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에 대한 글을 읽다보면 혼동되는 부분이 한가지 있다. 비슷한 구역을 활동 무대로 하는 3함대와 5함대가 정확히 어떤 집단을 지칭하는가라는 문제이다.
- 오늘날의 3함대와 5함대 -
미국 제 3 함대(U.S. Third Fleet)는 동경 160도 동쪽의 태평양(제 2 함대가 담당하는 남아메리카 서해안을 제외한)을 담당하는 미해군의 함대이다. 사령부는 캘리포니아의 샌디에고 군항에 위치해 있다.
3함대는 동경 160도 왼쪽의 서태평양과 인도양(중동 지역은 제외)을 담당하는 제 7 함대와 함께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구성하고 있다. 항공모함을 비롯한 함정들은 제7 함대나 중동을 담당하는 제5 함대에 순환식으로 배치되고, 각각의 함정들은 담당한 해역에 따라 3함대로부터 7 함대 혹은 5함대로 지휘권이 넘겨지게 된다.

미해군 5함대
제 5 함대(U.S. Fifth Fleet)는 페르시아만과 홍해, 아라비아해로부터, 케냐까지의 동 아프리카 해역을 담당 구역으로 하는 미해군의 함대로서 사령부는 바레인에 위치해 있다. 인력과 장비는 태평양 함대와 대서양 함대로부터 제공되고 있다.
5함대 사령관(COMFIFTHFLT)은 미국 중앙 해군 사령관(COMUSNAVCENT)과 대테러 전쟁에 있어서 다국적 연합 해상 부대(Combined Maritime Forces) 사령관도 겸하고 있다.
- 3함대와 5함대의 역사 -
1943년 3월, 태평양 함대의 편성이 변경되어 윌리엄 할지 대장이 지휘하는 남태평양 부대가 제3 함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10월 7일 3함대는 일단 해산되었으나, 1973년 2월 1일 태평양 함대의 재편과 함께 부활하여 하와이에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1986년 11월 26일에는 사령부가 육상에서 기함인 코로나드(USS Coronado, AGF-11)로 옮겨졌고, 2003년 9월에는 다시 샌디에고 해군기지로 옮겨졌다.
1944년 4월 26일, 중부 태평양 방면군의 개편에 따라 미해군 제 5 함대가 처음으로 편성되었다. 사령관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였으며 3함대와 마찬가지로 2차 대전이 끝난후 일단 해산되었다가, 1995년 중동 지역을 관할하는 지역함대로 부활하였다. 중동은 세계 최대의 석유 생산지이며 미국의 국익에 중요한 지역임에도 그동안 중동을 전담하는 상설 해군부대가 설치된 적이 없었다. 가령 걸프 전쟁 때 많은 미해군 함정들이 중동 지역으로 전개하여 제7 함대의 지휘를 받았지만, 이들은 모두 태평양 함대나 대서양 함대에 속하는 함정들이었으며 7함대 또한 중동을 주된 책임 구역으로 설정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1995년 7월, 새롭게 중동지역을 관할하는 함대를 편성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반세기만에 제 5함대의 명칭이 부활한 것이다. 제 5 함대는 부대 관리에 있어서는 해군 작전 부장에 직할되고 작전시에는 미국 중앙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게된다. 제 5함대의 전력은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2003년 초에 피크를 맞이했다. 이때 5함대에는 5척의 항공모함과 6척의 양륙함, 그외의 호위함들에 더하여 30척이 넘는 영국 해군 함정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 38 기동부대와 58 기동부대 -
제 38 기동부대 (Task Force 38)와 제 58 기동부대(Task Force 58)는 태평양전쟁 중 편재된 미해군의 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Fast Carrier Task Force)의 명칭이다. 38기동부대와 58기동부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함대로서 특정 시점에 이 부대가 3함대와 5함대중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행정적 명칭일 뿐이다. 
38 기동부대
38 기동부대는 1943년 8월, 항공 모함 사라토가(USS Saratoga)를 기함으로 프레드릭 셔먼 소장의 지휘하에 탄생하였고, 58 기동부대는 1944년 1월 6일에 마크 미쳐 제독의 지휘하에 창설되었다.
1944년 8월 26일, 38 기동부대는 할지 대장의 지휘하에 제 3함대에 소속되었으며 그 전력은 항공모함 17척까지 증강되었다. 1945년 1월 26일에 이 함대는 58 기동부대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같은해 5월 25일에는 다시 38기동부대로 변경되어 종전을 맞이하였다.
- 할지와 스프루언스 -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전 미 태평양함대의 기동부대 사령관은 윌리엄 할지 중장이었으며, 그는 미국이 보유한 모든 항공모함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기동부대의 기함은 유명한 엔터프라이즈(USS Enterprise)였다. 1941년에는 킨멜(Husband E. Kimmel)이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할지와 사관학교 동기생이자 친구었다. 9월에는 또다른 친구 스프루언스 소장이 할지 휘하의 제 5 순양함 전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진주만 기습 직전인 1941년 11월 28일, 할지는 웨이크섬에 항공기를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동부대를 이끌고 진주만을 떠났다. 당초 기동부대는 12월 6일까지 진주만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귀항하는 길에 폭풍을 만나 한척의 구축함에 균열이 발생하는 사고가 일어난 관계로 도착 예정시간을 12월 7일 정오로 늦추게 되었다. 결국 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미국의 기동부대는 진주만 기습의 재앙을 피할수 있었다.
할지는 호놀루루 서쪽 150마일 해상에서 진주만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킨멜 사령관은 즉각 모든 함선의 지휘권을 할지에게 넘겨주었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현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제한되어 있었다. 결국 할지는 12월 8일 저녁, 진주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2월 말경 웨이크섬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할지 기동부대는 즉각 기동부대를 이끌고 출항했으나 중도에 섬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2월 31일 진주만으로 귀항했다. 
니미츠와 할지
한편 이날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할지의 사관학교 1년 후배 체스터 니미츠가 부임했다. 니미츠는 일본에 대한 능동적 반격작전을 계획했으며, 할지 또한 그 계획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니미츠의 계획에 따라 할지는 16 기동부대를 인솔하고 마셜제도와 웨이크섬 등을 공격하였다. 1942년 4월에는 진주만 공습을 보복하기 위해 일본 본토에 둘리틀 공습이 감행되었으며, 할지 기동부대가 폭격대를 일본 근해까지 운송하였다. 둘리틀 폭격대가 출격한 후 기동부대는 즉시 산호해 해전 이후 일본측과 대치중인 플레쳐 함대를 돕기 위해 남태평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동중에 할지는 태평양함대 사령부로부터 즉각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드웨이 방면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임박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주만에 귀항한 할지는 반년에 가까운 장기간의 항해로 피부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할지가 추천한 후임 스프루언스가 16 기동부대를 이끌고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16기동부대는 플레처가 이끄는 제 17 기동부대와 함께 미드웨이 근해에서 일본 기동부대를 완벽하게 격파했다. 이 전투는 태평양전쟁의 일대 분기점이 되었으며, 대전과를 올리고 귀환한 스프루언스는 니미츠의 참모장이 되었다.
할지는 1942년 8월 5일에 퇴원하였으나 특별히 담당할 보직이 없는 상태였다. 이때 남태평양에서는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섬을 둘러싼 전투가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과달카날 인근에서 벌어진 1차 솔로몬 해전과 2차 솔로몬 해전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1942년 10월 남태평양 함대 사령관 로버트 곰리(Robert L. Ghormley) 중장은 니미츠에게 과달카날의 전황에 대하여 비관적인 보고를 하였다. 이에 화가 치밀어 오른 니미츠는 참모장 스프루언스에게 남태평양 방면을 시찰하도록 명령했다. 특별히 하는일 없이 빈둥거리던 할지도 이 일행에 동반하게 되었다. 
Robert L. Ghormley
1942년 10월 18일, 남태평양 함대 사령부가 위치한 누메아에 도착한 스프루언스 일행에게 곰리를 대신해서 할지를 남태평양 방면 군사령관(COMSOPAC)으로 임명한다는 전보가 도착했다. 입장이 난처해진 할지는 "지금껏 나에게 주어졌던 가장 귀찮은 임무다."라고 불평했지만, 사령부를 기존의 구식 수리함 아곤에서 육상으로 옮긴후 남태평양 전선을 적극적으로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한때 호넷(CV-8)을 상실하여 가동중인 항공모함이 전혀 없는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신예전함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를 아낌없이 투입하여 제 3차 솔로몬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942년 11월 19일 할지는 대장으로 승격했으며 1943년 2월 1일까지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과달카날을 탈환한 할지는 라바울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곳은 더글라스 맥아더의 담당구역이었다. 1943년 2월, 할지는 라바울 공격을 위해 중폭격기를 빌려줄것을 맥아더에게 요청했다 쌀쌀하게 거절당한후 니미츠에게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4월 15일, 호주의 브리즈번에서 맥아더를 직접 만난 후에는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 오랜 친구와 같이 느끼고 있다. 당시 63세이던 그는 마치 50대처럼 날쌔고 용맹스러웠다."
맥아더 또한 할지를 호평하였다.
"만난 순간부터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솔직하고 기탄없는 의견을 말하는 정력적인 인물이다."
1943년 5월 15일부로 할지의 휘하부대는 제 3함대로 개칭되었으며 맥아더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솔로몬 전선의 전황도 술술 풀려나가게 되었다.
한편 스프루언스는 1943년 5월 30일에 중장으로 승진하고 중부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의 지휘하에 있던 전력은 정규항모 6척, 경항모 5척, 호위항모 7척, 전함 12척, 순양함 15척, 구축함 65척, 잠수함 10척, 상륙정 33척, LST 29척, 탱커 22척, 육군 항공대 폭격기 90대, 해군 폭격기와 정찰기 66대, 해병대 항공기 200대였다. 기함은 스프루언스의 고향에서 이름을 따온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CA-35)로 정해졌다. 이 배는 순양함 전대의 지휘함으로 쓰이던 것이라 대함대의 지휘부를 수용하는데는 약간 무리가 있었지만 오히려 이것이 명령 계통의 간소화를 도모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스프루언스 사령부의 참모는 모두 32명이었는데, 이것은 할지 사령부의 절반 규모에 불과했다.
스프루언스는 길버트 - 마셜 제도 전투를 지휘했으며 1944년 2월 10일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기함을 신예 전함 뉴저지(BB-62)로 옮겼으며, 3월에는 중부 태평양 함대가 제 5함대로 개칭되었고 팔라우 제도의 공략을 개시하여 4월까지 이를 완료하였다.
한편 스프루언스가 마셜제도를 공략하고 다음의 목표로 마리아나 공격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맥아더는 통합참모본부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할지에게 "만약 내 지휘 아래 들어온다면 영국과 미국의 연합함대 지휘권을 부여하여 넬슨 제독 이상의 인물로 만들어주겠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미해군 작전부장 킹제독과 니미츠는 할지를 중부 태평양 방면의 스프루언스와 교대시키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맥아더의 구상을 제지했다. 할지는 1944년 6월 누메아를 떠났으며, 이 때 영국에서 대영제국 명예 기사 사령관 훈장을 수여받았다.
한편 스프루언스는 5월 28일에 진주만을 출항하여 6월경 마리아나 서쪽 해상에서 일본군 기동부대와 필리핀해 해전을 벌여 승리했다. 7월 9일에는 사이판, 8월 8일에는 티니안, 8월 10일에는 괌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8월 말 스프루언스는 할지에게 함대의 지휘권을 넘겨주고 진주만으로 돌아갔다.
스프루언스는 1945년 7월 10일 워싱턴의 해군성에서진주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때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필리핀해 해전 당시 스프루언스의 지휘행태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존 타워즈 중장을 중심으로한 항공통들은 항공기를 몰아본적이 없는 사람이 기동부대를 지휘하는 것이 문제라고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스프루언스는 특별한 코멘트를 남기지 않았다.
한편 할지에게 지휘권이 넘겨진 5함대는 명칭이 3함대로 변경되었다. 할지는 기동부대의 기함으로 항공모함과 같은 속력에 뛰어난 방어력을 가진 전함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아이오와급 신예전함을 할당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할지의 고향의 이름을 딴 아이오와급 2번함 뉴저지(BB-62)가 주어졌다. 3함대는 1944년 8월 28일 이오지마를 시작으로 9월 9일에는 팔라우 제도를 차례로 공격하였고 9월 하순에는 필리핀해에 진입하였다.
10월 12일에는 대만해 항공전을 벌여 일본군의 항공전력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혔으며, 10월 17일에는 레이테 해전에 참가하였다. 이 해전에서 할지는 17척의 주력 항공모함과 18척의 호위 항공모함, 12척의 전함, 24척의 순양함, 141척의 구축함과 1천5백대의 항공기를 지휘하여 일본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할지는 엄청난 수적 우세 속에서 일본군 전력을 괴멸시키지 못했으며 미군도 3,500명이 사망하는 대피해를 입었다. 이런 피해가 발생한 것은 할지가 일본측 오자와 기동부대의 꾀임에 넘어가 적시에 킨케이드 제독의 7함대를 구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후일 황소의 돌진(Bull's Run)전투라고 불리게 되었다.
스프루언스와 미쳐, 니미츠, 리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스프루언스 제독은 니미츠 제독보다도 2기 후배로서 헐지 제독보다 3기나 후배입니다.
스프루언스 제독과 헐지 제독이 친구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1942년 10월의 남태평양 시찰여행은 니미츠 제독이 참모들을 이끌고 직접 간 것입니다.
육군항공대 사령관인 아놀드 장군과 동행했지요.
헐지 제독은 이 시찰여행에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이 임시로 맡고있던 남태평양의 항공모함 기동부대 사령관으로 부임하러 가면서 중간에 과달카날을 시찰하러 가던 중 긴급전보를 받고 누메아로 가서 곰리의 후임으로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이 됩니다.


다만 틀린 내용이 몇 군데 있네요.
태평양함대가 고속항모기동부대를 편성하여 한 사람의 사령관 밑에 고속항모들의 지휘권을 통합한 것은 1943년 8월 이후입니다.
그 이전에는 고속항공모함 1척이 하나의 TF 를 이루고 있었을 뿐 항공모함들의 통합지휘권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헐지 제독이 진주만 기습 이전에 미국의 모든 항공모함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헐지 제독은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2기동부대(TF2)사령관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