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주로 스탈린의 우스꽝스러운 면모에 대한 포스팅을 해왔는데, 이번에는 인간백정이라 불리게 된 스탈린의 진면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1930년대는 대숙청(Большая чистка)의 시기로 간단히 정의내릴 수 있는데 대숙청은 1936년 9월 하순부터 1938년 12월까지 내무인민위원을 맡았던 예조프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1927년 야코프 블룸킨의 처형으로 시작된 대숙청은 1930년대의 농업집단화 강행으로 이어졌고, 1934년 12월 키로프 암살사건으로 폭발적으로 가속화되었다. 특히 이 기간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조직은 군부였는데 모든 군관구 사령관, 군관구 참모장 및 대리의 90%, 군단 및 사단장의 80%, 참모장교 및 참모장의 90%가 숙청되기에 이르렀다.


대숙청에서 스탈린의 충견 노릇을한 내무인민위원회(NKVD, 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т Внутренних Дел)는 소비에트 연방내의 치안과 소방을 담당하는 부서로서 1918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NKVD하면 떠오르는 무시무시한 보안임무가 처음으로 부여된 것은 1922년 2월로, 1917년 12월에 창설되어있던 소비에트연방 비밀경찰조직 체카(ЧК)가 내무인민위원회 산하 게빼우(ГПУ)로 재편되고나서부터이다.

비밀경찰조직은 1923년에 다시 분리되어 오게빼우(ОГПУ)라는 독립기관이 되었으나, 이후 스탈린은 소비에트연방의 행정조직 개편을 단행하며 오게빼우를 국가보안총국(ГУГБ)으로 재편하며 이를 다시 내무인민위원회 산하로 편입시켰다.



드디어 전율끼치는 공포의 조직이 완성된 것이다. 

대숙청기 NKVD에서 스탈린의 충견 노릇을 톡톡히 한 것은 아래의 유명한 세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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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리흐 야고다(Genrikh Yag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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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예조프(Nikolai Yezh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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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프렌티 베리아(Lavrentiy Beria)



위의 인간들은 매번 후임자가 전임자를 숙청하는 먹이사슬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중 가장 뛰어난 숙청의 달인은 피의 난장이로 불린 예조프였다.

예조프의 예술적인 경지에 이른 숙청술로 인해 예조프시치나(Yezhovschina)라는 신조어가 탄생되었다. 광란의 예조프시치나가 휩쓴 이후 당과 정부의 지도급인사, 스탈린의 반대파뿐만 아니라 스탈린을 충실히 지지한 인사들도 다수 휩쓸려 사라졌으며, 군부도 막대한 타격을 받아 2차 세계대전 초기 소련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한 원인이 된다.

스탈린은 사냥개들의 대활약으로 명실상부하게 당과 정부 그리고 군부와 국가 전체를 완벽히 장악한 전제군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아래의 글은 대숙청기의 일상적인 업무지령중 하나이다.


소련 내무인민위원 니콜라이 예조프의 업무지령 00447호(1937년 7월 30일)

반소비에뜨 형성 사건들에 관한 심리 자료들에 의해 이전에 탄압을 받았거나 탄압을 피했거나 수용소, 유형, 노동부락에서 도망쳐 나온 과거 꿀라끄들 중 상당수가 농촌에 정착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과거에 탄압을 받았던, 수많은 교회파 교도와 분리파 교도들, 예전에 반소비에뜨적인 무장 연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자들이 정착을 했다.

반소비에뜨적인 당의 주요 요원들, 사회혁명당원들, 다쉬낙쭈쮼(아르메니아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반혁명당) 당원들과 예전의 반혁명도당적 봉기의 참가자들, 백군들, 징벌대원들, (본국송환) 귀환자 등의 요원들까지도 농촌에서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다. 위에서 열거된 분자들의 일부는 농촌에서 도시로 떠나면서, 산업화의 공장과 수송(대열), 건설 분야에 침투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사범에 속하는 주요 인사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농촌과 도시에서 둥지를 틀고 있다.

확인된 바와 같이, 이 모든 반소비에뜨 분자들은 수송부문이나 몇몇 공업화 지역, 또는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에서 발생하는 온갖 종류의 반소비에뜨적이며 교란적인 범죄를 선동한 주요 인물들이다.

국가적인 안보 기관들 앞에는 하나의 임무가 제시되고 있다.―가장 가차 없는 형태로 반소비에뜨적인 분자들의 모든 도당들을 파괴해야 하며 그들의 반혁명적인 음모로부터 근면한 소비에뜨 인민을 보호해야 하며, 종국에는 소비에뜨 국가 원칙에 반하는 그들의 비열하고 파괴적인 활동을 단번에 종식시켜야 한다.



이에 따라 다음을 명령한다.


1937년 8월 5일부터 모든 공화국과 지방, 주(州)에서 예전의 꿀라끄들과 적극적인 반소비에뜨 분자들과 형사범들에 대한 탄압과 관련된 업무를 시작해야한다. 

업무를 조직하고 실행함에 있어 다음을 따라야 한다:



I. 탄압 대상 인원

1. 형기를 끝내고 돌아왔거나 적극적으로 반소비에뜨적인 파괴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예전의 꿀라끄들.
2. 수용소와 노동부락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예전의 꿀락들과 재산몰수를 피했던 꿀락들.
3. 빨치산적, 파시스트적이고 테러적이며 반혁명도당적인 조직을 꾀했거나, 형기를 마쳤거나, 탄압을 피했거나, 감금 지역으로부터 도망쳐 나왔거나, 반소비에뜨적인 범죄적 행동을 재개하는 예전의 꿀락들과 사회적으로 위험한 분자들.
4. 반소비에뜨 당원들(사회혁명당원들, 다쉬낙쭈쮼 당원들), 탄압을 피했거나 감금 지역에서 도망쳐 나왔거나 적극적인 반소비에뜨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예전의 백위군들, 헌병들, 관리들, 징벌대원들, 반혁명도당의 당원들, 반혁명도당의 공범자들, 본국에 다시 복귀한 이민자들.
5. 심리되고 확인된 첩보 자료들에 의해 폭로된 (자들로서), 현재는 소탕된 까자끄―백군 빨치산을 조직하고 파시스트적이고 테러적이며 스파이적―교란적인 반혁명적인 행위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가한 자들. 현재 감시 아래서 그러한 사건들과 관련된 심의는 끝났지만 아직까지 심의 기관들에 의해 조사가 완료되지 않은 사건들을 유지하고 있는 이 범주에 속하는 분자들도 탄압해야 한다.
6. 현재 감옥이나 수용소, 노동 부락, 특수 거류지등에 있거나 그곳에서 적극적인 반소비에뜨적인 파괴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예전의 꿀락들, 징벌대원들, 반혁명도당 당원들, 분리파의 활동분자들과 교회파 교도 등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반소비에뜨 분자들.
7. 형사범들.
8. 현재 농촌 지역―집단 농장, 국영 농장, 농업 회사에서―과 도시 지역―공업 및 무역 회사, 수송, 소비에뜨 기관과 건설 분야에서―에 있는 위에서 열거된 모든 대상을 탄압해야 한다.


II. 탄압 처벌 방법과 탄압해야 하는 인원에 관하여

1. 탄압받은 모든 꿀락, 형사범 등의 반소비에뜨 분자들은 두 범주로 나누어진다. а) (위에서) 열거된 분자들 중에서 가장 적의를 지니고 있는 모든 분자들이 첫 번째 범주에 속한다. 그들은 즉각 체포해야 하고, 3인 위원회의 조사에 의거 총살에 처해야 한다. 그 밖에 남아 있는 자들로, 상대적으로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악의를 지니고 있는 모든 분자들이 두 번째 범주에 속한다. 그들을 체포하여 8-10년간 수용소에 감금해야 하지만, 그들 중 좀 더 악질적이고 사회적으로 위험한 자들은 같은 기간동안 3인 위원회가 지정한 감옥에 감금해야 한다.
2. 공화국들의 내무인민위원부의 인민 위원들과 내무인민위원부의 지역 및 주 관리국의 책임자들에 의해 제출된 숙고된 증거들에 따라 이후 탄압할 인원이 정해진다.
3. 확인된 숫자는 개략적인 것이다. 그러나 공화국들의 내무인민위원부의 인민 위원들과 내무인민위원부의 지역 및 주 관리국의 책임자들에게는 독자적으로 그것을 초과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자의적으로 숫자를 늘리는 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허용되지 않는다.  숫자를 줄이는 것, 마찬가지로 첫 번째 범주에 따라 탄압해야 하는 사람을 두 번째 범주로 바꾸거나 그 반대로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4. 첫 번째와 두 번째 범주에 의해 탄압을 받은 사람들의 모든 가족들을 체계적으로 감찰해야만 한다.


III. 업무 수행 순서

1. 1937년 8월 5일부터 업무를 시작해서 4개월 동안에 끝마친다.
2. 첫 번째 범주에 속하는 자들에 대한 탄압을 가장 먼저 수행한다.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인원은 특별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탄압해서는 안 된다.

소비에트 연방 내무 인민위원 니콜라이 예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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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부하린(Nikolai Ivanovich Bukharin, 1888 ~ 1938)이 1938년 3월 15일 소비에트 연방 전복음모, 자본주의 부활 기도, 독일의 간첩 혐의 등으로 공개 총살형을 당하기 이전에 스탈린에게 보낸 비밀편지로서, 복잡한 내면의 감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1988년 2월 4일 소련 최고 법원의 결정에 의해 복권되었다. 



부하린이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1937년 12월 10일) 

누구도 스딸린의 허락 없이는 이 편지를 열람할 수 없음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이 편지는 내가 죽기 전 자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군. 그래서 내가 죄수이지만 이 편지를 쓰게 해 달라고 자네에게 요청했던 걸세. 이 편지를 혼자서 자네에게 쓰게 된 이래로 더욱 그렇다네. 이 편지가 남겨지느냐 아니냐는 자네 손에 전적으로 달려있을 테지.

나는 이제 나의 드라마, 아마도 내 인생의 마지막 장에 도달한 것 같군 그래. 나는 펜과 종이를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했다네. 이 편지를 쓰면서 내면의 온갖 동요와 감정으로 인해 몸서리를 쳤고 좀처럼 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네. 하지만 내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기에 나는 미리 작별인사를 하고 싶은 거라네. 바로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늦기 이전, 즉 내 머리가 아직 돌아가고 있을 때 말이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사회에 관한 얘기부터 해 볼까 하네.

가. 내가 자백했던 것을 철회할 생각은 없네.
나. 이와 관련해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로부터 나를 빼내달라고 자네에게 요청하거나 간청할 생각도 없네. 하지만 나는 자네가 개인적으로 참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네. 나는 이 마지막 몇 마디의 구절을 쓰지 않고서는 내 생을 마감할 수 없네. 왜냐하면 나는 자네가 알아야 하는 고통의 손아귀에 놓여있기 때문이지.


1) 위기 일보 직전에 서서, 막다른 처지에 놓여,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명예롭게 다음과 같이 자네에게 말하겠네: 나는 조사에서 자백했던 그러한 범죄들을 짓지 않았다.

2) 내 맘 속을 정리하면서 할 수 있는 한 나는 이미 중앙위원회에서 말했던 것에 다음사항을 첨부하겠네.

가. 나는 누군가 무엇인가를 고함쳤다고 말하는 사람한테서 이야기를 들었네. 내가 보기에 그것은 꾸즈민으로 보이지만 나는 그것에 그다지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네. 그것은 나의 주목조차 끌지 못했네.

나. 우리가 길에서 걷고 있을 때 아이헨발뜨가 지나가면서 내가 전혀 알고 있지 못하는 회의에 대해 말했다네. 나는 류찐의 강령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네. 도당은 모였고 보고서는 읽혀졌네. 그러한 종류의 어떠한 것들 말이지. 그래 그렇다네. 나는 집단에 대해 섭섭함을 느끼면서도 이 사실을 숨겼다네.

다. 나는 또한 1932년 나의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표리부동한 자세를 취했다네. 그렇게 해서 내가 그들을 정말 당에 모두 귀속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을 당에서 축출했을 것이네. 이렇게 말하면 내 양심이 아주 깨끗해지겠지. 어떠한 반역도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났어도 나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네. 그래서 중앙위원회에서 나는 진실만을 말했지만 아무도 나를 믿지 않았네. 이제 이 편지에서 완전한 진실을 말하겠네: 지난해 내내 나는 진정으로 당 노선을 따랐고, 자네를 소중하게 여기는 법도 배웠다네.

3) 나는 비난과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확인하고 그것들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해.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진정할 수 없었을 거야.

4) 관계가 없는 요소들 그리고 위의 주장 3번과는 별도로 나는 얼마간 조국에서 진행 중인 다음 개념을 생각해보았네.
일반 숙청에 대한 정치적 사고에 관해서는 위대하고 철저한 점이 있다네. 그것은 전쟁이전 상황과 연결되어 있고 민주주의로의 이행과도 관련이 있네.

이 숙청은
첫째, 죄가 있는 자들
둘째, 의심을 받는 자들
셋째, 잠재적으로 의심의 대상이 되는 자들.

이 작업은 나 없이는 제대로 행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네. 몇몇은 이렇게 무력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이와는 다르게 무력하게 되게 되지. 그리고 제3의 집단은 여전히 다른 방법으로 무력화되지. 이 모든 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서로서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사실이고 그렇게 하면 서로간의 불신이 발생하게 되지. 내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하는 거라네. 나는 나를 중상 모략한 라덱을 공격했고 그리고 나서 내 스스로 그의 전철을 밟게 되었네. 이렇게 해서 지도부는 자체적으로 완전한 결속에 이르게 되었지.

제발, 내가 비난이나 심지어 나의 속생각에 연연해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게. 나는 갓난아기가 아니네. 나는 위대한 계획, 위대한 사상, 위대한 이해관계가 모든 것을 선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내 개인적 질문을 자네의 어깨에 놓인 우주적-역사적 과업과 동일하게 간주하는 행위가 대범치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네. 하지만 여기서 나는 가장 슬픈 고뇌와 스스로 슬픈 고통의 패러독스에 직면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네.


5) 자네의 생각이 정확히 이 길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내가 절대적으로 확신했다면 내 마음이 훨씬 더 편안했을 텐데. 글쎄,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만약 그것이 틀림없었다면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게! 하지만 나를 믿게나. 나는 내가 이 모든 죄에 책임이 있고, 이 모든 공포에 대해 진정으로 비난받아야 한다고 자네가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면 심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하네. 이런 경우에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 되겠는가? 그것이 내가 당에서 많은 사람들을 축출하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내가 알면서도 악마의 행위를 했다는 말이 되는가? 그런 경우에 이러한 행위는 절대 정당화될 수 없지. 머리가 매우 혼란스럽군. 마음껏 고함을 치고 싶다네. 머리를 벽에 부딪치고도 싶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6) 나는 누구에게도 손톱만큼의 악의를 품었던 적이 없으며, 그다지 독하지도 못하다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핑계를 가지고 있지. 내가 공격을 했던 그 시절에 대한 보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만약 자네가 어쩌면 잊어버렸을 테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한 가지 사실에 가슴아파했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한다면. 일단 1928년 여름에 나는 자네의 거처에 있었지. 그리고 자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네: 왜 내가 자네를 내 친구라고 생각하는지 자네는 아나? 무엇보다도 자네는 아무런 음모를 가지고 있을 수 없을 테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나도 대답했네, 나도 그렇지 못하다고. 당시에 나는 까메네프와 친하게 지냈지. 믿든 안 믿든 이 사실은 유태인의 원죄처럼 내 맘속에 각인되었네. 오! 얼마나 내가 어린애였는지. 얼마나 바보였는가! 내 명예와 목숨을 걸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네. 이것에 대한 거라면 날 용서하게. 꼬바. 글을 쓰면서 울고 있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네. 자네 스스로 내가 이글을 쓰면서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단지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네. 최후의 작별인사를 해야겠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았네. 당, 국가지도부와 심문자들 그리고 다른 누구에게도 말이지. 용서를 구하네. 내가 비록 이미 상황을 다시 돌릴 수 없을지라도 말이지.

7) 환각상태에서 자네와 자네의 죽은 아내를 보았네.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하더군. "그들이 당신에게 무슨 일을 한거죠? 니꼴라이 이바노비치? 난 스딸린에게 당신을 풀어달라고 말할 거예요."

너무 사실 같아서 나는 껑충 뛰면서 자네에게 편지를 써서 풀어달라고 요청하려고 했네. 현실과 망상이 온통 뒤섞여 있다네. 자네의 죽은 아내는 내가 자네에게 악의를 품었다고 믿지 못할 거라는 걸 난 알고 있네. 내 초라한 자아의 잠재의식이 나에게 이런 망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몇 시간동안 애기했지. 자네와 나.

오 신이시여! 자네가 내 영혼이 온통 망가져 열려져 있다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스쩨쯔끼 혹은 딸과 같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내가 자네에게 신체적으로 그리고 심적으로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자네가 볼 수만 있다면.. 심리적인 것이 중요하지. 날 용서하게. 어떤 천사도 아브라함의 손에서 검을 빼내가기 위해서 나타나지는 않겠지. 나의 끔찍한 운명.


8) 마지막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조그만 요청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게.

가. 재판을 거치는 것보다 죽는 게 수 천 번 낫겠지. 어떻게 내 자신을 통제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 천성을 알아라: 나는 당 혹은 소련의 적 어느 쪽도 아니네. 나는 힘이 닿는 한 당의 대의를 위해 봉사했다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 힘은 보잘 것 없는 것이며 무거운 감정이 내 맘속에서 북받쳐 오르고 있네. 그래서 내 무릎을 꿇고 치욕이든 아니든 자네에게 재판만은 피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다네. 하지만 아마 자네에게 요청하는 게 불가능할지도 모르지. 가능하다면 재판 전에 죽게 해주게. 물론 자네가 그 문제들을 얼마나 힘들게 바라볼지 난 알고 있지만 말일세.

나. 내가 사형을 받는다면 사전에 간청하지만 총살형에는 처하지 않게 해주게. 대신 내 방에서 독약을 먹게 해주게. 모르핀을 맞게 허락해주게. 나에게 이 점은 정말 중요하네. 자네에게 이런 행위를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겠네.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정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할 것이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마지막 순간을 즐기도록 해주게. 동정심을 가지게. 확실히 자네는 날 이해하네. 자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어떨 때는 내가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것처럼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네. 다른 때는 여느 일반인과 같이 혼동 속에 있는 날 발견하고 축 처지게 되지. 만약 사형이 언도되면 모르핀을 맞게 해주게. 부탁이네.

다.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주게. 딸에게는 할 필요가 없다네. 미안한 감정뿐이네. 내 첫 번째 부인과 아버지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 되겠지. 다른 한편으로 내 두 번째 아내는 젊다네. 그녀는 살아남을 거야. 그녀와 몇 마디 말을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네. 그녀를 재판 전에 만나도록 허락해주게. 내 주장은 다음과 같네. 만약 가족들이 내가 자백한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예기치 못한 일이라고 생각해 자살을 할지도 모르네. 어떻게든 그들로 하여금 이에 준비를 하도록 나는 해야겠네. 나에게 그것은 사건의 이해관계와 공식적인 설명인 것처럼 보이네.

라. 예상과는 다르게 내가 살아남는다면 우선 아내와 그것에 관해 토의해봐야겠지만 나는 다음을 말하고 싶군. 날 몇 년 동안 미국으로 추방해주게. 나는 재판에 옹호적인 주장을 펴겠네. 뜨로쯔끼와 싸울 것이며 흔들리는 많은 지식인들을 돌려놓겠네. 그리고 반뜨로쯔끼주의자가 되어 대범하고 열정적으로 내 임무를 수행하겠네. 자네는 체카요원을 나와 함께 동행시켜도 되네. 그리고 덧붙여 말하지만 내 아내를 6개월 동안 여기에 구류시켜도 좋다네. 내가 진정으로 뜨로쯔끼와 그 지지자들을 공격한다는 것이 입증될 때까지 말이야.

하지만 자네의 마음에 조금의 의심이라도 있다면 나를 뻬초라 혹은 꼴릐마에 있는 수용소로 추방하게. 적어도 25년 동안 말이야.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세울 수 있을 거야. 대학교, 현지문화박물관, 기술양성소, 그리고 학원과 미술갤러리. 문화지학박물관, 동ㆍ식물학 박물관, 신문 및 잡지 열람실.

요약하자면 내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면서 나는 개척적인, 도전적인 문화사업을 펼칠 수 있을 거야. 어쨌든 내가 보내지는 어느 곳에서도 정력가로 일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바네. 하지만 사실 나는 여기에 큰 희망을 걸지 않고 있다네. 2월 전체회의의 지침이 변화했다는 사실 자체가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상황이 재판이 지금 언제라도 열릴 수 있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나의 마지막 요청사항들이네. 한 가지 더 말하면 내 철학적 작업에 더 많은 신경을 썼지.



스딸린!

자네는 수많은 능력 있는 참모들 중에서 진정으로 자네에게 헌신했던 사람인 나를 잃었네. 하지만 그 모두가 지나갔지. 바르끌리 드똘리가 반역죄의 혐의를 받은 뒤 알렉산더 1세가 위대한 조력자를 잃었다고 맑스가 썼던 것을 기억하네. 이 모든 것을 회고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 하지만 정신적으로 눈물로 얼룩진 속세에서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네. 자네와 당 그리고 대의 모두에 대해서 위대하고 끝없는 사랑만이 내 안에 존재해 있다네. 인간적으로 가능한 그리고 불가능한 모든 것을 하고 있지. 이 모두에 대해서 자네에게 썼다네. 모든 t자들에 횡선을 긋고 모든 I자들에 점을 찍었네.

나는 내일 그리고 내일 모레 어떤 상황에 처해질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사전에 이 모든 것을 했지. 엽맥이 되어서 나는 그러한 보편적 무감각에 젖어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 두통과 내가 흘리는 눈물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를 쓰고 있네. 꼬바 자네 앞에서 내 양심은 깨끗하다네.

마지막으로 자네의 용서를 구하는 바네. 이런 이유로 진정으로 나는 자네를 내 맘속에 포옹하고 있다네.

잘 있게. 그리고 불쌍한 부하린을 잘 기억해주게.

# 물론 위의 눈물나는 탄원은 스탈린에게 있어서 가벼운 농담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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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의 절정기인 1939년 1월 10일 공포된 스탈린 명의의 이 명령문에는 '반혁명주의자'에 가하는 내무인민위원회의 고문에 대한 옹호가 드러난다. 


체포된 자들을 고문하는 문제에 대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명령문 (1939년 1월 10일)

내무 인민위원회의 관례에 따라, 체포된 자들을 고문하는 것에 관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명령문.
주위원회, 지방위원회 비서, 각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내무부 인민위원과 내무 인민위원회 치안청장들에게.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주위원회, 지방위원회의 비서들이 내무 인민위 치안청 요원들을 조사하면서 그들에게 인질에 대한 고문의 사용을 마치 범죄인 듯 그들의 죄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내무 인민위원회의 관례에서 고문의 사용은 허가되었으며, 고문은 특히 인도적인 심문방법을 이용하여 파렴치하게 공모자들을 말하지 않고, 몇 달에 걸쳐 진술을 거부하고 체포되지 않은 공모자들의 폭로를 방해하려하는, 즉 감옥에서조차 소비에뜨 정권과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민중의 분명한 적들에 대해서는 예외로써 사용되어야함을 설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경험은 그러한 우리의 입장이 나름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으며, 민중의 적을 적발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실제 고문의 사용은 자코프스키, 리트빈, 우스펜스키와 같은 자들에 의해서 악용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방법을 예외에서 규칙으로 바꾸었고, 그것을 우연히 체포된 양심수들에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응당한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옳게 사용되는 한 이 방법은 조금도 그 정당성을 훼손당하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모든 부르주아 첩보기관들은 고문을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를 대하는데 사용하였다. 게다가 가장 추한 형태로 말이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왜 사회주의적 조사가 용서할 수 없는 민중의 적, 농민들의 적인 열광적인 부르주아 요원들을 대하는데 더 인도적이어야만 하는가이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고문의 방식이 이제부터는 예외에 한해서, 즉 민중의 명백한 적들, 무장하고 있는 적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가장 올바르고 적절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내무 인민위 치안청 요원들이 조사에서 실제 사실에 의거하기를 주위원회, 지방위원회, 각국 공산당의 비서들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스딸린.




# 니콜라이 예조프(Nikolai Yezhov, 1895~1940)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생의 예조프는 기초적인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09년부터 1915년까지 재단사의 조수일과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15년에서 1917년의 2년간 러시아군에 복무하였고, 1917년 3월 5일, 비테프스크에서 볼셰비키에 가입하게 된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의 내전기에 그는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싸웠다.

1922년 2월 이후, 예조프는 여러지역 인민 위원회의 당비서를 역임하며 정치가로 변신했다. 1927년에는 공산당 내 배급과 관련된 부서에서 핵심실세로 근무했으며, 1929년부터 30년까지는 농업담당 인민지도원 대리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1930년 11월에는 공산당내 여러 부서의 부서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공업 및 인사, 특수업무에 관련된 부서들이었다.

1934년, 그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다음해에는 중앙위원회 당비서가 되었다.

이후 1935년 2월부터 1939년 3월까지는 당기구통제위원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니콜라이 부하린이 저술한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Letter of an Old Bolshevik, 1936)'라는 회고록에 보면 예조프에 대한 동시대의 인식이 잘 드러나있다.

내 평생에 예조프만큼 혐오스러운 작자는 보지못했다. 내가 그를 쳐다볼때면 난 항상 라스테라예바 거리 광장에서 파라핀에 적신 종이를 고양이의 꼬리에 묶고 불을 붙여놓은뒤 겁먹은 동물을 보며 즐거워하는 악동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예조프 역시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외양만 틀릴뿐 지금 역시 그것과 다를바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조프는 키가 매우 작았기 때문에 독의 난장이(The Poisoned Dwarf) 혹은 피의 난장이(The Bloody Dwarf)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졌다.

예조프는 1936년 9월 26일, 야고다가 실각한 이후 그 뒤를 이어 내무인민위원(People's Commissar for Internal affairs), 최고간부회의 중앙수석위원회 회원을 겸직하고 스탈린의 충견으로서 무자비한 대숙청을 가속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군부와 정치국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수천명 이상을 반역죄로 몰아 숙청하였다. 또한 NKVD 내부의 숙청도 빼놓지 않았는데 이렇게 숙청당한 요원들 중에는 전임자인 야고다가 임명한 인물뿐 아니라 예조프 스스로가 임명했던 인물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예조프의 일처리방식은 '무고한 사람 10명이 숙청되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라는 식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예조프도 1938년 이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스탈린은 대숙청을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그동안 충직한 사냥개로 일해온 예조프를 토사구팽하기 위하여 고향인 그루지아에서 음모의 달인 베리아를 데려왔다. 베리아는 1938년 8월 22일 내무인민위원회에 입성하였다.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1938년 11월 11일 중앙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과거 NKVD가 범한 여러 과오를 들어 예조프를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1938년 11월 25일, 예조프는 내무인민위원직을 제외한 나머지 업무에서 사퇴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베리아가 내무인민위원직을 가로챘다.

1939년 3월 3일, 예조프는 소비에트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모든 직책에서 쫓겨났으며 1939년 4월 10일, NKVD에 연행되어 수하노프카(Sukhanovka)감옥에 수감되었다.

예조프는 스탈린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고 자백한다면 명예로운 죽음을 당할 기회를 주겠다는 베리아의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즉결 재판이 열려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1940년 2월 4일, 총살된 예조프는 뼛가루로 변해 돈스코이 공동묘지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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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사진 왼쪽부터 몰로토프, 스탈린, 예조프 - 이후 조작된 우측 사진에서는 예조프가 쫓겨났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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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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