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란 독일과 소련간에 1942년 8월 21일 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현재의 Volgograd)에서 벌어진 2차대전 최대의 격전(激戰)을 말한다.
이 대전투는 독일의 공격으로 시작되어 소련의 반격과 포위로 이어졌으며, 독일 제 6군과 동맹군들의 참혹한 전멸을 불러왔다.
이 사건은 2차 세계 대전의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150만명이 한 장소에서 사망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살육전 중 하나가 되었다.

불가침 조약을 깨고 스탈린의 배후를 찌르는 히틀러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스탈린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트리고 바바로사 작전(Unternehmen Barbarossa)을 감행하여 전격적으로 소련을 침공하였다.
독일군은 맹렬하게 진격하여, 12월에 모스크바를 공격하였으나, 가혹한 소련의 겨울 날씨와 너무나 길어진 보급로 등으로 인하여 소련의 수도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였다.
이로써 단기간내에 단 한번의 작전으로 스탈린을 무력화시킨다는 바바로사 작전의 본질적 목적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모스크바의 수비 성공으로 자신감이 붙은 스탈린은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풀고 독일의 중앙 집단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원대한 야망을 세웠으나, 엉성한 대반격은 독일군에 의해 모두 좌절되었다.
- Operation Blau -
소련의 반격을 막아내고 여유가 생긴 독일은 새로운 공세 계획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최초에는 모스크바를 재공격하는 방안이 강구되었으나, 히틀러는 소련을 단기간내에 굴복시킨다는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되었다.
장기전에 있어 중요한 자원 확보에 착안한 히틀러는 소련의 코카서스 지역을 점령하기로 결심한다.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계속하고 중부 집단군은 현전선을 유지하며, 남부 집단군이 공세의 주력으로서 코카서스 지역을 공격하도록 계획하였다. 이 구상은 블라우 작전(Unternehmen Blau)으로 구체화되었다.
입안 단계에서 블라우 작전은 코카서스의 자연 지대 장악이 목적으로서, 스탈린그라드는 보급선 후방의 거점 확보라는 부차적 목표에 지나지 않았다.
Franz Ritter Halder
프란츠 할더 참모총장은 보급의 문제와 전력 분산을 들어 스탈린그라드 점령에 반대했지만 히틀러는 아래의 여러 이유를 들어 할더의 의견을 물리쳤다.
스탈린그라드는 카스피 해(Caspian Sea)와 러시아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인 볼가 강(Volga River) 유역에서 가장 큰 산업도시이며, 이 도시의 확보는 독일군에게 부족한 대량의 석유가 적재된 코카서스(Caucasus)로 진격하는 독일군 전선 좌익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가치를 지녔다.
또한 히틀러는 숙적인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이 도시를 점령하는데 흥미가 있었다. 스탈린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총들 기운이 있는 남자는 누구든지 전투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탈린은 러시아 내전(Russian Civil War)의 공로로 그의 이름이 붙여진 이 도시의 함락으로,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1942년 4월 5일, 히틀러는 각 부대의 작전 명령을 하달하였다.
작전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졌다.
제 1단계에서 보르네쉬를 점령하고 측면에서의 소련군의 위협을 제거한다.
제 2단계에서는 돈강을 건너 소련군을 격파한다.
제 3단계에서는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한다.
마지막 제 4단계로 코카서스 유전 지대를 장악하고, 이란과의 국경까지 진격하여 전략적 목적을 달성한다.
남부 집단군은 임무에 따라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Paul Ludwig Ewald von Kleist
우선 17군과 1기갑군으로 편성된 남부 집단군 A(Army Group South A)는 파울 루드비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Paul Ludwig Ewald von Kleist)의 지휘 하에 코카서스 방면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Friedrich Paulus)의 6 군과 헤르만 호트(Hermann Hoth)의 4 기갑군은 남부 집단군 B(Army Group South B)로 편성되어 스탈린그라드를 접수하도록 하였다.
남부 집단군 B의 지휘는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Maximilian von Weichs)가 담당하였다.

Maximilian Maria Joseph Karl Gabriel Lamoral Reichsfreiherr von Weichs zu Glon
블라우 작전은 당초 1942년 5월 말에 시작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참가 병력 중 일부가 크림 반도(Crimean Peninsula)의 세바스토폴(Sevastopol)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연기되었다.
그동안 하르코프 2차 전투(Second Battle of Kharkov)가 벌어져서, 5월 22일 독일군은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을 격퇴하였다.
작전은 1942년 6월 28일 시작되었다. 공세는 성공적이었으며, 독일의 다음 공세는 모스크바를 목표로 할 것으로 오산하고 있던 소련군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독일군의 빠른 진격 때문에 소련군은 효과적인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번번히 실패하였고, 7월 2일 하르코프의 소련군이 괴멸된 후, 일주일 간격으로 밀레로보(Millerovo), 로스토프 오브라스트(Rostov Oblast)의 소련군이 패주하였다.
동시에 헝가리 제 2 군과 독일 제 4 기갑군은 보로네츠(Voronezh)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7월 5일 도시를 점령하였다.
작전이 술술 풀려나가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B집단군 소속의 4 기갑군을 A집단군으로 편입시켰는데, 열악한 도로에 4 기갑군과 6 군의 대규모 병력이 뒤섞이면서 최악의 교통혼잡이 일어났다.
이들은 도로에 놓여진 수천대의 차량들을 치워가면서 일주일이 걸려 겨우 진군을 할 수 있었지만, 마음을 바꾼 히틀러는 4 기갑군을 다시 B집단군으로 돌려보냈다.

독일군의 진로
7월 말 독일군은 소련군을 돈 강(Don River) 건너편으로 몰아냈고,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을 투입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제 6 군은 이제 스탈린그라드로부터 수십 킬로미터 거리까지 접근하였으며, 남쪽으로 이동한 4 기갑군은 도시 남부로부터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한편 A집단군은 7월 25일 소련 해군의 거점인 로스토프를 점령하여 흑해 함대를 무력화시킨후 코카서스를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터키의 중립에 의해서 보스포러스 해협은 군함의 통행이 금지되었고, 흑해의 제해권 확보는 독일의 보급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제서야 독일의 목적을 파악한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방어를 위해서 모든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독일군의 공격으로 패주한 소련군들은 재편하여 도시 서쪽에 방어망을 형성하였으며, 볼가 강을 건너서 지원군이 속속 배치되었다.
지원군은 바실리 추이코프(Vasiliy Chuikov) 지휘하에 신규 편성된 제 62 군이었으며,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Stalingrad
- Stalingrad 전투의 시작 -
공성전은 독일 공군(Luftwaffe)의 대규모 폭격으로 시작되었고, 수많은 인명들이 살상되면서 도시는 거대한 폐허와 무덤으로 변해갔다.

스탈린은 주민들의 존재가 방어군의 사기에 큰 역할을 한다는 이유를 들어 도시 밖으로의 피난을 금지하였다.
시민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거대한 참호와 철조망 설치 작업에 동원되었다.
8월 23일, 루프트바페의 대폭격이 화염 폭풍을 일으켜 수천명이 사망하였고, 스탈린그라드의 거주공간 80%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도시의 기본 방어는 제 1077 대공포 연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대부분 젊은 여성 자원병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별다른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로 전선을 사수하며 진격하는 독일 전차를 저지하였다.
독일군 제 16 기갑사단이 1077 연대의 전체 37개 대공포대를 모두 파괴하기까지 이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초기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방어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민병대에 의존하였다.
전투중에도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에서는 계속하여 전차 생산이 이루어졌으며 완성된 전차에는 공장 노동자들이 올라타고 전장으로 달려나갔다.
이렇게 공장에서 전선으로 바로 달려나간 전차들은 페인트칠은 커녕 조준경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8월 말 독일군의 일부가 스탈린그라드 북쪽의 볼가강변에 도달하였고, 도시 남쪽에서도 진격이 계속되었다.
9월 1일, 소련의 지원군은 독일군의 포격과 항공기 공격 속에서 볼가 강을 건너 도시로 진입하였다.
볼가강을 건너는 소련군
도시에 도달한 소련 제 13 위병 소총 사단(13th Guards Rifle Division)을 포함하는 소련 제 62 및 64 군은 건물과 공장들을 거점으로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며 사방에서 매섭게 공격하는 독일군과 대치하였다.
도시 안으로 투입된 소련 병사의 평균 수명은 24시간 아래였으며, 장교의 경우는 3일 미만이었다.
스탈린은 1942년 7월 27일 명령 제 227 호를 발효, '한 발짝도 물러나지 마라(Ni Shagu Nazad!)' 라고 명령하였으며, 허가없이 퇴각한 장교는 무조건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독일의 압박은 계속되었지만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독일측의 사상자도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독일의 기본 전술은 전차, 보병, 공병, 포병, 그리고 지상 공격기의 연계였으며, 소련은 이에 맞서기 위하여 최전방의 수비 병력이 독일군과 물리적으로 가깝게 붙어있도록 하였다. 
Vasily Chuikov
추이코프는 이 전략을 독일군 껴안기라고 불렀는데, 독일군들은 이 때문에 각자의 전투력을 믿거나, 아군 포화에 피해를 입을 것을 각오하고 지원 사격을 요청하거나 양자 택일을 해야만 하였다.
포격 지원과 항공 지원은 아군의 피해를 염려하여 약화되었고, 도시의 모든 곳, 길거리, 공장, 집과 지하실, 계단에서 백병전을 포함하여 치열한 근접전이 펼쳐졌다.

도시 내부의 언덕인 마마예프 쿠르간(Mamayev Kurgan)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언덕을 사이에 두고 독일과 소련은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반복하였고, 소련은 이곳에서 하루에 1만명, 즉 1개 사단 병력 전체가 사망하기도 하였다.
곡물 처리장에서는 거대한 곡물 창고를 가운데 두고 양측 군대가 서로 숨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총격을 주고받았다.
여러주 동안의 대치 끝에 결국 처리장을 점령하였을때 독일군은 불과과40구의 소련군 시체를 발견하였다.
많은 병력이 지키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독일군은 소련군의 투지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6군 장병들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는 야코브 파블로프(Yakov Pavlov)가 이끄는 소련군 소대가 아파트를 요새화하여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냈는데, 이후 중앙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이 아파트에는 '파블로프의 집'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병사들은 아파트 주위에 지뢰를 매설하고 창문에 기관총좌를 설치하였으며 지하실 벽을 뚫어 소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전투의 끝이 보이지 않자 독일은 도시 안으로 대구경 화포를 끌어들였는데, 이중에는 800 mm 구경의 초거대 열차포 도라(Dora)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볼가 강 너머로는 진격하지 않았고, 덕분에 소련은 볼가 강 유역에 포격 거점들을 만들어 전선의 독일군에게 숨쉴 틈없이 포격을 퍼부을수 있었다.
계속된 전투로 무너진 건물 폐허는 방어 거점이 되었고, 독일 전차들이 지나갈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폐허로 변한 도시는 소련군 저격수들에게 좋은 은신처를 제공해주었다.

Ivan Mikhailovich Sidorenko
독일군은 저격수의 공격으로 많은 사망자를 내었는데, 소련 제 1122 소총연대의 이반 미하일로비치 시도렌코(Ivan Mikhailovich Sidorenko)는 전쟁이 끝날때까지 500 여명의 독일군을 사살하였다.
한편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해진 바실리 그레고르예비치 자이체프(Vasiliy Grigor'yevich Zaytsev)의 경우 스탈린그라드에서만 242명의 독일군을 사살하였다.
특히 그는 하인츠 토르발트(Heinz Thorvald)라는 독일 저격수를 사살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를 날조된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Vasiliy Grigor'yevich Zaytsev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스탈린과 히틀러 양쪽 모두에게 최대의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스탈린은 수송기를 총동원하여 모스크바의 예비 전력을 긁어모아 볼가 강으로 보냈다.
전투로 인한 중압감으로 독일군의 파울루스 장군은 눈꺼풀 떨림 증상이 생겼으며, 소련의 추이코프 장군은 습진이 생겨 두 손을 모두 붕대로 감싸고 있어야만 했다.

Friedrich Wilhelm Ernst Paulus
10월 6일, 트랙터 공장을 공격하던 독일군에 카츄샤 로켓 공격이 퍼부어져 4개 대대가 전멸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점점 날씨는 추워졌지만 독일군에게는 방한 장비가 없었고, 악화되는 상황을 견디다 못한 파울루스는 전투를 중지시키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틀간간의 휴식후 파울루스는 재차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였고, 추이코프는 노동자들로 병력을 보충하며 버텼다.
10월22일 마침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된지 3개월이 지난 11월경 독일군은 소련군을 두 지점에 포위하고 도시의 90%를 점령하였으며, 볼가 강으로 진입하는 소련군의 보트를 차단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도 마마예프 쿠르간 언덕과 도시 북부의 공장지대에서는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붉은 10월 제철소(Red October Steel Factory)와 제르진스키(Dzerzhinsky) 트랙터 공장, 바리카디(Barrikady) 총포 공장에서의 전투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정도가 되었다.

전차를 수리중인 노동자
공장을 둘러싸고 소련군과 독일군에게 총격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공장 노동자들은 전차와 무기를 수리하며 공장을 지켰다.
- 대재앙의 징후 -
한편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에 몰입한 사이, 스탈린은 도시의 양쪽을 끼고 있는 돈강 교두보에 병력을 집중하였다.
B집단군에 소속된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은 상부에 거듭 지원을 요청하였다. 특히 장비가 열악했던 헝가리 제 2 군은 스탈린그라드 북부 최전선 200km 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병력 부족으로 전선이 얇아져서 1~2 km 에 달하는 지역을 1개 소대 병력이 방어하는 지경이었다.
소련군은 돈강 남쪽 강변에 몇 개의 거점을 마련하여, B집단군의 배후를 위협하였지만, 스탈린그라드에 정신이 팔린 히틀러는 이 징후를 무시하였다.

Aleksandr Vasilyevskiy
가을이 되자 소련의 알렉산드르 바실리예프스키(Aleksandr Vasilyevskiy)와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 장군은 대규모의 예비 병력을 이동시켜 스탈린그라드의 남과 북으로 독일군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장비와 훈련도가 열악하던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이 담당한 북부 전선의 방어가 취약하였는데, 소련군은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였다.
11월 8일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제압했다고 선언하고, 연설을 통하여 "이제 1척의 배도 볼가강을 다닐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나 이 연설로부터 불과 10일후, 100만명의 소련군이 대반격에 나서게 된다.
- 우라누스 작전 (Operation Uranus) -
11월 19일 우라누스 작전(Operation Uranus)이 시작되었다.
제 1군위군, 제 5 기갑군, 제 21 군에 소속된 18개 보병 사단, 8개 기갑 여단, 6개 기병 사단, 1개 대전차 여단, 2개 기계화 여단의 무려 100만 대군이 니콜라이 바투틴(Nikolay Vatutin) 장군 지휘하에 대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Operation Uranus
사실 전선의 루마니아군은 소련의 공격 징후를 미리 포착되었지만, 독일군 지휘부는 루마니아군의 정보 보고를 무시하였고 지원 요청 또한 거부하였다.
부족한 장비에 적은 인원으로 넓게 퍼져 독일 6군의 북부 외곽을 방어중이던 루마니아군은 결국 소련군의 압도적인 병력에 철저하게 붕괴되었다.
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남쪽에 배치된 제 48기갑군단 소속 13기갑 사단의 출동이 필요하였으나,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단의 전차 70대 중 58대는 쥐들이 엔진의 배선을 갉아먹는 고장이 나있었다. 대노한 히틀러는 48기갑군단장 하임 장군과 13기갑사단장 후리베 장군을 해임했다.
결국 소방수로 제 29기계화사단이 출동하여, 24시간의 전투로 소련 제 4탱크군단의 전차 268대와 후속 부대를 궤멸시켜 전선의 붕괴를 막아낸다.
우라누스 작전이 개시된 날 정오 스탈린은 모스크바 방송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거리에도 다시 축제의 휴일이 올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한편 히틀러는 쏟아지는 전황을 들으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프란츠 할더(Franz Halder)참모총장과 언쟁을 벌인 끝에 그를 내쫓고, 대신 쿠르트 자이츨러(Kurt Zeitzler) 장군을 임명하였다.

Kurt Zeitzler
11월 20일 마르스 작전(Operation Mars)에 따라 소련군의 두번째 공세가 남쪽 전선에서 시작되었고, 대부분 보병으로 구성되었던 루마니아 제 4 군단은 즉각 와해되었다.
남북으로 도시를 에워싸며 진군하던 소련군은 공격개시 이틀만에 칼라크(Kalach) 마을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스탈린그라드를 탈출한 6군 소속의 5만 병력을 제외하고, 스탈린그라드에는 독일군과 루마니아군, 크로아티아 의용군까지 합하여 25만의 병력이 포위되었다.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소련군은 즉각 내외부로 이중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11월 30일의 연설에서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소련의 포위망이 완성된 이후 소집된 회의에서 다수의 독일 지휘부는 돈 강 서쪽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여 포위망을 뚫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항공지원으로 스탈린그라드에 물자를 보급하여 전투를 지속시킬 수 있다는 헤르만 괴링(Hermann Goring)의 호언장담에 속아넘어가게 된다.

Hermann Wilhelm Göring
일년 전에 데미얀스크(Demyansk)에서 독일군 1개 군단 병력이 포위되었을때 괴링은 비슷한 항공지원을 성사시킨 예가 있었지만, 괴링은 데미얀스크와 스탈린그라드의 병력 규모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또한 그동안 독일군과의 전투를 치르면서 소련 공군이 양적 질적으로 많은 성장을 나타내었다는 사실도 무시되었다.

Wolfram von Richthofen
제 4 항공대(Luftflotte 4)의 볼프람 폰 리히프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은 이 결정을 뒤집고자 노력하였다.
항공 지원으로 보급을 받을 제 6 군만으로도 일반 독일 정규군의 두배 규모에 달하였고, 제 4 기갑군까지 같이 보급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루프트바페는 크레타 전투(Battle of Crete)의 손실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포위망에서 하루에 필요한 물자가 800톤에 달했던데 반하여 독일 공군이 수송할 수 있는 양은 500 톤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500톤의 수송조차 융커스(Junkers) Ju-52 수송기에 하인켈(Heinkel) He-111 과 He-177 폭격기들까지 용도 변경하여 사용해야만 가능한 수준이었다.
실질적으로 만족스러운 항공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곧 밝혀지게 된다.
스탈린은 포위된 스탈린그라드 주변에 1천여 개의 대공포를 밀집시켰으며, 이 포대는 16세에서 35세에 이르는 여성들이 조작하였다. 또한 재건된 소련 공군도 수송 작전을 악착같이 방해하였다.
결국 루프트바페는 작전 기간 동안 490 대가 넘는 수송기를 잃었고, 혹독한 날씨 때문에 원활한 비행이 불가능하여 결국 보급된 량은 필요량의 10%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보급품조차 포위망 내부에서는 별 쓸모없는 물자일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에는 식량과 탄약을 실은 수송기들은 격추되고 보드카(Vodka)와 여름 전투복 20톤 분량만이 도달한 경우도 있었다.
스탈린그라드내에 성공적으로 착륙한 수송기는 고급 기술 인력과 부상병을 탈출시키는 용도로 활용되었는데, 이렇게 포위망을 빠져나간 인원은 4만 2천명에 불과하였다.
제 6 군은 서서히 굶주려갔으며 수송기 조종사들은 물자 하역을 담당한 병사들의 지치고 굶주린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병사들과 곤궁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자이츨러 참모총장은 절식을 하였고, 혹독한 다이어트끝에 수척해져버린 참모총장의 모습을 본 히틀러는 정상적으로 식사하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후 한동안 방어선을 단단히 굳히는데 집중하던 소련군은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하였다.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이 다가오면서 볼가 강은 얼어붙었고,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은 얼어붙은 강으로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 독일군의 땔감과 의약품, 식료품은 급격히 소모되어 수천명이 기아와 질병, 동상으로 죽어가게 되었다.
- 겨울 폭풍 작전(Operation Wintergewitter) -
루마니아의 최고 지휘관 안트네스크 원수는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루마니아군의 운명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고 히틀러에게 구출 작전을 요구하였다.
히틀러는 항공 지원으로 다음 봄까지 버티게 한다는 속셈이었으므로 이 주장에 크게 화를 냈지만 장시간의 협의 끝에 안트네스크 원수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스탈린그라드 구원 작전은 겨울 폭풍(Wintergewitter)으로 명명되었고, 세바스토폴의 성공적인 공략으로 주가가 치솟은 만슈타인 원수에게 지휘가 맡겨졌다.
Erich von Manstein
작전의 실행을 위해 남부 집단군의 마지막 예비 병력이던 호트의 기갑 군단과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잡다한 병력을 합쳐 돈 집단군이 새롭게 편성되었다.
작전은 12월 11일 시작된 이후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침내 12월 18일 호트 기갑 군단의 선봉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불과 35km 떨어진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곤경에 쳐한 6군 병사들에게 구출 부대의 포성은 무엇보다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 새턴 작전(Operation Saturn) -
독일의 겨울 폭풍 작전에 잠시 침묵하던 스탈린은 마침내 3개 군을 동원하여 역습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12월 16일 소련군은 새턴 작전(Operation Saturn)으로 이름붙인 2차 대공세를 시작하였다.
이 작전의 목표는 돈 강 주변의 독일군을 쫓아내고 로스토프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만약 로스토프가 함락되면 코카서스로 진격한 클라이스트의 제1 기갑군의 퇴로가 봉쇄될 터였다.
스탈린의 의도는 독일의 남부 집단군 전체를 고립시켜, 동부 전선에 배치된 독일 전력의 1/3을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소련군의 공세는 성공적이었으며,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독일 제24기갑군단, 헝가리 제2군, 이탈리아 제8군은 완전히 괴멸되었다.
바다노프가 지휘하는 소련 제24 전차군단은 수비군을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1942년 12월 23일에는 타친스카야로 돌격하였다.
타친스카야는 스탈린그라드로 보급품을 공수하던 비행장이었으므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으나, 독일측의 수비는 고작 8문의 88mm 대공포가 전부였다.
바다노프의 T-34들은 손쉽게 방어선을 돌파하여, 활주로의 Ju-52 수송기 70여대를 격파하였다.
스탈린은 바다노프의 맹활약에 고무되어 그의 부대에게 제 2근위 전차군단이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 바다노프의 다음 목표는 로스토프였다.
다급해진 만슈타인은 제 4기갑군의 6기갑사단과 홀리트군의 제11기갑사단을 긴급히 타친스카야로 이동시킨다.
제 6기갑사단은 타친스카야 북쪽을 공격하여 전선의 간격을 막고 깊이 침투한 소련군의 퇴로를 봉쇄하였으며, 제11기갑사단은 고립된 소련군을 공격하여 소탕하였다.
바다노프의 제24 전차 군단은 11기갑사단의 맹공격을 받아 34대의 T-34 전차를 잃고 타친스카야로부터 북쪽으로 후퇴하여, 제25 전차군단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매복중이던 제6 기갑사단의 공격과 11기갑사단의 협공에 90대의 T-34전차를 잃고 궤멸당하였다.
로스토프에 대한 안전은 확보되었으나 소련군의 압력은 계속되었다.
이에 만슈타인(Fritz Erich von Manstein)은 12월 24일 결단을 내려 6군 구출을 포기하고, 코카서스의 A 집단군만 건져내어 스탈린그라드에서 250 km 떨어진 곳까지 후퇴하였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엉덩이를 호되게 걷어차인 히틀러
- 신들의 황혼 -
6군에게는 이제 모든 희망이 사라졌지만, 포위망속의 독일군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채 원군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12월 25일 성탄절, 파울루스는 6군이 가지고 있던 모든 군마의 도축을 허락하였다.
몇몇 장교들은 파울루스에게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자고 주장하였지만,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하였다.
사실상 독일군은 돌파 작전에 필요한 연료가 부족하여, 혹한기에 도보로 포위망을 돌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43년 1월, 볼가강이 완전히 얼어붙어 소련군은 물자 보급이 원활해졌다. 반면 독일군의 영양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1943년 1월 7일, 소련은 파울루스에게 명예로운 항복을 권유하며 모든 포로의 안전을 보장하고 부상자와 환자에게 의료 혜택을 지원할뿐 아니라 포로 각자가 자신의 소지품을 보관할 수 있도록 하며, 전쟁이 끝나면 본국으로 모두 돌려보내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파울루스의 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6군은 계속 진지를 고수해야 하며, 버티는 기간이 길수록 다른 전체의 독일군의 전선을 돕는것.'이라고 답변하였다.
1월 9일, 소련은 항복 시한을 10일 오전 10시까지로 연기하였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항복은 안되며, 최후의 한발까지 싸워라.'고 명령하였다.
1월 10일, 최후 통첩 시간이 지난 직후 소련군은 두시간에 걸친 사전 포격후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6군 병사들에 대하여 항복을 권유하는 삐라가 살포되었다.
1월14일,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항복 교섭의 허가를 요청하였지만, 히틀러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Pitomnik 비행장의 독일 수송기 잔해
1월 16일, 피톰니크(Pitomnik) 비행장이 함락되었다. 독일군의 두 개의 비행장 중 하나가 점령되자 굼락(Gumrak) 비행장을 수비하기 위하여 절망적인 시도를 계속하였다.
한편, 히틀러는 다시 한번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만슈타인은 그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유능한 장교들을 빼내올 것을 건의하였다.
1월 21일, 파울루스는 6군 전 장병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라고 명령했다. 배낭 9개 분량의 우편물이 수거되어 수송기편으로 날아갔으나, 이 우편물들은 가족에게 배달되지 못하고 게쉬타포에게 전량 압류되었다.
독일군은 점점 도시 안쪽으로 쫓겨났고, 1943년 1월 23일 마침내 굼락(Gumrak) 비행장이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져, 항공 지원은 완전히 끊어졌다.
이제 독일군은 식량뿐 아니라 탄약 부족에도 허덕이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항복한 자를 처형한다는 믿음이 병사들 사이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특히 독일군 편에서 소련과 맞섰던 일부 소련인들(HiWis)은 항복한 뒤 자신들에게 주어질 운명을 생각하여 더욱 격렬히 저항하였다. 한편 포위망을 좁혀가는 와중에 포위망 안쪽의 독일 병력이 예상외로 대규모임에 놀란 소련군은 포위망에 투입된 병력을 증원하였다.

최대의 격전지였던 Mamayev Kurgan에서 URAAAAA
소련군과 독일군 사이에는 피비린내나는 시가전이 계속되었지만, 입장은 예전과 바뀌어 볼가강 방면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은 독일군이었다.
1월 26일, 파울루스는 자신의 병사들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전문을 히틀러에게 보냈다.
1월30일, 히틀러 집권 10주년 당대회에서 헤르만 괴링은 "잔혹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노르웨이, 아프리카, 스탈린그라드에서 병사의 죽음은 큰 문제가 아니다. 최종적으로는 우리 군이 승리할 것이다."라고 연설하였으며, 괴벨스는 "지금의 난관을 극복해야만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원수로 진급시켰다. 독일군의 역사상 원수 계급으로서 적의 포로가 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끝까지 싸우거나 자결하라는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러나 2월 2일 소련군이 GUM 백화점에 설치된 파울루스의 지휘부에 다가오자 파울루스는 항복하였다. 지치고 병들고 굶주린 독일군 생존자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으며, 이중 장성급이 22 명이나 되었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항복 소식에 파울루스가 영원한 영광의 문 앞에서 뒤로 돌아섰다고 격분하며 토로하였다.
2월 3일, 6군에 보급품을 지원하기 위한 마지막 수송기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라고 보고하였다.
2월 4일 18시 45분, 돈 집단군 사령부에 스탈린그라드로부터 "볼셰비키 놈들이 벙커 앞에 와 있음. 우리는 무전기를 파기할 것임."이라는 마지막 전문이 도달하였다.
독일의 다큐멘터리 필름 '스탈린그라드'에 따르면 11,000 명의 독일군과 동맹군들이 수용소에서 서서히 죽어가느니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며 항복을 거부하고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지하실과 하수도에 숨어 1943년 3월 초까지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 정보부 문서에 따르면 이들중 2,418 명이 전사하였으며 8,646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독일군 포로들
스탈린그라드의 포로들 중에서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고,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은 5천에 불과하였다.
포위 기간 동안 이미 질병과 기아로 약해진 이들은 소련 각지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대부분 고된 노동과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일부 고위 장교들은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프로파간다에 동원되었는데, 파울루스와 몇몇 장성들은 독일군을 대상으로 반 히틀러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발터 폰 세이드리츠 쿠르츠바흐(Walther von Seydlitz-Kurzbach) 장군은 스탈린그라드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반 히틀러 군대를 조직하겠다는 제안을 하였지만 소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1955년까지 모두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 후기 -
독일은 1943년 1월 말까지 스탈린그라드의 비참한 상황을 대중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공식 발표 수주 전에야 전투가 성공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프로파간다가 중단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비보는 독일의 첫 패전은 아니었지만 그 큰 규모에서 보듯이 최악의 사태였다.
2월 18일 나치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는 베를린에서 행한 유명한 스포르트팔라스트(Sportpalast) 연설을 통하여 온 국민의 모든 자원과 노력을 전쟁을 위해 바칠 것을 호소하였다.
199일간 전개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중 하나였다.
소련 정부의 통계 부실로 인하여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지만 상상을 초월할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여러 학자들은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의 사상자 및 포로의 숫자가 도합 850,000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하는데, 이중 독일이 400,000 명, 루마니아가 200,000 명, 이탈리아가 130,000 명, 그리고 헝가리인이 120,000 정도일 것이라고 본다.

항복하는 독일군
독일인 포로들 중 5천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수용소 생활중 사망하였으며, 독일의 편에서 전투를 치른 소련인(Hiwis)들 또한 모두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소련군의 사상자 수는 1,129,619 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이중 478,741 명이 사망하였으며 650,878 명이 부상하였다.
이밖에 개전 초기의 폭격으로 소련 민간인 40,000 명이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 민간인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발생한 사상자의 수는 1,700,000 명에서 2,000,000 명 사이가 될 것이다.
특히 독일군은 복구할 수 없는 귀중한 인적 자원을 대량으로 손실하여, 손실을 만회하기 위하여 그동안 병역이 면제되던 숙련공들까지 동원하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양 군대의 인내심이 전투력을 유지시킨 핵심 요소중 하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소련군은 사병들의 평균수명이 하루를 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 하에서도 독일군에 맞서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투지를 보였는데, 주인이 15번이나 바뀐 스탈린그라드역에서 로디므체프(Rodimtsev) 장군의 한 병사는 죽어가면서 벽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겨놓기도 하였다.
"Rodimtsev's Guardsmen fought and died here for their Motherland."
"로디므체프의 근위병들은 어머니의 땅을 위해 여기서 싸우고 죽었다."
스탈린그라드는 1945년 영웅시(Hero City)라는 호칭을 받게 되었으며, 전후 1960년대 마마예프 쿠르간 언덕에는 거대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Mother Motherland crowns the Mamayev Kurgan
이 기념비 주위에는 남겨진 폐허 조각들을 포함한 기념물들이 늘어서 있다.
격렬한 전투가 진행된 곡물 창고와 '파블로프의 집'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마마예프 쿠르간 언덕에서는 현재까지도 유골과 녹슨 철조각들이 발견된다.
한편 1943년 11월의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은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를 기념하여, "영국 국민을 대신하여 국왕 조지 6세의 이름으로 스탈린그라드의 강철 시민들에게 이 선물을 바친다."라고 쓰여진 '스탈린그라드의 칼'을 스탈린에게 선물하였다.
여담으로 이 회담의 만찬석상에서 스탈린은 "전쟁이 끝난후 독일의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포로로 잡은 독일 장교 5만 명을 처형하자"라는 제안 혹은 농담을 하였으나 처칠의 대노에 의해 유야무야되었다고 한다.

The sword of Stalingrad
포위된 독일군이 보여준 인내력 또한 놀라웠다.
식량과 의복이 부족하고 기아와 동상으로 사망하는 이들이 속출하는 가운데에도 지휘권은 끝까지 존중되었으며, 파울루스 역시 다른 장성들의 주장을 뿌리치고 모든 탄약과 식량이 완전히 소진되기까지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하였다.
히틀러가 파울루스를 원수로 진급시켰을때에야 스탈린그라드에 더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달은 파울루스는 그가 자살할 것이라는 히틀러의 믿음을 깨고 항복하였으며 독일 역사상 가장 계급이 높은 포로로 기록되었다.

소련 기자들과 문답중인 파울루스
한편 패장 파울루스는 전후 동독에 정착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자에게 히틀러의 개라는 비난을 받았고 우익에게는 스탈린에게 붙은 변절자라는 욕을 들었다. 1957년에 사망한 파울루스는 바리바덴에 매장되었다.
독일군이 일시 진출하였다 후퇴한 코카서스 지역, 특히 체첸은 이전부터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었으며 스탈린은 전투 종결 이후 체첸인들을 독일군에 협력하였다는 죄목을 씌워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스탈린의 사망 이후 체첸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벌써 그 땅에는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이후 체첸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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