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의 마지막 출격


비스마르크(Kms Bismarck)는 2차 세계 대전중 독일 해군이 운용한 초대형 전함으로 만재 배수량이 50,900t에 달하여, 일본의 야마토 전함이 등장할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이었다.

자매함으로는 노르웨이인들에게 북구의 여왕으로 불린 티르피츠(Kms Tirpitz)가 있다.


[자매함 티르피츠 - 1944년 노르웨이]


비스마르크의 설계는 영국과의 해군 협정이 체결된 후인 1934년에 이루어졌다.

최초 계획에서는 13인치 주포를 장착할 예정되었지만, 곧 14인치포 8문이 장착하는 것으로 설계가 변경되었다.

이때 15인치포를 탑재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되었지만, 배수량의 증가는 킬 운하를 통행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견해에 따라 14인치로 최종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후 기술의 발전에 따라 15인치포를 장착하여도 배수량을 적정 수준에서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신형 주력 전함이 15인치포를 채용할 예정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어, 설계는 다시 변경되고 15인치포를 주포로 탑재하게 되었다.

영독 해군 협정에서 독일 전함은 기준 배수량이 35,000톤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되어 있었으나, 15인치포 탑재 관계로 비스마르크의 기준 배수량은 42,600톤으로 부풀어 올랐다.


설계가 완성된 후 1935년 11월 16일 함부르크의 블롬&포스(Blohm und Voss) 조선소와 건조 계약이 체결되고, 1936년 7월 1일 용골이 놓이게 된다.


[戰艦 비스마르크 독일의 최첨단 공업력의 세례를 받고 세계 최강의 전함으로 태어나다.]

1939년 2월 14일 진수식이 거행되고, 1940년 8월 24일 정식으로 취역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이전의 샤른호르스트급과 비슷한 실루엣을 가졌다.

다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샤른호르스트가 엘레강스한 여왕같이 우아한 품위가 넘치는 반면, 비스마르크의 선체는 중후하고 위엄있는 포스가 느껴진다.

취역후 비스마르크는 1940년 9월 15일 함부르크를 떠나 발트해로 첫번째 시험항해에 나섰으며, 이후 1940년 11월까지 각종 테스트를 받게 된다.



[승무원들을 사열중인 린데만 함장]


[프린츠 오이겐에서 바라본 비스마르크의 모습]


1941년 3월 8일부터 17일까지 탄약과 연료의 보급을 마치고,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호와 함께 1941년 5월 18일 연합군 수송선단 습격을 위한 라인 연습(Rhienubung)작전에 투입되었다. 


계획상 라인 연습 작전은 Kiel에서 전함 비스마르크와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이 출항하고, Brest에서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와 그나이제나우(Gneisenau)가 출항하여 합류, 전함1척, 순양전함2척, 중순양함 1척의 강력한 함대를 이루어 실시될 예정이었다.

이 함대는 기본적으로 대서양의 영국 호송선단을 공격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영국 함대와의 정면 승부도 피하지 않을 방침이었다.

그러나 작전 개시 직전 샤른호르스트는 기관부의 고장으로 수리를 받아야 했으며, 그나이제나우는, 영국 뇌격기의 어뢰 공격으로 추진축이 손상되어 6개월 동안 도크에서 수리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어 역시 작전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라인연습작전은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 2척만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두척의 함대는 1941년 5월 18일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떠난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첩보원에 의해 속속들이 영국으로 보고되고 있었다.



Skagerrak해협에 도착한 비스마르크 일행은 스웨덴 해군의 순양함 고틀란트(Gotland)에 의해 발견되었다.

스웨덴은 정치적으로 영국에 가까운 중립국이었고, 수시간 동안 "엄청나게 거대한 정체불명의 전함"을 추적한 정보를 영국군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북쪽으로 이동한 함대는 밤이 되자 영국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노르웨이의 리아스식 해안 깊숙히 이동하였다. 비스마르크는 그림슈타트 표르드(Grimstadfjorden)에 정박하였고 프린츠 오이겐은 칼바네스(Kalvenes)만에서 닻을 내리고 정박하였다. 



[Grimstadfjorden에서 영국 정찰기에 의해 촬영된 비스마르크]

한편 스웨덴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부지런히 독일 함대의 행방을 찾던 영국의 스핏파이어 (Spitfire)중 한대가 마침내 정박중인 비스마르크를 발견하게 된다.

놀란 영국은 처칠이 아직 중립국이던 미국의 루즈벨트에게 정보 제공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내는 등의 야단법석을 떨게 된다.


당시 영국은 비스마르크의 정확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노르웨이 북부로의 지원 병력일 것이라는 것과, 아이슬란드(Iceland)로의 침공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같이 항해하는 호송 선단이 없었으므로 기각되었다.

만약 대서양으로 향한다면 그라페쉬페(Graf Spee)와 같이 통상 파괴전에 나설 것이 분명하였다.

통상 파괴전이 목적이라면 비스마르크는 아이슬란드의 북쪽으로나 남쪽, 혹은 셔틀랜드 섬 (Shetland Islands)의 북쪽이나 남쪽으로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영국은 초조했으나 악천후로 항공 정찰이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이틀후 해군 정보 요원이 탑승한 항공기가 200피트 상공에서 두 전함이 정박해 있던 곳을 탐색했지만 모두 사라진 후였다.

이에 본토 함대(Home Fleet)는 킹 조지 5세(King Geroge V)와 빅토리어스(Victorious)는 아이슬란드의 남쪽을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와 후드(Hood)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사이의 덴마크해협을 수색하기로 하였다. 


[북해의 비스마르크]

5월 22일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짙은 안개 속에서 서치라이트로 서로를 비추며 덴마크 해협을 통과하여 북상하였다.


5월 23일 그린란드의 빙산 지대를 피해 남하중이던 비스마르크 함대는 아일슬랜드 남서쪽에서 영국군의 중순양함 노포크(Norfolk), 서포크(Suffolk)와 최초의 접촉을 하게 된다.

이른 아침 서포크의 견시는 안개와 얼음 사이로 나타난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의 모습을 발견하였고, 안개 속으로 잽싸게 숨어버렸다.

비스마르크는 아직 서포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서포크는 무선으로 비스마르크의 발견을 보고하고, 레이다로 이들을 감시하였다.

비스마르크는 28 ~ 30노트의 속도로 빠르게 서쪽으로 항해중이었다.



한시간 가량 지난후 노포크가 갑자기 안개를 뚫고 비스마르크 6마일 전방에서 튀어나왔고, 즉각 비스마르크의 함포가 발사되었다. 

시야가 극히 제한된 상태에서의 이 포격으로 인해 영국은 비스마르크가 레이더 사격 통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직 영국군은 장비하지 못한 기술이었다. 

노포크는 다시 안개 속으로 숨었고, 비스마르크의 포격은 멈추었다. 밤새 이 전함들은 눈보라와 폭풍을 해치고 북극해를 질주했다. 

노포크와 서포크는 비스마르크의 위치와 침로, 속도를 계속 보고했고, 영국 해군 사령부가 비스마르크 발견 보고를 받았을 때, 마침 토비 대장이 인솔하는 주력은 스코틀랜드의 스카파 플로우에 정박중이었다.

가장 근접한 곳에 있던 홀랜드(Lancelot Holland) 제독의 함대 - 후드(Hms Hood)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Hms Prince of Wales) 그리고 호위 구축함 6척은 남쪽으로부터 비스마르크에 접근중이었다.

본토 함대 사령관인 토비 제독은 스스로 기함 킹조지 5세(King Geroge V)와 전함 리펄스(Repulse), 항공모함 빅토리어스(Victorious), 순양함 4척, 구축함 7척으로 대함대를 이루어 비스마르크 요격에 나섰으며, 이와는 별도로 덴마크와 영국간을 초계중이던 전함 로드니(Rodney)와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도 전장으로 비스마르크로 접근중이었다.



1941년 5월 24일 아침 5시 35분, 랜슬럿 홀랜드(Lancelot Holland)제독의 함대는 비스마르크를 발견하였고, 전투가 개시되었다.

두 함대간의 교전은 그린란드(Greenland)와 아이슬란드의 사이에서 벌어졌다.

5시 52분 후드가 약 23,000m의 거리에서 프린츠 오이겐에 포격을 시작하였다.


Gunther Lutjens


5시 55분 통상 파괴 작전의 목적에 어긋나는 전함간의 교전을 내켜하지 않던 함대 사령관 룽첸스(Gnter Ltjens)중장이 반격 명령을 주저하자, 비스마르크의 함장인 에른스트 린데만(Ernst Lindemann)대령이 포격 명령을 내려 약 20,300m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6시 프린츠 오이겐의 20cm 주포 일제사격이 Hood의 보트 갑판 부근에 적중하였다. 포격은 부근의 탄약고를 유폭시켰고, 4 인치 포탄들과 로켓이 폭발하면서 화재가 일어났다.


6시 1분 비스마르크가 17,000m 거리에서 발사한 다섯번째 일제 사격이 전속력으로 접근중이던 후드에 명중하였다.

얼마후 후드는 탄약고의 유폭으로 선체가 두 동강이 나며 뒷부분 절반이 가라앉았고, 이어서 앞부분 또한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전투 개시 10분만에 후드는 완전히 바다에 잠겨 사라졌고, 1,1418 명의 승무원 중 테드 브릭스(Ted Briggs), 밥 틸번(Bob Tilburn), 그리고 빌 던대스(Bill Dundas) 3인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침몰 2시간 후 구축함 HMS Electra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 또한 여러 발의 명중탄을 맞아 함교의 인원이(함장과 다른 1명 제외) 몰살당한채, 연막을 피우며 사력을 다해 도주하게 된다.


그동안 독일측은 비스마르크만 2발을 얻어맞아, 가벼운 손상을 입었다.


[비스마르크의 제물이 된 영국의 전함 Hood]


[비스마르크의 동료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1라운드가 끝난후 프린츠 오이겐은 비스마르크와 헤어져 독자 행동에 들어가게 되고,  멀리서 지켜보던 영국 순양함 노포크(Norfolk)와 서포크(Suffolk)는 비스마르크를 계속 추격했다.


Hood의 침몰이라는 날벼락을 맞은 영국 해군은 전함 리벤지(Revenge)와 전함 레밀라이즈(Ramillies)에게 즉각 추격명령을 내리고, 지브롤터 근처에서 대기중이던 지중해 함대의 전함 리나운(Renown), 항공모함 아크 로열(Ark Royal), 중순양함 쉐필드(Sheffield)에게도 출동 명령을 내렸다.


5월 24일 22시경 항모 빅토리어스에서 출격한 소드피쉬 뇌격기가 노포크의 수색 레이더의 도움으로 비스마르크에 공격을 가한다. 1발의 어뢰가 명중되었지만, 피해는 없었다.


5월 25일 03시 비스마르크가 서포크의 수색 레이더 탐지 범위를 벗어나고,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의 행방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룽첸스 제독이 해전의 상세 보고문을 독일 해군 본부에 발신하는 실수를 범했고, 이 전파를 탐지한 영국은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다시 추적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추격 5일째인 5월 26일 10시 30분, 영국 해안 경비대의 카탈리나 비행정이 프랑스 서쪽 해상에서 비스마르크를 다시 포착하였다. 이 때 영국 함대의 주력 부대는 북방 240km 지점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항공기로 비스마르크를 묶어둘 계획을 세운다.

발견 장소는 프랑스 해안에서 1,270km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24시간 이후에는 독일 공군의 제공권 내에 도달할 수 있었다.



14시 40분 항모 아크 로열에서 출격한 1차 뇌격대는 자국군의 경순양함 셰필드를 비스마르크로 오인 공격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한다.

19시 아크 로열에서 2차 공격대의 출격 준비가 완료되고, 10분후 소드피쉬 15기가 발진하였다.

20시 35분 비스마르크를 감시중이던 경순양함 셰필드와 2차 뇌격대가 합류한다.

20시 53분 2차 공격대가 경순양함 셰필드의 유도에 따라 비스마르크를 발견한다. 마침 두꺼운 구름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공격은 각 소대 단위로 이루어졌고, 약 30분에 걸쳐 전투가 일어났다.

전투 결과 2발의 어뢰가 비스마르크에 명중하였는데, 한발은 비스마르크의 좌현 중앙에 명중하여 작은 피해를 입히는 것에 그친다. 

그러나 다른 한발의 어뢰가 비스마르크 우현 후방에 명중하여 조타 장치를 손상시킨다. 

결국 전함 비스마르크에게는 지독한 불운으로 이 한방이 최악의 결정타가 되고 말았다.

조타기는 회피 기동중 영국 주력함대가 추격해오는 북서 방향으로 고정되어 버렸으며, 추진기로 조타를 실시하는 관계로 속도가 7노트로 느려졌다.



이때 공격 항공대의 편대장은 명중탄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를 했으나, 셰필드는 비스마르크가 침로를 북북서로 돌리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토비 제독은 셰필드의 보고가 잘못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비스마르크가 다시 대서양 쪽으로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21시 30분 바람과 파도에 휩쓸린 비스마르크는 우연히 경순양함 셰필드로부터 14,000m의 위치에 접근하여 포격을 개시한다. 심한 손상을 당한 셰필드는 도주하였다.

22시 구축함 Hms Cossack, Hms Sikh, Hms Maori, Hms Zulu 그리고 폴란드의 Piorun으로 구성된 영국 해군 제 4 구축함대가 셰필드에 접근하여, 비스마르크 추격을 계속한다.


22시 42분 비스마르크가 약 13,000m의 위치까지 가까워진 구축함대에 포격을 개시하여 쫓아낸다.

이때 린데만 함장은 "비스마르크는 조종이 불가능하지만, 최후의 한발까지 싸울 것임"이라는 電文을 본국에 송신하였고, 보고를 받은 독일 해군 수뇌부 또한 비스마르크를 구하기 위하여 근처의 모든 U-Boot를 집결시키는 등의 대책을 강구하였지만 이들은 잘못된 좌표로 보내졌다. 

마침 대서양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복귀중이던 U-556은 눈앞에서 항공모함 아크 로얄이 지나는 모습을 보았지만, 어뢰가 모두 떨어진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비스마르크의 운명을 결정지은 5월 27일이 된다.


[공격당하는 비스마르크(영국측에서 바라본 시점)]

5월 27일 00시 30분 조직적인 공격이 무리라고 판단한 제 4 구축 함대는 개별 함 단위로 비스마르크에게의 어뢰 공격을 개시한다.

01시 21분 구축함 Zulu가 약 4,500m의 거리에서 비스마르크에 어뢰 공격을 실시하지만 빗나간다.

01시 37분 구축함 Maori가 조명탄을 발사하여 어둠을 밝힌 후, 비스마르크에 어뢰 공격을 실시하였으나 역시 빗나간다. 공격 직후 비스마르크는 배를 멈췄다.

02시 30분 비스마르크는 5노트 정도로 이동을 재개하였다.

제 4 구축함대는 비스마르크를 놓치지 말라는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조명탄을 쏘기 시작하나, 비스마르크의 정확한 사격에 위협받은 나머지 03시를 마지막으로 조명탄 발사를 중지하였다.

03시 35분 구축함 Cossack가 비스마르크로부터 약 4,000m의 거리에서 어뢰를 발사했지만 역시 빗나간다.

04시 경 제 4구축함대는 비스마르크의 행방을 잃어버린다.

05시 50분 Maori가 다시 비스마르크를 발견하였다.

06시 Piorun이 연료 부족으로 이탈한다.

06시 40분 Maori가 4,200m의 거리에서 어뢰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역시 빗나갔다.



08시 40분 드디어 수평선 너머 23 km 지점에 토비 제독의 기함 킹조지 5세와 전함 로드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08시 47분 전함 로드니가 2만2천m 거리에서 비스마르크를 향해 공격을 시작하였고, 1분후 전함 킹 조지 5세 역시 포문을 열었다.


매우 느리며 회피 기동 없이 고정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비스마르크는 숙련된 영국의 전함에게는 손쉬운 표적이었다. 

09시 8분 명중당한 비스마르크의 전방 주포 2문이 침묵하였다.

09시 18분 후방 주포 1문이 파괴되었고, 얼마후 마지막 주포 역시 침묵하였다.


10시 15분 경 함장을 비롯한 갑판 상부 구조물의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였고, 기관장 게르하르트 유나크(Gerhard Junack) 소령은 자침 준비를 하고, 갑판 위로 올라가 생존자들을 모아 Sieg Heil을 세번 외친 후 퇴함하였다.


한편 같은 시각 영국 함대의 KGV와 로드니는 연료 부족으로 인하여 회군해야만 했다. 토비 경은 비스마르크가 침몰하지 않는 것에 놀라워했으며, 예하 함정들에게 어뢰가 남아있으면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지시에 따라 순양함 도세트셔(Dorsetshire)는 아주 가까이 비스마르크에 접근하여 어뢰을 발사하고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 발을 발사했다. 

아직 깃발을 휘날리며 떠 있던 비스마르크는 이제 천천히 좌현쪽으로 기울어져가다가 전복되어서 사라져갔다. 


비스마르크의 침몰 시각은 10시 40분 경으로, 도세트셔(Dorsetshire)의 어뢰가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오늘날은 승무원들이 자침했다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다.


이날 비스마르크에 명중한 영국의 주포는 직경 13 cm에서 40 cm에 이르는 다양한 포탄이었는데, 400발에서 600발 정도가 명중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침몰하는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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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