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의 위대한 지도자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해 소련에서 추방된 후 각지를 전전하다 멕시코에서 자객의 도끼에 맞아 목숨을 잃게된다.

일찌기 레닌은 스탈린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그를 서기장직에서 몰아낼 것을 트로츠키에게 권유하였다. 이때 트로츠키는 공산당 서기장이라는 직위의 권력을 과소평가하고 그 제의를 거절했다. 스탈린은 관료들의 두목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을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전제 군주로 만든 것은 바로 그 관료들의 우두머리라는 직책에서 나온 힘 덕분이었다. 스탈린은 관료조직을 이용하여 행정적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공산당과 소련을 완벽히 손아귀 안에 움켜쥐게 되었다.

행정적 조치란 체포와 숙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숙청은 의심이라는 스탈린의 고질병에 의거해서 이루어졌다. 셀수 없을만큼 무수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던 스탈린은 급기야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1951년 여름 스탈린은 아폰에서 휴가를 즐겼다. 그는 언제나처럼 흐루시초프와 미코얀을 불러들여 말동무(?)를 삼았다. 미코얀과 흐루시초프가 정원을 산책하고 있을때, 마침 현관앞에 앉아있던 스탈린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도 안믿어. 나 자신까지도 안믿어."


스탈린의 의심증은 결국 자기 자신까지 믿지 못하는 경지(?)로 발전하고 말았던 것이다.



스탈린의 만찬과 휴가에 이어 스탈린의 의심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흐루시초프 회고록 일부를 요약 발췌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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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트로츠키




- 스딸린 동무의 보로실로프에 대한 의심 -

스탈린의 만년에 이르러 베리아, 말렌코프, 불가닌과 흐루시초프 이렇게 네사람이 스탈린과 만났다. 그중 불가닌은 이 측근들의 저녁 식사 모임에 항상 참석하지는 않았다.


스탈린이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허약해져간다는 것은 해가 갈수록 명확해졌다.

이것은 그의 흐릿해진 정신과 기억력 상실로 봐서 확실했다. 그가 건강하고 정신이 밝은 때는 아직 막강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는 급속히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스탈린이 언젠가 한번은 불가닌을 쳐다보고 무엇인가 말하려 했으나 그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스탈린은 그를 한참 쳐다보다가 말했다.

"저기 서있는 친구. 자네 이름이 뭐더라?"

"불가닌입니다."

"맞았어. 불가닌이야!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하려 했지."


스탈린은 이런류의 일이 일어날 때마다 매우 의기소침해졌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런 기억력 상실증은 더욱 빈번히 일어났고 그결과 스탈린은 거의 미친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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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노비치는 불가닌보다도 더 뜸하게 측근 모임에 참석했으며, 보로실로프는 거의 초대받지 못했다. 종종 보로실로프는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불쑥 이 모임에 끼어들었다. 때때로 그는 자기가 참석하겠노라고 미리 전화를 걸기도 했다. 결국 그는 그 자리에 한몫 끼지 못했다.

스탈린은 십년간이나 보로실로프를 영국의 첩자로 의심했었는데, 이것은 실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사람을 그토록 불신하자면 도대체 어디까지 못믿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와 수십년간을 같이 일하고 투쟁해왔던 것이다.

당의 입장과 노동 계급의 입장에서 볼때 보로실로프의 충실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국방 인민 위원회에서 그가 보여준 빈약한 준비성을 놓고 그가 부주의하고 태만스럽다고 평가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무엇이라고 평하건 간에 그는 충실하고 정직했다.

한번은 스탈린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도대체 보로실로프가 어떻게 정치국에 파고들어왔소?"

흐루시초프들은 대답했다.

"그가 파고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동무가 직접 그를 임명했습니다."

그후 베리아, 말렌코프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하며 스탈린이 어떻게 그런말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무척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 스딸린 동무의 몰로토프에 대한 의심 -

스탈린이 언젠가 내앞에서 몰로토프에 대한 그의 의심을 말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남부 지방에 있을때 스탈린은 갑자기 몰로토프가 미 제국주의자의 간첩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발단은 아마도 몰로토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워싱턴에서 뉴욕까지 기차로 여행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몰로토프가 기차로 여행했다면 틀림없이 자기 소유의 기차를 가졌을 것이라고 추리했다. 그가 기차를 가지고 있다면 그 돈은 어디서 났을까? 그러므로 몰로토프는 미국의 첩자가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스탈린에게 몰로토프가 해외에 나가있는 동안 개인 소유의 기차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기차가 민간 회사 소유라고 설명했음에도, 스탈린은 유엔에서 근무하는 비신스키에게 전문을 띄워 미국에서 몰로토프의 행적에 대해 모든 정보를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물론 비신스키는 몰로토프가 기차를 가지지 못했음은 물론 가질수도 없다는 점을 즉각 회신해왔다.


이것은 스탈린이 만년에 이르러 얼마나 정신적으로 혼란한 상태였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어쨌든 이와 같은 스탈린의 의심으로 인해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제 19차 전당대회 이래 살얼음판을 디디게 되었다. 스탈린은 그들을 정치국의 일원으로 기용하지 않을 때 벌써 그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9차 전당대회 이후에도 얼마간은 미코얀과 몰로토프는 계속 그들의 직책을 수행하였고, 스탈린의 만찬에 함께 어울리곤 했다. 그들은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어 허락을 얻는식의 구차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탈린이 크레믈린에 있는지 또는 별장에 있는지의 여부만 간단히 알아보고 나타났다. 그러나 스탈린이 그들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것은 분명하였다.

미코얀과 몰로토프는 단순히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해서 스탈린에게 필사적으로 접근하려 애썼다. 그들은 스탈린의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스탈린은 "그 두 녀석들은 이제 오지 말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참모들에게 몰로토프와 미코얀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밝히지 말라고 명령했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베리아, 말렌코프, 흐루시초프와 이건에 대해 상의했고, 흐루시초프들은 스탈린의 태도를 완화시키는데 힘쓰기로 합의했다.

따라서 여전히 스탈린이 별장에 가거나 영화관에 갈 때마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이 나타나게 되었다.


마침내 스탈린은 참모들을 조사했고, 그들이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스탈린은 누군가 첩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느날 그는 드디어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는 특정한 누군가를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고함치는 동안 주로 말렌코프를 노려보았다.

"자네들은 내가 자네들이 몰로토프와 미코얀에게 내 소재를 알려서 그들이 오도록 하는 짓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나? 당장 그만두게! 내가 있는 곳을 그들에게 알리지 말란 밀이야. 다음번에는 용서하지 않겠어."


결국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스탈린의 모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 등장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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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리아(Lavrenty Pavlovich Beria) -

베리아는 스탈린과 같은 그루지야 출신이다. NKVD의 수장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베리아는 훗날 반역자란 죄명으로 흐루시초프에 의해 숙청되었다. 그는 스탈린 시대에 행해진 숙청의 책임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전임 NKVD 수장인 예조프가 일으킨 대숙청을 멈춘것은 바로 베리아였다.

스탈린이 예조프를 제거하기 위해 그를 모스크바에 데려갈 때까지 그의 경력은 그루지아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는 처음에 당기구에서 일했으며, 다른 그루지아인을 상대로 음모를 꾸며 크레믈린 최고의 밀고자이자 심문관으로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게된다.

베리아는 스탈린 시대의 정치국에 가장 늦게 입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는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스탈린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을 품도록 하였다. 2차대전 이전 그는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인 국가보안당국의 책임자가 되었다.

베리아는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숲에서 폴란드 장교들을 대학살한 장본인이었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자 스탈린은 베리아를 몰로토프, 보로실로프, 말렌코프와 함께 국방 인민 위원으로 임명하여 국내 정책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독일군의 진격중 베리아는 산업 시설 철거와 재정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2년후 독일군이 퇴각할 때에는 해방된 지역의 복구를 담당한 말렌코프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다음날 스탈린은 베리아에게 핵개발을 추진하도록 명령했다. 이 프로젝트는 1949년 7월 카스피해와 아랄해 사이의 사막에서 핵폭발 실험이 성공함으로써 훌륭히 완결되었다.

베리아는 간혹 흐루시초프에게 대들곤 했다. 베리아와 말렌코프는 1951년 흐루시초프의 농업 도시 방안을 공격했다.

베리아는 음모의 거장이었지만 동료들 앞에서 자신의 권력과 야망을 지나치게 과시했고, 이것이 파멸의 원인이 되었다.

스탈린도 만년에 이르러서는 베리아를 의심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완가 흐루시초프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지 한달도 되기 전에 베리아를 숙청하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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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렌코프(Georgy Maksimilianovich Malenkov) -

스탈린은 종종 말렌코프를 '줏대없는 서기'라고 경멸했지만 말렌코프는 총명한 두뇌와 능력, 끈기와 야망을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떠들썩한 시골뜨기 흐루시초프보다 훨씬더 자기의 배경과 수법을 잘 이용했다. 1948년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사망하자 말렌코프는 명실상부한 소련의 2인자가 되었다.

말렌코프는 분명히 스탈린의 후계자로 널리 인정받았다. 1952년 제 19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말렌코프로 하여금 자기 대신 일반 보고를 하도록 지명하였다. 이것은 후계자로서 말렌코프가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스탈린 사망후 잠깐동안 말렌코프는 서기장과 수상을 역임했다.

그러나 1955년 흐루시초프의 책략에 의해 불가닌에게 수상 직위를 빼앗겼고, 이후 흐루시초프에 대항하기 위해 스탈린주의자들과 제휴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 1957년 이후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

1년후, 흐루시초프는 말렌코프가 전쟁 기간 동안 아무런 한일이 없으며 1949년 벌어진 레닌그라드 숙청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뿐 아니라 심지어 반당 음모에 가담했다고 비난하였다.

결국 말렌코프는 카자흐스탄의 한 벽촌 발전소 지배인으로 쫓겨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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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코얀(Anastas Ivanovich Mikoyan) -

서방 세계에 소련의 가장 유능한 외교관으로 알려진 엄격하고 교활한 아르메니아 출신의 정치가이다. 그는 스탈린 치하에서 살아남은 가장 우수하며 독특한 인물이다.

1915년 볼셰비키에 가입했고, 혁명후 카프카즈에서 백군과 싸우다 포로가 된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것은 이후 스탈린의 의심을 받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6년 정치국의 후보 당원이 되었고, 그해에 국내 무역 담당 인민 위원으로 지명되었다.

1936년 식량 증산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였고, 1959년 재차 미국을 방문하여 양국간의 무역을 개시하자고 역설하였다.

미코얀은 반당 그룹으로 몰려 실각한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의 원로그룹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흐루시초프가 실각한 1년후 은퇴하여 정치 무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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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로토프(Vyacheslav Mikhaylovich Molotov) -

몰로토프는 부르조아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로서 말더듬이에 코안경을 쓰고 언제나 점잔을 떨고 다녔다.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레닌과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등이 해외로 망명을 떠나 있는 동안 페트로그라드 당을 지켜나갔다.

레닌은 한때 그를 가르켜 "러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서류 정리가"라고 불렀으며, 트로츠키는 "평범한 인간의 화신일 따름"이라고 비난하였다.

2월 혁명으로 짜르 체제가 붕괴되었을 때, 몰로토프는 27살에 불과하였다.

스탈린의 측근이 된 그는 곧 '스탈린의 망치'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다.

스탈린은 반대파를 몰아내고 자기 세력을 구축하는데 몰로토프를 이용하였다. 몰로토프는 맨셰비키 숙청에 앞장섰으며 1926년에는 보로실로프와 함께 레닌그라드의 지노비예프파를 숙청하였다.

1939년 그는 수상 자리를 스탈린에게 넘겨주고, 외상이 되었다. 외상으로 그의 첫번째 임무는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만년 미국 정부의 첩자라는 의심을 받아 곤경에 처했지만, 여전히 몰로토프는 확고한 스탈린주의자였다.

스탈린 사망후 몰로토프는 사사건건 흐루시초프와 대립했다. 그는 티토와의 화해에 반대했으며 1956년에는 폴란드 반란에 대한 신중한 정책에 반대했다.

흐루시초프는 1957년 몰로토프를 카가노비치, 말렌코프와 함께 당의 적으로 몰아붙였으며, 특별히 몰로토프는 반당 그룹의 두뇌로 낙인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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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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