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버마를 평정한 일본군이 방어 계획에 몰두하던 무렵, 태평양의 전세는 솔로몬, 뉴기니 방면부터 서서히 미국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에서는 미군의 반격으로 건설중이던 비행장을 잃었고, 뉴기니 전선에서는 연합군 기지인 포트 모레스비를 눈앞에 두고 보급이 두절되어 굶어 죽는자가 속출하며 호주군의 반격 앞에 풍전등화 꼴이 되어 버린 참상이 벌어졌다. 따라서 태평양 전선이 어느 정도 수습되면 총구를 장개석에게로 돌려 중경을 점령함으로서, 앓던 이를 시원하게 빼려던 일본 육군의 계획은 근본부터 어긋나게 되었다.
오히려 전쟁 지도부가 가장 우려하고 있던 병력의 축차 투입을 태평양 전선에서 반복하여 결국은 남태평양의 무수한 섬에 육군을 분산 배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쨌든 장기전을 치르고 있는 일본의 국가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전쟁의 핵심 지역은 어디까지나 태평양 방면이었다. 버마 전선은 어디까지나 이 전쟁의 부수적 작전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일본은 버마에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보내지 않았다.
버마 북부의 중국 운남 접경의 56사단, 후콩 트라이앵글 지대를 맡은 18사단, 아라칸 산맥에 위치한 13사단, 그 어떤 부대도 2천 킬로미터에서 3천 킬로미터나 되는 범위의 방어선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보병 1개 연대의 방어 범위의 최대한이 2킬로미터로 여겨지는 전술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숫자였다. 따라서 버마의 15군이 버마의 수비에는 1개의 새로운 방면군과 3개의 군, 10개 사단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중앙에 요청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조치였다.
향후 15군을 이끌게 된 무다구치(牟田口廉也)도 당시에는 "버마 방위는 페구 부근에 모든 주력 병력을 집결시켜 두었다가 적이 침공해 왔을 때 필요한 곳에 출동 공격하는 것이 현재의 병력 상황으로 볼 때 최상책이다."라고 막료들에게 토로하였을 정도였다.

지휘중인 무다구치
한편 버마 전선에서 패퇴한 미국의 스틸웰과 영국의 웨이벨 총독, 오킨렉 총사령관 등은 반격 작전을 입안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1차 아라칸 전투와 1차 친디트에서 길도 없는 정글로 공격해오는 일본군에 의해 실패의 쓴맛을 본 연합군은 마침내 원통 진지(Admin Box)라는 맞춤형 전술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원통 진지란 선형 방어라는 공식에 얽매이지 않고, 우세한 항공력을 통한 공중 보급으로 일본군의 장기인 우회 포위에 대항하여 방어선을 유지하는 전술이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간단한 전술이지만, 일본군으로서는 육군 대학의 강의에서나 들을까 말까한 기상천외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Admin Box는 2차 아라칸 전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 위력을 발휘하였고, 일본군 수뇌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선을 유지하고 방어에 전념하는 것을 으뜸으로 쳤던 사고 방식은 급변하고, 마침내 일본군도 아라칸 산맥의 험준한 지형 또한 공중 보급이 수반된 지상 작전을 제약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초조함이 마침내 임펄 작전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43년 4월 3일. 새로운 버마 방면군 사령부가 창설되어 가와베 쇼오조(河辺正三) 중장이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나까나가 다로우 소장이 참모장으로 발령되었다. 15군 사령관에는 이이다 쇼오지로오 중장 대신 무다구치 중장이 취임하게 되었다. 무다구치는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중국 전선으로부터 싱가폴까지 패해본 적이 없었던 상승 장군으로서 현대의 세계 전략 추이를 한번도 연구해보려 들지 않았던 정신론자였다.
15군의 작전 회의에서 버마 방위 작전의 소극, 적극론은 큰 논쟁을 일으켰다. 
小畑信良
버마 방위는 국경 내에서 완수될 수 있다는 의견을 내걸고 인도 침공 불필요를 주장했던 오바다 노부요시(小畑信良) 15군 참모장은 무다구치와 대립하여 인도 진격 작전은 후방의 병참선을 생각치 않은 망동이라고 주장하여, 무다구치의 노여움을 사고 만주 특무 기관장으로 좌천되고 만다.
또한 오바다 참모장에 동조하한 제 33 사단장 야나기다 겐조(柳田元三) 중장, 제 15 사단장 야마노우찌 마사후미(山內正文) 중장도 사실상 사단장 지위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여기서 이들이 편 주장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 소극론 -
친드윈 강가의 작전에는 우기와 건조기, 이상 두가지 형태의 전투 가능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건조기인 2월에 영국군(윈게이트)이 손쉽게 15군의 방위선을 돌파하여 버마 내부로 침입해 왔는데도 그것을 방지하지 못했던 경험으로 미루어 방위 제 1선을 더욱 강화하고, 가능하다면 쥬우피 산맥의 서쪽 친드윈 강 서쪽까지 군을 전진시켜야한다.
그러나 방위군의 현상태로 미루어 방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작전은 어디까지나 연합군의 진출에 반격하여 침공 시도를 분쇄하는 데 두어야 한다. 국경 부근의 지형적 악조건을 무릅쓰고 임펄 진공작전을 벌인다는 것은 후방 병참로 확보라는 점에서 너무나 큰 무리가 따른다.
만약 인도에 들어가더라도 보급로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로 우기를 맞이하면 진격군은 자멸하게 될 것이다.
- 적극론 -
1. 방위의 1선을 친드윈까지 전진시킨다 하여도 방위선이 더욱 길어지게 될 뿐이며, 인도 - 버마간의 긴 국경선 중 어떤 지점을 뚫고 들어올지 예측할 수 없는 연합군의 적극적인 공세를 모두 봉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연합군의 주요 작전로인 임펄-파레르-타암 간 도로의 가장 좁은 입구를 제압하여, 연합군의 아라칸 산맥 진출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수를 쳐서 파레르 동쪽에 있는 적을 공격하여 연합군의 반격 의도를 분쇄해야 한다.
2. 일본군측 방위선을 아라칸으로 이동시키는 일은 궁극적으로 버마의 방위 목적에는 합리적일지 모르나, 현실적으로 틴 고지에까지 진출한 연합군을 파레르 동쪽에서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연합군측의 기지인 임펄을 일차적으로 탈취하여 반격 기도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편이 전술적으로도 쉬우며 방위 목적 또한 달성할 수 있는 길이다. 후방 보급로 확보라는 문제가 있지만, 진출한 이후 현지 조달이라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버마로부터의 보급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3. 버마 방위를 장차 오랜 기간에 걸쳐 완수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수단이 필요하다. 버마 방면군의 현재 병력만으로도 아삼주의 연합군 기지를 섬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단숨에 인도로 진공하여 정전양략(政戰兩略)을 활발히 펼쳐 대동아 전쟁의 전반적인 전략에 기여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적극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나선 것은 남방군 총사령부에서 전속되어 온 후지하라(藤原) 정보참모 한사람 뿐이었다. 그외의 사람들은 어느쪽 견해에도 명확한 태도 표시를 하지 않았다.
결국 무다구치 군사령관의 최고 강경론이 압도적으로 지휘부를 제압하여, 국경을 넘어 임펄을 제압한다는 것이 15군의 방침으로 결정되었다. 15군의 임펄 침공 작전안은 수차에 걸쳐 집요하게 버마 방면군에 제출되었으며, 무다구치 중장이 직접 가와베 방면군 사령관을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 어떤 때에는 방면군을 거치지 않고 남방군 총사령부나 대본영에 직전 전보를 발신하기도 하는 등, 무다구치의 집념은 열광적이었다.
한번은 대본영에서 출장나온 덴노의 인척 다께다미야 쑤네노리(竹田官但德)왕의 앞에서 15군의 참모 기노시다와 버마 방면군의 가다꾸라 참모가 채찍을 휘두르며 핏대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버마 방면군의 극렬한 반대도 대동아 회의 석상에서 도죠(東條)수상이 찬드라 보스 인도 괴뢰정부 수장에게 인도로 보내주겠노라 공언하는 바람에 누그러지게 되었다.
마침내 '임펄까지는 어떻게 되겠지'라는 근거없는 낙관론이 일본군 내부에 팽배하게 된다.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요즘도 매일 늦게 퇴근하나? 새로운걸 안올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