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술랑(전 5막 7장)
유 치 진 (柳致眞)
장 면
제 1막 신라 문무왕12년 (지금 1300여 년 전) 초가을 어느 날 아침. 신라 서울인 서라벌(지금 경주(에 있는 김유신 장군 댁 사랑
제 2막 전막으로부터 10수 일 후, 저녁 나절부터 밤까지. 김유신 장군 댁 대문 앞 한길
제 3막 제 1장 전막의 익년. 즉 문무왕 13년 여름, 어느 날 해질 무렵.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어느 언덕 밑. 원술이 은피하여 있는 곳
제2장 전장으로부터 10여 일 후. 제 2막과 같은 무대
제 4막 전막으로부터 2년 후인 문무왕 15년 봄. 태백산(지금 봉화와 영양 사이에 있는 산) 산중 협곡
제 5막 제 1장 문무왕 8월경. 어느날 밤. 매소성(지금 양주) 싸움터
제 2장 전장으로부터 1개월 후인 9월 중. 명랑한 날. 궁전 뜰 앞
나오는 사람들
김 유 신 (70여 세의 노장군. 태대각간)
지 소 부 인 (유신의 아내. 문무왕의 고모되시는 분)
원 술 (유신의 차자. 젊은화랑)
담 릉 (원술보다 약간 연상인 원술의 좌관)
진 달 래 (당병에게 부모를 살해당한 16, 17세의 시골 처녀, 원술을 사랑하게 됨.)
대아창 · 효천 (총 관)
아 창 · 의 문 (비 장)
문 무 왕
원 각 대 사
문 지 기
처 사
사 신
기 타 하비, 시동, 시신들, 궁녀들, 전령 갑·을, 병사들, 동리 사람들, 동리 아이들, 농부, 승려와 그 도제들, 한 노인, 해골들, 구종들.
제 1막
나오는 사람들(등장순)
원술, 담릉, 지소 부인, 여비, 김유신, 진달래, 효천 의문, 원각대사, 시동.
때 문무왕 12년 초가을(음력 8월 말경) 어느 날 아침.
곳 신라 서울인 서라벌(지금 경주) 태대각산 김유신 장군 댁 사랑.
무대 거의 전체를 마루가 차지한 아담스럽고 검소한 사랑채, 무대 좌우편에 바깥 한길로 나가는 대문과 안으로 통한 일각문이 각각 섰다. 뒤로 우뚝 솟은 안채의 지붕 모퉁이가 보이는 외에는 주위는 수목으로 덮였다.
막이 열리면 원술, 마루에 나와 앉아 활과 화살을 바로잡고 있고, 담릉은 원술을 도와 아교를 끓이고 있다. 먼 한길에서는 동리 계집아이들의 노랫소리 들린다.
-----노랫소리------
이 몸 님일래 생긴 몸!
이 맘 님에게 바친 맘!
햇님같이 밝으신 님!
봄볕같이 따스한 님!
님이여! 님!
님일래 이 맘 밝아지고
님일래 이 몸 튼튼도 하여.
유신의 아내 지소 부인, 일간문에서 나타난다.
부인 얘 원술아, 간밤에 너의 아버지께 무슨 말을 여주어 드렸니?
원술 왜 그러세요.
부인 밤새도록 한잠 안 주무시더니 날이 새기가 무섭게 임금님을 배알하러 입궐하시었단다.
원술 어머니께선 아실 일이 아닙니다.
부인 또 난리가 났나 보구나. 간밤에 늦게 돌아왔으면 하루쯤 푹 쉬지 않고 아침부터 이렇게 활을 만지고 있는 것을 보니……,
원술 요즘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이 새삼스럽게 들고 일어나지 않아요? 그것이 아마도 당나라의 장난인 것 같아요.
부인 당나라는 우리의 동맹국인데도?
원술 그러니 걱정이지요.
부인 그러면 우리가 당나라를 상대로 또 싸워야 한단 말이냐? 그 싸움은 여태 백제, 고구려와 싸운 때 보다도 더 지독할 것이니 이 일을 어떻게……,
원술 어머니 걱정 마세요. 아무일 없을 터이니까―
부인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다.(안색이 질려 울상이 되어 일각문으로 달아나다시피 퇴장)
원술 괜한 말을 지껄였지?
담릉 그렇군요
원술 (바로잡은 활을 심술스럽게 쏘아보며) 당나라건 뭐건 어디 한번 덤벼 보아라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화계에 만들어 놓은 해태의 콧잔등이에 꽂힌다.)
원술과 담릉, 통쾌하게 웃는다.
밖에서 문지기의 외치는 소리 "태대각간님 듭시오." 태대각간 김유신 장군, 대문으로 등장. 구중들 따랐다. 원술과 담릉. 옷 앞을 여미고 뜰 아래에 읍하고 있다.
장군 (마루 위로 올라간다. 구종들, 대문 밖으로 몰려간다.)
원술 아버지, 그 말씀을 나랏님께 상주하셨지요?
장군 반란을 일으킨 유민들 중에 정말 당나라 군사가 섞여 있었지?
원술 당나라 군사뿐이겠습니까? 머리 꽁지를 땋아내린 글안, 말갈의 오랑캐까지 섞인 것을 눈으로 보았다니까요.
담릉 마침 그 오랑캐의 머리꽁지를 소인이 가지고 왔습니다.
원술 옳지!
담릉 (마루 끝에 있는 자기 짐에서 수건에 싼 되사람의 머리꽁지를 끌어내서 장군에게 보여 준다.)
원술 그것은 우리의 화살에 죽어 넘어진 놈의 머리를 베 온 것이예요. 무슨 증거나 될까 하고.
장군 분명 되놈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와 당나라 사이의 이간을 붙이려고 우정 이런 모략을 쓰는지도 몰라. 이를테면 우리는 당나라와 싸우게 하여 놓고 어부지리를 취하려는 것인지 모른단 말이야.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기는 하였지만 그 묵은 세력은 아직도 호시탐탐 우리의 삼국 통일의 대업을 망쳐 놓지 못해 갖은 흉계를 다 하고 있으니까 ――
원술 그런 모략이라면야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하지만 고구려가 망한 지 4년, 그리고 백제가 망한 지 벌써 십여 년이 된 오늘까지 그들 당나라가 자기의 군사를 우리 나라에 주둔시켜 두는 것부터가 수상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장군 어쨋든 백제, 고구려의 국경이 무너졌다고 마음 놓을 때는 아니야. 너희들 화랑은 각별히 단속하여 태종 무열왕께서 이룩하여 놓으신 국토 통일의 대업을 훼손치 않게 최후의 피를 흘릴 각오를 하여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원술 예.
장군 장지를 열고 방으로 퇴장
원술 좌관, 자네 곹 영문에 가서 낭도더러 뿔뿔히 흩어지지 말고 대김하고 있으라고 일어 주게.
담릉 예. 그러면 곧 가서 그렇게 일러 주고 오겠습니다.(대문으로 씩씩하게 퇴장)
원술 (마루 끝에 걸터않아 무슨 생각에 잠기더니) 얘야.
시동 예.
원술 (싸움터에서 신고 온 흙투성이가 된 신발과 갑주를 가리키며) 저것들 손 좀 보아 두어라.
시동 예.(하고 시키는 대로 한다.)
원술 (조용히 시를 읊조리다가 깊은 한숨을 쉬며) 한 고개를 넘으면 또 한 고개! 이 시름이 사라지면 또 저시름! 한 나라가 바로 서는데 이렇게 힘이 들고 애가 쓰인담. 그야말로 첩첩태산이군.
원술 큰서방님, 일어나셨느냐?
시동 예.
원술 형님을 만나 뵙고 같이 걱정을 해 보아야겠다.(머리꽁지를 싸들고 퇴장)
시동(신발의 흙을 떨어 들고) 에이참, 세상이 또 시끄러워지려나보다.
담릉, 어떤 시골 계집아이(진달래)를 데리고 대문 밖에 나타난다.
담릉 (대문턱에 들어서서 바깥을 보고) 들어와. 괜찮아. 들어오라거든 들어와.
진달래(조심스러이 대문 안으로 들어온다. 심신이 매우 피로해 보인다.)
담릉 여기 좀 걸터앉아.
진달래(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담릉 매우 고단한 모양이군
진달래 (멍하니 앉았을 뿐 아무 대답도 하려들지 않는다.)
시동 미치광이 계집아이 아니오?
담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세수나 시키고 밥이나 한술 맥여라.
시동 이 계집애야, 자, 날 따라 이리 와.(일각문 쪽으로 간다.)
진달래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시동 참, 이상한데요.
원술, 일각문에서 나타난다.
담릉 도령님의 분부대로 낭도들에게 다 일러두었습니다. 꼼짝 말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원술 나도 지금 안에 가서 큰서방님을 뵙고 이 머리꽁지 얘기를 드리고 오는 길이야. 형님께서도 병중에 계시면서도 매우 근심을 하시더군.(진달래를 가리키며) 이 계집아이는?
담릉 금방 도령님의 심부름을 갔다.저 무내다리를 건너려니까 동리 아이들이 이 계집아이에게 돌멩이질을 하고 있겠지요. 그래 붙들고 물어 보니까 마읍성에서 이 지경이 되어 왔군요.
원술 거기에 또 반란이 일어난 모양이군?
담릉 양친은 물론이요, 집까지 다 태워버렸대요.
원술 마읍성이라면 적지 않은 고을인데 도대체 언제 또 소동이 일어났나?
진달래 ......
원술 집은 몇 채나 타고 백성은 얼마나 죽었지?
진달래 (아랫입술만 깨물고 분한 듯이 느낀다.)
원술 매우 시달린 모양이군.
담릉 (달래듯이) 여봐. 이 도령님은 너를 해롭게 하실 분이 아니야. 백성을 못 살게 구는 놈들을 다 쳐 없에려는 화랑이시어. 이것이나 먹고 정신을 차려서 그 나쁜 놈들에게 수모당한 얘기나 들려 주렴.
진달래 해야 소용없어요.
담릉 왜?
진달래 저는 여태 화랑을 하늘같이 믿었어요.
월술 그랬는데-----
진달래 (겨우)……아, 알고 보니 화랑은 믿을 것이 못 되어요.
원술 그 무슨 소리야?
진달래 (일어서며) 저는 갈 테에요.
원술 (앞을 막으며) 왜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거야? 삼국 통일을 위해서 피를 흘린 우리 화랑의 공을 왜 모르겠다는 거야?
진달래 행, 삼국 통일?
원술 조각보같이 짖어진 이 나라를 한 덩어리로 뭉친 게 누누냐 말이야?
진달래 그 애쓴 것이 지금에 이르러 무슨 소용이예요?
원술 뭣이?
진달래 화랑은 저의 워,원수예요!
원술 원수?
진달래 그래요!
원술(악을 쓰며) 이 칼이 눈에 안 뵈느냐?(칼자루를 잡고 떤다.)
진달래 (몸을 갖다 맡기며) 제발 죽여 주세요. 죽여 주세요. 당나라 놈의 손에 오리가리 찢겨 죽느니보다 여기서 죽는게 나아요. 차라리 나아요.
원술 (칼자루를 놓으며) 아니, 당나라 놈의 손이라니?
진달래 저의 아버지 어머니를 찔러 죽인 놈도 당나라 군사고 저의 집에 불을 싸지른 놈도 당나라 군사예요.
원술 분명 당나라 군사란 말이야?
진달래 예.
원술 언제?
진달래 바로 사흘 전, 산에 숨어 있는 고구려의 유민을 토벌하여 주겠다는 구실로 우리 마을 성 밖에다 진을 치고 있던 당나라 군사가 별안간 창뿌리를 돌려 우리 성안을 무찔렀어요. 너무도 뜻밖에 습격을 받았기 때문에 성안 사람들은 미쳐 도망도 할 새 없이 모조리 몰살을 당하고 그 틈에 저의 아버지 어머니까지도!(느끼며)이런 몹쓸 당나라와 동맹국을 맺은 이는 누구며 당나라 군사를 이 땅에 들어오게 한 이는 누구예요?
원술 (찔린 듯이 턱 주저앉으며) 좌관, 놈들은 그예 거짓탈을 벗고 나섰군 그래.
진달래 이러구도 당신네들은 우리의 원수가 아니예요? 저의 아버지, 어머니를 살려 내세요! 살려 내요!
저의 아버지, 어머니는 아무 죄두 없어요. 있다면 우리 나랏님을 섬긴 죄밖에 없고, 태대각간 김유신 장군을 위한 죄밖에 없고, 시골서 길쌈하고 농사지어 먹고 사는 죄밖에 없어요.
원술 아----이 당나라 놈들을! (분해서 입술을 발발 떨더니 진달래 앞에 무릎을 꿇으며)미안하오. 미안해.
진달래 (별안간 힘없이 웃으며) 호호호…… 이렇게 쥐어짜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온대?
공연한 수작이야. 죽은 이를 살려줄 이는 아무도 없는걸. 이 세상에는 없는걸.(중얼거리며 일어선다.)
원술 어디로 가요?
진달래 모르지오. 어디로 가는지?
원술 좌관, 붙들게.
담릉 이봐!
담릉은 한길로 나가는 진달래를 따라 퇴장
원술 (진달래의 나가는 뒷모양을 바라보고 섰더니 결심한 듯이 휙 돌아서며) 쳐야 해! 천하에 흉모스러운 이 당나라 놈들을 무찔러야 돼!
장군 (분한 듯이 이 때 마루로 나선다. 그는 여태까지 영창문을 반쯤 열고 엿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불이 이는 듯하다.)
원술 아버지, 자고로 신의를 어긴 자에게는 어떠한 벌을 주어야 합니까?
장군 반드시 죽음을 주어야 하느니라.
원술 당나라는 신의를 어겼습니다. 그들은 동맹국인 우리를 잡아먹지 못해 갖은 흉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나라를 쳐야 합니다. 이 땅 덩어리 위에서 그 죄악의 씨를 없애버려야 해요.
장군 마읍성의 소식을 듣고는 있었지만 그게 모두 당나라의 장난이었다니! 이 늙은 아비도 살점이 떨려 견딜 수 없구나.
원술 아버지, 소자가 나서겠습니다. 소자에게 당나라를 몰아치게 하여 주십시오.
장군 (비통한 듯이) 지금은 그 때가 아니다.
원술 때가 아니라니요?
장군 우리는 되도록 전면 교봉을 피하여야 하느니라.
원술 그들이 수백만 대군을 거느렸다고 두려워 하십니다그려. 염려 마십시오. 우리 신라가 비록 소국이나, 천이 하나, 만이 하나로 뭉치면 철과 같이 강하여집니다. 아버지께서도 항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힘이란 결코 그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에 있는 것이라고.
장군 그것은 그래. 하지만 백제, 고구려를 토평하기에 이미 이십여 년의 긴 세월이 걸리지 않았느냐? 게다가 당나라와 싸움이 붙으면 또 몇 해가 걸릴 지 모른다. 잘못하면 오십 년 육십 년이 걸릴 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그 어간에 고생하는 백성이 얼마나 불쌍하냐?
원술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당나라의 행패를 그대로 두고 보시렵니까?
장군 결단코 두고 보지는 않는다. 나도 싸운다. 싸울 테다.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울 테다. 허지만, 칼을 들기 전에 나는 기다려야 할 일이 있어. 이런 충돌이 있을 것을 미리 예측하고 벌써 일 년 전에 나는 당나라 임금에게 상주한 바 있다. 그들의 군사를 불러 가라고.
원술 그 회답을 기다리고 계시는 동안에 우리 나라는 없어지고 맙니다. 나라가 없어진 다음에야 땅을 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장군 위급한 때일수록 사람은 신중하여야 한다. 싸움이란 칼을 들고 나설 때까지는 은인자중하여야 해. 참고 참다가 터뜨려져야 싸우는 힘도 커지는 법이야.
원술 이러시다가 백 년에 쌓은 탑이 일시에 무너지면?
장군 당나라로 유학 보낸 원각 대사가 귀국한다는 기별이 왔어. 그 편에 무슨 소식이 있을 것이다. 그 때까지!
원술 그러시다면?(말없이 차고 있던 칼을 끄른다.)
장군 이게 무슨 짓이냐?
원술 그때까지 이 칼을 맡아 주십시오. 이것을 차고서야 외적이 국토를 침노함을 어째 수수방관하고 있겠습니까?
장군 에이 고이한 것! 그 칼 도로 못 찰까?
원술 (추상 같은 아버지의 호령에 끄르려던 칼을 못 끄르고 주춤한다.)
장군 (오히려 순순히) 대장부란 칼을 드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들 때를 가리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국가 대사란 단순히 힘으로만 해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때로는 절충도 하고 모략도 있는 법이야. 그 칼, 칼집에 도로 넣고 물러가 있지 못할까?
원술 그러면……
장군 내가 부를 때까지 기다려라.
원술 예.(내심 불만이나 하는 수 없이 물러간다.)
장군 (퇴장하는 원술의 뒷모양을 바라본다. 미소를 띄며) 아무리 당나라가 흉모를 꾸며도 우리 나라를 쓰러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나라를 위하여 저렇게 죽기를 원하는 젊은이가 있는 동안은 결단코 쓰러지진 않어. 허허허……대아창, 거기 있소?
효천 (구석 별방에서 아까부터 나와 섰다가) 예.
장군 마읍성에서 당나라 군사의 행패가 자심한 모양이니 곧 전령을 보내어 한시성 태수더러 그 고을의 백성을 보호하게 하며 아울러 그 쪽에 있는 당나라 군사의 동정을 일일이 사실하여 오게 하오.
효천 예.
장군 그리고 대아창은 이 길로 바로 입궐하여 당나라 유학생 원각이 들어왔나 알아보고 오오.
효천 예.
효천, 미처 퇴장하기 전에 문지기,급히 나타난다. 그 뒤에 당나라 유학생 원각대사 따라 들어온다.
문지기 당나라에서 돌아온 원각 대사가 오셨습니다.
원각 (유신 앞으로 나아가 읍하며) 장군, 그동안 기체 대안 하십니까?
장군 오, 원각 대사, 언제 귀국하였소?
원각 행장을 풀어 놓기가 바쁘게 나랏님을 배알하고 오는 길입니다.
효천 당나라에서 얼마나 새로운 공부를 많이 하셨소?
원각 오, 대아창.
효천 지금 장군의 분부가 계셨기에 대사의 소식을 알려고 입궐하려던 참입니다.
원각 하하하...... 그렇습니까?
장군 거두절미하고 가장 긴급한 소식부터 묻겠소.대사 떠날 때 당나라 황제께서 전하는 것이 없었소?
원각 이 글월을 갖다 드리라 하였습니다. 금방 나랏님께서 보시고 장군께 보이라는 어명이더군요.
장군 (원각 대사가 내주는 서함을 읽더니 별안간 얼굴이 질린다.) 이게 무슨 소리람! 대사, 이것을 보시고 나랏님께서는 무슨 말씀이 계셨소?
원각 너무도 기가 막혀 그렇삽는지 눈을 감으시고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장군 응당 그러실 것이오.
원각 대관절 무슨 사연이온지오?
장군 하도 말 같지가 않아 입 밖에 낼수도 없소.(서함을 보이며) 이것을 보오. 도시 이런 법이 있소? 이
이십 년 동안 우리의 전 국력을 기울여 토평하여 놓은 백제와 고구려의 고지를 그들에게 도로 내주라는
것 아니요? 즉, 우리 동족끼리 영원히 피를 흘리고 싸우라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당나라는 우리가 하나로 뭉쳐 그 힘이 커짐을 시기함은 물론, 제 임의대로 휘두르지 못하게 됨을 원통히 여기고 있는 것이오. 내가 당나라의 배신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흉모스러운 줄은 정말 몰랐소.
원각 그나 그뿐입니까? 장군께서는 아직 당나라로 보낸 우리 사신 파진창, 양도의 소식 못 들으셨지요?
3년 동안이나 옥에 가두어 그예 옥사시키고 말았습니다. 일국의 사신을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장군 여우를 잡으려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거로군!
효천 우리가 너무 은인자중하는 나머지, 수세만 취하고 있다가는 벌써 찾아 놓은 조국의 강토마저 순식간에 외적의 아가리에 물려보내고 말겠습니다.
장군 (기가막힌 듯이 마루 구석에 있는 파초 잎사귀만 만지다가 문득 무엇을 생각한 듯이 가만히) 나는 곧 입궐하여 상감마마를 뵈야겠소. 대사도 나와 같이 갑시다.
효천 별안간 무슨 일이신지요?
장군 오늘의 판국이 이 서한의 내용과 일치함을 보매 여태까지의 그들 당나라 군사의 행패는 본국의 지령이었던 것이 분명하오. 그들이 우리에게 싸움을 건지는 오래요. 대아창은 영문으로 내달아 출전할 차비를 해두라 하오.
효천 예!(급히 퇴장)
장군 이런 줄을 알았더면 원술의 말을 진작 들을 것을!
장군은 대사와 급히 퇴장. 무대에는 아무도 없다.
대문으로 원술, 나타난다. 그도 매우 침통한 얼굴이다.
원술 (마루 끝에 드러누우며) 야----집에 와서 하루 저녁밖에 안 지냈지만 벌써 십 연도 더 된 것 같아!(계집아이들의 아까 그 노랫소리 들린다. 획 일어나서 거닐다가 뜰에 핀 가을 국화를 몇 송이 꺾어버린다.)
담릉 (진달래를 데리고 대문 밖에 나타나) 자, 들어와요.
진달래 (뜰에서 원술을 발견하고 주춤 선다.)
원술 들어와요. (진달래 마지못해 들어온다.) 아까는 참 미안하였소.
진달래 천만에요. 제가 잘못했지요. 우리의 은인인 화랑에게 감히 입에도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으니 이런 죄많은 일이 어디 있단 말씀이에요?
원술 아니오. 그게 모두 옳은 말이었소. 그렇게 옳은 말을 하여 준 이에게 칼을 빼려 들었으니 이런 무례한 짓이 또 어디 있겠소?
진달래 그것은 화랑을 위하여서지요. 화랑을 위하는 것은 나라를 위하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원술 그럴까요? 그렇게 봐주시면 다시 없이 고맙고요. 한데 이름은?
진달래 진달래예요.
원술 뭘 좀 자셨소?
진달래 (걸터앉으며) 예.
담릉 이런 소문 못 들으셨어요? 금방 행길에서 누가 그러는데 우리가 당나라를 치게 되었다는데요.
원술 (의아해서) 그 정말이야?
장군 (급히 등장하며) 내 갑옷을 내 놓아라.
시동, 장군의 갑주, 투구, 칼 등을 마루 중앙에다 내놓는다.
영문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와 군고 소리!
원술 (감격하여) 아버지!
장군 원술아, 인제 때는 왔다. 네 소원이 성취될 때는 왔다.(시동에게) 얘야,그 갑옷을 입혀라.
원술 (갑옷을 못 입게 하며) 아버지께서 출전하셔서는 안 됩니다.
장군 이번에야말로 내 남은 힘을 다하여 이 나라에 대한 내 마지막 봉사를 하여야겠다. 너는 너의
낭도와 더불어 심신을 연마하고 있다가 내가 전사하였다는 기별이 있거든 곧 내 뒤를 이어라.
원술 아닙니다. 소자가 나가겠습니다. 아까 아버지께서는 소자더러 물러가 기다리라고 하지 아니하셨습니까?
장군 너는 못 간다.
원술 왜 못 갑니까? 소자가 나이 어려 그러십니까? 십여 년 전 황산 싸움에 관창이 비록 나이 어렸으나....
장군 네 나이 어려 그런 것이 아니다.
원술 소자의 힘과 재주가 미급할까봐 그러십니까?
장군 아니다. 너의 실력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너를 아끼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풀밭에서 죽이기 싫다.
원술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야말로 돌아가셔서는 안 됩니다. 이 당나라와의 싸움은 백제, 고구려와 싸우던 때와는 다릅니다. 이 때야말로 건곤일척하여 이 나라, 이 겨레의 운명을 결정 할 위급존망 지추가 아닙니까? 아버지께서는 최후까지 살아계시어 수십 년 싸우신 그 풍부하신 경력으로 삼군을 질타하셔야 합니다. 아버지의 전지력을 쓰실 때는 이때예요.
장군 오냐.너의 결심이 그렇다면 너 먼저 나가거라. 이 칼을 들고 내 대신 싸워라. (자기의 칼을 쥐어 준다)
원술 고맙습니다, 아버지!
장군 자고로 화랑이란 죽음은 있어도 패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죽느냐? 이기느냐? 이 강토에 우리 겨레가 한 사람 남지 않더라도 우리는 싸워서 이겨야 한다.
원술 이 목숨을 바치어 반드시 이나라를 빛나게 하고야 말겠습니다.
장군 암, 그래야지, 그래야만 이 국토를 이만큼이라도 만들어 놓으려고 애쓰신 우리의 선령의 피를 욕되게 하지 않지.
지소 부인 (등장하여) 원술아, 내 네게 마지막 선물로 이 머리꼬지개를 주마. 너의 형 삼광이 가림성 싸움에 출전하였을 때 투구에 이것을 꽂아 주었더니 대승을 하고 돌아오더라. 너 있는 곳에 언제나 이 에미도 같이 잇는 줄 알고 목숨을 내놓고 싸워라.
원술 예, 어머니. 명심하겠습니다.
나팔 소리와 북소리 더 우렁차게 들린다. 대아창 효천, 아창 의문 무장을 하고 나타난다.
효천 영문에서 울리는 저 우렁찬 쇠북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영문에서는 행군할 차비가 다 되었습니다.
장군 대아창, 내 이번에 직접 진두에 서려 하였으나, 생각한 바 있어 원술을 보내겠소. 그러면 대아창 효천이 총관이 되고, 원술과 의문은 효천의 좌우 비장이 되오.
삼인 예, 알았습니다.
장군 그러면 떠나지.
원술 아버지, 이 처자를 집에 두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장군 염려 말아라.
원술 이 길로 그대 아버지, 어머니의 원수를 갚고 오마!
한길에서는 출전을 재촉하는 행군 나팔 소리. 효천, 의문, 원술 퇴장. 좌관 담릉은 원술의 뒤에 따랐다. 유신 장군, 지소 부인, 기타 무대에 있는 사람들 전부, 대문 밖으로 나아가 전송한다.
진달래, 홀로 감격의 눈물을 씻는다.
-막-
제 2 막
나오는 사람들 김유신(金庾信) 장군, 지소(智炤) 부인, 원술(元述), 진달래, 담릉(淡凌), 문지기, 하비, 전령 갑·을, 동네 사람들, 큰 아이, 동네 아이들, 남녀 하인들, 병정들, 사자(使者)
때 1 막에서 10수 일 후, 저녁 나절부터 밤까지
곳 태대각간 김유신 장군 댁 대문 앞 한길
무대 큰 솟을대문 앞에 고목 한 그루 섰고, 그 아래에는 재매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막이 열리면 대문 앞에 문지기가 서 있다. 동네 아이들 여럿이 모여, 어떤 큰 아이를 둘러싸고 욕을 하고 있다.
동네 아이들 (소리를 맞추어)
에이. 당(唐)나라놈 !
제 것 두고 남의 해
너엄실 엿보는
에이, 욕심쟁이 !
큰 아이 뭣이 어째 ? (여러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의 멱살을 잡고 땅바닥에 메어치며) 뭣이 어째 ?
동네 아이들 (다 같이 소리 높여) 아, 이것 봐요 ! 이놈이 사람 죽여요.
동네 사람 갑 (지나가다가) 아니, 이게 웬일이냐, 이놈들아 ! (싸움을 말리고) 대관절 이게 무슨 짓이냐 ? 다른 데도 아니고 태대각간 댁 문전에서.
동네 아이들 (큰 아이를 가리키며 이구동성으로) 이놈이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아 먹어요. 제 손에는 저렇게 큰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네 사람 갑 호, 그래 ? 그러면 이놈이 바로 당나라놈 아니냐 ?
큰 아이 (대들며) 왜 내가 당나라놈이어요 ?
동네 사람 갑 당나라놈들은 넓고 넓은 제 땅을 두고도 조그마한 우리 나라를 못 먹어 극성 아니냐 ? 그러니 네놈이 당나라놈이지 뭐냐 ?
동네 아이들 하하하, 정말 그래요. (또 한번 소리를 맞추어 의기양양하게 '에이, 당나라놈'을 노래한다.)
동네 아이들의 이 노래에 압박당한 듯이, 큰 아이 쫓겨서 퇴장. 여러 아이들, 여전히 소리치며 따라 나간다. 그 광경을 보고, 동네 사람 갑, 웃으며 퇴장. 아이들의 노랫소리, 차차 멀어진다.
진달래, 힘없이 나타난다. 전막과는 딴판으로 깨끗하게 차렸다. 손에는 호리병을 들었다.
문지기 어디 갔다 오나 ?
진달래 토함산에요.
문지기 옳지, 기도드리러 ?
진달래 예, 원술 도련님이 싸우고 계시는 저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까지 꼬박 사흘 밤 사흘 낮을 빌었어요. 하지만, 어찌 될는지 ? 할아버지, 백수성 싸움터에서 무슨 기별이나 있었소 ?
문지기 걱정 마라.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란다. 너도 너지만, 동네 아이들까지 저렇게 당나라놈을 비방하고 있는데야 하늘인들 어찌 우리를 버리겠냐 ?
진달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런데 간밤에 내 꿈이 하도 뒤숭숭해서…….
문지기 그래서 저렇게 얼굴빛이 좋지 못하군 그래.
진달래 바로 오늘 새벽의 일이어요. 토함산 바위 위에다 정화수를 떠 놓고, 내가 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았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원술 도련님께서 과연 백마를 타고 시퍼런 창을 휘두르면서 적을 무찌르며 나타나겠지요. 인제야 끝장이 나는구나 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노라니까, 저 북쪽 하늘에서 난데없는 시커먼 구름이 일지 않겠어요. 그러더니 다짜고짜로 원술 도련님을 휩싸 가지고 간단 말이어요. 그것을 보고 어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 ! "안 돼요. 우리 도련님을 휘몰아 가서는 안 돼요." 하고 펄쩍 뛰어 덤볐지요. 그 통에 깜짝 놀라 잠을 깨기는 하였지만, 어쩐지…….
문지기 이상한데…….
진달래 정말 이상하지요 ? 어떻게 해요, 도련님 신상에 무슨 불행한 일이라도 생겼으면 ?
문지기 그러면 큰일이게 ?
진달래 얼른 사랑에 들어가서 알아보고 오오, 백수성에서 무슨 기별이나 있었나.
문지기 그래, 곧 알아보고 올게. (들어가려다가 발길을 멈추고) 아니야, 꿈이라는 것은 생시와는 정반대라지 않아 ? 그러니까 그 꿈은 도련님께서 큰 공훈을 세우실 꿈이야.
진달래 (그래도 걱정스러워하며) 그럴까요 ?
문지기 암, 그렇지. 언젠가 황산 싸움에서 장군께서 대승하셨을 때에도 우리 마님의 꿈은 아주 말씀이 아니었어.
진달래 그렇다면 무슨 걱정이어요 ?
문지기 진달래야, 너 도련님을 그렇게 사모하다가는 병난다.
진달래 내가 사모하는지 할아버지가 어떻게 아셔요 ?
문지기 알지.
진달래 아니어요. 나 같은 게 어찌 감히…….
문지기 늙은이는 못 속인다. 네 눈동자가 벌써 다른걸, 뭐 !
진달래 도련님께서 나 대신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원수를 갚으러 떠나지 않았어요 ? 그러니까…….
문지기 그 핑계 하고 네가 마음놓고 도련님을 생각하는 거로구나. 허허허, 에이, 앙큼스런 계집애 같으니 !
진달래 아이, 큰일나겠네. 그런 말씀 하시면 나는 이 댁에 붙어 있지 못해요. 마님께서 얼마나 엄격하시다고요…….
문지기 쫓겨날까 봐 속에만 간직하고 있자는 수작이로군. 좋아, 좋아. 그럼 네 소원대로 비밀은 지켜 줄 테니까, 그 대신 누룽지나 좀 긁어다 다오, 심심할 때 먹게.
진달래 (대문 안으로 퇴장하며) 그래요, 그럼.
문지기 (큰 소리로) 얘, 얘, 그만두어라. 농담이다, 농담 ! (진달래, 어느 새 대문 안으로 퇴장하자) 계집애란 저렇게 앙큼스러운 데가 있단 말야. 어림없는 생각이지. 하늘의 별 같은 원술 도련님을 제가 어쩌려고 마음에 두고 저런담 ?
진달래 (누룽지를 싸들고 다시 나타나며) 이것 !
문지기 그게 누룽지냐 ?
진달래 예, 얼마나 맛이 좋다고요. (떼서 입에 넣으며) 백수성 싸움이 어찌 되었는지 알아다 주면 이것 드리지.
문지기 흐흐흐……. 너, 참 몸이 바짝 타나 보다. 사실인즉 나도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 나 대신 여기 좀 지켜라.
진달래 빨리 다녀오오.
문지기 음.
문지기, 급히 퇴장하려 할 때, 멀리서 나팔 소리, 만세 소리 들린다.
진달래 (귀를 기울이며) 가만 ! 저것이 무슨 소릴까요 ?
문지기 글쎄……. 옳지, 됐다 ! 우리 편이 이겼다는 기별이다.
진달래 이겨요 ?
문지기 그럼 ! 저 만세 소릴 들어 봐라 ! 이긴 게 아니고 무어냐 ?
진달래 정말일까요 ?
문지기 (안으로 급히 퇴장하며) 안에 가서 얼른 기별하여 드려야지.
진달래 소리가 가까워 오네.
전령 갑, 급히 등장. 그 뒤에 동네 사람들, 따라 들어온다.
전령 갑 장군께서 지금 댁에 계시온가 ?
진달래 예, 계십니다.
전령 갑 장군을 먼저 뵈옵고 대궐로 돌아가야지. (대문 안으로 들여서려다가 주춤하며) 애고, 황송하옵게도 친히 이리로 나오시네.
김유신 장군, 뒤에 지소 부인, 그리고 하인 다수, 문지기의 안내로 나타난다.
전령 갑 (땅에 엎드려 절하며) 장군께 말씀 아뢰나이다. 소인은 백수성 대아찬 효천(曉天) 총관이 보낸 전령이온데…….
장 군 효천이 떠난 지가 벌써 열흘이 넘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전갈을 보냄은 어찌 된 일인고 ?
전령 갑 오는 도중에 때아닌 비를 만나, 길이 막혀 예정보다 사흘이나 늦었습니다.
장 군 싸움은 어찌 되었느냐 ? 나팔 소리를 들어 보아도 우리가 승세인 모양이구나.
전령 갑 아주 대승입니다.
장 군 그것 반가운 소식이다.
전령 갑 여기서 떠난 우리 군사가 백수성에 들이닥친 때가 바로 밤중이었는데, 허리띠를 늦출 새도 없이 그대로 적진에 뛰어들어 불의의 엄습을 하였더니, 적은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라 거미새끼와 같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습격에 죽어넘어진 적군의 목은 수천 급 ! 백수성 앞은 적의 피로 바다 를 이루었습니다.
장 군 우리 군사의 피해는 ?
전령 갑 거의 없다시피 하였습니다.
장 군 거의 없어 ?
전령 갑 예.
장 군 아, 고마워라. 이 기별 있기를 나는 얼마나 고대하였는지 모른다.
전령 갑 더구나 이 싸움을 진두에서 솔선 지휘하신 분이 누군 줄 아십니까 ? 나이 어린 원술 비장입니다.
부 인 원술이가 ?
전령 갑 아마도 지금쯤은, 원술 도련님의 칼끝에, 그 교만 무례한 당나라 장수 고간의 목이 떨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장 군 승전고를 울려 온 백성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라. 나는 입궐하여 상감마마께 이 소식을 아뢰겠노라.
문지기 예. (큰 소리로) 승전고를 울려라.
김유신 장군, 대궐 쪽으로 퇴장. 전령 갑, 뒤따른다. 북 소리 둥둥 울린다. 여기저기서 동네 사람들의 만세 소리 터진다. 지소 부인, 하인들, 안으로 퇴장.
진달래 (혼자말로) 하늘이 나를 안 버리시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 주셨네. 원술 도련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문지기 고맙다는 인사는 내게 해라. 원술 도련님의 이번 승리는 내 해몽이 좋아 그런 거다.
진달래 정말, 할아버진 영특하셔 !
동네 사람들의 만세 소리, 가까이 들리더니, 하나 둘 대문 앞 한길로 모여든다. 아이들이 노래 부르며 나타난다. 한길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노래와 춤으로 한바탕 어우러진다.
이윽고 전령 을, 비통한 얼굴로 등장. 증오에 찬 눈으로, 신나게 노는 동네 사람들을 노려보더니, 고래 같은 소리로 부르짖는다.
전령 을 에이, 이 못난 것들 ! 당장에 집어치우지 못하겠느냐 ?
일동, 그 소리에 춤과 노래를 딱 그친다.
동네 사람 을 이 자가 어떤 자냐 ?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고 우리의 노는 것을 막는 거냐 ?
전령 을 저리들 비켜 !
용사들, 들것을 두 개 들고 조용히 나타난다. 들것 뒤에는 투구를 든 용사 따른다.
일동, 이 불의의 참경에 억눌릴 듯이 불안한 시선을 서로 주고받으며, 웬일인가 하고 섰을 뿐이다.
이때, 김유신 장군, 대궐 쪽에서 들어오다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란다. 지소 부인, 하비와 함께 들어오다가 멈칫 선다.
장 군 이 들것이 웬 건고 ?
전령 을 장군께 상서롭지 못한 말씀 올림을 용서하소서.
장 군 (들것을 가리키며) 이것이 도대체 무어냐 ?
전령 을 이것은 대아찬 효천 총관과 아찬 의문(義文) 비장의 시체이옵고, 저것은 아찬 원술 비장의 유물인 줄로 아룁니다.
부 인 원술의 ? (투구를 받아 보고) 이 투구에 꽂힌 이 뒤꽂이 !
하 비 분명하옵니다.
부 인 아, 원술아, 이게 웬일이냐 ? 여자의 뒤꽃이를 꽂아 주었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됐단 말이냐 ?
장 군 (시체를 일일이 들여다보고) 분명 효천과 의문이다. 금방 백수성에서 대승하였다는 전고가 왔기에 나는 그 뜻을 상감마마께 아뢰고 오는 길인데, 이것이 또 무슨 청천의 벽력이냐 ? 장수들이 이렇게 모조리 죽었다면 그 나머지 군사야…….
전령 을 (울먹이며) 살아 남은 것이란 우리 몇뿐일 줄로 아룁니다.
장 군 전멸이란 말이냐 ? 내가 칠십 평생을 싸워도 이렇게 전멸을 당해 본 적은 없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노릇이냐 ?
전령 을 우리 군사는 적의 군사를 휘몰아 너무나 깊이 적진에 뛰어들어갔습니다. 백수성에서 단숨에 석문벌까지 쳐들어갔으니……. 그 때문에 우리는 그예 적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그물에 든 고기와 같이 일망타진(一網打盡)을 당한 셈이지요.
장 군 그러고 보니, 백수성 싸움에서 당나라 군사가 거미 떼같이 흩어진 것은, 우리 군사를 그물에 싸려는 계략이었나 보군 ! 에이, 못난 것들 ! 그 간사한 당나라 장수 고간의 꾀에 속아 넘어가다니 ! 에이, 못난 것들 !
일동,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씻는다.
장 군 (이윽고 생각을 돌려) 그만들 울어라. 분해한들 무엇 하겠느냐 ? 싸움이란 운수 ! 이들은 죽음으로써 적을 막았으니, 이 역시 우리의 공신(功臣)일시 분명하다. 그런즉, 우리는 이 용사들의 시체를 개선 장군으로 맞이하여야 할 것이다.
전령 을 장군께, 더구나 마님께 뵈올 면목이 없음은, 소인들이 불민하와 미처 원술 비장의 시체를 찾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장 군 자식을 싸움터에 보내고 그 시체를 못 찾은 부모가 나뿐이며 내 아내뿐이겠느냐 ? 그 애가 쓰던 이 투구나마 찾아왔으니, 이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흡족하다. (부인에게) 그렇지 않소, 부인 ?
부 인 그 말씀은 그만두십시오.
전령 을 자, 우리 모두 다 같이 가서 이 용사를 검산에 모십시다.
일 동 예.
경건한 음악. 들것이 움직인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 진달래까지도 들것 뒤를 따라 나간다. 무대에는 김유신 장군과 지소 부인, 그리고 문지기만 남는다. 무대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지소 부인은 나가는 시체의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가 흑흑 흐느낀다. 참았던 울음이 터진 것이다.
장 군 여보, 울지 마오, 우리만이 자식을 죽였겠소 ? 우리 선조가 국토 통일에 뜻을 둔 지가 벌써 수백 년, 그 동안에 수없는 부모가 자식을 잃지 않았소 ? 당신마저 울면 이 나라는 울음 판 ! 이 강산이 온통 눈물바다가 될 것이오. 자 그만 하오. 우리 원술이가 이 나라의 화랑답게 번듯하게 죽었다 하니, 이 위에 더 큰 자랑이 어디 있겠소 ?
부 인 정말 그 자랑마저 없었으면 이 아픈 가슴을 무엇으로 위로 하겠어요 ?
장 군 아직도 우리에게는, 병석에는 있지만 큰아이 삼광(三光)이 있고, 셋째 아이 원정(元貞)이 있고, 그 밖에도 이남 사녀(二男四女)가 남아 있지 않소 ?
부 인 자식에 층하를 둠은 잘못된 일이겠지만, 원술이는 누구보다도 의리가 있고 용맹이 있어, 당신의 뒤를 이를 자식은 그 아이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자식을 죽이고 나니, 내게는 천하를 잃은 것만 같아요.
장 군 나 역시 그렇소. 내 뒤를 이어, 이 어수선한 판국을 바로잡아 국토 통일의 큰 뜻을 일어 줄 자식은, 원술을 두고는 없다고까지 나는 생각하고 있었소. 그런 아이를 죽였으니……. 하지만, 당나라와의 이 싸움에 우리가 이겨야지, 이기지 못하면 원술의 피는 헛된 피가 되고 말 것 아니겠소 ? 이렇게 슬퍼하고 있을 게 아니오. 자, 나머지 자식마저 싸움터로 내 보냅시다. 이 밤이 깊어지기 전에…….
김유신 장군, 대문 안으로 무거운 발을 옮긴다. 지소 부인, 그의 뒤를 따른다. 무대에는 문지기만 남는다. 용사의 시체를 장사하는 노랫소리, 검산 쪽에서 처량히 들린다.
문지기 (깊은 한숨을 쉬며 혼자말로) 아무래도 이러다가는 당나라 군사 때문에 우리 장수 다 죽이겠는걸.
진달래, 검산 쪽에서 힘없이 한숨을 쉬며 나타난다.
문지기 다 묻었어 ?
진달래 인제 구덩이를 파고 송장을 넣고 있다오.
문지기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참 처량하다.
진달래 나는 내 아버지, 어머니를 여의고 도련님을 나의 단 하나 뿐인 마음의 등불로 여겨 왔었어요. 한데, 오늘 그 등불마저 꺼지고 말았구려. (한동안 흑흑 흐느끼다가 고개를 들고) 문지기 할아버지, 나는 어떻게 해요 ? 어떻게 살아요 ? 아버지,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보다 이 세상은 더 어두워지고 내 마음은 더 깜깜해지는군요.
문지기 미련한 계집애 같으니 ! 도련님이 살아 계시면 네 해가 될 성싶으냐 ?
진달래 하늘의 해님을 내 해라고 할 수 있어요 ? 도련님은 내 해가 아니라도 좋아요. 살아 계시기만 하면 좋아요. 하늘에 해님이 있듯, 도련님께서 이 세상에 살아만 계시면 그만이어요. 그러면 그분은 나의 해님도 되고 달님도 되는 거여요.
문지기 너, 언제 이렇게까지 되었냐 ?
진달래 도련님께서 나를 죽이시려고 칼을 빼시려던 그 순간이었어요. 그 때, 나는 그분의 눈에서 범하지 못할 위력을 느꼈지요. 그 위력은 나라를 지극히 사랑하는 이라야 가질 수 있는 뜨거운 정이었지요. 그 뜨거운 정은 이 미물의 차디찬 가슴에까지 밀려와, 나도 살아야겠다는 용기를 가지게 해 주었어요.
문지기 하지만, 죽은 이를 살려 낼 재주야 있냐 ? 인제 지난 일일랑 다 잊어버려야지. 이 댁에 있으면 너, 평생 밥 걱정은 안 할 것이니까.
진달래 인제 이 댁에 있을 수도 없어요.
문지기 왜 ? 이 댁에 살면 도련님 생각이 날까 봐 ?
진달래 이런 박복한 년이 이 세상에 산들 뭘 해요 ?
문지기 뭐 ? 너, 그게 무슨 소리냐 ?
진달래 주인님께, 인사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떠난다고 사뢰어 주오.
문지기 얘, 끝끝내 내 말을 안 들을 테냐 ? 이러다간 너, 길거리에서 죽는다, 배가 고파서.
진달래 나의 가는 길을 막지 말아 주오.
문지기 귀찮게 굴지 말고 들어가 있어.
진달래 왜 이러셔요 ?
문지기 에이, 고집도…….
문지기, 진달래를 억지로 밀고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장사하는 노랫소리, 산에서 들린다. 사방은 고요하다.
담릉, 앞서고, 그 뒤에 원술, 숨어서 들어온다.
담 릉 도련님, 어서 오십시오, 마침 아무도 없습니다.
원 술 잘 되었다.
담 릉 시장하실 텐데 (재매정에서 물을 한 바가지 떠 주며) 우선 냉수라도…….
원 술 (들이켜고) 이만 해도 살겠는걸. (먹다 남은 것을 주며) 좌관도 시장할 텐데…….
담 릉 (역시 주린 듯이 들이켜고) 인제 숨을 좀 돌리겠습니다.
원 술 한시가 급하니 이러고 있을 수 없다. 얼른 큰서방님을 만나야지.
담 릉 도련님은 여기 계십시오. 도련님이 들어가시면 식구들에게 들킵니다.
원 술 (붙들며) 아니야.
담 릉 왜요 ?
원 술 좌관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담 릉 그럴까요 ?
원 술 어떻게 불러 내면 좋을까 ?
문지기, 나타난다. 원술과 담릉, 나무 뒤에 숨는다.
문지기 저 계집애 고대 병나 죽겠는걸. 저렇게 속을 태우다가는…….
담 릉 (나타나며) 이봐, 문지기 할아범 !
문지기 (놀라서 털썩 주저앉으며) 으앗 !
담 릉 할아범 ! 나요.
문지기 (의아해하며) 이게 누구야 ? 듣던 소린데……. (자세히 뜯어보고) 좌관님이 아니오 ? 원술 도련님과 같이 죽은 줄 알았더니, 이게 웬일이오 ?
담 릉 죽은 줄 안 사람도 살아 오는 수가 있지. 자, 들어가서 큰서방님 좀 모셔 오게. 삼광 서방님 말이야.
문지기 자, 같이 들어갑시다. 안에 들어가서 대감마님과 마님 뵙고, 석문벌 싸움 얘기며 원술 도련님이 장엄하게 전사하신 광경을 얘기해 주셔야지. 여간 궁금히 여기고 계시지 않는데……. (대문을 열고) 얘, 진달래야, 좌관님이 살아 왔다.
담 릉 쉬 !
진달래 (대문 안에서 나오며) 뭐, 좌관님이 ? 좌관님 ! 좌관님은 원술 도련님의 최후 못 보셨소 ? 여기에는 투구밖에 못 찾아왔는데.
담 릉 (가만히) 원술 도련님은 돌아가신 것이 아니야.
진달래 그러면 ?
원 술 (고목 뒤에 숨었다가 그제야 비로소 나타나며) 진달래야 !
진달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멍하니 섰다가 원술임을 알고 덤빌 듯이 나아가) 도련님 !
원 술 쉬 !
진달래 어찌 된 일이어요, 도련님 ?
원 술 내가 떠난 후로 우리 집에 쭉 있었지 ?
진달래 예. 이게 꿈이 아니면 좋겠어요.
원 술 꿈이라니 ?
바람결에 비장한 노랫소리 들린다.
진달래 저 소리가 안 들려요 ? 저것은 도련님이 돌아가신 줄 알고 장사지내는 소리여요.
원 술 웬일이야, 이것이 ?
문지기 아까 도련님의 투구가 전해 왔어요. 효천 총관과 의문 비장의 시체와 함께…….
원 술 (투구 없는 자기의 맨머리를 만지며) 참 죽을 뻔했지. 정말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빠져 나왔어.
진달래 상처는 없으셔요 ?
원 술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 할아범, 나는 떠날 길이 급하니 큰서방님을 불러 다오.
문지기 안에 드셔서 친히 만나십시오. 마님은 물론 대감께서도 여간 기뻐하지 않으실 겁니다.
진달래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아까 두 분께선 여간 슬퍼하지 않으셨어요.
원 술 지금은 뵐 때가 아니야.
문지기 왜요 ?
원 술 당나라 장수 고간의 모가지를 베어 들고 와서 뵈어야지. 아, 분해라 ! 그 당나라 군사한테 일패도지(一敗塗地)한 것이 분하여 못 견디겠다. 얼른 큰서방님을 모셔오너라. 큰서방님께 여쭈어, 당나라 군사를 되몰아칠 병력과 무기를 꾸어야겠다.
문지기 그러면 빨리 모여 오지요.
원 술 아무도 모르게 여쭈어야 하느니라.
문지기 (대문 안으로 퇴장하며) 걱정 마십시오.
원 술 좌관은 장사는 데 가서, 백수성 싸움에서 살아 온 우리의 동지들을 불러 와. 다시 싸우러 나가게…….
담 릉 예. (퇴장)
원 술 (이를 갈며) 이놈의 고간 녀석 ! 이번에야말로 우리 신라 화랑의 의기를 보여 주고 말 테다.
진달래 도련님, 소녀도 도련님 따라 싸움터로 나가겠어요.
원 술 진달래가 ?
진달래 예.
원 술 싸움이란 사나이만이 하는 거야.
진달래 옛말에 백지장도 맞들어야 쉽다고 하지 않았어요 ?
원 술 계집애는 힘이 없어 창칼을 들 수 없고, 허리가 둔해 뛸 수도 없어.
진달래 소녀는 농사꾼의 자식이어요. 팔심도 좋고 뛰기도 잘 한답니다.
원 술 그래도 안 돼.
진달래 정말 안 될까요 ?
원 술 우리 사나이만으로도 충분하다.
진달래 그러면 나는 어떡해 ? (돌아서서 아랫입술을 깨물고 흐느낀다.)
원 술 오, 나 없는 사이에 우리 집에서 못살게 굴어서 그러는구나.
진달래 아니어요. 절대로 그런 게 아니어요.
원 술 그러면 왜 떠나려는 거야 ? ……왜 말을 못 해 ?
진달래 (겨우) ……소, 소녀도 원수를 갚아야지요. 당나라 군사에게 참혹하게 희생된 소녀의 아버지, 어머니의 원수를.
원 술 오, 그래서 ? 그렇다면 데리고 가 주지.
진달래 정말요 ?
원 술 갈 채비를 차려라.
진달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진달래, 대문 안으로 퇴장, 전령 을을 위시한 병정들, 담릉의 안내로 등장. 장사하러 갔던 동네 사람들도 따랐다.
병정들 (일제히) 원술 비장님 ?
동네 사람들 (일제히) 만세 !
원 술 쉬 !
전령 을 (장사하려던 투구를 도로 내주며) 묻었던 투구를 좌관님의 말씀을 듣고 도로 파 가지고 왔습니다.
원 술 당나라 장수 고간의 모가지를 베려고 적진 깊이 뛰어들었다가 뜻하지 아니한 봉변을 당했는걸. 이번에야말로 그놈의 목을 벨 승산이 섰으니 다 같이 떠나세.
병정들 예 !
동네 사람 갑 우리는 곧 가서 동네 젊은이들을 더 모아 오겠습니다.
원 술 그러오.
동네 사람 갑 (동네 사람들을 보고) 자, 가 보세.
동네 사람들 (일제히) 가세.
담 릉 큰서방님은 ?
원 술 웬일인지 문지기 할아범이 아직도 안 나오는군.
담 릉 장군께서 눈치를 채신 게 아닐까요 ?
원 술 글쎄.
담 릉 누가 나오나 봅니다.
원 술 누굴까 ?
김유신 장군 앞서고, 그 뒤에 지소 부인, 그리고 하인, 진달래 등 조용히 나타난다. 문지기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맨 뒤에 따랐다. 원술, 숨는다.
장 군 (무겁게) 원술아 ! 원술이 어디 갔느냐 ?
원 술 (망설이다가 나타나서 반가이) 아버지, 어머니 ! 너무나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지만, 소자는 앞으로 그 당나라 군사를 칠…….
장 군 (노기를 띤 목소리로) 그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
원 술 (아버지의 의외의 태도에 억눌린 듯, 불안한 시선으로 문지기를 바라본다.)
문지기 (열없는 목소리로) 큰서방님을 찾으러 집 안팎으로 초조히 돌아다녔으나, 뵙지 못하고 대감께 그만 들켜서…….
장 군 도대체 네가 무어냐 ?
원 술 예 ?
장 군 네가 무어냐 말이다 !
원 술 (머뭇거리듯) 이 나라의 화랑이올시다.
장 군 그러면 화랑의 다섯 가지 신조를 알겠구나.
원 술 예.
장 군 외어 보아라.
원 술 예 ?
장 군 외라거든 외어 보아 !
원 술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싸움에 나아가 물러나지 않고, 동무를 사귀되 신의로써 하고, 산 것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장 군 분명, 싸움에 나아가 물러나지를 않는다 하였것다 !
원 술 예.
장 군 그럼 죽지 않고 왜 살아 왔느냐 ? 네가 떠날 때 내가 너에게 이른 말이 있지 않느냐 ? 자고(自古)로 화랑에게는 죽음은 있어도 패전은 있을 수 없다고.
원 술 (깊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장 군 그런데 왜 이렇게 살아 왔느냐 ? 네가 하잘것없는 병졸이라도 이렇지 못할 것이어늘, 하물며 비장의 몸으로서 !
원 술 그것은…….
장 군 적이 무서워서냐 ?
원 술 아닙니다.
장 군 목숨이 아까워서냐 ?
원 술 아니올시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올시다.
장 군 이 세상에 미련이 있어서냐 ?
원 술 아니올시다. 결단코 그런 것이 아니올시다.
장 군 그러면 무어냐 ? 다시 일어설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냐 ?
원 술 (반가운 듯이) 예, 바로 그것입니다. 소자는 당나라 장수 고간의 목을 베지 않고는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그놈의 목을 벨 기회를 만들려고 죽지 않고 물러나왔습니다.
장 군 (추상 같은 소리로) 에이, 비겁한 녀석 같으니 ! 옆에서 전우들이 죽어 넘어지는 꼴을 보고 어찌 뻔뻔스럽게…….
원 술 장수란 물러날 때와 싸울 때를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 하잘것없이 죽느니보다 살아 뒷일을 도모함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 군 구구한 변명 듣기 싫다. 변명이란 떳떳하지 못한 인간만이 하는 소리다. (원술이 차고 있는 칼을 빼어) 이것은 적의 목을 베라고 내가 너에게 준 칼일 게다. 내 앞에서 이 칼로 단박에 죽어라. 네놈은 우리 가문을 더럽혔음을 물론, 빛나는 화랑의 체면을 훼손하였고, 거룩한 이 나라의 이름을 망친 놈이다. 냉큼 이 칼을 거꾸로 물고 죽지 못하겠느냐 ?
원 술 (말없이 칼을 받는다.)
담 릉 장군, 실상인즉 도련님께서 적진에 뛰어들어 적과 더불어 죽으려는 것을, 소인이, 여기서 죽을 것이 아니요, 살아 다시 일어설 유예를 가지자고, 붙든 말고삐를 놓지 아니하였습니다. 도련님을 오늘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오직 이 좌관의 죄입니다. 소인을 처벌하여 주소서. 도련님, 그 칼을 소인에게 주십시오. 예, 이리 주십시오.
원 술 담릉, 그게 무슨 말인가 ? 설사 그대가 그런 말을 내게 권했다 하더라도, 죄는 그 말을 끌어 낸 그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행한 나에게 있는 거야.
담 릉 그럴 리 없습니다, 비장님. 이 몸을 죽여 주십시오.
원 술 제발 입을 다물어 주게. 그대가 이 자리에서 그렇게 고집함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 망신시키는 것이 되네. 사실인즉, 내가 다시 일어설 유예를 만들려고 살아 나오기는 하면서도,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나서 어찌나 마음이 꺼림칙했는지 견딜 수가 없었어. 아버지, 소자는 죽겠 습니다. 그러나 소자의 죽음만으로 소자가 지은 죄를 다 씻을 수 있을는지요 ? 그것을 저어할 뿐입니다. (단정히 앉으며) 아버지, 어머니, 불효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흰 수건으로 칼날을 닦아 입에 물고 앞으로 엎더져 죽으려 한다.)
부 인 (자지러지는 소리로) 으앗 ! (기절하여 넘어진다.)
장 군 마님을 안으로.
하 비 예.
하비, 대문 안으로 지소 부인을 모시고 들어간다. 원술, 지소 부인이 나간 곳을 보다가 흐느낀다. 이 때, 사신 급히 등장.
사 자 (김유신 앞에 나아가 공손히 절하고는) 장군께 말씀 아뢰오. 상감마마께서 아찬 원술이 금번에 화랑(花郞)의 오계(五戒)를 어기어 싸움터에서 물러나옴을 아시고, 그 죄 죽음에 해당하나, 원술은 대장도 아니요, 또 들은 바로는 그의 실수도 아니니, 집에 들르거든 목숨만은 살리어 지경 밖으로 내쫓으라는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장 군 목숨만은 살리어 ?
사 자 예.
원 술 아니올시다. 소자는 죽어, 나라님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드리고, 전우를 배반하고, 그리고 가훈을 저버린 죄를 씻겠습니다. 이 더러운 몸으로 하늘 밑에 구차히 살아 다닌들 무엇 하겠습니까 ? 그것은 죽기보다 오히려 기막힐 노릇입니다. 제발 소자를 죽게 내버려 주십시오. 소원입니다. (칼을 도로 든다.)
진달래 (달려들어 칼을 빼앗으며) 도련님 어명이오. (김유신 장군에게 칼을 바치며) 대감마님, 제발 이 칼을…….
장 군 (칼을 받아 놓으며) 어명이니 할 수 없다. 그러면 너는 이 길로 내 눈에서 안 보이는 데로 멀리 사라져라.
장군, 참지 못하여 대문 안으로 퇴장. 원술, 말없이 갑옷과 투구를 벗고, 칼집까지 끌러 놓더니, 대문을 향하여 절하고 힘없이 퇴장. 그의 뒤를 따르는 이는 진달래뿐이다.
담 릉 그 때, 차라리 비장님의 말고삐를 붙들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병정들 비장님 !
─ 막 ─
제 3막 1장
나오는 사람들
원술, 늙은 농부, 진달래, 처사.
때 전막의 익년 여름(음 6월경) 어느 날 해질 무렵.
곳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어느 언덕 밑. 원술의 은피하여 있는 데
무대 야트막한 언덕, 아래에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그 개울물을 끼고 산으로 오르는 소로. 한 옆에 있는 큰 바위 밑은 원술과 진달래가 이슬을 피하는 곳이다.
막이 열리면 멀리서 농부들의 노랫소리 졸리는 듯이 들려온다. 지저귀는 산새 소리는 가다오다 적막한 이 은피 생활을 고요를 깨뜨린다.
들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 늙은 농부, 소를 몰고 지나간다.
화랑의 제복을 벗고 벌써 일개 초민이 된 원술랑, 홀로 언덕 위에 앉는다.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하늘에 뜬 구름을 바라보고 한숨을 짓는다.
원술 (혼잣말로)…… 구름이 가면 세월이 간다던가? (기지개를 켜며) 야------이놈의 세상은 언제 끝장이 나려나? (괴로운 듯이 언덕 위에 드러눕는다,)
이윽고 진달래, 들에서 품을 팔고 돌아온다. 치마폭에 싼 것은 원술 도령님께 드릴 저녁이요, 한 손에 든 것은 밭에서 얻어 온 목화의 모종이다.
진달래…… 도령님, 퍽 기다리셨지요?
원술 ……
진달래 하던 일을 그만두자 하여도 한 이랑만 더 매달래서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늦었답니다. 그 대신 이것 보세요. 저녁밥을 이렇게 많이 얻어 왔어요. 이만하면 내일 아침까지 둘이 먹고도 남지 않겠어요?
원술 (묻는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채로) 우리가 이렇게 떠 다니는 지가 몇 해지?
진달래 벌써 일 년은 되었지요.
원술 일 년?
진달래 예.
원술 구름이 저렇게 줄달음질을 치는 데도 겨우 일 년이야? 나는 십 년도 더 된 것 같은데----
진달래 제게는 며칠밖에 안 된 것 같애요.
원술 정말?
진달래. 예.
원술 진달래는 나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였어도?
진달래 고생이 뭐예요?
원술 그것은 또 뭔구?
진달래 (심던 목화 모종을 보이며) 밭에서 얻어 온 목화 모종이예요. 이것이 커서 꽅이 피면 그것을 따서 도령님의 겨울 솜옷을 지어드릴 것이예요.
원술 솜옷?
진달래 지난 겨울에는 너무 춥게 하여 드려서 정말 죄송하였어요.
원술 아내 그러면, 올 겨울까지 내가 살아야 한단 말이야?
진달래 무슨 말씀이세요?
원술 (풀밭에 엎드리며) 아----지긋지긋해라.
새 우는 소리
진달래 (원술의 괴로운 생각을 덜어 주려는 듯) 아, 도령님 저것이 무슨 새예요? 저 나뭇가지에 앉는 것이----
원술 (악을 쓴다) 아! 귀찮아!
진달래 (시무룩하여 지며 바위로 간다. 시름없이 앉았다가 바위 밑에 남아 있는 밥을 발견하고) 애고, 점심 진지가 또 그대로 남았네.(걱정되는 듯이 괴로워하는 원술에게 고개를 돌려) 도령님, 왜 이러세요?
원술 (힘없이) …… 저리 가.
진달래 (뾰로통하여 지며) 이렇게 안 잡수시면 정말 싫어요.
원술 (획 일어나며 쏘는 듯이) 아니, 내가 개, 돼지란 말이야? 여기 앉아 밥만 처먹게.
진달래 안 잡수시면 어찌 하실 테예요?
원술 ( 두 손으로 제 머리를 붙들며 괴로워서) 아----나라는 어떠하게 되었으며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계실까?
진달래 (애원하듯) 도령님?
원술 진달래, 이 세상에 나 같은 못난이가 또 있겠어?
진달래 도령님이 이렇게 되심은 한때의 운수예요.
원술 천만에. 발에 채이는 이 돌맹이를 봐! 이런 것도 이 세상에서 쓰일 데가 있지 않어? 하지만 나는
----나는 이 돌멩이만도 못해. 아무데도 쓰일 데가 없어.
진달래 아니예요. 때가 올 것이예요. 도령님이 비겁한 분이 아님을 알게 될 때가 올 것이예요. 저는 믿어요. 그 때가 꼭 올 것을 믿어요. 하늘에 맹세하여도 좋아요.
원술 하늘에?
진달래 상감마마께서 일부러 특차를 보내셔러 사 일등을 감하시와 도령님을 이렇게 살려 주심도 이를테면 도령님에게 그 때를 기다리게 하신 것이지요.
원술 (약간 솔깃하여 지며) ……정말 그럴까?
진달래 그만한 이치는 삼척 동자라도 짐작할 일 아니예요?
원술 (어떤 자신을 발견한 듯이) 그렇다면---
진달래 그러니까 마음을 든든히 잡수시고 그 때 오기만 제발 기다려 주세요.
원술 그럼 기다리지!
진달래 정말?
원술 때가 온다면야 기다리다 뿐이냐, 무슨 짓이라도 하며 그 때 오기만 기다릴 테야!
진달래 (감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핑 고이며) 아, 고마워라.
원술 (다정하게) 진달래, 우는 게 아니야?
진달래 (얼른 눈물을 씻으며) 아, 아뇨.
원술 잘못했어, 부질없이 진달래 마음을 괴롭게 해서---
진달래 제까짓 것의 마음이야 아무렇게 되어도 좋아요.
원술 그 무슨 소리야?
진달래 정말이예요.
원술 그러면 못써.
진달래 정말 도령님께서 저를 가엾게 생각하세요?
원술 생각하다 뿐이냐.
진달래 (밥을 내놓으며) 그러면 소원이예요. 제발 이 진지를 잡수세요. 도령님께서 숟가락을 드시는 것을 볼 때 제 마음은 끝없이 기뻐요.
원술 내가 끼니를 거르면 그만큼 그대가 품을 팔지 않아도 되지 않어?
진달래 저는 논도 갈아보고 모매기도 해 봤어요, 요즘 밭에서 김매는 것쯤은---
원술 (감격하여 꽉 안으려 하며), 오, 진달래!
진달래 (부끄러워 원술의 품속에서 빠져나가려도 몸짓하며) 에구, 놓으세요.
원술 우연히 만난 그대가 내 마음의 지팡이가 될 줄이야. 진달래, 그대가 없었으면 내가 어찌 되었을까?
바윗돌에 내머리를 짓찧어 나는 벌써 이 세상에서 없어졌을는지 몰라.
진달래 그 말은 제가 도령님께 드릴 말씀예요.
원술 내가 있기에 진달래가 있단 말인가?
진달래 마치 하늘이 있어 땅이 있고, 낮이 있으니까 밤이 있는 것과 같아요.
원술 그러면 진달래를 위해서도 나는 죽어서 안 되겠군?
진달래 저 때문에 살아 줍시사 하는 것은 너무나 외람한 말씀이지만……도령님, 도령님께서 만일 그렇게만 생각하여 주시면야 저로서는 더 이를 데 없어요.
원술 그러면 살지. 사는 대로 살아보지. 하늘과 땅이 있을 때까지 살아보지.
진달래 (너무나 감격하며) 도령님! (하고 엎디어 운다.)
원술 (어루만지며 달래는 듯이) 진달래, 그대가 차려온 저녁 어디 두었지?
진달래 (얼른 눈물을 씻으며) 예, 여기에 있어요. 애구, 국이 다 식었네.
원술 나 산에 가서 나무해 올게.
진달래 앉아 계세요. 제가 해 와서 데워드리리다.
원술 가만 있어. 나도 일을 좀 해 보게.
원술은 진달래를 억지로 앉혀 놓고, 삿갓을 들쳐 쓰며 쾌활히 퇴장
산새도 이 기분을 아는 듯 명랑하게 운다.
진달래 (원술의 뒷모양을 바라보며) 날이면 날마다 저렇게 주름살을 펴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오늘은 좋은 날이야 아마도 무슨 기쁜 일이 있으려나 봐. 저렇게 산새까지 와서 지저귀니----(한참 지저귀던 새소리 별안간 그친다.) 애구, 웬일이야? (입으로 새를 부르며) 후후훗.
늙은 처사, 단출한 행장으로 산길에서 내려온다.
처사 (주춤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혼잣말로) 여기가 어딜까?
진달래 옳아. 이 노인 때문에 새가 날아갔나 봐.
처사 (그 말에는 상관도 하려들지 않고) 도데체 여기가 어딘가? 몇 달 동안 산으로만 쏘다니다가 내려오니까 어리둥절한 걸. 이봐, 거기 그릇 있어? 저 개울에 가서 물이나 좀 떠먹게.
진달래 예. (깨어진 바가지를 준다.)
처사 (언덕 밑 개울로 내려간다.)
원술 (나무를 한아름 안고 온다.)
진달래 (나무를 받으며) 애구, 그 새 많이도 해 오셨네!
원술 (개울 쪽을 가리키며) 누구야?
진달래 산에서 내려온 이예요.
원술 나는 사람이 두려워. 내가 누군지를 알아볼까봐.
진달래 올라와요.
원술 (삿갓을 눌러쓰며 나무 그늘로 숨는다.)
처사 (수건으로 얼굴을 씻으며 나타난다. 세수를 한 모양이다.) 아, 시원해라. 덕분에 꽤 더위가 가셨는걸. (진달래가 불을 살리느라고 연기를 피우는 것을 보고) 옳지, 이왕이면 나도 단지밥이나 좀 끓여 먹을까? (전대에서 단지와 쌀을 끌어낸다.)
진달래 (어찌해야 좋을지 당황하며 원술의 숨은 쪽을 바라본다. 원술, 처사를 내쫓으라는 듯이 열심히 손짓을 한다) 할아버지 여기는 안 돼요. 한 십리 길만 더 가면 주막집이 있어요.
처사 누가 주막집 있는 줄 모르남.
원술 (내쫓으라는 손짓, 더 열심히)
진달래 아무래도 안 돼요. 나가요! (떠밀어내려 한다.)
처사 아따! 그 처녀, 꽤 인심 사납군! 그래 주막집에 가면 돈이 들지 않어?
진달래 안 나가면 이 단지를 내동댕이 칠 테예요.
처사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딧담! 길가는 사람에게는 자던 방도 비어주는 법인데 임자 없는 산길을 막고 가라 마라 하니----(진달래 옆에 있는 나무를 갖다가 다짜고짜로 불을 피운다.)
진달래 정말 내동댕이 치지 않을 줄 아세요? (그러면서 도사의 전대와 수건에 싼 풀을 내던진다.)
처사 (얼른 가서 수건에 싼 것을 소중히 주우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에이, 요망스런 계집애 같으니라구! 이것이 뭔 줄 알고 내동댕이 치는 거야? 천하에 벼락을 맞으려고!
원술 (너무 흥분함에 놀란다. 그러나 도리어 어이없이) 아니 왜들 이러세요?(하며 나타난다.)
처사 이것은 또 왠 사람인고?
원술 여기사는 사람인데 하도 노인이 노하시기에?
처사 (반가운 듯이) 글쎄 이럴 수가 있어? 이 계집에가 이것을----내가 이것을 구하려고 벌써 석 달 동안을 두고 산에서 고생을 하였는데----
원술 도대체 그거이 뭣이기에 그렇게----
처사 약초야.
원술 약초?
처사 약초라도 이만저만의 것이 아니요, 바로 태대각간 김유신 장군께 드릴 약초야.
원술 김유신 장군께 약초가 무슨 소용이요?
처사 무슨 소용이라니? 장군께서 병환이 나신 것도 몰라?
원술 병환요? (어이없이 진달래를 본다)
처사 백성이라는 것이 이 따위니까 당나라 놈들까지 우리 땅을 넘겨다 볼 밖에! 에이 참! 기가 맥혀서!
원술 (바짝 다가서며) 어쩌다가 병환이 나셨답니까?
처사 (짐을 챙기며) 나는 가겠네. 여기 있다가는 석 달이나 공들인 약초, 나무아미타불 되겠어.
진달래 같이 저녁이나 자세요.
처사 내좇을 때는 언제고, 저녁같이 먹자는 때는 언제야?
원술 (나가려는 처사를 꽉 붙들고) 가시지 마시고 장군계서 병환이 나신 내력이나 알려 주요. 대관절 무슨 병환이랍니까?
처사 왜 이렇게 다부지게 묻는거야?
원술 아까 노인도 말씀하셨지만 이 나라 백성되어 김유신 장군의 병환을 모르고 있어서야 되겠어요?
처사 장군께서는 참 덕도 높으시어, 길거리에서 사는 이런 헐벗은 거지까지도 이렇게 근심을 하니! 자, 그러면 일러줄 테니 잘 듣게, 장군께서는 이를테면 심화병이 나셨어.
원술 심화병이라니? 무슨 속상하신 일이 있었소?
처사 온 이 총각, 캄캄 절벽이로군
원술 말씀하여 주세요.
처사 아니, 임자는 장군의 둘째 아들인 원술이란 놈이 그 어른의 슬하를 떠난 얘기도 모르고 있나?
원술 (찔린 듯이) 그 때문에 병환이?
처사 암, 그렇지.
진달래 그러면 그 원술이란 아드님의 얼굴을 보시면 혹 나으실지도 모르겠군요?
처사 암, 대번에 나으시지. 장군께서 많으신 자재 중에서도 그 아들을 여간 사랑하지 않으셨거든! 더구나 요즘 당나라의 침노가 날로 자심하여져서 우리의 국토가 자꾸 줄어만 가니, 자나깨나 그 아드님 생각이시래.
원술 그 정말이요? 정말 그렇소?
처사 그렇게 아니야! 이 판국이 지금 어떻다고? 까딱 잘못하면 우리 나라는 그 흔적도 못 찾게 되었어.
이럴 때 그 원술 도령님이 있었으면 좀 잘 쓰이겠어?
진달래 (원술에게) 아이, 저 말씀!
원술 소용 없어! 다 틀렸어! (수양버들 쪽으로 휙 피해 가서 주먹으로 자기의 앞가슴을 치며 비통해 한다.)
처사 (의아해서) 아니, 총각 왜 이러나?
원술 ……아, 아녜요.
처사 왜 자네 그 원술이를 아는가?
원술 천만에요, 그까짓 놈은 알아서 뭘해요.
처사 그러면 이렇게 애통할 게 뭔가?
원술 노인은 분하지 않으세요? 내 눈앞에 고놈이 나타나면 나는 단번에 고놈을 잡아 이 입에 씹고 씹어 가루를 만들어 죽이겠소. 고놈이 한 번 5계를 어기더니 급기야 천하 명장이신 그 아버지를 병들어 하고 그분이 병들어 누워 정사를 돌보실 수 없게 되니 천하가 이 지경으로 기울어지게 되고----아---고대역 부도하고 불효 막대한 놈을 상감마마께서는 왜 죽이지 않고 살려 주셨을까? 그것이 분해서 못 견디겠소.
처사 이 늙은 것을 속여서는 못써! 아까 저 수양버들 그늘에 숨어 있는 거며 지금 이 태도가 아무리 해도 달라! 더구나 뜬 소린지는 모르지만 원술랑이 이 지리산 근방으로 떠다닌다는 소문도 있는걸.
원술 그러면 내가 원술랑이란 말씀이요? 천만에요, 천만에요.(불 앞에 피해 앉아 부채질한다.)
처사 (아직도 의심스러우나) 아니라면야 할 수 없지.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그 원술이를 좀 만나봤으면 좋겠는걸! 하여간 장군의 병환을 낫게 하는 거야. 그 때문에 이 늙은 것도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니 임자도 역시 나라를 근심하고 장군을 추앙하는 마음이 여간 아닌 모양이니.
원술 노인은 약초라도 구했지만 이렇게 빈 손으로야 가나마나지요.
처사 전국 백성들이 검산에 모여서 하늘에 치성을 드린대. 그러니까 총각도----
원술 고맙소. 하지만 이런 거지꼴로야 어찌---
처사 허----정성이야 마음으로 드리지 겉모양으로 드리는 건가?
원술 하지만---(우뢰소리) 아니 별안간 왠 천둥이야?
진달래 (멀리서 또 우레소리. 하늘을 가리키며) 아이구 구름이 저렇게 모여드네. 아마도 비가 오시려나 보아.
처사 (하늘을 같이 우러러보고) 정말! 아까는 괜찮더니 왠일일까? 빨리 가서 비나 좀 피해야겠군. (진달래더러) 주막집이 여기서 십 리는 된다지?
진달래 예.
원술 총각, 그러면 후일 보세.
처사, 하늘을 걱정하며 황급히 퇴장
진달래 (처사의 뒷모양을 바라보며) 아이 겨우 쫓았네! (비가 쏟아진다.) 도령님! 비가 쏟아져요.
원술 (동치 않고 꾹 섰다가 부채를 내던지며 미친 듯이 엎디어 고민한다. 한동안. 휙 일어서더니 옆에 있는 소나무를 뿌리째 뽑는다. 으스러지라는 듯이 땅바닥에다가 태친다.)
진달래 (걱정스런 듯이) 도령님!
원술 (언덕에 쓰러지며 몸부림쳐 운다.)……아버지! 아버지 용서하세요!
비가 여전히 쏟아진다.
진달래 도령님, 이러고 계실 것이 아니라 서라벌로 올라가세요. 그 늙은이 따라 올라가세요.
원술 내가?
진달래 예.
원술 너, 나를 조롱하는 거야?
진달래 아니예요. 때가 왔나 봐요. 우리가 기다리던 때가 왔나 봐요. 도령님의 죄를 씻을 그 때가. 얼른 올라가셔서 아버지를 뵈세요.
원술 아버지가 이 천하 무도한 역적을 용서해 주실 성싶으냐?
진달래 금방 그 노인의 말씀 못 들으셨어요?
원술 아냐, 나는 아버지의 강철 같으신 그 의지를 알아. 도저히 용서를 받을 수 없어.
진달래 설혹 용서를 못 받는다 하더라도 남의 자식으로 그 어버이가 위급하다는데 이렇게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수 있어요? 만일 어버이가 마지막으로 찾는 자식이 그 머리말에 없을 때 그 얼마나 서러운 노릇이겠어요? 그나 그뿐이예요? 이 나라는 지금 도령님을 부르고 있어요. 이러고 계시면 도령님은 또 한 번 불충과 불효를 저지르십니다. 도령님은 이 이상 몹쓸 신하가 되고 자식이 되시렵니까? 그 기맥힌 아버지의 가슴을 더 어둡게 하시렵니까?
원술 진달래, 정말 이대로 있으면 더 불충한 신하가 되고 불효한 자식이 될까?
진달래 암 되고 말고요.
원술 그러면 안 돼! 나는 이 이상 더 죄인이 되어서는 안 돼. 진달래, 거기 바위 틈에 끼인 내 간발을 내다고.
진달래 (간발을 끌어내며) 제가 쳐드리지요.
원술 이 일 년 동안 겪은 내 이 괴로운 심정을 아버지께 서서히 여쭈면 아버지도 나를 용서해 주실거야. 나 때문에 병환이 나실 만큼 나를 생각하고 계시니 얼마나 나를 반겨 맞아 주시겠니.그러면 진달래, 그때는 내가 어떻게 되지? 다시 투구를 쓰고 창칼을 들고---이번에야말로 나는 멋드러지게 싸우고 죽을걸! 이 나라 사나이답게 싸우고 죽을거야!(운다)
진달래 도령님!
제 3막 2장
나오는 사람들
문지기, 군중들, 승려들, 처사, 한 노인, 사신, 왕, 시신, 시녀, 진달래, 원술, 지소 부인, 남녀 종
때 전장으로부터 10여일 후
곳 제 2막과 같은 무대인 김유신 장군 댁 대문 앞
막이 열리면 멀리 토함산 봉우리에서는 신제 지내는 연기, 실오라기같이 오르고 대문 앞 우물 앞에서는 경을 읽는 장님! 그 옆에서는 처사 등 목욕 재계한 늙은이 엎디어 기도드린다. 이 모두 '김유신 장군의 병이 나아지이다.'하고 정성드리는 것이다. 대문 옆에 선 문지기 할아범도 수심에 잠겼다. 무대에는 경건과 불안이 흐른다.
고령의 승려. 도제를 데리고 마음 속으로 경을 염하며 한길에서 나타난다. 무거운 발을 대문 안으로 옮긴다. 이윽고 사신, 총총히 나타난다.
사신 (소리친다.) 상감마마의 거동이시다!
무대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일어나 길을 비켜 선다.
문무왕, 경건한 표정으로 나탄난다. 왕의 전후에는 몇 사람의 시신과 시녀가 따랐다.
왕 (발을 멈추고 주의를 살펴보며) 이 문전에 어이한 사람들이 이다지 많은고?
사신 장군의 병환을 근심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백성들인가 하나이다.
왕 호----모두 수심이 찼고나. 자기의 어버이의 병환을 근심하듯----
사신 (먼 산을 가리키며) 황공하오나 저 토함산 봉우리에서 오르는 연기를 바라보소서. 저 연기 역시 '장군의 병환이 나아지이다.' 하고 백성들이 기도 드리는 것인 줄로 아뢰나이다.
왕 (지그시 눈을 감으시고) 천지 신명이시여, 우리 겨레는 지금 나라의 명운을 걸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이 때에 장군을 불러가심은 우리 겨레로 하여금 멸망의 길로 인도하심과 다름이 없사오니 원컨대 우리 겨레를 위하시와 장군의 병환이 회소되도록 하여 주소서.
사람들 (일제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지 신명이시여, 살피소서.
왕, 발을 옮긴다. 왕의 일행 대문 안으로 사라진다. 군중들,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로서로 말없는 시선을 주고받는다.
처사 상감마마의 용안에도 수심이 가득 찼구료.
동리 사람 갑 심상치가 않은데----
동리 사람 병 삼감마마께 무슨 마지막 부탁을 하시려고 거동하시는지도 모르지.
몇 사람 그러면 큰일 났게.
처사 (자기가 가지고 온 약초를 들어 뵈며) 이거면 그만일 텐데----
동리 사람을 들고 들어가서 다른 하인에게 부탁해 보오.
처사 참, 그래야겠군.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진달래, 초조히 등장
진달래 (동리 사람 갑에게) 문지기 할아버지, 어디 가셨소?
동리 사람 갑 이런 소란통에 문지기는 찾아 뭘해.
진달래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디 가고 안 보일까?
처사 (대문 안에서 다시 나오며) 도시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 (진달래를 발견하고) 오, 너 언제 왔느냐?
진달래 여기 닿은 지 벌써 닷새 째예요.
처사 네가 나를 그 때 같이 데려만 왔어도 이것을 달여드릴 유예가 넉넉히 있었을 것을! 그래 그 총각은?
진달래 같이 왔어요.
처사 대관절 그 사람이 누구냐? 원술 화랑이지?
진달래 이제야 속여 무엇하겠소.
처사 정말? 어쩐지 그런 것 같았어! 그래, 그 원술 화랑은 어디 계시나?
진달래 저 산 밑에.
처사 얼른 들어가서 장군을 뵈지 않고 왜 산 밑에서----
동리 사람을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저도 한 깐이 있어 감히 이 대문 가까이에 못 오는 거요.
진달래 못 오나요? 못 오게 하지요.
처사 장군께서?
장군 암요. 제발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만 생면을 지켜줍시사고 벌써 닷새째나 애원을 하였답니다. 그때도 용서는 커녕 이 대문 앞에 얼씬도 못 하게 하시는 군요.
처사 저런!
진달래 문지기 할아버지를 만나면 마님께 한 번만 더 여쭈어 줍시사고 졸라볼 텐데----(대문 안에 들어가서 중대문을 끼웃이 들여다본다.)
동리 사람을 에이 퇴! (진달래가 들어간 대문 쪽을 향해 침을 뱉는다.)
동리 사람 갑 소위를 생각하면 괘씸하기야 하지만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여 애쓰는 그 정성이 가엾지 않고?
처사 오! 저기에 원술 화랑이. 애구 가엾어라. 미친 사람같이 풀어 헤치고----
어깨가 축 처진 원술. 이 때에 나타난다.
처사 원술 화랑!
원술 그 때 노인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어 이 대문 앞까지 오기는 왔지만----
동리 사람들 (피해 선다.)
원술 옴쟁이를 피하듯이 나를 피하는군 그래. 하지만 어떻게 하여서라도 아버지를 뵈야 할 터인데---진달래는 어디 갔을까?
진달래 (대문 안에서 나타나며) 도령님!
원술 어떻게 되었나?
진달래 문지기 할아버지를 아직 못 찾았어요.
원술 그러면 내가 들어가서 간청하여 못 볼 테야, 아버지를 얼굴을 한 번만 뵙게 하여 줍시사고.
처사 이제는 마지막이니 응당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염려 말고 들어가 보십시오.)
진달래 자, 웃앞을 잘 여미세요. 이 모양을 보시면 더욱 마음이 상하실 것이예요. (웃과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원술 아버지! (용기를 내어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주춤하며) 안 돼. 내가 무슨 면목으로 허락도 없이 대문 안에 발을 들여 놓는담! 역시 문지기를 찾아, 어머니께 동하여 달라고 한번만 더 간청한 다음에 이 대문 안에 발을 들여 놓아야겠어.
진달래 저기에 문지기 할아버지가.
문지기 힘없이 나타난다.
원술 할아범!
사람들 장군의 병환은?
문지기 (심각한 얼굴로) 명재 경각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오.
동리 사람 갑 숨을 거두시나요?
문지기 이 나라와 백성에 대한 마지막 부탁을 임금님께 드리고 계시오.
원술 마지막 부탁을?
문지기 예, 겨우 실오라기 같은 목소리로.
원술 상군을 질타하시던 그 우렁찬 목소리가 실오라기같이 되셨다니? 비켜라, 무리 아버지의 마지막 눈초리라도 바라보고 마지막 숨소리라도 들어보련다(헤치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문지기 안 돼요. 장군께서는 도령님을 이 대문 안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었어요. 만일 도령님을 들여 놓으면 장군께서는 울화가 치뻗치시어 실날같이 남으신 그 목숨마저 단박에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원술 아니다. 그 엄하신 성격에 한번 작정하신 것이니까 끝내 뻗치시지만 내심으로는 이 자식을 여간 보고 싶어 하시지 않을 것이다. 나를 안 보시고는 눈을 못 감으실는지도 몰라. 아버지께서 나를 얼마나 생각하셨다고. 나를 그처럼 미워하심도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이야. 나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 할아범, 내 아무리 못났을망정 할아범에게 누야 끼치게 하셨는가? 제발 나를 들여보내 주게. 이 대문안에 발을 들여 놓게 해 주게.
문지기 소인은 대감의 신상을 염려하여 이러는 것입니다.
원술 대감을 아끼는 마음도 알아. 하지만 아버지의 심정은 자식인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문지기 그러면 여기에 잠깐만 계십시오. 소인이 들어가서 한 번 더 여쭈어 보고 올 테니까.
원술 그래. 그럼, 꼭 성사를 시켜 주게.
문지기 예. (대문 안으로 퇴장)
원술……아버지, 한 번만 용서하여 주소서. 소자는 맹세코 새 사람이 되겠습니다. 인제는 그런 실수하지 않고 화랑의 5계를 받들어 국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겠사오니 부디 소자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대문을 향해 기도드리듯 혼자 중얼거린다.)
진달래 걱정 마세요. 이번에야말로 도령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원술 진달래, 아버지께서 허락하시겠지? 그러면 나도 사람축에 끼일 수 있게 되겠지? 왜 할아범이 안 나와? 들여다봐다고, 대문 안을---
진달래 곧 기별이 있을 것입니다. 잠깐만 참으세요.
이 때, 안에서 울음소리가 터진다. 그 소리 마치 벌레 소리같이 윙윙거린다. 원술, 깜짝 놀란다.
진달래 이 무슨 소릴까요?
원술 (어리둥절하며) 글쎄.
갑 운명을 하신 것이 아닐까?
원술 뭐요! 운명이라니요?
문지기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타난다)
원술 어찌 되었나?
문지기 그예 숨을.
원술 그 정말이야?
문지기 임금님께 드리실 말씀 다 하시고는 잠자듯이 숨을 거두시었어요.
원술 아----아버지!
동리 사람들 (일제히) 장군님!
원술은 대문 앞에 펄쩍 주저앉아 땅을 치며 소리없이 느낀다. 군중들도 느낀다.
원술 아, 이 일을 어찌 하리! 그예 나는 때를 놓쳤고나, 새 사람이 될 때를 놓치고 말았고나.
부중 팔백 팔십 팔사에서 치는 조종 은근히 울린다. 대문 안에서는 목탁 소리 흘러 나온다. 어린 승려, 하인에게 조등을 들려 안에서 나와 대문 앞에 걸어 놓고 도로 들어간다.
처사 (겨우) 아, 하늘도 무심하여라. 어찌 하실려고 삼국 통일의 대업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우리의 하나뿐인 기둥을 이렇게 빼어 가신담!
동리 사람들 인제 우리 나라는 망하였어. 속절없이 우리는 당나라의 종이 되고 말았어!
문지기 하늘이 도우시어 앞으로 일 년만 더 살게 하여 주시어도 우리 장군께서는 넉넉히 외적을 물리쳐 주셨을 텐데----
동리 사람들 상감마마!
왕 (대문턱에 발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지으며)……아, 장군이 가고 보니 짐의 눈앞에는 태산이 무너지고 짐의 두팔이 한꺼번에 떨어진 듯! 외적의 말굽에 짓밟혀 있는 이 불쌍한 백성을 짐 홀로 어찌하며,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이 사직은 어이하리!
지소 부인 이것이 모두 전생에 지은 신의 죄인가 하와 황공하기 짝이 없나이다.
왕 작년 이맘 때. 그 몹쓸 원술 화랑이 5계를 어기어 고모의 마음을 마프게 하더니 그 아픈 상처가 제 가시기도 전에 이런 기맥힌 노릇을 또 당하였으니 고모의 그 마음인들 오직 하겠소? 하지만 죽음의 길이란 임의로 못 하는 길, 애통한들 무엇하겠소? 공명과 충절이 천하에 으뜸간 고인의 영을 위로하기 위해여 짐은 이제 입궐하는 맡으로 수백 명의 군악 고취를 보낼 터인즉 특히 영구를 금산벌에 모시어 빛나는 장례를 지내 주오.
부인 황공하오이다.
왕 (일행과 더불어 퇴장)
원술 (왕을 전송하고 대문 안으로 도로 들어가려는 지소 부인에게) 어머니!
부인 이것이 누구냐? 원술이가 아니냐?
원술 용서하십시오.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부인 문지기 할아범한테서 며칠 전부터 네가 이 대문 앞에서 방황한다는 소리는 들었었다. 하지만 네 모양이 이것이 무어냐? 얼마나 고생을 하였기에 이 꼴이 되었느냐?
원술 아버지를 여의게 한 죄! 이런 고생도 소자에게는 과람하여요. 이렇게 생명을 붙이고 살아 있는 것만 하여도 과람한 노릇이에요.
부인 (어루만져 주며) 원술아, 이 에미는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원술 어머니, 소자는 아버지를 뵙고 마지막 용서를 빌어야겠습니다.
부인 이미 돌아가신 이에게 무슨 용서냐?
원술 예?
부인 인제 소용없다. 다 소용 없게 됐다.
원술 그래도 살아 생전에 그리던 아버지의 얼굴이나마 한 번 뵈야지요. 그러면 이 몸은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요.
부인 네 아무리 죄인이기로 너도 사람의 자식인 걸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었겠느냐?
원술 어머니! (미친 듯이 어머니의 품에 뛰어든다. 고마워 운다.)
부인 자 들어가서, 그러면 잠깐만 뵈어라.
원술 (대문을 바라보며 감개 무량하여) 아! 내가 이 대문 안에 발 들여 놓을 때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자 그러면 어머니! (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대문 안에 들어서려 한다.)
부인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가만! (하고 원술을 막는다.)
원술 (주춤하며) 왜 그러세요?
부인 안 돼.
원술 (의아하여) 예?
부인 이 일은 에미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원술 그 무슨 말씀이세요? 별안간?
부인 아무리 생각하여도 못 하겠다. 이 대문 안에 너의 발을 들여 놓게 할 수도 없고 시체나마 너의 아버지를 대면시킬 수도 없다
원술 그건 왜 그러세요? 여태까지는 아버지의 엄명에 어머니의 뜻대로 못하셨지만 인제는 임의로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란 땅 속에 들어가면 영영 그 흔적을 찾지 못하는 것! 아버지를 인제 뵙지 못하면 다시 뵐 길은 없습니다. 어머니, 제발 소원이예요. 아버지의 식은 손발이나마 한 번 만져보게 하여 주소서.
부인 아무리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기로 내가 어찌 그이의 뜻을 어기겠느냐?
사람들 제발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십시오.
원술 소자의 이름을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제 귀에 ...... 어머니!
부인 너 아버지가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돌아가신 것을 어찌 이 에민들 너를 자식으로 여기겠느냐? 너는 너의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었으니 내 자식일 수도 없다.
원술 어머니!
부인 (괴로움을 참지 못하여 부르짖는다.) 아----나를 괴롭게 하지 말아!
원술 (흑 하더니 턱 쓰러져 느끼며) 어머니마저 소자를 버리십니까? 그러면 소자는 어느 하늘 밑에서 살아야 합니까?
부인 아버지의 그 준엄한 얼굴! 돌아가신 영혼이래도 아버지께서 너를 용서하실 성싶지 않다.
원술 그래도 어머니! 소자를 얼마나 사랑하여 주신 아버지였어요? 어머니, 소원입니다. 아버지를 뵙지 않고는 저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어요.
부인 아----이 에미 가슴 터진다.
원술 (부인 앞에 쓰러져 운다.)
부인 (부르짖다시피) 아, 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꼴을 당한담! 아, 그 꼴 보기 싫다. 가라! 가 물러가라! (호흡을 겨우 가다듬어 줄얼거리듯) 차라리 나는 산으로 가겠다. 산으로 가서 낙발하여 비구니가 되겠다.
부인, 힘없이 대문 안으로 퇴장. 원술, 겨우 느끼는 가슴을 가다듬어 무거운 고개를 들어 부인의 뒷모양을 바라본다.
원술 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이 죄! 이 죄를 어디에 씻어 다시 사람이 되리!
원술, 힘없는 발걸음으로 사라진다. 진달래. 그 뒤를 따른다.
-막-
제4막
나오는 사람들
원술, 망령들, 진달래, 담릉
때 2년 후인 문무왕 15년, 이른 봄
곳 태백산 (지금 봉화와 영양 사이에 있는 산) 산중
무대 무대 전체는 지옥을 연상할 수 있을 만한 악몽적인 협곡. 기암 괴석이 마귀와 같이 혹은 서로 웅크렸으며 군데군데 서 있는 소나무조차 풍우에 쪼들려 허리를 펴지 못하고 섰다. 바위 틈에는 고드름이 달려 산 틈으로 새어드는 사양에 비치어 귀녀의 이빨같이 반짝인다.
막이 열리면 무대 중앙, 앙상이 늙은 소나무 가지에 원술랑, 발목을 칡녕쿨로 칭칭 묶이여 거꾸로 매달렸다.
이 구석 저 구석의 바위 틈에나 나무 그늘 밑에는 말라서 해골화된 망령들, 꿈틀거리고 있다. 어찌보면 이것은 지상에 투영된 바위나 나무의 그림자 같기도 하다. 어디선지 맹수의 짖는 소리 꽝 꽝! 그 때마다 산도 따라 운다. 간간이 바람 소리 천공을 스쳐 지나간다.
망령들 (소리를 맞춰 노래한다.) 햇빛도 없고 꽃도 없는 죽음길의 이 첫 고개, 쉬어! 잠깐 쉬었다 가세. 헤메고 헤메어도 차디찬 어둠의 길. 쉬어! 잠깐 쉬었다 가세.
원술 (거꾸로 매달린 채 신음한다.) 아, 왜 이렇게도 이 목숨이 질길까? 지긋지긋이 끊어지질 않는 이 목숨!
망령들 이 고개 넘으면 텅 비인 허허 저승의 땅! 쉬어! 잠깐 쉬었다 가세.
원술 (큰 소리로) 거기 누구냐? 제발 이 목슴을 끊어다고. 나를 좀 죽여 주어.
망령1 (원술에게 비로소 시선을 뺏기며) 오, 저것을 보게. 저기 또 하나 우리의 길동무!
망령들 길동무!
원술 (앓는 소리) 음!
망령들 (원술에게 가까이 가며) 그대는 누군가?
원술 죽지 못해 애쓰는 사람이야!
망령1 이런 미친 친구! 죽음이란 얼마나 외로운 건데, 하필 원한다는 것이 죽음이야?
원술 너희들은 무어냐?
망령들 도수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죽음을 싫어하는 사람들일세.
원술 너희들이 싫어하는 그 죽음을 제발 내게 빌려 주렴.
망령들 빌려 줄 수는 없어.
원술 왜? 왜 못 빌려 주어?
망령들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인걸.
원술 너희들의 죽음의 탈을 내게 둘러씌워 주면 되지 않어?
망령들 우리한테는 그런 권한이 없어.
원술 그러면 이 손을 이끌어 주렴. 너희들이 가는 길로---
망령들 안 돼! 못 해! 우리는 끌려가는 사람인걸.
원술 그러면 난 어떻게 죽어야 해? 이렇게 매달려 있어도 죽지 않으니 죽는 법을 가르쳐 주어.
망령1 그것을 어떻게 알아? 우리의 죽음은 우리가 택한 게 아닌걸.
원술 그러면?
망령들 우리는 원통하게도 당나라 군사의 발굽에 밟혀 죽은 망령들이야.
원술 그러면 석문벌 싸움에서 죽은 나의 동지들이야? 여보게들! 여보게들!
망령들 안 돼! 못 해!
원술 내가 비열한 놈이라서 그래?
망령들 우리는 비열이 뭔지 몰라.
원술 나를 용서해 주게. 제발 용서해 주게.
망령들 흐흐흐...... 죽음길을 걷자니 별꼴 다 보겠네.
원술 (큰 소리로) 너희 놈들이 아니면 내가 못 갈 줄 알고? 가라! 보기 싫다!
망령 1 제가 가라 하지 않은들 이미 가게 된 길 못 가겠느냐? 가세, 동무들!
망령들 (일제히) 가세. (죽음길의 노래를 부르며 떠나려 한다.)
원술 (망령들에게 손짓하며) 가서는 안 돼! 나를 버려두고 가면 어떻게 해? 자네네 재주로 나를 죽여 줄수 없거든 그러면 저 짐승들이나 불러다고!
망령들 맹수들?
원술 푸줏간 고기처럼 이렇게 매달려 있어도 저 야수들은 나를 먹어 주지 않어.
망령들 (멀리 바라보며 소리친다.) 어우! 어---우! (이 소리에 맹수들 응한다. 그 소리 점점 가까이 들린다.) 어우! 어---우!
원술 자 야수들아 어서 이리 와서 내 살을 뜯어라! 뼈를 핥아라!
망령 2 저 짐승들이 몰려오면 우리들까지 잡아 먹히지 않을까?
망령 1 이미 우리는 죽은 사람이니까 먹을래야 먹을 수가 없네!
망령 2 그러면 괜찮지만---
망령들 (여전히) 어---우! 어---우!
맹수들이 우는 소리만 꽝! 꽝!
원술 왜 안올까? 내 살덩어리는 짐승의 입가심도 될 수 없단 말인가?
망령 1 옳지! 여기 커다란 뱀이 한 마리 기어 오네!
망령 2 뱀이?
원술 아, 이 독사뱀아, 얼른 내게 기어올라 내 목줄기를 졸라매다고. 그리하여 숨이 가시거든 내 피를 빨아다고! 얼른! 이리와! 얼른! 와! 얼른! (뱀, 원술에게 기어 올라 목에 감긴다.) 옳지 옳지! (목을 조른다.) 아, 시원해라. 더---힘껏! 힘껏느(죽어가는 소리로) 음---
망령 (원술의 괴로워함을 보고 좋아서) 흐흐흐......
원술 (더 처참히 죽어가는 소리로) 으--ㅁ!
망령들 (여전히) 흐흐흐...... (기쁜 나머지 원술을 둘러싸고 춤을 춘다. 무대는 차츰 어두워지며 먼 하늘에서 천둥소리 가늘게 울린다.안개 속에 보이는 달과 같이 산봉우리 위에서 김유신 장군의
그림자 어슴푸레하게 나타난다.)
원술 (황홀한 듯이) 아버지! 아! 아버지가 보이네! (그러나 무엇에 찔린 듯이 별안간 두 팔을 내저으며) 안돼! 나는 죽어서는 안 돼. 거기에 아버지가 계셔. 이 뱀, 이 독사뱀을 떼어 주어!
망령들 흐흐흐! 그러면 그렇지. 네 놈인들 사람인 바에야 죽기를 좋아하겠냐?
원술 으아! (하고 최후의 몸부림을 치며 목에 감긴 뱀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친다.)
망령들 저런! (하고 놀라자 먼 하늘에선 번갯불이 일고 우뢰소리가 들린다.) 하, 하늘이 노하셨지?
원술 (뱀이 몸부림치면 칠수록 번갯불과 우뢰소리 심해짐을 보고) 누구나 저 뱀을 밟아 죽여 주어.
망령들 가세, 얼른! 천벌이 내렸나 보이!
망령들 퇴장. 바람 소리와 함께 번갯불! 그리고 천지가 떠나가는 듯한 우뢰소리 터진다. 별안간 주위는 깜감해 지고 죽은 듯 하다.
이윽고 하늘 한 구석이 밝아 온다. 부드러운 햇빛이 뼈만 남은 산봉우리를 어루만진다. 여태까지의 풍경과 딴판으로 어디선지 구슬을 부르는 듯한 명랑한 산새 소리 들린다. 망령들은 물론 없어지고 원술 혼자 땅바닥에 나가 떨어져 있다. 그 떨어져 있는 꼴이 일개 돌덩어리 같아서 그가 사람임을 알이 볼 수 없다. 고개를 넘어 진달래 나타난다. 그 뒤에 바랑을 짊어진 중이 한 사람 따랐다. 그는 담릉이다.
진달래 (높은 봉우리에서 사방을 두루 살펴보더니) 이 골짜구니에도 없는걸요.
담릉 틀림없이 이 태백산으로 들어왔지요?
진달래 일루 들어오시는 것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예요.
담릉 그러면 어디 숨어 계실까?
진달래 또 한 고개 넘어 볼까요?
담릉 더 가야 소용 있겠소?
진달래 이런 이슥한 골짜구니가 또 있지 않아요?
담릉 이만하면 찾을 만한 곳은 다 찾아본 셈이요.
진달래 그러면 어떻게 해?
담릉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 끝으로 차 보며) 이것이 뭘까? 무슨 쇠토막이지요?
진달래 칼같지 않아요? 도령님이 차고 다니시던----
담릉 (한참 들여다보더니) 정말이야. 정말 그래! 옳지, 인제 되었다. 도령님은 분명히 이 근방에 계셔!
진달래 (목에서 피가 나게) 도령님! 도령님! 원술 도령님!(하고 부른다. 산울림만 가깝게 혹은 멀리 이중 삼중으로 들릴 뿐이다.)
담릉 천연 어디서 대답을 하시는 것 같지요. (더 큰 소리로) 도령님!
진달래 저 소리는 산울림이예요.
담릉 (시험으로) 오!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귀를 기울려 듣더니) 정말 산울림이야.
진달래 아마도 이 칼로 돌아가셨나 봐요.
담릉 그러면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게요?
진달래 (산봉우리를 우러러보며) 산신님, 영특하신 산신님. 제발 우리 원술 도령님을 내놓아 주세요. 제가 도령님의 뒤를 밟아 이 산중을 헤멘 지 이태 만에야 비로소 이 쇠토막을 얻었습니다. 이 이상 제 가슴을 태우지 마시고 제발 우리 도령님을 내놓아 주세요. 소원입니다. 예, 산신님! (이 정성을 응하는 듯이 멀리서 맹수의 우는 소리 들린다.)
담릉 멍한 하늘에는 피에 주린 야수의 울음소리뿐이로군!
진달래 (실망한 듯이) 산신님도 무심하시어!
담릉 그 칼로 자결하시지 않았으면 저 짐승들의 밥이 되었는지도 몰라요. 여기는 태백산 중에서도 호랑이 많기로 유명한 데니까요. (무심히 땅에서 커다란 뼈다귀를 하나 주웜본다.
진달래 뼈지요? 무슨 뼈다귈까?
담릉 글쎄. (이모저모 살펴보더니) 오---사람이 뼈로군. 그리고 여기에 이 해골! (해골을 주워 진달래에게 보인다)
진달래 정말! 그러면 이 칼과 이 해골! 그리고 저 야수의 우는 소리!
담릉 도령님은 자살하신 거예요. 틀림없소.
진달래 나는 이것이 도령님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담릉 설사 이것이 도령님 아니래도 도령님 역시 이 모양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 분명해요.
진달래 (해골을 안고) 도령님 이 험한 산중에서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그 고생하신 흔적이 이것! 나무 탄 자리에 재가 남듯이 도령님의 남기신 표적이 이것뿐야요? (해골에 뺨을 비비더니 해골을 안는다)
담릉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진달래 나도 같은 길동무가 되겠어요, 도령님의---
진달래, 속으로 사를 염하여 정죄한다. 먼 하늘에 바람 소리만!
원술 (이제야 겨우 정신이 났는지 죽어가는 소리로) 으---ㅁ.
진달래 가만! (두 사람 귀를 기울인다. 원술의 잠꼬대 같은 소리 들린다.)
담릉 무슨 소릴까?
진달래 여우 우는 소린가 봐요.
담릉 아니요, 바람소리요.
원술 (여전히) 으---ㅁ.
진달래 (원술의 허리를 누르고 있는 나뭇가지를 들먹거린다) 저것 보세요. 저기에---
담릉 (무서워 가까스로 가까이 간다. 자세히 보고는 비로소) 사람인가봐.
진달래 이 깊은 산중에 웬 사람일까요?
담릉 (더 자세히 뜯어보더니) 도령님이 아닐까요?
진달래 (들쳐보자 틀림없는 원술이다.) 아----도령님!
원술 (느끼며) 아, 가까스로 죽을 기회를 얻었나 하였더니 또 죽지를 못하고 이 모양이야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담. 언제까지 살아야 한담.
진달래 (흔들며) 도령님. 저예요. 진달래예요.
원술 (어슴푸레 알아들은 듯이) 진달래?
진달래 예, 진달래 여기 있어요. (원술의 손으로 자기의 뺨을 어루만져 보인다.)
원술 (그제야 정신이 난 듯이 몸을 뒤집어 진달래를 뚫어지라고 바라보더니 비로소 깨닫고) 앗, 정말!
진달래 도령님! (껴안는다.)
원술 (황홀하여) 이 일이 웬일이야? 웬일이야?
진달래 아---산신님도 고마우시어! 산신님께서 천축사에서 좌관님을 만나게 해 주시더니 여기서 또 도령님을!
담릉 도령님! 용서하십시오. 도령님을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이 못난 담릉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느낀다.)
원술 오 담릉!
진달래 헌데 도령님, 소나무 가지에 칡녕쿨로 발목은 왜 이렇게 붙들어 매셨어요? (소나무 가지에 매달린 원술의 발목을 만져 준다.)
원술 이렇게 큰 독사뱀 한 마리 내 목을 조르기에 안 죽을려고 몸부림을 쳤더니 그통에 그만!
담릉 (원술의 발목을 풀어 주며) 발목에 이 피좀 봐!
진달래 자결을 하시려면 고이 하시지, 왜 이렇게 참혹한 짓을---
원술 내 몸을 못 살게 다루었어야지. 그래도 내가 지은 죄를 다 씻을 수 없어.
진달래 도령님.
담릉 소인 역시 소인의 죄를 씻으려고 부처님 전에 이 육신을 맡기고 있습니다만 무거운 가슴은 매양 그대로예요. 도령님, 소인 역시 같이 죽게 해 주신다면 소인에게는 그 위에 더 큰 행복은 없겠어요.
진달래 여기까지 찾아 뵌 것도 도령님을 모시고 같이 떠나기 위해서예요.
원술 하지만 진달래, 인제 나는 죽을 수 없어. 아무리 애써도 나는 죽을 수 없어.
담릉, 진달래 왜요?
원술 저승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동지들이 있어. 내가 죽으면 저승에 가서 우리 동지들과 아버질 뵈야 되지 않어? 이승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한 그이들을 저승에서 내가 어떻게 만나? 안 돼. 갈 수 없어. 나는 못 죽어. 아까 뱀에서 목을 졸라맸을 때 문득 그 생각이 나서 죽지 못하였어. 그래서 기를 쓰고 뱀을 떼었다.
진달래 (고뇌하는 원술을 안아주며) 아, 가엾은 도령님! 죽음보다 더 큰 속죄는 없다는데 죽음으로써도 죄를 면할 수 없다니!
원술 (진달래에게 안긴 채) 아, 나는 어디로 가야 해?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으니----
진달래 (하늘을 우러러보며) 아---막막해라.
원술 아---떨려!
진달래 (원술을 꼭 껴안은 채 이성의 가슴의 더운 기운을 느끼는 듯이) 먼 산에 저 아지랑이.
원술 저것이 내 가슴을 태우는 불꽃일걸.
새소리, 멀리서 들린다.
진달래 (원술의 팔을 만지며) 마르기도 하셨군. 도령님께서 조금만 건강하시면 도령님의 죄를 씻을 길이 있으련만!
원술 그 무슨 소리야?
진달래 아무것도 아니예요. (하며 꼭 껴안아 준다.)
원술 어떻게 하면 죄를 씻을 수 있겠어?
진달래 도령님, 이 팔로 창칼을 들 수 있겠지요?
원술 뭐?
진달래 싸움터로 한 번 나가 보시고 싶지 않으세요?
원술 내가 싸움터로?
진달래 예.
원술 음, 이 더러운 손으로 어찌 다시 창칼을?
진달래 제가 들은즉 장군께서 돌아가신 뒤로 당나라 군사는 무인지경을 걷듯이 우리 나라 국토를 휩쓸고 있다 합니다. 백성은 모두 죽기를 기쓰고 제 애비는 지게 작대기를 들고 제 어미는 부지깽이를 짚고 나가셨다 합니다.
원술 하지만 내가 나선다는 것은---
진달래 나라를 위한 일편 단심만 있으면 죄인이건 병신이건 심지어 이 땅 위에 있는 한줌의 흙, 돌 한덩어리까지도 지금 이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답니다. 도령님, 일어나세요. 도령님의 돌아가실 자리는 그자리뿐! 죄를 씻을 길도 그 길밖에 없어요.
담릉 도령님, 진달래 말이 적실히 옳습니다. 소인한테도 기회를 주십시오. 석문벌에서 저지른 죄를 씻고 가슴에 사무친 이 원한을 풀 기회를 주십시오.
원술 (이를 갈며) 원한을 풀 기회를?
진달래 (일어서려고 애쓰는 원술을 붙들어 주며) 자요.
원술 담릉, 가세! 그러면 죽으러 가세!
담릉, 감격하여 눈물을 씻으면 원술을 붙들고 나간다.
-막-
제 5막 1장
나오는 사람들 (등장순) 어린 병정, 늙은 병정, 병정 갑.을, 당장, 원술, 담릉
때 전막으로부터 약 반 년 후인 문무왕 15년 8월, 어느날 밤
곳 매초성(지금 양주) 싸움터
무대 숲이 우거진 산악 지대. 키가 땅에 붙은 노송 밑에 당막을 두른 신라군의 군지
막이 열리면 몇 번째 큰 싸움이 지나간 뒤이므로 주위가 모두 황막하고 진두에 서 있는 깃발조차 피로해 보이며 여기저기에서는 적의 화살, 아직 치우지 못한 우군의 시체도 더러 뒹굴고 있다.
장막 안에 병정 몇 사람 늘어져 있다. 피로와 기갈에 맥이 풀어진 것이다. 개중에서 어린 부상한 병정은 다리를 안고 신음하고 있다. 모두 기진맥진하여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이 풍경과는 딴판으로 적진에서는 호궁 켜는 소리 슬프게 그리고 한가롭게 들린다. 보초(병정 을)는 높은 언덕 위에서 원망스러운 듯이, 호궁 소리 흘러오는 쪽을 노려보고 있다.
어린 병정 애구, 목말라.
병정 갑 (산 아래를 노려보며) 에이, 개짐승 같은 당나라 놈들!
늙은 병정 이놈들아, 뭘 먹겠다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사람을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병정 갑 음, 어찌하면 저놈들을 휘몰아낼까? 이 땅에서----
병정들 (부두둑 이를 가며) 원수!
원술과 담릉, 조심스럽게 나타난다.
병정 을 (소리친다.) 누구냐?
원술 ...... 저!
병정 갑 (가까이 가서 달빛에 얼굴을 뜯어보니) 귀찮게 왜 자꾸 찾아오는 거야?
원술 우리는 여기 꼭 한몫 들어야 되겠어요.
담릉 제발 한몫 끼어 주세요.
병정 갑 (시체를 가리키며) 저 땅바닥에 딩굴어져 있는 시체를 못 봐? 화살이 휭휭 날아와, 여긴----
원술 그래야 싸울 맛이 나지 않소?
병정 갑 뭐?
원술 내게 제발 싸울 기회를 주오.
어린 병정 헤 참! 지긋지긋한 싸움터에 발을 붙이지 못해 애쓰는 놈도 있담.
갑 정말 우스운 놈도 다 보겠네!
늙은 병정 당장, 꼴이 수상하지 않소. 어찌보면 미친놈들 같기도 한데, 또 성한 사람 같기도 하며 어찌 보면 똑똑한 놈들 같기도 한데, 또 못난 놈들 같기도 하고----
담릉 대관절 너희들 웬놈이야?
원술 우리는 이 근방에 살아요.
당장 거짓말! 장정이란 장정은 모조리 이 싸움에 뽑혀 이 고을에는 사람이 없어. 이름이 뭐야?
원술...... 저 -
당장 이름도 없냐?
담릉 이름이야 뭣이건 좋지 않습니까?
당장 대관절 너희들 창칼 들어 본 적은 있니?
원술 (대답할 바를 몰라 망성이다가)......있어요. 아니 어, 없습니다.
당장 (소리지르며) 어찌된 일이냐? 금방 있다고 했다가 별안간 또 없다고 하니---
갑 아마도 당나라에 붙어 우리 조국을 팔아먹은 놈인 모양요.
을 이 역적!
원술 당나라의 끄나풀이라니 당치 않은! 아니요. 아니오.
을 (창을 겨누며) 닥쳐라! 이 싸움터에서는 사람이라고는 당나라 아니면 우리 나라! 이 두 나라 군사뿐이야. 당장 죽여라!
갑을 예! (각각 손에 든 칼과 창으로 원술과 담릉을 친다. 원술과 담릉, 날쌔게 그 칼과 창을 피한다.)
당장 가만! (갑, 을, 창칼을 멈춘다.) 정말 우리 신라를 위하여 싸우겠니?
원술과 담릉 싸우다 뿐이겠습니까?
당장 그러면 영문에 가서 한몫 넣어 달래라.
원술 영문에 가면 이런 진지에 풀려 나오지 못해요. 여기는 바로 적군하고 마주보고 있지 않아요? 여기서 싸워야만 직접 당나라 놈들과 직전을 할 수 있어요. 살과 살을 깎고 뼈와 뼈를 부딪치며 ---
당장 그럴 용기가 있니? 너희들에게---
원술과 담릉 있다 뿐입니까?
당장 그러면 속는 셈치고 붙여 두어 보지. (을에게) 여보게, 여기 두워 둬, 이 두 사람을---
원술과 담릉 (감격하여) 고맙소! 고맙소! (한구석에 선 칼과 창을 덥석 든다.)
당장 안 돼! 그것은---
원술 예?
당장 이 나라 군사의 창칼이란 아무나 드는 게 아냐?
원술 창칼이 없이 어떻게 싸워요?
당장 우선 잔심부름이나 해.
원술 심부름?
당장 너희들이 어떤 놈인 줄 알고 함부로 무기를 맡긴담.
늙은 병정 창칼은 차츰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원술 (깊은 한숨을 쉬며 힘없이) 허기야 그럴 테지.
담릉 (위로하듯) 여기 좀 앉으세요.
원술 (쭈구리고 앉아 호궁 소리를 들어며) 야--- 이 무슨 청승이람!
어린 병정 애구, 다리야. 다리가 쑤셔. (바람결에 호궁 소리가 가까이 들리니까) 할아버지, 이놈의 호궁 소리 좀 안 들리게 해 주오. 아이, 듣지 싫어! 되놈들은 왜 저런 앓는 소리를 좋아하는 거야?
늙은 병정 고향 생각이 나는 게지, 놈들도---
갑 천만에. 저것도 한 가지 꾀야. 저것을 켜서 사람의 간장을 텅--- 비게 해놓고는 우리를 되잡아 치려고 저래.
병정들 에이, 여우 같은 놈들!
화살이 하나 날아와서 고나무에 꽂힌다. 모두 깜짝 놀란다.
을 이크, 화살이!
늙은 병정 (갑을 보며) 자네 말이 정말이군 그래.
바람 소리와 호궁 소리, 육박하는 듯이 들리면서 화살 몇 개 연거푸 날아오다. 모두 몸을 피한다.
어린 병정 (질린 듯이 소리치며) 이 할아버지, 여기를 물러나요. 그만 물러나요.
늙은 병정 얘, 그 무슨 소리냐?
어린 병정 여기 이러고 있다가는 몇 사람밖에 안 남은 우리마저 몰살당하고 말아요. 저놈들이 기어 올라오면 우리는 다 죽어요.
갑 (어린 병정의 뺨을 모질게 치며) 닥쳐! (증오에 불타는 눈으로 쏘아본다)
어린 병정 (울며)...... 난 죽기는 싫어요! 개, 개죽음을 하긴 싫어요!
당장 몇 해 전 석문벌 싸움에 원술 화랑이 죽음의 유예를 얻으려다가 평생 씻지 못할 죄를 짓지 않았니? 우리에게는 후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여기에서 우리가 한 발이라도 물러나와 봐! 우리 때문에 저 산등성이에 쭉 포진하고 있는 우군의 진지는 모두 결딴이 나고 말거야. 우리는 여기를 사수하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 나라는 망하고 말아.
어린 병정 하지만 적군의 수는 수십만이나 되지 않아요?
당장 일당 백이란 말이 있지만 우리는 일당 천이나 만으로 당할 각오를 하면 돼.
원술 (가만히 앉아 흙을 쥐어 바람에 날린다.)
늙은 병정 너 뭘하고 있는 거냐?
원술 바람이 저 당나라 군사 있는 쪽으로 불지요?
늙은 병정 왜 그래?
원술 (심한 바람 소리를 들어며 속으로 깊은 생각에 사로잡히여) 좋은 수가 있지만---
늙은 병정 무슨 소리야?
원술 (휙 일어서며) 그만두어요.
당군의 아우성 소리 멀게 들린다.
당장 또 습격을 해 오는 게 아니야?
갑 그런가 봐요.
을 (어둠을 통해 먼 산을 바라보고는) 놈들이 저 우편에 있는 우리 우군의 진지를 쳐올라가고 있습니다.
당장 (호령) 자, 창칼을 들라!
병정들 예. (일제히 적군의 아우성 소리 나는 쪽을 방비하려고 각종 무기를 들고 전투 자세를 취한다. 어린 병정까지도 아픈 다리를 끌고 따른다. 그러나 원술과 담릉만 할 일 없이 뒤에 쳐저 남는다.)
원술 (슬픈 얼굴로) 우리는 뭘 해?
담릉 돌멩이라도 줘 모아 둡시다. 적군이 가까이 오거든 집어던지게---
원술 (상장에게 가서 애원한다.) 당장! 우리가 아무리 사람축에 못 끼일 인간이라 하더라도 구경만 하고 있으라니 이게 무슨 꼴이요. 이 손에 뭐든지 하나 잡혀 주십시오. 이럴 때 안 싸
우고 언제 싸우겠소?
당장 그렇게도 싸우고 싶으냐?
원술 소원이오, 이 몸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나도 싸울 테요. 싸우다가 죽을 테요.
당장 (자기가 차고 있는 칼을 뺴어 주며)자, 그럼!
원술 (감격하며) 고맙소! (싸울 준비로 허리띠와 신발을 고쳐 매고는) 저기 저 말을 빌려 주시오.
동장 어딜 가기에?
원술 적진에 뛰어들어 한바탕 무찌르고 죽겠소. 그러다가 적장의 머리나 베어들고 오면 다행이고요.
동장 이 미친 녀석아, 그런 짓은 관창과 같은 화랑이나 하는 거야. 너 같은 놈이 한 발자국만 아래로 발을 내디디어 보아! 단박에 그만---
원술 죽기밖에 더 하겠소?
당장 맞아 죽기나 하면 좋지만 산 채로 사로잡히기나 해 보아. 우리의 이 진중 비밀이 드러나게 되고 말걸.
원술 (간절히) 걱정마세요. 사로잡히면 이 칼을 물고 그 자리에서 단박에 자결할 테요. 자, 보십시오.(칼을 들어 당장의 면전에서 자기의 왼쪽 팔을 걷어올려 한 일자로 뿍 긋는다.)
동장 (깜짝 놀라) 앗! 저 피! (팔의 상처를 쥐어 준다.)
원술 자기의 앞가슴을 잡아 헤치며) 이래도 이 몸을 못 믿으신다면 그러면 이 앙가슴에다 상처를 내 보이겠소.
동장 앗, 여보게, 말은 저기에 매어 있으니 타고 가게! 가서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게. (수건을 찢어 상처를 질끈 싸매 준다.)
가기를 재촉하는 듯 말의 울음소리
원술 고맙소.
담릉 나도 같이 따르겠어요.
원술 그대는 여기 있다가 적진에서 만일 아우성 소리가 일거든 이 숲에다 불을 싸질러 주게.
당장 그건 왜?
원술 거센 바람이 저 아래 적진을 향하여 불지 않습니까? 적진이 불에 휩싸이는 동안에 막 몰아치겠어요.
당장 음, 그래.
원술 그러면---(퇴장, 달리는 말굽 소리)
담릉 (바라보고) 막 무찌르고 들어가지 않아요?
일동 아---니, 어쩌려고 저럴까?
적군의 놀란 아우성소리
담릉 옳지 --- 적의 아우성이다! 불을 싸지르세요, 얼른!
당장 불을 싸질러라!
갑 예! (퇴장)
하늘이 붉어온다. 모진 바람소리! 갑, 다시 나타난다.
담릉 봉홧불을 울주세요. 저 산허리에 쭉 늘어 서 있는 우리의 진지에서 일제히 총돌격을 하게.
당장 봉홧불을 울려라.
갑.을 예. (봉홧불 오른다. 여기저기 먼 산봉우리에서도 웅한다.)
담릉 총돌격의 호령을.
당장 자, 몰아쳐라!
일동, 담릉과 당장의 선두로 으악 소리지르며 퇴장. 빈 무대에는 더 심한 바람소리 들려오고 그리고는 마침내 하늘은 피빛이 된다.
-막-
제 5막 2장
나오는 사람들(등장순)
궁녀들, 시신들, 진달래, 낭당총관, 병정들, 원술, 문무왕, 공주, 지경시중, 사관.
곳 전장으로부터 1개월 후, 문무왕 15년 9월 어느날 명랑한 날, 낮.
때 궁전 앞뜰.
무대 당군에게 치명상을 준 매초성(지금 양주) 싸움에서 대승한 개선군에게 논공 행상을 행할 식장.
주위에는 화려한 장막을 둘러쳤고 각종 기치는 맑게 개인 가을 하늘에 나부낀다. 무대 좌우 양측에서는 대청과 삼문이 각각 그 건물의 일부를 보이고 있다.
막이 열리면 멀리서 행진해 오는 씩씩한 군악소리에 무대에는 궁녀 1,2,3, 콧노래를 부르며 대청기둥에 꽃등을 달고 있다.
진달래, 나타난다. 피로한 가운데로 얼굴에는 희망과 기쁨의 빛이 넘쳐 흐를 듯하다.
진달래 (고개한 기웃이 뺴어 안을 들여다보며) 여기서 오늘 논공 행상을 하시지요? 이번 싸움에 공을 세우신 이에게.
궁녀1 (부르던 노래를 그치고 퉁명스럽게) 왜 그래?
진달래 오늘같이 즐거운 날 시골서 묻혀 있을 수 있어요? 그래, 구경하러 올라왔지요. 나랏님께서 친히 상을 주신다니까.---
궁녀2 정말 길거리는 인산인해래. 시골서 구경꾼들이 얼마나 떼를 지어 올라오는지.
궁녀3 아마도 온 천지가 발끈 뒤집혔나 보아.
시신 (꽃방석을 들고 바쁘게 등장하며 자---이것을 받으오. 이것이 오늘의 상품이오.
진달래 아이, 이것이 모두 금실로 만든 것 아니오?
시신 헹, 그것보다도 더 기맥힌 상이 있는 줄은 모르는군 그래.
진달래 뭔데요?
시신 이게 웬 계집애야, 나가요! 나가! (진달래를 쫓아낸다.)
궁녀들 정말! 우스운 것도 다 보겠고나 호호호......,
이 때, 군악 소리 더욱 가까이 들린다.
시신 (안을 향하여 소리친다.) 개선군의 입궐이요.
문무백관 안에서 나타나 삼문 앞에 들어선다. 개선군의 지휘자인 낭당총관의 선두로 의기양양하게 등장. 각종 기치를 들고 뜰 앞에 정연히 선다. 군악 멎는다.
안에서 우아한 궁전악 일더니 지경시중의 안내로 문무왕, 궁녀들에게 싸여 공주를 데리고 유유히 등장. 공주는 특히 호화롭게 차렸다.
왕, 옥좌에 앉으니 음악 그친다. 장내는 물을 뿌린 듯이 엄숙하다.
낭당총관 (왕에게 정연히 나아가) 상감마마께 아뢰나이다. 어령을 받잡고 매초성 싸움에 출전하였던 신들은 적을 일망타진하여, 이렇게 적장의 목을 베어 들고 돌아왔소이다.
왕 수고들 하였소.
낭당총관 이미 상달한 바도 있거니와 교봉 시초에는 아군의 전세 불리하와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내어 조국의 존망 풍전 등화와 같이 위급하였사오나, 마침내 한 무명의 병사 나타나 그의 목슴을 초개로 여긴 용맹한 거사로서 적의 장수 고간의 목을 벤 후로는 구름같이 흩어지는 적군을 휘몰아 개미새끼를 짓밟듯이 무찔러 불과 일 개월도 못 되어 적의 이십만 대군을 하산지세로 패주시키고, 전마 삼만 삼백 팔십 필을 얻었으며 기여 병장의 획득도 그만큼 되었삽는데 이는 오로지 성은의 망극하신 덕인가 하나이다.(주악)
왕 (주악이 그치니) 경등의 충성으로 이룩한 이 전과는 이 땅에 와 있던 적군의 주력을 송두리째 꺾은 것으로, 이로써 당나라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만큼 큰 타격을 받았음은 물론, 우리 나라가 아무리 적다 하여도 외적의 침노에 대하여는 뭉쳐 불이 되어 죽음으로써 저항한다는 돌 같은 결심을 적에게 보여 준 것이요. 어시호 당나라도 허욕에 끄을려 남의 강토를 엿보는 우매한 짓은 영원히 삼갈 것으로 믿으니 태종선왕께서 뜻 세우신 삼국 통일의 대업은 이로써 성취되었소. 경등의 충성으로 국토는 튼튼한 반석 위에 서고 창생은 베게를 높이 하여 잘 수 있게 되었으매 하늘에 나부끼는 저 깃발도 우리 겨레의 불멸의 혼을 상징하는 듯 씩씩하게 펄럭이게 되었소.
낭당총관 이것은 전혀 신등의 힘이 아니옵고, 우로 하늘의 도움이요, 땅의 성은의 지극한 덕인가 하옵나이다.
왕 그러면, 금번에 적장의 목을 베어 전세를 이렇게 승리의 길로 이끈 우리의 공신을 불러 내오.
낭당총관 그 공신은 사양하여 궁중에 들어오지 않으려 하기에 저 삼문 밖에 머무르게 하였는 줄로 아뢰나이다.
왕 빨리 들어오게 하오. 짐이 몸소 포상하겠소.
낭당총관 예. (퇴장)
주악.
낭당총관, 원술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난다. 원술은 얼굴에 붕대를 감았으며 한 팔은 없어졌다.
왕 (놀래어) 오, 얼굴에 저 상처는?
낭당총관 적당 고간의 목을 베러 적진에 뛰어들었을 때 불행히 적의 칼에 맞아---
왕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오, 장하도다! 장하도다! 공주, 이 꽃방석을 깔아 주라.
공주 예. (꽃방석을 받아들고 계하로 내려간다.)
왕 그 방석은 그대를 위하여 공주가 손수 수놓은 것이다.
공주 (방석을 깔아주며) 아이, 수척도 하세었네. 조국을 위한 골똘한 마음! 몸을 돌보실 겨를도 없었구려.
왕 금번 그대는 화랑도 아니요, 일개 하졸의 몸으로서 5계를 체득한 화랑도 능히 할 수 없는 대공을 세워 일직이 태대각간 김유신 장군도 이룩하지 못한 조국 통일의 왕업을 완성시켜, 도탄에서 헤매는 백성을 제도하였으니 그 충성심과 그 용맹함과 그 지혜로움은 만세의 거울이 되어 이 나라 청사를 영원히 빛나게 하였도다. 여기에서 우리의 수천만 겨레를 대신하여 그대에게 포상을 행하거니와, 이 포상의 영화로운 자리를 만듦도 이 또한 그대의 빛나는 공이로다.(주악)
지경시중 (상장을 읽는다.) 그대의 공로에 비추어 이에 소판이란 작위와 남성의 도조 삼천 석의 땅을 그대에게 사하노라.
왕 짐의 앞으로 나와 그 작위와 땅을 표증한 저 증상과 아울러 이 상품을 받을지여다.(증상과 상장을 시중에게서 받아 원술에게 주려 한다.)
원술 (역시 꼼짝하지 않는다.)
왕 (주위에 선 문무백관들에게) 이 어이된 일인고?
낭당총관 이것은 그대를 추앙하는 수천만 우리 겨레의 마음의 표징이니 자---사양치 말고 받으라.
원술 (역시 부동)
왕 어이하여 꼼짝하지 않을까? 짐의 처사에 무슨 불만이 있음일까?
지경시중 아마도 소판이란 벼슬과 삼천 석의 땅과 이 상품이 저 공신의 마음에 마땅치 아니한가 하나이다.
왕 정말 그런가?
원술 (그제서야 겨우 입을 열어 그러나 고개는 들지 못하고) 결단코 그렇지 않은 줄로 아뢰나이다.
왕 그러면 무슨 까닭인가? 이 상을 받으려들지 않는 연유를 아뢰오.
지경시중 상감마마께서 역정 나시겠소. 빨리 아뢰오.
낭당총관 빨리 아니 아뢰겠오?
원술 (아무리 윽박질러도 입을 벌리지 않는다.)
왕 (실망하여) 아, 답답한지고! 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내던진 그대, 어이하여 짐의 가슴을 이다지도 괴롭게 하는가?아, 그대, 이 왕을 조롱함인가?
원술 (가슴이 복받치는 듯)아니오! 아니오! (하고 엎디어 통곡한다. 장내 모두 의아해 한다.)
왕 (역시 의아하여) 그대 무슨 연고로 짐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가? 그대는 누군가? 이름이 무엇인가?
원술 여기에 이르러서야 어찌 신의 본색을 숨길 수 있사오리까? 신의 이름은 워, 원술인 줄 아뢰나이다.
왕 뭐?
원술 재맷골 출생인 김 원술이로소이다.
왕 그러면 원술 화랑이란 말인가?
원술 (무거운 고개를 겨우 들어 눈물에 빛나는 눈으로 서러운 듯이 왕을 우러러본다.)
왕 호---정말! 얼굴의 상처로써 지난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나, 틀림없는 원술 화랑이로고! 오---원술 화랑---죽은 줄만 알았더니 이 어이한 일인고?
원술 계율을 어기어 가문과 동지와 나라를 욕되게 한 이 불효 불충한 죄인이 뻔뻔스럽게도 거룩한 이 나라 군사와 어깨를 겨누어 창칼을 잡았사오니 또한 그 죄 이를 바 없는가 하나이다.(느낀다.)
왕 과연 천하 공신 김유신 장군의 피를 받은 자로고! (감동하여 다정하게) 그대 눈물을 거두라. 그대의 세운 공은 그대의 지은 죄를 씻고도 남음이 있도다. 지하의 그대의 아버지도 오늘의 이 광경을 보면 짐과 더불어 기뻐할 것이어.
원술 그 정말이리까?
왕 암, 정말이고 말고. 기뻐 춤을 추는지 모를 일이어.
원술 황공하여이다. 황공하여이다.
왕 자--- 인제 마음을 놓고 이 상을 받으라.
원술 황공한 말씀이오나, 그 상은 받을 수 없는 줄로 아뢰나이다.
왕 그 또 무슨 연곤고?
원술 신이 싸움터로 나아간 것은 상을 받기 위하여서가 아니옵고, 오로지 신의 지은 죄를 씻기 위한 것에 불과하였나이다.
왕 연이나, 이것을 사양함은 짐의 뜻을 너무나 저버림이 아닐까?
원술 아니오. 아니오이다. 상감마마께서 신이 감히 이 나라 창칼을 든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만으로도 신에게는 과람한 처사이온데 이 위에 상까지 받으라 하심은 도리어 신으로 하여금 세상의 웃음거리를 만드심이 아닌가 하옵나이다.
신은 인제 어디서나 마음놓고 죽을 수도 있삽고, 죽으면 떳떳이 저승에서 신의 부친을 만날 수 있게 되었사은즉 인간으로서 이 이상 무슨 상이 또 있사오리까?
왕 (감탄하여) 과시 우리의 화랑이로고! 이 슬기로운 화랑이여, 짐이 그대의 그 슬기로움에 비추어 긴히 부탁할 바 있지만 그대 만일 짐의 이 부탁마저---
원술 무슨 어명이시온지? 상을 받으라는 어명이 아니오면 무엇이나---
왕 고마우이.
원술 어서 분부 내리소서.
왕 공주, 잠깐 물러나라.
공주 예. (읍하고 퇴장)
왕 (퇴장하는 공주를 힐끗 쳐다보며) 짐에게 공주가 있은즉 그대, 쟤와 원앙의 짝이 되어 이 나라의 부마가 됨이 어떠한고?
원술 예?
왕 그대를 부마로 삼으려 함은 그대를 아끼는 짐의 간절한 심정인즉 그대는 짐을 실망케 하지 않을 줄로아노라.
원술 망극하신 성은이로소이다. 그러하오나, 불초 신에게는 마음에 두고 있는 아이가 있는 줄로 아뢰나이다.
왕 응? 그 누군고?
원술 집도 절도 없는 지극히 외로운 시골 처자로소이다.
왕 시골 처자?
원술 그 처자는 신이 죄지은 몸으로 실의에 빠졌을 때 끝끝내 신을 도와 신에게 삶의 힘을 부어주었거니와 신으로 하여금 죽음에서 뛰어나와 오늘의 성사를 이루게 함도 또한 그 처자의 덕인 줄로 아뢰나이다.
왕 그 정말인가?
원술 누구의 앞이라고 거짓을 아뢰리이까?
왕 그러고 보면 그 처자야말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여야 할 숨은 공로자의 한 사람이 아닐까? 여보아라, 그 처녀를 불러 이 논공행상에 참석케 하라.
시중 예.
원술 고마우신 분부로소이다.
왕 (원술에게) 지금 그 처자는 어디 있는고? 있는 곳을 알려 빨리 입궐케 하라!
원술 불행히 신의 그의 행방을 알 길이 없나이다.
왕 그 무슨 말인가?
원술 아마도 길거리에서 이슬로 사라졌음이 아닌가 하옵나이다.
왕 뭐?
원술 당나라의 침노로 백성 모두 도탄에 빠진 이 때 집도 절도 없는 계집아이로서 살아 있을 리도 없삼고, 더구나 신과 작별할 때에 피차에 죽기를 언약하였사온즉 도저히 살아 있다고는 할 수 없을까 하나이다.
사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까 여기서 식장을 차리고 있노라리까 어떤 시골 계집아이 하나 나타나 상받을 이의 소식을 물은 일이 있었삽는데---
원술 상 받을 이의 소식을?
시신 예.
왕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는가?
원술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반드시 오늘의 이 날을 축하하러 상경하였을 줄로 아뢰나이다.
왕 그러면, 그 시골 처녀를 찾아오라!
궁녀 상감마마, 그 처녀는 지금 저 안에 붙들려 있는 줄로 아뢰나이다.
원술, 왕
왕 뭐
궁녀 아까 여기에 들렀다가 나가는 길에 저 바깥 우물에 빠져 자결하려는 것을---
원술 자결?
궁녀 예. 그러는 것을 마침 지나가던 수문장이 보고---
원술 아니, 무슨 까닭으로 자결하려 하였을까? 인제는 외적이 물러났으니 자기의 할 일을 다 하였다 생각한 까닭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런 병신이 된 줄을 미리 알고 비관한 나머지? 아니, 담릉까지 전사한 마당에 나 홀로 이렇게 살아있음을 비열하다 생각한 까닭인지......
진달래, 신하들에게 붙들려 등장.
시신 저기에 나타나는 저 처녀가 바로---
원술 (깜짝 놀래어) 오---정말! 진달래! (하고 덤비려 한다.)
진달래 (손으로 막으며) 저는 죽어야 할......
원술 죽다니, 그 무슨 소린가? 황공하옵게도 이 어전에서.
진달래 도령님과 같이 훌륭하신 분께서 부마가 되시어야 우리 나라는---
원술 오, 내가 부마가 되는 줄 알고 자결하려 한 것이로고! (전신이 불이 되며) 진달래! 나를 이렇게도 몰라준단 말인가? 나는 그대를 만나면 갈삿갓 쓰고 길거리에서 살던 그 시골로 다시 찾아가 외로운 새벽 하늘의 별처럼 의좋게 살 결심을 하고 있는데 그대는 나를! (분노에 못이겨 뚫어지라고 진달래를 쏘아본다.)
진달래 (원술의 불타는 눈에서 그의 진심을 비로소 알고) 도령님,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하고 그의 품에 쓰러진다)
공주 (조금 전에 등장하여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아바마마 저분을 놓아 주소서.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하여주소서.
왕 그러면 그대, 앞으로 그대는 그대의 마음대로 하겠거니와 그대 떠나기 전에 그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이 있노라.
원술 무슨 일이오니까?
왕 그대에게 주려던 소판이란 작위만은 원술이란 이름과 아울러 우리의 사기에 남김을 허락하라.
원술 신의 성명을 거룩한 우리 나라 청사에 남기신다는 말씀이시니이까.
왕 물론이야.
원술 그 천부당 만부당하신 분부로소이다.
-막-
출처 유치진, 원술랑(어문각, 1973)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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