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 카시노 전투(Battle of Monte Cassino)는 연합군이 독일군의 중부 이탈리아 방어선을 돌파하여 로마(Rome)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벌어진 전투이다.

이탈리아 남부에 연합군이 상륙하고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댓가도 치르겠다고 공언했다.

결국 몬테카시노에서 2차 세계 대전중 가장 격렬했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독일군의 주방어선이던 구스타프 라인(Gustav Line)은 라피도(Rapido), 리리(Liri) 그리고 갈리아노(Garigliano) 협곡과 일대 산맥들을 아우르고 있었지만 524년 성 베네딕트(St. Benedict)가 설립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제외되어 있었다.


- 발단 -

1942년 9월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은 북진을 시작하였다.



Mark Clark

마크 클라크(Mark Clark) 장군이 지휘하는 미국 제 5 군은 서쪽에서 나폴리(Naples)의 기지로부터 북상을 시작하였지만 거친 지형과 습한 기후, 완강한 독일군의 저항에 맞닥뜨려 진행은 지지부진 하였다.

독일군은 매복했다가 공격해 연합군에게 많은 피해를 안기고는 다음 매복지로 물러나는 방식으로 이들의 진격을 저지하며 Winter Line이라고 이름붙인 로마 남부 방어선이 구축될 시간을 벌었다. 덕분에 1943년 10월까지 로마에 입성하고자 했던 연합군의 계획은 달성이 불가능해졌다.


겨울 전선(Winter Line)의 동부는 아드리아 방면에서 진군한 영국 제 8군에 의해 돌파되었지만, 12월 말 세찬 눈보라가 밀어닥쳐 항공 지원이 끊기면서 영국군의 진군도 정지되었다. 때문에 나폴리에서 로마로 가기 위한 방법중 동쪽에서 5번 가도를 이용하는 안은 폐지되었다.

남은 것은 6번과 7번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7번 고속도로(Roman Appian Way)는 서쪽으로 놓여 있지만 대규모의 독일군이 기다리는 폰틴 마쉬(Pontine Marshes)를 지나쳐야 했다.


6번 고속도로는 리리 협곡을 따라 놓여있었다. 이 고속도로의 입구가 바로 배후에 산지를 끼고 있는 카시노였다.

많은 언덕들은 독일군이 연합군의 움직임을 정찰하는데 최적의 장소들이었고, 훌륭한 포격 거점이 되었다. 견고한 산악 방어 거점들에 더해 라피도 강 도하의 어려움은 연합군에게 또 하나의 골칫거리였는데, 강 자체의 물살이 세었던데다가 독일군이 물살의 방향을 바꾸어 범람시킨 것이 어려움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카시노는 구스타프 라인의 중심이 되었으며, Winter Line의 완성을 위한 가장 강력한 요새가 되었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역사상 가치를 잘 알았기 때문에 1943년 12월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알베르트 케셀링(Albert Kesselring) 원수는 방어선에 수도원을 포함시키지 말것을 명령하였고, 연합군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Albert Kesselring


- 1차 공격 -

미 5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의 공격 계획은 영국 제 10 군단의 제 5 보병사단과 56 보병사단이 좌측 20 마일의 전선에서 1944년 1월 17일 공격을 개시하고 해안 근처에서 갈리(Gari)를 도하해 진군하는 동안, 19일과 20일 밤에 영국 제 46 보병사단이 오른편에서 진격하는 미국 제 2 군단의 지원을 받아 강을 도하하는 것이었다.

이후 1월 20일 제 36 텍사스(Texas) 보병사단이 카시노에서 5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도하해 주 공격을 가하고, 알퐁스(Alphonse Juin) 장군의 프랑스군이 이에 맞추어 우측에서 구스타프 전선과 아돌프 히틀러 방어선(Adolf Hitler defensive lines)의 접점인 몬테 카이로(Monte Cairo)를 향해 기습을 가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클라크는 조속한 점령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지만 적어도 로마 근교에서 멀리 독일군을 묶어두어, 1월 22일 미국 제 6 군단(영국 1 보병사단과 미국 제 3 보병사단 포함)이 상륙하기로 예정된 안지오(Anzio)공격이 용이하도록 도울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안지오에 미군이 상륙하면 알반 언덕(Alban Hill)을 통한 빠른 내륙 이동이 가능할 것이고, 6번 가도와 7번 가도가 연합군의 수중에 넘어오면 구스타프 라인의 보급선 문제를 야기되어 독일군은 로마 북부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이는 지난 3개월간의 독일군의 전술을 검토하여 계획한 작전이었지만, 연합군 정보부는 독일의 치고 빠지기식 전술이 구스타프 전선을 공고히 하기위한 시간을 벌 목적이었음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제 5군은 베른하르트 전선(Bernhardt Line) 7마일 구간을 돌파하는데 6주동안 1만 6천명의 사상자를 내고서야 1월 15일 구스타프 라인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들은 나폴리에서 출발했을 때부터 3개월 동안 진행된 여정을 멈추고 휴식과 재정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안지오 상륙은 여러 여건으로 늦추어져, 1월 말에나 가능해졌고, 상륙 3일 전 구스타프 전선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다.


연합군의 1차 공격 계획


첫 공격은 1월 17일 이루어졌다.

해안쪽에 위치한 영국 10 군단이 갈리아노 강을 도하하자, 독일 제 14 기갑사단의 지휘관이자 구스타프 전선 남서부를 책임지고 있던 폰 젱어(von Senger) 장군은 전선을 사수하고 있던 독일 제 94 보병사단의 방어 가능성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젱어의 요청에 따라 케셀링은 로마에 주둔중이었던 제 29, 제 90 장갑척탄병사단(Panzer Grenadier Division)을 전선에 파견해 방어군을 증강하기로 하였다.


영국 10 군단에 예비병력이 있어서 진격을 계속 진행했다면 전선의 양상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0 군단의 3개 사단은 도하작전에서 무려 4천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군단 예비병력은 바닥났다. 독일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다른 경로로의 공격이 예정되어 있던 미 2군단을 돌려 영국 10 군단을 지원하도록 할 수 있었지만, 제 5군 사령부는 해당 지역의 독일군의 방어가 취약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계획은 원래대로 추진되었다. 


1월 21일, 로마에서 파견된 독일군 2개 사단의 증원군이 전선에 도착하였다.

1월 20일 일몰 3시간 전에 미 36 사단이 중앙 돌파에 나섰다. 도하는 매우 위험하였는데, 강 주변에는 수많은 지뢰와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었던데다가 계획 자체도 꼼꼼하지 못하였고, 예행 연습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개 부대가 도하에 성공하였지만 기갑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번번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벌어진 48시간 동안 36 사단은 2100명의 사상자 및 실종자를 냈다.

다음 공격은 이틀뒤인 1944년 1월 24일 시작되었다.

소장 찰스 라이더(Charles Ryder)가 지휘하는 34 보병사단이 중앙 돌파를 시도하는 동안 프랑스군이 34 보병사단 우측에서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어서 2군단이 공격에 나섰다. 이들은 범람한 라피도 협곡을 건너 고지대에서 카지노 북쪽을 공격하고자 하였지만 험한 지형 때문에 이동 속도가 느려졌다. 카시노의 라피도 상류는 걸어서 건널수 있었기 때문에 임무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범람으로 인하여 예상은 빗나갔다.

34사단은 8일간의 혈전 끝에 결국 물러났고, 프랭크(Franck) 장군이 지휘하는 44 보병사단은 간신히 산 위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우측 방면에서 프랑스군은 율리우스 린겔(Julius Ringel)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제 5 산악사단과 교전을 벌이며 목표지점인 몬테 키팔코(Monte Cifalco) 근방에 도착을 성공함으로써 괜찮은 출발을 이루어냈다. 이어서 제 3 알제리 사단(3rd Algerian Division)이 몬테 키팔코를 지나 다음 거점 점령을 위해 진군하였다. 프랑스군은 카시노를 지나 곧바로 독일 방어진지를 타격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현재 점령지 사수를 위한 증원군을 요청하였지만 기각되었고, 36 사단 하의 1개 연대가 34사단 보강을 위해 파견되었을 뿐이었다.

프랑스군은 1월 31일까지 몬테 키팔코에서 독일 방어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결국 패하였다. 독일군은 몬테 키팔코에서 프랑스군과 미군의 동향을 훤히 관찰하며, 프랑스군 2개 사단의 2천 5백 병력을 손쉽게 살상할 수 있었다.


36사단 142연대의 원군을 가담시킨 미 34사단은 수도원이 위치한 언덕 방면으로 진군하였다. 산세는 험하고 도랑도 많았기 때문에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암반 때문에 개인호를 파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이들은 독일군의 포화에 노출된채 싸울 수밖에 없었고, 부비 트랩이 설치된 철조망에 가로막히기도 했다.

독일은 이미 3개월 전부터 다이너마이트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탄약을 산처럼 쌓아두었다. 공격군은 쉴곳을 찾을수도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기후는 습하고 추웠다.


2월 초 미군은 수도원에서 1 마일 거리도 안되는 산 오노프리오(San Onofrio) 마을 근방의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했고, 2월 7일 대대 병력이 수도원 바로 아래 400 야드 거리에 있는 445 고지를 점령하였다. 미군 분대 하나가 절벽같은 수도원 벽을 올라 정찰하다 수도원의 계단에 있었던 독일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어 34 사단은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지만 독일 제2공수연대 3대대가 사수하고 있던 593고지 점령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2월 11일 미군은 공격을 멈추고 철수하였다.

미국 보병들은 전체 전력의 80%가 손실되었으며 사상자 수는 2천 2백에 달하였다.

시기 적절한 예비 병력의 투입만 이루어졌다면 분명히 기회는 있었다. 일부 사학자들은 첫 전투의 실패를 클라크 장군의 경험 부족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경험부족 보다는 클라크가 카지노와 안지오 모두를 담당한 일 자체가 너무나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전선 사령관 알렉산더(Alexander) 장군이 카지노와 안지오를 공격할 두 부대를 단 한명의 지휘자에게 담당하도록 한 반면, 케셀링은 안지오 방면을 폰 마켄센(von Mackensen) 장군의 14군에게, 구스타프 전선 방면을 폰 비에팅호프(von Vietinghoff)의 10군에게 담당시켰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 2차 공격 -

패퇴한 미군은 아드리아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영국 제 8군 소속의 뉴질랜드 군단(New Zealand Corps, 제 2 뉴질랜드 사단과 제 4 인도 사단으로 구성)으로 교체되었다. 뉴질랜드 군단은 버나드 프레이버그(Bernard Freyberg) 장군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으며, 군단 사령부는 제 4 인도 사단을 어디로 진군시켜야 할지, 어떻게 원조해야 할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였다. 수도원에서 내려다보면 훤히 보이는 오솔길을 따라 나귀로 7마일 거리에 보급물자를 실어날랐지만 제대로 조준한 포격 한번이면 몰살당하기 일수였고, 덕분에 이곳은 죽음의 협곡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프레이버그의 계획은 첫 전투때와 별다른 점이 없었고, 성공 확률은 반반이었다.


Fallschirmjaeger(독일 공수부대)의 당나귀 보급


한편 독일군이 수도원을 포격 관측지로 사용하고 있다는 연합군 장교들의 의혹이 점차 증가하였다. 영국 신문들과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의 슐츠버거(C. L. Sulzberger)는 이 수도원을 이용하는 독일군의 기사를 자주 날조하여 보도했다. 미 육군 항공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이커(Ira C. Eaker) 중장과 데버스(Jacob Devers) 중장이 직접 200 피트 상공에서 수도원을 정찰하였을 때 수도원 벽 안쪽 50피트 내에 독일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았다고 한다.


뉴질랜드 군단 사령부도 수도원이 관측지가 되지 않고서는 독일의 포격이 그렇게 정확할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하였다. 키펜버거(Kippenberger) 소장은 군사적 관점에서 수도원 폭격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제 4 인도사단의 프랜시스 터커(Francis Tuker) 소장은 현 상황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수도원 언덕 공격을 결심하였다. 그는 자세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나폴리의 서점에서 1879년에 출판된 수도원 관련 서적을 구해 읽었다. 터커 소장은 또한 수도원의 150피트 석벽이 10피트의 두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공병의 작업으로 파괴하기가 곤란하다며 폭격기의 동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1944년 2월 11일 제 4 인도 사단의 디몰린 준장(H. W. Dimoline)의 이름으로 몬테카시노의 수도원에 대한 폭격 요청이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터커 소장은 열병으로 카세르타(Caserta)의 병실에 누워서 이를 재차 요청하였으며 프레이버그는 1944년 2월 12일 이 내용을 타전하였다.

제 5군의 마크 클라크 중장과 그의 참모 알프레드 그루엔터(Alfred Gruenther) 소장은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문화유적을 파괴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직접 수도원 근방에서 전투를 벌인 제 34사단의 부관 버틀러 장군 역시 독일군이 수도원을 점거하고 있다는 의견을 부정하며 실제 독일군의 공격은 수도원 아래의 언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클라크는 전선 총사령관 해럴드 알렉산더(Sir Harold Alexander) 장군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수도원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파괴 명령은 결국 하달되었고, 수도원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1944년 2월 15일 아침 142대의 B-17 Flying Fortress 폭격기와 47대의 B-25 Mitchell, 그리고 40대의 B-26 Marauder 중폭격기가 동원된 폭격이 시작되었다. 4시간 동안 폭격기들은 총 493톤의 폭탄을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 쏟아부었고, 많은 연합군들이 쌍안경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며 환호하였다. 클라크 장군과 그루엔터 장군은 폭격의 참관을 거부한채 사령부에 틀어박혔다.

그날 오후와 다음날까지 추가로 포병의 포격이 이루어졌으며 59대의 전폭기가 폐허 위로 몇 톤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교황 피우스 12세(Pius XII)는 폭격에 대하여 어떠한 공식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지만, 보좌관 매글리온(Maglione) 추기경은 바티칸(Vatican)의 미국 대사 해럴드 티트만(Harold Tittmann)을 불러 폭격이 어마어마한 실수이며 바보짓이라고 항의했다.


훗날의 조사결과 그 날의 폭격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피난처를 찾아 수도원에 숨어든 이탈리아 민간인들이었다. 수도원 내에서 폭격으로 인하여 사망했다는 독일군에 대한 기록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투하된 폭탄의 10%만이 수도원에 도달하였고, 부정확하게 투하된 나머지 대부분의 폭탄들은 수도원 밖으로 떨어져 독일군은 물론 연합군에도 사상자를 내았다.

폭격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은 전후 조금씩 정정되었다. 1969년 최종적으로 교정된 미육군 공식 역사에 따르면 당시 수도원은 독일군에게 점거되어 있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폭격이 이루어진 다음날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살아남아 폐허에서 달아났다. 첫 폭격이 끝났을 당시 수도원에는 40명 정도만이 남았다. 이들은 수도원 지하실로 피신해 살아남은 6명의 수도승과 79세의 대수도원장 그레고리오(Gregorio Diamare), 세 농부 가족, 양친을 잃거나 버려진 아이들, 그리고 중상을 입고 죽어가는 사람들이었다.

포병의 포격이 끝난 후 전폭기의 공격과 제 4 인도 사단의 공격이 이어지자 수도승들은 수도원을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도승들과 생존자들은 1944년 2월 17일 아침 7시 반에 수도원을 빠져나왔다. 늙은 대수도원장은 이들을 인솔하여 리리 협곡으로 빠져나가며 로사리오의 기도(rosary)를 암송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독일군 응급처치소에 도착하였고, 수도승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상태가 심각한 민간인들은 독일군 구급차에 실려 후방으로 보내어졌다.

독일 장교와 면담 후에 수도승들은 차량에 타고 산 안젤모(San Anselmo)의 수도원으로 이동하였다. 수도사 칼로마노 펠라갈리(Carlomanno Pellagalli)만이 몬테카시노의 폐허로 돌아갔다. 이후 폐허에서 방황하고 있는 그를 본 독일 공수부대원들은 그를 유령으로 착각하였다고 한다. 1944년 4월 3일 이후 그 수도사의 행적은 더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독일 제 1 공수사단 소속의 공수부대원들은 폐허를 점거하고 이를 요새화하여 3개월간 주둔하였다.


연합군의 2차 공격 계획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폭격은 지상군과 공조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2월 15일 폭격은 지상군이 채 공격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산으로부터의 공격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폭격이 개시된 날 밤 Royal Sussex Regiment(제 4 인도 사단 내의 영국군 연대)의 1대대가 그들의 위치로부터 70 야드 떨어진 뱀머리 마루(Snakeshead Ridge)의 593 고지 점령에 나섰지만 병력의 절반을 잃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공격은 당초 대대 병력으로 수행하도록 명령된 것이었으며 시작부터가 좋지 않았다.


연합군의 경우 주변 아군의 피해를 우려하여 593 고지를 향한 포격지원이 사실상 불가능하였지만, 독일군은 575 고지로부터 지원포격이 가능하였다. 불행히도 575 고지로부터 뱀머리 마루를 넘어 낮게 날아온 포탄 일부가 모여있는 공격 중대 위로 떨어졌고, 사상자를 수습하고 전열을 다시 정비하였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공격은 혹독하게 진행되었고 때로는 백병전까지 벌어졌지만 영국군은 끝내 고지 점령에 실패하였다.

이 전투로 서섹스 연대는 15명의 장교 중 12명을 잃고, 313명의 병력 중 162명을 잃었다.


2월 17일 밤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서섹스 연대 병력과 4/6 라자푸타나(Rajputana) 소총부대가 593 고지 및 444 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공격에 나서는 동안, 1/2 구르카(Gurkha) 소총부대와 1/9 구르카 소총부대가 계단을 경유해 수도원을 직격하기로 하였다.


Gurkha


후자의 경우 험난한 지형을 경유해야 하지만 히말라야(Himalayas) 출신의 구르카 용병들은 산악전에 능숙하였기 때문에 희망을 걸어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절망으로 끝났다.

라자푸타나 부대는 196명의 장교와 사병을 잃었으며 1/9 구르카 부대는 149명, 1/2 구르카 부대는 96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제 공격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황 하에서 1944년 2월 18일, 디몰린과 프레이버그는 수도원 언덕에 대한 공격 계획을 취소하였다.


총공격의 또 다른 부분은 뉴질랜드 사단 소속 제 28 마오리(Maori) 대대의 두개 중대가 담당하였다. 이들은 라피도를 건너 카시노의 철도역을 점거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역 점령에 거의 성공하였지만 기갑 지원이 없는 상황 때문에 역을 앞두고 마지막에 놓여있는 교량을 건너는데 실패하였다.

연합군 포병의 연막탄 덕분에 독일 포병의 공격을 덜 받게 된 이들은 날이 밝은 뒤에도 현 위치를 사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에 독일군의 기갑전력이 출현하였고 고립상태에 놓인데다가 대전차 병기또한 없었던 이들은 철수 명령을 받게 되었다. 전멸의 위기에서 이들은 겨우 퇴각할 수 있었는데, 철도역을 점령당할뻔한 독일군이 긴장한 상태였는데다가, 있을지 모르는 또다른 공격에 대한 대비를 우선으로 한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2월 19일에는 마을과 수도원을 점령하기 위한 연합군의 대대적인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성 언덕에 자리하고 있던 독일 제 1 공수 사단은 수도원을 향하는 모든 연합군의 시도를 완벽히 분쇄하였다. 마을에서는 연합군이 약간의 진전을 보였지만 곧 독일군의 저항에 직면하여 승기를 잡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2월 20일 프레이버그는 공격을 취소하였다. 훗날 연합군 이탈리아 전선 사령관 알렉산더 장군은 큰 타격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한 독일 제 1 공수 사단에 대하여 독일군 최강의 사단이라고 칭찬하였다.


- 3차 공격 -
 
겨울이 지나기 전에 세 번째 전투가 계획되었다.

지난 두 번의 전투 결과를 보아 판단하건대 카지노의 라피도 하류를 건너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측 산으로부터의 공격 또한 값비싼 실패로 끝났다. 결국 연합군은 라피도 협곡의 북부로부터 한 팀은 카시노를 점령하고 다른 팀은 수도원 언덕 방향으로 진군하는 양동 작전을 구상하였다.

2월 말, 영국 제 78 보병사단이 뉴질랜드 군단의 휘하로 배속되었고, 카시노의 라피도 하류를 도하하여 로마 방면으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연합군 지휘관중 이 계획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들은 공격 전에 중폭격기들을 동원해 폭격을 실시하는 것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하였다. 폭격에는 3일의 청명한 날씨가 필요하였고, 연합군은 기상 예보를 기다리며 21일 동안 습하고 추운 곳에서 견뎌야만 했다.
 
이 동안 일어난 안좋은 소식은 두개 뉴질랜드 사단을 지휘하던 키펜버거 장군이 대인지뢰에 두 발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었고, 좋은 소식은 안지오에 대한 독일의 반격이 실패로 끝나 독일군들이 물러났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전투는 3월 15일에야 결국 개시되었다. 이날 아침 8시 반경부터 3시간 반 동안 폭격기들이 일천 톤의 폭탄을 퍼부었다.

뉴질랜드군은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진군을 시작하였다. 성사 여부는 독일군이 폭격으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가에 달렸다. 그러나 독일군의 방어는 생각보다 더 신속하였으며, 연합군 전차들은 폭격으로 생긴 구덩이 때문에 이동이 어려운 상태에 빠졌다. 뉴질랜드군에게 신속한 공격 명령이 내려졌다면 사태는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명령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내려졌고, 그동안 독일군은 전선을 정비하였다.

게다가 일기 예보와 반대로 비마저 다시 내리기 시작하였다. 빗물은 폭격으로 생긴 구덩이에 고였고 사방을 온통 저습지로 만들어버렸으며 무전기를 불통으로 만들어버렸다. 검은 먹구름은 달빛을 완전히 가려버렸으며 연합군은 길조차 찾기가 어려운 지경에 놓였다.

그래도 이날 밤 뉴질랜드군은 성 언덕(Castle Hill)과 165 고지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고, 제 4 인도 사단은 236 고지를 지나 435 고지, 교수형 언덕(Hangman's Hill)을 점령하였다. 1/9 구르카 소총부대는 236 고지를 지나 435 고지 점령을 지원하였고, 1/6 라자푸트나 소총부대는 퇴각하였다.


상황은 많이 호전되었다. 비록 보급선은 위태로웠지만 구르카 부대는 이제 수도원에서 250 야드 거리에 있는 교수형 언덕을 대대 규모로 점거하고 있었다. 마을은 여전히 독일의 수중에 있었지만, 뉴질랜드군은 철도역 점령에 성공하였다. 3차 전투 이후 사흘이 지나 고립된 구르카 부대는 퇴각하여 재정비되었다.

오랜 전투에 지친 제 4 인도 사단과 2개의 뉴질랜드 사단은 산을 담당할 영국 제 78 사단과 마을을 담당할 영국 제 1 위병 여단(1st Guards Brigade)으로 교체되었다. 카시노에 머무는 동안 제 4 인도 사단은 3,000 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뉴질랜드 사단은 1,600 명을 잃었다.


알렉산더 장군의 전략은 해협을 건너는대로 최대한의 사단을 투입해 독일군을 일거에 몰아낸다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여건이 뒤늦게야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올리버 리즈(Oliver Leese) 중장이 지휘하는 영국 제 8군이 아드리아 전선으로부터 이탈리아의 척추를 건너 미 제 5군에 당도하였고, 카시노와 바다 사이의 20마일에 걸친 공격을 담당하였다.

미국 제 2 군단과 프랑스군으로 구성된 5군은 영국 제 8군(영국 제 13군단과 폴란드 제 2군단)의 왼편을 맡아 협공을 담당하게 되었다. 봄이 되어 기온도 올라갔고 지면상태도 훨씬 나아져서 대규모 기갑 전력의 운용이 가능해졌다.



Operation Diadem


왕관 작전(Operation Diadem)이라 명명된 계획은 미 2군단이 연안에서 7번 가도를 통해 로마로 북상하는 동안 프랑스군은 연안 평원과 리리 협곡의 장벽 역할을 하는 아룬치 산(Aurunci Mountain)을 통해 공격하고, 영국 13 군단이 폴란드 군단의 지원을 받아 정면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는 작전이다보니 실행에 두달이나 걸렸다. 독일군의 관심을 구스타프 전선으로부터 돌려 예비 병력을 다른 곳으로 보내게끔 하는 일련의 교란 작전들이 시도되었고, 행군은 밤을 이용하였으며 독일 정찰을 속이기 위한 가짜 전차와 차량들이 배치되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케셀링은 카시노 근방에 6개의 연합군 사단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실상은 13개였다.

5월 11일(혹은 12일) 23시, 영국 제 8군의 1000문의 대포와 미국 제 5군의 600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포격과 동시에 연합군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시간 반 동안의 포격은 이 일대 독일군의 방어지역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미 2군단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였지만 프랑스군은 아룬치 산 점령 목표를 달성하여, 이곳과 영국 제 8군 사이에 끼어버린 독일군들을 물러나도록 하였다.

영국 제 13군단 휘하 두개 사단이 라피도를 도하하였고, 제 8 인도 사단이 강에 교량을 놓아 제 1 캐나다 기갑 여단(1st Canadian Armoured Brigade)의 전차가 진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제 기갑 지원을 받을 수 있게된 도하군들은 독일의 전차와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카시노 윗편의 산에서 벌어진 폴란드군과 독일군의 교전은 쌍방에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제 4 공수 연대의 헤일만(Heilmann) 대령은 이 날의 전투를 돌아보며 '베르덩(Verdun) 전투의 축소판' 이라고 평가하였다.


12일 오후부터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지만 13일이 되어서는 다시금 연합군이 유리하게 전투를 이끌어나갔다. 프랑스 군단은 몬테 마이오(Monte Maio)를 점령했고, 케셀링은 8마일 후방의 2차 방어선인 아돌프 히틀러 전선이 준비될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모든 예비전력을 투입하였다.

5월 14일 오귀스탱 길로메(Augustin Guillaume) 장군이 지휘하는 모로코군이 리리 협곡과 나란히 놓인 산을 타고 도착하여 비어있던 독일 방어선 근방의 지역을 점령하고 13군단을 지원하였다. 독일군은 아무도 그런 지형을 뚫고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위치였다.


사단 규모였지만 조직 자체는 보다 느슨한 모로코군은 산악전을 전문으로 수행하는 조직이었다. 쥬인의 프랑스군 휘하에는, 제 1 자유 프랑스 사단(1st Free French Division), 제 2 모로코 보병 사단(2nd Moroccan Infantry Division), 제 3 알제리 보병 사단(3rd Algerian Infantry Division), 제 4 모로코 산악 사단(4th Moroccan Mountain Division)의 총 4개의 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5월 15일 영국 제 78 사단이 13 군단에 가세, 리리 협곡으로부터 카시노를 고립시켰다. 17일에는 폴란드 사단이 산을 다시 공격하였으며 18일 새벽 78 사단과 연계, 카지노 서쪽 2마일 부근까지 진군하였다.


몬테카시노 정상에 깃발을 세운 폴란드 정찰대


5월 18일 폴란드군의 정찰대가 수도원에 도착하였을때 잔해 속에 남아있는 독일 수비병은 상태가 심한 부상자들 뿐이었다. 독일 수비군은 전날 밤에 모두 빠져나갔고, 연합군은 저항없이 수도원에 입성하였다. 연합군의 북상은 계속되어 1944년 6월 4일, 노르망디 상륙(Normandy invasion)을 이틀 앞두고 로마가 함락되었다.


 - 戰後 -

전투는 성 베네딕트가 설립한 몬테 카지노 수도원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비록 수도원 자체는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지만 다행히도 폭격 전에 독일 중령 율리우스 슐레겔(Julius Schlegel)이 수도원의 1만 2천 권에 달하는 장서들과 마슬품들을 모두 바티칸의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었기 때문에 문화재의 소실을 최대한 방지할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나고 자유 프랑스군 사령관 Alphonse Pierre Juin은 인근 지역(Ciociaria)에서 50시간의 약탈을 허용한다. 이때 총 2,000여명의 여성이 강간당하고, 800여명의 남성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마을은 모두 불태워지고, 재물들은 모두 약탈되었다.

프랑스군은 이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도 다시 한번 강간, 살해, 약탈로 악명을 떨친다. 프랑스 정부는 현재까지도 이 전쟁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소피라 로렌 주연의 강간당한 두 자매 이야기

현재 수도원은 재건되었으며 수도원 근방에는 폴란드인 공동묘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싸웠던 폴란드 작곡가 펠릭스 코나스키(Feliks Konarski)는 Czerwone maki na Monte Cassino(The Red Poppies on Monte Cassino)라는 송가를 써서 몬테 카지노에 바쳤다.


복원된 Benedict 수도원

전사한 영국인, 뉴질랜드인, 캐나다인, 인도인, 구르카인과 남아프리카인들을 안치하기 영연방 군인묘지(Commonwealth War Graves)가 카시노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을 위한 묘지는 리리 협곡의 6번 가도 근방에, 미국인은 안지오에, 독일인은 카시노 동쪽 라피도 협곡에 각각 안치되었다.


2006년 로마에서는 도시를 해방시키기 위해 쓰러진 연합군들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열렸다.

비슷한 글들
profile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