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펄(Imphal) 전투(일본측 작전명 : 우호작전,ウ号作戦)는 1944년 3월부터 7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일본군과 영국군간에 인도 동북부의 임펄 지역에서 벌어졌다.
1944년 초 임펄 전선에는 슬림 장군 지휘하의 제14군 예하 1개 영국군 사단과 3개 인도 사단의 연합군과 무다구치 중장 휘하 제 15군 예하 4개 사단의 일본군이 대치해 있었다.
인도 동북부의 아삼(Assam)주에 위치한 임펄은 인도에 주둔한 영국군의 주요 거점중 하나이며, 연합국으로부터 중국으로 향하는 보급 루트가 출발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임펄 북쪽으로 약 110㎞ 지점에 코히마가 있고, 여기서부터 북서쪽으로 60㎞ 지점에 아삼(Assam)으로 통하는 전략 요충지 디마푸르가 있다.

아라칸 산맥
버마 북부의 열대 우림은 5월부터 쏟아 붓는 몬순의 폭우로 모든 육상 교통을 마비시킨다. 정글의 관목(灌木)과 덩굴은 톱날처럼 억세고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어 쉽게 뚫고 나갈 수가 없다. 정글을 통과하는 데는 고작 800m를 전진하는데 하루가 걸린다.
극성스러운 모기는 밤낮 구분 없이 사람들을 물어뜯으며 지네, 독사, 전갈, 덤덤파리, 모기장을 뚫고 들어와 피를 빨아먹는 물소파리, 길이 2.5~15㎝의 새까맣고 번들거리는 산(山)거머리 등이 인간들을 괴롭힌다. 역겨운 비린내를 풍기는 거머리들은 나뭇잎이나 가지 등에 붙어 있다가 나무 밑으로 사람이 지나가면 소나기 내리는 소리를 내며 옷을 뚫고 들어가 피를 빨아먹는다.
곤충들이 옮기는 말라리아, 이질 등의 역병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다.

후콩 계곡의 중국 - 미국 연합군
- 버마 방면군의 지침과 임펄 작전의 준비 -
1944년에 들어서 일본의 버마 방면군은 휘하 부대에 아래와 같은 지침을 내렸다.
2. 임펄 작전의 기습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애캽 방면의 영국군을 공격한다.
3. 후콩 방면의 18사단은 지구전을 취하여, 임펄 작전중 연합군의 공세를 카마인 이북에서 저지하도록 한다.
4. 운남 방면의 제 56 사단 역시 중국군을 맞아 지구전을 벌인다.
이 방침에 따라 15군은 우선 노강 정면의 중국군을 공격하여 동부 아삼 지역으로 몰아내려 시도하였으나, 미국-중국 연합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오히려 뒤로 밀려났다. 제 2의 방침에 따라서는 1944년 2월 하호 작전(ハ号作戦)을 애캽 방면에서 벌여 크게 패배했으나, 영국군이 예비 전력을 임펄에서 아라칸 지역으로 빼돌리도록 강요하여 절반의 성공을 거둔다.
임펄로의 보급로 확보를 위한 도로 공사는 자재 부족과 우기로 인해 거의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오히려 연합군의 공습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임펄 작전의 준비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한편 3월 5일, 영국군의 윈게이트가 일본군의 배후로 대규모 강하 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에 대한 델리 방송의 보도 내용은 아래와 같다.
대작전을 앞두고 후방으로 빼돌릴만한 여유 병력이 없던 버마 방면군은 후방에서 독립 혼성 24여단을 투입하고, 전선의 각 부대에서 1개 대대씩을 충원하여 윈게이트 부대에 대한 토벌 작전을 벌였다.
임펄 입성을 손꼽아 기다리던 15군보다는 오히려 버마 항공사단 쪽이 이 공수 작전을 중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있었으나 우세한 연합군 공군력 앞에는 어쩔 방도가 없어, 고작 정찰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일본군의 이중 도박 - 윈게이트가 보급로를 끊고 스틸웰이 위로부터 압박을 가하고 있다.
- 김치국부터 마시는 15군 -
여러가지 불길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음에도, 무다구치의 15군 사령부는 임펄 입성후의 대책을 마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승리는 기정 사실이다.
1. 임펄 입성과 동시에 제 15군 사령관은 이 지역의 행정에는 직접 관여를 피하고 오직 치안 유지에 전념한다. 이 지역 행정은 자유 인도 임시정부가 담당한다.
2. 인도 국민군을 표면에 내세우되, 통수권은 제 15군 사령관이 갖는다.
3. 인도 - 일본 전쟁 협력위원회와 임시 재해대책 위원회를 둔다.
4. 이들 기관의 활동을 통해 점령지 물자 비축을 신속히하고, 교통기관 정비를 실시한다. 물자 비축은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하되, 그 관리는 군이 직접 담당하며 일체의 유출을 금한다. 또한 포고령과 성명은 적절히 공동으로 발표한다.
떡주기 전에 김치국부터 마시는 꼴이다.
무다구치는 벌써부터 임펄을 점령한 듯 들떠 있었고 사령부에서는 각종 점령 정책을 쏟아내었으나, 이는 인도 국민군을 괴뢰로 내세우고 있는 일본군이 적절히 물자를 횡령하려는 야비한 의도가 바탕에 깔려있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임펄 점령을 위한 무다구치의 작전 계획은 아래와 같았다.
1. 제 31사단은 남쪽에서 북진하여 임펄로 향한다.
2. 제 33사단과 제 15사단은 친드윈강을 도하하여 인도 국경으로 돌입한다.
3. 제 33사단은 남쪽에서 임펄 정면을 공격한다.
4. 제 15사단은 직선으로 임펄 동북부로 진출하여 측면에서 공격한다.
5. 제 31사단은 계속 북진하여 코히마를 점령하여 임펄로의 연합군 증원을 저지한다.
5. 제 31사단은 코히마를 점령 완료하면, 일부 전력을 임펄로 돌린다.
6. 이 작전은 20일 이내로 끝내며, 작전 개시일은 3월 15일로 하되 제 33사단의 개시일은 3월 8일로 한다.

공격을 담당할 제 15군의 내역과 지휘관은 아래와 같았다.
제 15군(第15軍) 하야시(林)- 사령관(司令官):무다구치 렌야(牟田口廉也)
제 15사단(第15師団) 마쓰리(祭)- 사단장(師団長):야마우치 마시부미(山内正文)
제 31사단(第31師団) 레쓰(烈)- 사단장(師団長):사토 고오도꾸(佐藤幸徳)
제 33사단(第33師団) 유미(弓)- 사단장(師団長):야나기다 겐조(柳田元三)
이외에 인도 국민군 4개 사단이 있었으나, 이름뿐인 전력이었다.
- 작전 개시 -
3월 8일, 33사단이 친드윈강을 도하하여 우호 작전이 시작되었다.
제 33사단의 일부는 친드윈 강을 도하하고 카바우계곡을 북진하였으며 다른 일부 병력도 탄잔과 카레묘로 향했다. 영국 제 4군단은 턴잔 방면에 제 17 인도사단, 파렐방면에 제 20 인도사단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3월 15일, 해가 저문 후인 저녁 9시에 나머지 병력들이 일제히 친드윈강을 건넜다.
병사 1명이 가지고 있는 장비는 소총탄 240발, 수류탄 6발. 식량으로는 쌀과 건빵, 소금, 가루된장과 통조림 등 20일 분량이었다.
친드윈 강을 넘어 당분간은 진격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각 사단에는 무다구치의 징기스칸 작전안에 따라 몇천 마리의 코끼리와 양, 소, 말 등의 가축이 배당되어 있었다. 이 가축들은 등에 무겁게 탄약과 무기, 식량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험준한 아라칸 산맥을 넘다 많은 수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사라져버렸다. 또한 버마의 물소들은 험한 지형을 걷는데 익숙치 않아 종종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실정이다보니 일본군은 가축들을 짊어지다시피하여 아라칸 산맥을 넘어야만 했다.
그러나 어쩔수없이 많은 가축과 보급 물자가 사라져 버렸다.
이는 초반부터 일본군의 식량과 탄약을 궁핍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 3개 사단이 전선에 전개했을 무렵에는 실질적인 전투력이 상당부분 소모된 상태였다.
제 31사단은 친드윈강 도하 이전에 125 마리의 소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21일 후 코히마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5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3월 21일, 제 31사단의 좌익 돌진부대는 3월 21일 우크룰에 진출했다.
3월 28일, 제 15사단은 임펄의 북쪽에 가까스로 도달했다. 이로써 임펄의 수비대는 고립되었고, 영국군과 일본군은 임펄로 통하는 길 위에 몇 겹으로 서로 엇갈려 위치하게 됐다.
- 임펄로 가는 길 -
예상밖의 공격을 받은 영국 제 14군 사령관 슬림 중장은 역습을 준비했다.

William Slim
슬림은 우선 애캽 방면의 제 15군단에서 제 5, 제 7사단을 차출하여 임펄과 데마풀에 파견하는 동시에, 제 33 군단에서도 제 2영국사단과 제 50인도전차여단을 차출하였고 제 14군 예비의 인도 전차 사단도 임펄로 긴급 투입하였다.
또한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전투중이던 제 4군단에게는 임펄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제 4군단 예하의 17사단은 이미 일본군에게 퇴로를 끊겼고, 제 23사단도 우크룰 남쪽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제 23사단은 암호 문서 등을 소각한 뒤 일부가 탈출에 성공했으나 17사단은 좀처럼 퇴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코히마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던 제 1아삼 연대는 일본군이 코히마에 침입했다는 헛소문에 사기가 저하되었다.
3월 25일, 연합군 총사령관 루이스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은 제 17사단을 수송기편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고 이를 런던의 참모본부에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영국군 참모본부는 즉시 수송기 25대를 인도에 파견하고, 미군에 연락하여 5월 중순까지 미군 수송기 46대를 대여하기로 하였다.
제 17 사단이 임펄로 후퇴했을 때, 애캽 방면에서 온 증원부대가 속속 전선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공중 수송되어 병력의 피로를 최소화하였다. 먼저 제 5 인도 사단이 도착하였고 이어서 제 7인도사단, 그리고 디마플 북방에서는 제 33군단 사령부가 진출하고 보가잔에서는 제 2영국사단이 나타났다. 증원부대의 증원이 끝나자 스틸웰 장군은 임펄과 캥그라톤비, 비센풀인에 각 부대를 배치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비센풀 요새 인근의 영국군 전초병
4월 20일, 일본군 제 33 사단은 마침내 임펄의 입구인 비센풀 요새에 도달하였다. 이는 애당초 작전 완료일을 20일로 잡은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느린 진도였다. 그동안 몇차례에 걸쳐 33 사단장과 의견 대립을 겪은 무다구치는 사단장 야나다 중장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다나카 중장을 임명했다.
15사단의 야마우치 사단장 역시 해임되고 그 후임으로 시바다 중장이 임명되었다. 야마우치 중장이 해임된 이유는 그가 앓고 있는 폐병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평소에도 무다구치의 작전에 은근히 반대했다는 것과 제 15사단의 실적이 신통치 않다는 데 따른 문책 인사였다.
33사단은 소형 전차를 앞세워 요새를 돌파하고자 했으나 영국군의 화력 앞에 무산되고 말았다.
임펄의 고립 상태가 몇 주일간 계속되는 동안 영국군의 보급은 공수에 의해 유지돼 왔다. 4월 18일부터 영인군은 보급 강화를 위한 스태미너 작전을 개시했다. 하루 평균 148톤의 군수물자가 보급되었고, 6월 말까지 1만 2000명의 증원병과 1만 9000t의 물자가 공수되었다. 조립식 교량과 노새, 염소까지 낙하산으로 투하되었다.
4월 말이 되자 공수 보급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위된 영국군은 임펄에서 공세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탱크와 중포가 쉴사이 없이 불을 뿜고, 항공기들이 밤낮없이 상공을 맴돌았다.
우기가 시작되고 일본군의 보급은 완전히 끊어졌다. 노새와 가축까지 모두 잡아먹었지만 균형 잃은 식사 때문에 각기병에 걸려 쓰러지는 병사가 속출했다. 병사들은 풀과 달팽이를 먹기도 했다.
5월20일, 일본군은 비센풀 요새를 향해 총공세를 시작했다. 사단장 다나카 노부오 소장은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비센풀 요새를 점령할 것이며, 실패한 상태로는 결코 살아 돌아오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제 33사단의 요새 공격에 필수적인 화포 전력력은 150㎜ 유탄포와 100㎜ 산포 몇 문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영국군의 포화 앞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인간과 기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제 33사단은 자살과 다를 바 없는 육탄 공격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으며, 포병들은 근거리에서 사격을 받거나 착검한 보병들에게 공격을 당할 때까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돌격해 오는 연합군 중전차에 육탄 돌격을 감행하고 이불 속에 수류탄 여러개를 싸서 전차 밑으로 기어들어가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마침내 다나카는 비센플진지와의 언덕을 일본군의 시체로 메워 그것을 엄폐물로 삼아 진지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노일전쟁 당시의 노기 마레스께의 전법을 본딴 것이다.
그러나 비센풀의 방어진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돌격중 인도 병사
- 코히마 -
임펄 작전의 우익을 담당한 제 31사단은 임펄 북방의 코히마를 점령하여 임펄로의 증원군과 보급을 저지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코히마는 인구가 약 3천 남짓의 소도시로, 아삼 철도 디마풀 역까지 45마일이며 디마플과 친스키아방면에서 오는 도로가 합쳐져 임펄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따라서 코히마를 점령하여 임펄을 고립시킨 후 포위공격하면, 임펄 점령은 순식간이라고 일본군 수뇌부는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영국군도 코히마를 중시하고 있었다. 일본군 제 31사단의 움직임으로 코히마 점령 의도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 방면의 수비를 담당한 제 33군단장 스톱포드소장은 이 인도 동북부의 관문 코히마를 통해 일본군이 아삼주로 칩입할 계획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제 14군 사령관 슬림중장도 같은 생각이어서 스톱포드소장에게 코히마의 확보를 명했다.
죠세마 고지에 보급품을 하역하는 영국군
그러나 스톱포드 소장은 코히마 자체보다는 그 서쪽의 디마플, 임펄 가도의 갈림길에 해당하는 죠세마 고지에 중점을 두고 여기에 제 161여단, 제 2사단, 제 7사단, 제 33여단을 주력으로 하는 부대를 배치할 계획을 세웠다.
31 사단이 친드윈강을 건넌 것은 3월 15일이었고, 좌익의 미야자끼 지대(宮崎支隊)는 코히마를 향해 본대와 떨어져서 돌격했다. 미야자끼 지대가 코히마 외곽에 도달한 것은 4월 5일이었다. 잠시 휴식한 미야자끼 지대는 6일 새벽 4시 반에 코히마를 기습하였고, 코히마를 지키던 영국군은 자신들의 계산보다 2주일이나 빨리 일본군이 나타난 것에 당황하여 코히마에서 부근 고지로 철수했다.
스톱포드 소장은 별다른 수송수단도 없는 일본군이 이렇게 빨리 코히마에 나타난 것에 경악하고, 곧 제 161여단을 세거리 고지로 급파했고 나머지 병력도 모두 코히마로 보냈다.
한편 일본군은 '코히마 함락'의 소식을 곧장 발표하였으나, 연합군측의 로이터 통신은 즉각 '코히마,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라는 보도로 응수하였다.
일본군은 코히마 거리를 점령하였으므로 코히마 함락이라고 보도하였고, 영국군은 죠세마 고지를 확보하고 있는한 코히마는 아직 함락되지 않은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포위된 영국군은 날이 갈수록 주야를 가리지 않고 타작하듯이 강력한 포격을 퍼부었다. 반면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이 없는 일본군의 화력은 점점 약해졌다.
일본군은 매일 새벽 2시마다 벌이는 만세 돌격으로 이에 맞서 나갔다. 여러 중대가 이 공격으로 전멸되었다.
마침내 포위된 영국군의 식량과 탄약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수비대의 방어선은 계속 좁혀져 모든 방향에서 일본군에 공격받기에 이르렀다.
코히마 전투 - 일러스트

코히마 인근에서 탱크와 돌격중인 영국군 구르카
4월18일, 영국군 제 161여단이 디마풀 방면을 막고 있던 일본군 제 58연대 7중대를 전멸시키고, 보급로를 다시 연결하였다.
이제 영국군은 다시 아삼 철도를 이용하여 충분한 보급을 받게 되었다.
어쨌든 3면을 포위하고 있는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영국군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형국이었다.
5월13일, 제 31 사단장 사토 유끼나(佐藤幸德) 중장은 견디다 못해 무다구치에게 전력을 추스릴 수 있도록 일정 지역까지의 후퇴를 상신했으나 일언지하에 거부당했다. 사토의 철수 요구는 수차례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무다구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제 일본군은 포탄이 바닥나고 병사들은 굶주려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동안 영국군의 병력은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보급물자를 실은 수송기가 영인군 진지의 상공에 대편대를 이루어 왕래하는 모습이 일본군의 눈에도 띄었다.
몇차례에 걸친 보급 요구와 후퇴 상신을 거부당했던 15사단장 사토 중장은 마침내 6월 3일, 독단적으로 퇴각 명령을 내렸다.
사토 중장의 독단 후퇴에 충격을 받은 무다구치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1. 31사단의 최초 임무인 코히마 확보 명령을 철회한다.
2. 후미네로 식량을 추진하여 퇴각중인 31사단에 보급한다.
3. 31사단은 제 15 사단과 협력하여 임펄을 계속 공격한다.
그러나 사토 중장이 후미네에 도착했을 때, 여전히 아무런 보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격노한 사토는 다시 후미네에서 친드윈강까지 후퇴해 버렸다.
무다구치는 마침내 6월 20일, 사토 중장을 해임하고 후임으로 가와다(河田) 중장을 임명했다.
- 백골가도(白骨街道) -
15군 전체가 독안에 든 생쥐꼴이 된 상황에서, 무다구치는 여전히 "사수하라! 공격하라! " 등 조령모개(朝令暮改)식의 명령을 남발하였다.
무다구치는 7월로 접어들자 전선을 일일이 순시하기 시작하였고, 현상황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스틸웰 장군 지휘의 중국군 제 38사단과 제 20사단은 천천히 카마인에서 모가운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선발대인 제 5307연대는 5월 17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미티나비행장을 탈환했다. 이 보고를 접한 스틸웰장군은 즉시 P40전투기 40대를 전출시켰다. 윈게이트 부대는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보급로를 완전히 마비시켰다.
운남 방면의 제 18군 또한 모든 보급이 끊겨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7월 9일, 모든 부대에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굶주린 일본군은 철모, 모포, 소총, 수류탄 등 모든 물건을 내버리고 아라칸 산맥을 넘어 후퇴하였다. 영국군의 맹추격 속에 일본군은 군대로서의 통제력을 완전히 잃고 지리멸렬해버렸다.
전선을 유지할 때의 일본군은 굶주리더라도 그런대로 군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전면 후퇴시에도 후위부대를 번갈아 남겨두며 질서있게 후퇴할 작전을 세워두었으나, 1선부대가 떠나는 모습을 보자 전군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후위부대로 남아있어야할 부대조차 주력부대의 뒤를 따라 제멋대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영국군은 마음놓고 맹추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굶주림과 역병으로 길가에는 병자와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퇴각로를 따라 끝없이 계속되는 백골이 널린 이 처참한 광경을 일본군은 백골가도(白骨街道) 혹은 야스쿠니 가도(靖國街道)라고 불렀다.
영국군에게는 전염병이 전투보다 더 큰 위협이라, 추격군은 길가에 널부러진 일본군의 시체와 이질에 걸린 중환자들을 가솔린으로 소각해가며 천천히 진격하였다.
임펄 작전의 결과 일본군은 버마 전선을 유지할 능력을 상실하고, 버마 북부를 상실하게 되었다. 1944년 3월, 임펄 작전 시작시 22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던 버마 방면군은 종전시 총병력이 13만으로 절반가량 감소해 버렸다.

랑군으로 가는 길
- 후기 -
임펄 전투란 무다구치란 희대의 바보가 행한 헛짓거리에 지나지 않을까?
이건 사태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일본의 버마 방위전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항공기, 화력, 기동력, 보급력 등. 모든 부문에서 현저히 뒤떨어지는 일본군은 앉아서 망하느냐 뭔가 해보기라도 하느냐라는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보급에 대한 경시 내지 무시는 당시 일본군의 일반적인 성향이었다. 좋은 시절, 말레이 반도에서 싱가폴까지 내달린 야마시타 휘하의 일본군 또한 보급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때는 처칠 급여라고 부르는 영국군의 보급 물자 탈취와, 싱가폴의 손수운 항복으로 인해 그런 문제가 겉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 뿐이다. 중국 전선에서도 일본군은 보급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거기서는 현지 보급이라는 손쉬운 수단이 있었다.
현지 보급이 불가능한 태평양의 섬이나 정글에 고립된 일본군은 결국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싱가폴에서 항복한 영국군. 필리핀에서 항복한 미국군.
이 모든 것은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하는 연합군과 옥쇄와 죽음밖에 모르는 일본군의 차이뿐인 것 아닐까?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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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펄전투에 관한 논문을 써도 되겠다..
한가지 사건을 이렇게 진득하게 파는 지구력과 집중력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