어 소위 계급장을 달고 보충 중대에 배속되어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한 상병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이 우연한 만남에서 소위와 상병은 서로간에 큰 인상을 주고받지 못했다.

1918년 봄, 헤스 소위는 수차례에 걸친 지원 끝에 공군의 파일럿이 되었다. 리히트호펜과 괴링 같은 공군의 수퍼 에이스는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독일의 어린아이들까지 이들의 이름을 알 정도였다. 그러나 루돌프는 너무 늦었다. 전쟁 막바지에 실전에 투입된 그는 한대의 적기도 격추시키지 못했다.


1918년 11월, 독일제국이 붕괴하자 헤스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전역한 소위는 뮌헨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그의 자산을 몰수하는 바람에 금전적으로도 궁핍한 처지에 빠졌다. 헤스는 뮌헨 대학에 진학하여 경제학과 역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향후 NSDAP의 세계관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인물을 만나게 된다. 지정학 강의를 담당하던 퇴역장군 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였다. 헤스는 곧 그의 조교가 되어 스승의 학문적 신조(Lebensraum)에 깊게 빠져들게 되었다. 

헤스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외모를 지녔음에도 여자도 사귀지 않았다. 그는 오직 독일과 정치, 전쟁에만 열광했다.  1920년 헤스는 일제 프릴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특이한 사람을 만났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갑자기 회색 군복을 입고 팔에는 에프 의용군의 청동사자 완장을 두른 청년 하나가 정원의 바깥 출입문쪽으로 들어와 작은 계단을 한꺼번에 세칸씩 뛰어 올라왔다. 그는 예상치못한 나의 시선에 놀라는 눈치였다. 짙은 눈썹 아래로 매우 어두운 눈이 거부의 빛을 보내고 있었다. 찰나였지만 예의를 차려 인사하고 그는 곧 가버렸다.

두사람은 이후 미지근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헤스는 부모에게 뱀구덩이에서 유일한 뱀장어를 발견했다고 그녀를 소개했다.일제는 후일 헤스의 부인이 되었고 결혼식을 치르기 전까지 당에서 그의 일을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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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와의 만남 -

1920년 5월의 어느날 밤, 헤스는 슈테른에커브로이라는 뮌헨의 어느 지하 맥주집에서 독일노동당에 소속된 한 사람이 연설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노동당은 바이에른에 무수히 존재하는 민족주의 정당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맥주집에는 스물네명의 청중들이 모여있었다. 각자에게는 1,000cc의 맥주가 돌려졌다. 홀 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연사는 헤스보다 몇살 많았는데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기고 콧수염을 직각으로 깍았다. 전단지에는 그의 직업이 화가라고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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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오스트리아 억양으로 연사는 지난 몇년간 벌어진 사건들을 열거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 민족에 대한 범죄이며,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에 대한 정부의 배신행위라고 정의했다. 또한 이 모든 악행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은 유태인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연설은 끝없이 계속되었고 신들린듯한 고함소리에 의해 갈수록 열기가 고조되었다.

헤스는 연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연사는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연설을 하는것처럼 보였다. 그날밤 그는 일제의 집으로 뛰어가 더듬으며 말했다.

그사람. 그 사람이.. 내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이 하는 연설을 들었다오. 누군가가 우리를 베르사유 조약의 구속에서 풀어준다면, 바로 그사람일 거요. 이 사람이 우리의 명예를 다시 찾아줄 게 분명하오.

일제는 그날 이후 헤스가 완전히 새사람이 된것처럼 생동감이 넘쳤으며 얼굴이 환해졌다고 말했다.


1920년에 히틀러는 권력과는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조그마한 독일노동당 안에서 권력다툼을 벌이는 일개 피라미에 불과했다. 그러나 헤스는 이 화가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히틀러는 자신을 따르는 이 젊은이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헤스는 신뢰할만한 사람이었다. 노동당 사람들은 커피를 먹으러 가서 함께 대화를 나누곤 하던 이 기묘한 커플에 대해 비웃었다. 독일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총통과 그의 대리인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길이 없었다.

헤스는 존경심에 가득차 히틀러는 호민관으로 불렀다. 그는 자신의 스승에게 히틀러를 소개하였지만 하우스호퍼는 벼락출세자인 히틀러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지명도가 낮던 초기의 NSDAP에는 연설능력을 갖춘 인재가 필요했다. 그러나 헤스는 그 능력이 부족했다. 그는 연설대에 오르기만 하면 심리적 압박감으로 말을 더듬고, 몸이 마비되기도했다. 초기 당의 연사중 하나이던 헤르만 에세르는 헤스가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는 한마디도 제대로된 문장을 말하지 못한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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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DAP의 초기 행동대원들


- 맥주홀 폭동 -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는 붕괴되었다. 빵 한덩어리가 무조 1조 라이히 마르크에 달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엉망이 되었고, 화폐는 가치를 상실했다.

사회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특히 독일 남동부의 바이에른 지방에서는 총통이라고 불리는 한 사나이가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1년전 이탈리아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검은셔츠단이 로마로 진군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총통은 무솔리니가 아니었고 그의 세력인 NSDAP는 바이에른지역을 벗어나면 독일인들에게 이름조차 생소한 집단에 불과했다.

11월 8일 총통은 새로운 제국을 세우려는 일대 모험을 감행했다. 예비역 상병 히틀러는 예비역 소위 루돌프 헤스에게 바이에른 정부의 모든 장관들을 체포할 준비를 갖추도록 명령을 내렸다. 헤스는 이 명령을 감격스럽게 받아들였다.

히틀러와 괴링, 그리고 약간의 돌격대원들과 함께 헤스는 저녁 6시경 주정부의 집회가 열리던 뷔르거브로이켈러를 급습했다. 히틀러는 의자에 뛰어올라 정숙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용해지지 않자 총통이 공중에 대고 총을 한방 쏘았다. 효과가 있었다.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방금전 뮌헨에서 애국적인 혁명이 일어났소. 이순간 우리 부대가 도시를 장악했소. 이 홀도 600명의 사람들에 의해 포위되어있소.

그러나 이 서툰 쿠데타 시도는 다른 우익세력들과 육군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초조해진 총통은 다음날 불리한 형국을 역전하기 위해 3천명의 인원으로 진군을 시작했지만 결국 경찰의 발포로 피만 흘린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매년 11월 9일마다 쿠데타 시도에서 목숨을 잃은 14명의 희생자에 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거창한 횃불과 북소리와 함께 총통의 대리인인 루돌프 헤스가 항상 이 행사를 이끌었다.

그러나 사실 발포가 이루어질때 헤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당시 바이에른 주정부의 장관 슈바이어와 부첼호퍼를 인질로 감시중이었는데, 쿠데타 실패 소식을 듣고 즉각 바트 퇴르츠 방향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 히틀러는 11월 11일에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다른 주동자들도 붙잡혀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헤스는 완전히 종적을 감춰버렸다.

쿠데타 주동자들에 대한 재판은 무명 정치인 히틀러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와 다름이 없었다. 그는 이 재판에서의 변론을 통해 독일국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특히 그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3가지 원칙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결국 히틀러는 5년간의 금고형과 200 마르크의 벌금이라는 관대한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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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홀 폭동 재판 기념사진 - 루덴도르프와 히틀러, 에른스트 룀의 모습이 보인다.


히틀러의 변론에 힘을 얻은 헤스는 자수하는 길을 선택했고, 18개월간의 금고형을 선고받아 히틀러와 함께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헤스가 감옥에 도착했을 무렵 히틀러는 벌써 자기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1층에서 생활했는데 총통은 헤스를 특별히 자신의 옆방으로 불러들였다. 이곳에서의 몇달간은 히틀러와 헤스의 관계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헤스는 히틀러의 토론상대 겸 청중이 되었다. 이곳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역작인 나의 투쟁(Mein Kampf)을 저술하였는데, 특히 레벤스라움과 같은 개념을 정립하는데는 하우스호퍼 교수의 제자인 헤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히틀러는 감옥에서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우리는 제국의회의 일에 관여하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것보다 표결로 이기는 것에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결국 그들의 법이 우리의 성공을 보장하게 될 것이다.



- 권력 장악 -


총통은 감옥에서 앞으로 최소한 5년, 길어도 7년 내에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풀려난 히틀러에게는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독일 경제가 인플레이션에서 완전히 회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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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헤스 - 1924년

힛통은 계속적인 집회와 연설로 대중의 환심을 사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30년까지 제국의회에서 NSDAP는 득표율 2%를 넘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개인 비서 헤스는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에게 예언했다.

그날이 올 것입니다. 완전히 헌법에 입각하여 독일국민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책임질 그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헌법을 만든 사람의 의도에 따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헤스는 비서로서 히틀러의 일정을 짰고, 그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너무 잦은 연설로 히틀러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말없이 연단에 머리를 기대기도 했고, 목이 쉬어 연설 내용을 알아듣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히틀러가 오버잘츠베르크에 새롭게 구입한 집에 머무를 때도 헤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다. 공적인 장소에서 두사람은 서로 존칭을 썼지만 사석에서는 오래전부터 허물없이 지냈다. 다른 부하들은 헤스에 대한 히틀러의 총애를 시기했다. 대중들은 헤르만 괴링이나 괴벨스, 돌격대 사령관인 에른스트 룀을 주목했지만 실제로는 헤스야말로 숨어있는 권력자였다. 후일 헤스는 이 시기야말로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노라고 회상했다. 당의 상황도 호전되었고 히틀러와의 관계도 더할나위없이 친밀했으며 독일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희망도 점차 현실화되는 것 같았다. 

1927년 12월 30일, 헤스와 일제는 히틀러의 중매로 결혼에 골인했다. 입회인은 히틀러와 하우스호퍼 교수였다. 그러나 새신랑 루돌프 헤스는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히틀러 곁에서 보냈다. 항간에서는 헤스가 외도를 하고 있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지만 성실한 그의 성격으로 볼때 그것이 사실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헤스는 당 후원금을 모으는 일에도 능력을 발휘했다. NSDAP의 정강정책은 상당히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루르 지역의 부유한 기업가들은 이들에게 후원하는것을 꺼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인의 아들인 헤스는 당의 과격한 운동가들보다 더 쉽게.. 괴링보다 더 원만하게 대기업가들과 접촉을 가졌다. 결국 이들이 낸 많은 후원금은 NSDAP의 선거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2년 7월 NSDAP는 37퍼센트를 득표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수상에 임명되기를 바라던 히틀러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헤미안 상병에 대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혐오감과 헌법에 충실하겠다는 히틀러의 다짐을 믿지 못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의심이 문제였다. 당은 위기에 봉착했다. 초조감과 재정적 궁핍현상이 확산되었다. 기업들이 돈주머니를 꽉 틀어쥔 관계로 NSDAP의 부채는 1,200만 라이히 마르크에 달했다. 실망감으로 헤스는 병에 걸려 요양소로 들어가야만했다. 그가 요양소에서 나왔을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1월 선거에서 NSDAP는 200만표를 잃었다. 당내에서 히틀러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이루어졌다. 그레고르 슈트라서는 12월 4일 제국 수상인 슐라이허와 직접 담판을 벌였다. 이것은 히틀러와 헤스에 대한 공개적 도전행위였다. 그러나 결국 권력투쟁은 히틀러의 승리로 끝나고 슈트라서는 이탈리아로 도주했다.

궁지에 몰렸던 NSDAP에 행운이 찾아왔다. 독일 정계를 지배하던 슐라이허와 파펜 전 수상의 불화로 인해 1933년 1월 히틀러를 제국 수상으로 임명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행운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헤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당신에게! 꿈인지 현실인지 묻고싶소. 나는 빌헬름 광장에 있는 제국 수상 청사의 집무실에 앉아있소. 정부 부처 공무원들이 부드라운 양탄자 위를 미끄러지듯 걸어오고 있소. 수상에게 서류를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오.
- 일제에게 보낸 편지 -




- 총통의 대리인 -


헤스에게도 새로운 시기가 찾아왔다. 1933년 4월 21일 히틀러는 그를 총통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이 직함에 실질적인 권력이 따라온 것은 아니다. 이미 헤스는 중앙위원회 의장으로서 형식적으로 히틀러를 잇는 2인자였던 것이다. 1933년 가을에 그는 무임소 장관으로 내각의 일원이 되었다. 헤스는 자신을 보좌할 유능한 비서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마르틴 보르만이었다. 헤스는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서류작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르만은 그 틈을 파고들어 자신만의 권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헤스가 사라지자 보르만이 가진 권력은 놀라울 정도로 커졌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헤스를 거의 완전히 고립시키고 있었다. 헤스가 사라지자 보르만은 며칠만에 그의 모든 직책을 인수했고 자신을 총통의 비서로 부르도록 했다. 게다가 그는 헤스의 부인을 아주 불손하게 대했다.
- 슈페어 -

유약한 헤스는 권력을 틀어쥐지 못했다. 최고 당직자인 헤스는 자신의 권력을 주변에 나누어주었지만 그들은 헤스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 지역당을 책임지는 몇몇 대관구 지도자들은 공개석상에서 대리인에게 무례하게 굴기도 했다. 결국 헤스는 당을 관리할 능력이 없음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총통을 향한 대리인의 충성심은 여전했다.

헤스는 히틀러의 측근 중에서 청렴결백하며 예의바른 당의 양심이라 부를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하루에도 수천건씩 지역당 간부의 직권남용이나 잘못된 처신에 대한 투서가 쏟아졌다. 그러나 부정직한 간부들에 대한 헤스의 준엄한 경고는 흥미거리로 취급당했다.

뮌헨의 헤스와 베를린의 히틀러는 물리적인 거리처럼 서서히 멀어져갔다. 1934년 여름 히틀러는 에른스트 룀을 숙청했다. 그러나 헤스는 그 일을 미리 알지 못했다. 그는 또한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에 서명했다. 3일후 헤스는 하우스호퍼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그의 가족에게 아무런 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우스호퍼의 부인은 인종법에 따르면 절반의 유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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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DAP 지도자들

총통의 대리인은 뮌헨 근교에서 검소한 생활을 했다. 아들의 이름을 짓는 날에는 몇몇 손님들만 초대되었다. 히틀러도 아들의 대부로 첨석했다. 바로 그날 헤스는 독일 전역의 유대인 교회당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른바 수정의 밤이었다. 그는 분노했다. 아무도 총통의 대리인에게 그 정보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헤스는 대관구 지도자들에게 전보를 통해 위법행위를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대리인의 지침은 더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헤스는 항상 예의바르고 친절했다. 우리는 종종 대화를 나누며 함께 웃곤 했다. 또한 그는 투철한 정의감의 소유자였다. 그는 항상 하우스호퍼 교수의 부인을 보호해주었다. 그리고 특별한 어려움에 대해 듣게 되면 항상 당사자를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는 당의 민원해결사로 불리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가 화내는 것을 나는 본적이 없다. 단한번 수정의 밤 사건 때문에 화를 낸적이 있는데, 그일이 자기 모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날의 행위에 대해 알게되자 그는 모든 동지들에게 이 사건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 헤스의 비서 힐데가르트 파트 -

헤스는 위통과 담석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 헤스는 의사들중 한명의 권고를 받아들여 예상되는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윗니를 모두 뽑아버렸다. 그러나 차도는 전혀 없었다. 대리인은 이제 더이상 정치적으로 중요한 논의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 자리에는 비서인 보르만이 참석했다. 헤스는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는 논의에 참석하는 대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얼굴마담 역할을 담당했다. 겨울철 빈민 구제 사업과 아이를 많이 낳은 여성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상이용사를 표창하는 것 등이었다.


- 2차 세계대전 -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에 선전포고하여 2차대전을 일으켰다. 이틀후 대리인은 수상관저에 있었다. 그날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했다는 소식이 접수되었다. 당황한 히틀러는 영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 외무상 리벤트로프에게 호통을 쳤다.

모든 계획이 어긋나 버렸다. 나의 투쟁 세계관의 핵심 전제이던 영국과의 우호 관계가 실패로 돌아갔다. 히틀러는 스웨덴을 통해 협상을 위해 괴링을 보내도 되는지를 영국에 문의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괴링과 협상을 할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다. 독일군은 곧 폴란드와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상주의자셨고 독일에 대해 확신을 가진 분이셨다. 아버지의 목표는 언제나 독일의 번영이었다. 그는 괴링처럼 권력형 인간이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우리집에서 불필요한 모든 것들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남은 살림은 자동차가 유일했다.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매우 엄격한 삶을 영위하셨다.
- 헤스의 아들 볼프 헤스 -

헤스는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우스호퍼의 아들인 알브레히트가 포루투갈에 있는 중개인을 통해 영국과 접촉을 시도했다. 선을 대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영국 정보부가 밀사를 체포해버렸던 것이다. 이제 헤스는 단독으로 일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스스로 평화의 메신저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먼저 아우구스부르크의 공장에서 BF 110 전투기를 한대 얻었다. 그리고 이 비행기를 장거리 비행용으로 개조하였다. 가을부터 그는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또한 비밀리에 북해 상공의 기상상태를 알아보고 비행 금지 구역에 대한 지도도 마련했다. 1월 10일에 그는 첫 시도를 감행했다. 이륙전 그는 자신의 부관 칼 하인츠에게 봉투 두개를 건넸다. 하나는 히틀러 앞으로 쓴 이별의 편지였고 다른 하나는 이륙 네시간후 열도록 명했다. 그러나 출발후 두시간이 지나며 날씨가 악화되어 헤스는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5월초 헤스는 베를린에 있었다. 히틀러는 이미 소련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들의 마지막 대화는 4시간이나 이어졌다.


-  영국으로의 비행 -

5월 10일 저녁 스코틀랜드 상공으로 빠른 속도로 BF110 한기가 접근하고 있었다. 레이더 기지가 경고를 울렸고 두대의 스핏파이어 전투기가 요격을 위해 날아올랐다. 스핏파이어가 불과 몇마일 거리로 접근했을 때 BF 110의 캐노피가 열리고 조종사가 뛰어내렸다. 총통의 대리인이 영국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히틀러는 이 소식을 처음 듣고 믿지 못했다. 사실임이 판명되자 결국 "헤스가 내게 어떻게 이럴수 있는가?"라며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러나 총통은 앞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하우스호퍼는 체포되어 "영국과 평화를 이끌어낼 가능성이 있는가?"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영국으로부터 헤스의 임무가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히틀러의 결심은 굳어졌다. 대리인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정신분열 증상을 보여 광기어린 생각의 희생자가 된 것으로 발표되었다. 히틀러는 헤스가 돌아온다면 총살이나 정신병원중 택일해야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후일 자신의 생애 마지막 밤에 그에 대해 순수한 마음으로 운동에 참여한 이상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한편 처칠은 헤스를 평화의 사절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와 워싱턴이 이 상황을 오해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헤스는 인류를 구하려는 임무를 띠고 왔다는 말만 반복했다. 영국 정부는 헤스에게 모종의 약물을 주사했는데 이것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헤스는 현실감각을 상실해버렸다. 심문이 끝난 후 헤스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채 감옥에 수감되었다.

헤스는 마지막 순간에 새로운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으로 날아왔습니다. 내가 이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면 1941년 당시 헤스는 군의 사절이라는 신분이었습니다. 군의 사절은 국제법적으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를 포로로 잡아서는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경우 그는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내져야했습니다.
- 뉘른베르크 재판의 헤스 변호인 알프레드 자이들 박사 -

헤스가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제3제국은 서서히 몰락해갔다.


- 뉘른베르크 재판 -

2차대전이 종결된 후 독일 전범을 처단하기 위해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헤스는 범죄음모죄, 반평화범죄, 전쟁범죄, 반인륜죄 등 4가지 항목에 걸쳐 기소당했다. 헤스는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기 이전에 독일을 떠났고, 전쟁 지휘에도 가담한 적이 없었다. 결국 뒤의 두가지 항목에 대한 기소는 중지되었다. 소련은 헤스의 사형을 요구했고 미국은 제한적인 금고형을 원했다. 양자의 견해가 절충되어 종신형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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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판다우 감옥 구내를 홀로 걷는 헤스


루돌프 헤스는 베를린의 슈판다우 감옥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헤스의 시간은 1941년에 정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료 죄수들의 관계는 항상 좋았다. 슈페어와 폰 쉬라흐는 이 늙은이를 위해서 항상 조금이나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슈페어는 심지어 그의 침대를 봐주기도 했다.

1966년 이후에 슈판다우 감옥은 헤스를 위한 독방이 되었다. 종신형 판결을 받았던 다른 죄수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서독 정부는 헤스 또한 석방시키려 노력했으나, 소련이 끝까지 거부한 관계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감옥에 수십년 동안 갇혀있으면서도 헤스는 여전히 충성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1969년에야 가족들이 자신을 방문하는 것을 허락했다.

1987년 8월 17일, 헤스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헤스의 죽음은 자살이라고 발표되었는데 이는 격렬한 논란을 몰고왔다.

나는 아버지가 영국인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동기는 무엇일까? 아버지는 너무나 많은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결국 영국은 전쟁에 공동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질 위험을 제거했던 것이다. 그밖에도 살인이라는 것을 밝힐 근거는 많다. 아버지는 러시아인들이 자신을 석방하려는 것을 알았고, 또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는커녕 혼자서 구두끈도 맬수 없는 지경에 있는 93살의 노인이었다. 슈판 박사에 의해 이루어진 두번째 부검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영국인들이 묘사한 것처럼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이 판명되었다. 자살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 헤스의 아들 볼프 헤스 -

루돌프 헤스의 장례식은 그가 청년기를 보냈던 라이히홀츠그릔에서 수킬로 떨어진 분지델(Wunsiedel)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헤스 추종자들이 묘지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장례는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Rudolf_Hess-Gedenkmarsch.jpg

해마다 헤스가 사망한 날이면 순례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다. 옳건 그르건 간에 총통의 대리인 헤스의 신념은 현재까지 이어져내려오고 있다. 

우리 민족이 수천년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아들 밑에서 나의 수많은 날들을 바칠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소. 내가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시기에 대한 기억을 없애려하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소. 언젠가 나는 영원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그앞에서 내 자신을 변호할 것이오. 나는 내가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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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