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이 끝날때까지 일본인들에게 연합함대란 제국해군과 같은 뜻을 지닌 말이었다. 연합함대가 얼마나 무한대의 신뢰를 받고 있었는가는 태평양전쟁 말기 전함 야마토가 자살 공격을 감행할 때까지 일본인들 대다수는 여전히 "아직 우리에게는 연합함대가 있노라!"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연합함대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친숙해진 존재이다. 일본 최초의 함대조례는 1889년 7월에 제정되었는데, 이에 따라 상비함대가 설치되었고 초대 사령장관으로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 소장이 임명되었다. 이후 일본해군은 신예함으로 편성된 주력부대를 상비함대(常備艦隊), 노후함으로 구성되어 연안 경비를 담당하는 2선급 부대를 경비함대(警備艦隊)라고 부르게 되었다.

山本権兵衛.jpg
山本権兵衛

청일전쟁의 개전이 임박함에 따라 전력증강과 명령일원화를 위해 경비함대를 상비함대에 통합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당시 해군군령부관방주사(軍令部官房主事)이던 야마모토 곤베(山本権兵衛)대령은 경비함대를 서해함대(西海艦隊,사이카이함대)로 명칭을 변경하여, 양 함대로 연합함대를 조직한다라는 안을 내놓았으며 이것이 연합함대의 시작이 된다. 청일전쟁 개전 6일후에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해군의 연합함대가 편성되었다. 연합함대는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등의 실전상황과 해상 훈련시에 임시로 편성이 이루어졌으며 평상시에는 해산되었다. 그러나 1923년 이후에는 상설조직으로 편제로 변경되어 명실상부하게 일본해군의 실전부대를 총괄하는 사령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연합함대는 일왕에게 직속되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지휘하며, 군령에 대해서는 해군 군령부 총장의 지시를 따르고 군정에 관해서는 해군 대신의 지시를 받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본 해군은 군정권을 가진 해군대신과 군령권을 가진 군령부총장(軍令部総長)으로 권한이 양분되어 있었다. 군령부총장은 육군의 군령권을 가진 참모총장과 함께 일왕의 통수권을 보좌하는 참모기관의 수장이며, 해군대신은 각료의 일원으로서 일왕을 보좌하여 예산과 조약, 법령에 근거해 군령부총장의 활동을 감독했다.

태평양전쟁의 적국이던 미국의 조직과 비교하자면 해군대신은 미국의 해군장관과, 군령부총장은 미국의 해군 작전부장과 비슷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특유의 조직인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적절히 대응되는 미국측의 카운트파트너가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태평양함대 사령관과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면된다.

군령(軍令 military command)이란 군정(軍政)의 상대적인 의미이다. 군대의 지휘와 운용은 상급 지휘관에서 하급 지휘관으로 전달되는 명령으로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지휘관들이 내리는 모든 명령의 근거는 최고지휘관의 권한으로부터 위임된 것이며, 군령이란 최고지휘관의 명령권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군정(軍政, Military administration)이란 군대의 전력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한 행정권을 말한다. 군대의 편성, 보충, 동원, 병역, 인사, 복무, 병기, 경리, 위생, 교육, 보안 등이 군정에 속한 내용들이다. 군정의 행사원리도 군령권과 같은 형식을 취한다.

실전부대 지휘관의 최고봉으로서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모든 해군 장교들이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선망의 지위였다. 연합함대 장관은 직제상 해군 군령부장의 부하였으나, 실제로는 해상 작전 전반의 총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일본해군에는 청일전쟁 이래 기함선두라는 독특한 전통이 있었는데,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단순한 전투 지휘관이 아니라 그 이상의 전반적인 해군작전을 총괄하는 직위를 수행하는 데는 이 전통이 일종의 장애가 되었다.

가령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장관은 전쟁중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령부를 트럭섬의 야마토 전함에 두었다. 그러나 이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사령부 자체가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처지가 되었으며, 그 와중에 두명의 사령장관이 사망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결국 전쟁 말기에는 사령부가 일본 본토로 옮겨졌고 해군총대라는 조직이 신설됨에 따라 연합함대라는 이름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고가 미네이치 두명의 사령장관과 수십만의 일본군 장병들은 연합함대라는 이름과 함께 태평양의 바다속으로 사라져 결코 돌아오지 못했다.


연합함대를 상징하는 노래 - 군함 행진곡


- 일본 해군의 역사 -

근대 일본은 열강들중 미국의 뒤를 잇는 가장 젊은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바쿠후 말기 일본의 개항은 흑선이라고 불리는 페리함대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졌다.

페리라는 이름은 언제나 역사의 중요한 시기와 관련하여 떠올려지고 있다.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외교정책은 일본을 봉건국가로부터 산업국가로 전환시켰고, 국민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동양의 모든 가치에 변혁을 가져오게 했다.

1853년 7월 페리는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 폴리머스, 사라토가의 함선들을 이끌고 일본의 도쿄만에 닻을 내렸다. 이 함대는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페리는 일본인들의 감정을 잘 연구하고 정세를 파악한 후 외교수단에 의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고 멋지게 그것을 해낸 것이다.

이전부터 일본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네덜란드, 스페인, 포루투갈,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유럽식 방법으로 일본인에게 접근하려 했다. 그러나 형식에 치우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외교상식과 까다로운 형식주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국교를 희망하고 있었다. 페리가 취한 행동들은 일본인에게 호감을 품게 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미국인을 "신분과 예절을 지니고 있는 최초의 오랑캐"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여러 흥정과 거추장스러운 담판의 결과 페리는 미국 상선에게 몇개의 항구를 열겠다는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 1941년 발행된 미국 해군지 -

Matthew_Calbraith_Perry.jpg
Matthew Calbraith Perry

흑선이 가진 막강한 위력을 절감한 바쿠후 정부는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대형선박의 건조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서양식 선박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근대적 해군의 시작이었다. 일본에서 최초로 관함식이 열린 것은 1868년 3월 26일이었으며 4년후인 1872년 2월 27일, 해군성이 신설되었는데 이때 이미 일본은 총 배수량 13,832톤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 해군성은 18년에 걸치는 거창한 건함계획을 세웠다. 1889년 7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 청과의 관계가 험악해지자 해군은 건조비 2,664만엔을 투입한 8개년 계획을 세워 신조함 32척의 건조에 착수했다. 1900년 9월에는 최초로 의회가 소집되었는데 여기서 4개년 계획의 건함안 예산이 추가로 제출되었다. 이것은 당시 청이 자랑하던 최신예 전함 정원과 진원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회는 이 안을 통과시키지 않은채 해산해버렸고, 이듬해 12월 새롭게 구성된 국회에 다시 안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중의원은 무리한 건함 예산을 삭감하고 휴회해 버렸다. 이에 메이지 일왕이 스스로 경비를 절약하여 매년 30만엔을 국방비로 내놓겠다는 안을 내놓게 되었고, 각료들도 봉급의 1/10을 6년간 헌납하기로 하여 결국 법안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청일전쟁 당시 일본해군은 함선 31척, 도합 59,198톤의 대함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러일전쟁 직전에는 더욱 덩치가 불어나 보유한 함정의 배수량이 28만톤에 이르렀고, 건조중인 신형함도 3만4천톤에 달하였다. 1914년부터는 7년에 걸쳐 공고, 히에이, 하루나, 기리시마, 류소, 야마기, 이세, 휴우가 등의 신형전함을 잇달아 건조하였고 다시 40센티포를 장착한 나가토와 무쓰를 건조하는 등, 신형전함 8척과 전투순양함 8척으로 이루어진 88함대의 실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열강간의 해군력 무한 경쟁을 막기위해 1921년에 열린 워싱턴 군축회의에서는 영국과 미국 일본의 해군비율이 5:5:3으로 규정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영국과 미국을 잇는 세계 3위의 해군국으로 공인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일본은 1936년 1월 15일 워싱턴 조약을 갱신하기 위해 열린 런던 군축 조약을 결렬시키고 다시 해군력 증강에 나섰다. 이때 일본의 해군력은 전함 9척, 중순양함 12척, 경순양함 21척, 항공모함 4척 등 기타 함정들을 합쳐 83만8천톤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의 해군력 증강에 발맞추어 미국역시 군비 확장에 나서 태평양의 해군밀도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무한대로 끝없이 팽창될 것 같던 일본해군은 결국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자멸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1944년에 접어들어 필리핀해 해전에서 항공대를 상실하고, 레이테 해전에서 남은 전투함 태반을 잃어버려 결국 일본해군은 실질적으로 전쟁을 지속해나갈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1945년 5월에는 남아있는 해군 전력을 총괄하는 해군총대가 신설되었지만, 살아남은 몇안되는 함정들도 연료부족으로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일본 해군의 활동은 가미카제에 한정된 상태로 종전을 맞는 처지가 되었다.

비슷한 글들
profile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