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미국 역사상 맥아더만큼 많은 신화와 전설을 남긴 사람은 드물것이다. 또한 그만큼 많은 논쟁의 씨앗을 뿌리고 열렬한 지지와 극단적인 반대를 동시에 부른 사람도 없을것이다. 한때 軍神으로 모셨던 것의 반동인지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맥아더가 터무니없이 형편없는 인물로 묘사되고는 한다. 아마 이런 현상은 뒤늦게 우리나라를 휩쓰는 좌파 수정주의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기준으로 봐도 맥아더는 함량 미달의 지휘관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매우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술가였다. 맥아더의 지휘력이 가장 빛을 발한 시기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뉴기니를 탈환하는 과정을 소개해보도록 하자.

태평양전쟁 초기 영국의 처칠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커틴 수상은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주력 사단들은 아프리카에서 롬멜과 용감히 싸우고 있었는데, 정작 본토는 일본의 침공으로부터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도처에서 난국에 처한 대영제국 입장에서는 제국의 변방인 오스트레일리아 방위에 전력을 기울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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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프로파간다 - 호주인들이 피를 흘리는 사이 루즈벨트가 호주대륙을 전리품으로 챙기고 있다.]

한편 호주를 대영제국에서 떼어낼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던 일본은 멜버른 헤럴드에 기고된 커틴의 성명을 주목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우리는 태평양 전쟁을 전체 투쟁의 종속적인 부분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조하기를 거부한다. 이것은 다른 싸움이 태평양보다 더 중대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일본을 완전히 물리칠 결의를 가지고 민주주의 국가로서 최대한의 힘을 이끌어낼 방침을 구하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평양 전쟁에 대해서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전쟁 방침의 지휘권에 대해 최대의 발언권을 소유해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견제도 받지 않고, 본인은 다음과 같은 점을 명백히 밝히는 바이다. 즉,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과의 전통적 유대에 대해 하등의 정신적 고통도 받지 않고, 미국에 의지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영국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잘 알고 있으며 세력 분산의 위험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또 오스트레일리아가 붕괴될지라도 영국이 잘 버텨나갈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오스트레일리가 붕괴되지 않도록 결의를 굳히며,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방어안을 작성하는데 온 정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하 중략....

이 성명이 발표된지 얼마후 필리핀의 패장 맥아더는 일본군에 대한 반격을 지휘하기 위해 후방으로 이동하라는 루즈벨트의 명령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로 부임하였다. 이때 베를린의 괴벨스는 맥아더를 도망친 장군이라 불렀고 무솔리니는 비겁자라고 정의했으며, 도쿄에서는 근무지를 이탈한 탈주자로 규정하고 아직 필리핀의 바탄반도에서 항전중인 미군의 저항이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는 점을 미국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신랄히 논평했다.

어쨌든 맥아더가 도착하기 직전까지 오스트레일리아는 국토의 3/4에 해당하는 북서부의 광대한 지역은 방어를 포기하며 남동부의 인구 밀집지역 이른바 '브리즈번 라인'에 방어를 집중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변변한 수비병력조차 없는 호주 입장에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부임후 이 계획을 백지화하고 방위선을 뉴기니로 전진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연합군 총사령부 또한 뉴기니 전선의 포트 모레스비로 옮겨졌다. 맥아더의 이 결정은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오스트레일리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가장 유효적절한 조치였으며 이후 호주 본토에 대한 위협은 완전히 제거될 수 있었다.

1944년에 접어들자 뉴기니에서 맥아더의 공세가 급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1944년 1월 2일 뉴기니 북동부에 상륙한 맥아더는 몇차례의 뜀뛰기 상륙작전으로 1년만에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섬의 전지역을 장악했다.

맥아더의 공격은 그야말로 적의 주력을 피해 급소를 찌르는 날카로운 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해군과 공군의 지원이 미치는 범위내에서 몇개의 적거점을 스치고 지나가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결과적으로 맥아더보다 많은 병력을 지녔던 일본군 수비대는 여기저기에 부대단위로 고립되어 정글의 미아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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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진로]

섬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보겔콥(Vogelkop)반도를 평정함으로써 뉴기니 캠페인이 종료되자 워싱턴에서는 맥아더에게 전선 후방에 고립된 적병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이 질문에 대한 맥아더의 회신은 아래와 같았다.

솔로몬 군도와 뉴기니에 남겨두고 지나온 적의 수비부대는 현재나 장래의 작전에 조금도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 이 부대들은 이미 조직적인 공세를 취할 능력이 없고, 이후 여러 수단으로 소모시켜나가면 멀지않아 처리될 것이다. 이 일본군들이 구체적으로 언제 궤멸되는가라는 물음은 거의라기보다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일체 전쟁에 공헌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지금 즉시 공격하여 그들의 전멸을 꾀하는 것은 아군의 많은 생명을 잃게될 것이고, 그 희생을 감당할만큼의 전략적 잇점이 없다.

맥아더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여러가지 이유들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그가 불필요하게 적의 주력과 맞서지 않음으로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전술적 목표를 달성하는 경제적 지휘를 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럽전선에서 발생한 사상자와 비교해본다면 맥아더의 비범함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이탈리아의 안지오 상륙작전에서 미군은 단 한번의 전투로 7만2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노르망디에서는 2만8천명을 잃었다. 반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필리핀까지의 공세기간 맥아더의 휘하부대가 낸 사상자는 2만7천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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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