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을사건(海軍乙事件)이란 1944년 3월 31일, 연합 함대 사령장관 고가 미네이치 해군 대장이 탑승기의 추락에 의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舊일본 해군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탑승기 격추 사건을 해군갑사건(海軍甲事件)이라 하고, 이 사건을 해군을사건(海軍乙事件)이라고 불렀다.


古賀峯一


1944년 2월의 트럭섬 대공습 후, 연합 함대는 새로운 거점으로 팔라우를 이용하고 있었지만 역시 3월에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다.

3월 29일, 대본영은 연합 함대에 미군의 수송 선단이 아드미라르티 군도의 북방을 향하고 있다라는 정보를 보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미군은 어딘가에 상륙 작전을 감행할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나 방면으로는 적이 상륙해올 낌새가 없었으며, 초계기를 아무리 날려도 적의 수송함대는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군의 수송선들은 서부 뉴기니로 향하고 있다고 단정지어졌다.

고가 사령장관은 미군이 뉴기니를 상륙할 경우에 대비해 세워둔 기존의 작전 계획에 따라 즉시 연합함대 사령부를 다바오로 옮길 것을 명령하였다.

 

3월 30일 밤 9시 55분, 고가는 2식비행정(二式飛行艇)을 타고 다바오로 향했다. 바로 참모들이 탄 2번기도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물론 이것뿐이라면 매우 간단한 사건이겠지만, 이 배후에는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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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式飛行艇(Kawanishi H8K)

태평양전쟁 초기 바탄반도에서 저항하던 미군이 항복함으로써 필리핀의 전투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지만, 맥아더의 필리핀 극동군(USAFEE)은 아직 살아남아있었다. 바탄반도 전투가 끝난후 탈출한 미군 장병들을 중심으로 필리핀 전역에 게릴라 부대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는 10만명의 게릴라가 있다면 향후 필리핀 탈환작전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는데, 실제로는 필리핀 극동군에 등록된 인원만 27만 이상이었고 2천8백만의 필리핀인 대부분이 이들의 협력자였다.

게릴라들의 지휘관은 맥아더에게 정식으로 임명되었으며, 잠수함으로부터 식량과 커피 등 기호품, 각종 무기류에 라이프지같은 잡지는 물론 훈장까지 수여되는 형편이었다.

USAFEE는 필리핀 전역을 12개 군관구로 나누어 조직되어 있었으며, 사령관은 로페스라는 이름의 필리핀인 중령이었다.

1944년 접어들어 일본의 열세가 명백해지자 게릴라들의 활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1944년 4월 초, 세브섬 경비를 하던 오오니시(大西)부대는 게릴라 지휘관인 제임스 쿠우신 중령을 맹렬히 추격중이었다. 쿠우신 중령은 석유기사로 필리핀에 근무중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대로 필리핀 극동군에 입대한 사람이었다.

오오니시 부대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짐에 따라 쿠우신 중령도 독안에 든 쥐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무렵, 게릴라측에서 전령이 왔다.

"일본군의 중요인물을 인도할테니 쿠우신 중령의 탈출을 묵과해달라!"


일본측도 게릴라들이 중요인물을 포로로 데리고 있다는 것은 첩보활동을 통해 알고 있었으나, 그 인물이 연합함대의 후쿠도메 시게루(福留繁) 참모장이라는 것을 알고 대경실색하게 되었다.

후쿠도메 참모장은 2번기가 불시착한후 게릴라들에게 포로로 붙잡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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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留繁


오오니시 부대는 조건을 승낙하고 엄숙한 인도식을 거쳐 후쿠도메를 인도받았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후일 오오니시가 전범재판을 받을 당시 쿠우신 중령이 유리한 증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후쿠도메는 포로로 잡힐 당시 新 Z작전 계획과 암호책 등 여러가지 중요한 군사기밀들을 게릴라에게 빼앗겼다. 이 문서들은 미군의 잠수함을 통해 맥아더에게 넘겨졌고, 태평양함대에 전달되었다.

물론 이 기밀들이 후일 벌어진 필리핀해 해전이나 레이테 해전에서 미군측에 큰 도움을 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본측에게 약간이라도 악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후쿠토메는 전쟁이 끝날때까지 자신이 기밀 문서를 빼앗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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