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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Георг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Жуков)는 2차 대전중 최고의 활약을 보인 소련의 지휘관이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스트렐코프카(Strelkovka, Maloyaroslavets Raion, Kaluga Guberniya)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 직공일을 배우기 위해서 모스크바(Moscow)로 갔다.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중 러시아군에 징집되어 제5 예비 기병 연대에 배속되었고 1916년 봄에는 제10 용기병(dragoon)연대로 전속되었다. 전쟁중의 용맹한 활약으로 주코프는 성 게오르그 십자장(Cross of St George)을 두번 수상했고 하사관으로 승진하였다.

10월 혁명(October Revolution)이 일어나자 청년 주코프는 볼셰비키(Bolshevik Party)에 가입하였다. 티푸스로 한시기 앓고난 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붉은 군대의 소속으로 내전(Russian Civil War)에 참가하여 싸웠다. 1921년 탐보프(Tambov)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을 진압한 그는 이 일로 붉은깃 전투훈장(Order of the Battle Red Banner)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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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의 주코프


1923년에는 기병 연대장이 되었고, 1930년 5월에는 기병 여단장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하였다. 이후 붉은 군대 감찰 보좌관, 제4 기병 사단장, 제3 기병 군단장, 제6 기병 군단장을 역임한다.

그는 육군의 기계화와 전쟁시 기갑 부대 운용의 새로운 전술을 창안하였고 세밀하고 논리 정연하며 휘하 부대들은 엄격한 규율과 훈련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 노몬한 전투 -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스탈린(Joseph Stalin)이 실시한 대숙청(Great Purge)으로 인하여 붉은 군대 내부의 유능한 고급 장교들은 씨가 마를 정도였으나, 주코프는 용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용했지만 아직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모스크바을 떠나, 1938년 제1소비에트-몽골군 집단의 사령관에 취임했다. 여기서는 일본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과 몽골인민공화국의 국경 분쟁으로 소규모 전투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국경 지대 노몬한에서 벌어진 몽골인민공화국군과 만주군의 작은 충돌이 양국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소련과 일본의 충돌로 발전하였다. 관동군은 최초 소련의 국경방위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전투를 개시하였으나, 급격히 대규모 전투로 발전하여 최종적으로는 전차 500량 이상, 항공기 500기 이상, 수만의 병력이 투입되는 대규모 교전에 이르렀다.


노몬한에서 주코프의 반격

주코프는 일본군의 공세가 소진되기를 기다리고 충분한 예비 전력을 준비한 후, 1939년 8월 20일부터 관동군에 대한 반격을 지휘했다. 차량화된 포병과 보병의 지원 아래 2개 전차여단이 전선의 양 날개를 형성하여 진격한다는 대담한 전술 기동을 실시하여 일본 제 6군을 포위하고, 1개사단을 전멸시키는 대타격을 주었다. 2주만에 관동군은 후퇴하고, 그후 국경선은 소련,몽골의 주장대로 확정되었다.

이 전투로 주코프는 소련 연방 영웅(Hero of the Soviet Union)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이 전투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못한채 묻혀버렸다.


- 2차 세계대전 -

주코프의 선구적인 기동 장갑 부대의 활용은 서방세계에서 거의 무시되다시피 하였고, 결국 독일은 1940년 전격전(Blitzkrieg)으로 프랑스를 점령하며 큰 충격을 남겼다.


1940년 5월 스탈린은 주코프를 상급 대장으로 임명하고, 키예프 특별군 관할 구역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같은해 12월 열린 각군 사령관 회의에서 주코프는 독일군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주장하고, 기계화 부대의 증강과 공군, 방공 부대의 강화를 중요 과제로 제기하였다. 1941년 1월 주코프는 붉은 군대 참모부(Red Army General Staff) 참모총장 겸 국방 인민위원에 임명되었다.


스탈린 사망후 니키타 흐루스초프(Nikita Khrushchev)의 반스탈린 정책이 정점에 달하였을때 작성된 주코프 자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주코프는 1941년 6월 독일의 침공 이후 스탈린과 다른 지휘관들에게 직설적인 비난을 날렸을 정도로 대담하였다.

그는 스탈린에게 키에프(Kiev)에서 퇴각하지 않으면 독일의 이중 포위망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몇 안되는 소련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스탈린은 그를 꾸짖고 그의 조언을 무시한채 키에프에서의 병력 철수를 거부하였고, 결과적으로 키에프 함락과 함께 50만 소련군이 독일의 포로가 되었다. 주코프는 1941년 가을 레닌그라드(Leningrad)의 남쪽자락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주코프의 이런 묘사는 후대 작가들에게 조롱을 받았다.

역사가 빅토르 수보로프(Viktor Suvorov)는 저서 The Shadow of the Victory와 I Take Back My Words를 통해 주코프를 강도높게 비판하였다. 위의 책들에 따르면 주코프는 전술적으로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고, 키에프의 일은 날조된 것으로 주코프는 오히려 스탈린의 결정을 지지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주코프는 발트(Balt)해 연안과 베사라비아(Bessarabia)를 점령하고자 하였던 스탈린의 의견을 지지하였다고 한다. 독일은 전략물자인 니켈과 목재를 발트 연안의 핀란드(Finland)와 스웨덴(Sweden)에서, 석유를 베사라비아 근방의 루마니아(Romania)에서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의 이러한 결정은 독일을 크게 자극하였다. 게다가 베사라비아 침공은 루마니아로 하여금 독일의 편에 서도록 하였다.

최근에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1941년 주코프와 그 지지자들은 독일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침공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러시아 역사가들 사이에 논란이 분분했던 이 문서는 기밀 접근권한이 있었던 카르포프(V. V. Karpov)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그는 아마도 중대한 시점에 적에 대한 기습을 제안하였던 군사적 천재로서의 주코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듯 하다. 빅토르 수보로프는 이 계획을 그의 논문에 인용하였고, 미하일 멜튜코프(Mikhail Meltyukhov)는 계획의 배경을 연구하였다.

이 자료는 국방위원(Commissar of Defense) 티모셴코(Semyon Timoshenko)와 참모부장 주코프가 작성하여 스탈린에게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건은 결재 표시가 없어서, 승인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결재 표식이 없는 것이 통례였다고 한다. 이 계획은 스탈린으로부터 승인을 받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제출조차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베리(Overy)는 이 계획이 스탈린과 관계없이 주코프와 티모셴코가 작성한 것으로, 훗날 독일인들을 자극할까 두려워한 스탈린으로부터 반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네브진(Nevezhin)과 다닐로프(Danilov)의 지지를 받는 러시아 역사학자 보리스 소코로프(Boris Sokolov)는 정치적 리더쉽을 고려해 보았을때 참모부의 최고 책임자가 스탈린의 찬성 없이 독일을 선제공격하는 계획안을 작성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멜튜코프 역시 1941년 5월의 이 제안이 1940년에 작성된 초안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 계획안은 독일의 공세를 격퇴하고 재빠르게 반격하는 내용을 주로 하고 있지만, 기본적 방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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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22일 주코프는 악명높은 인민위원회 방어지침 3호(Directive of Peoples' Commissariat of Defence No.3)에 서명하여 붉은 군대의 전면적인 반격을 명령하였다. 주코프는 6월 24일까지 인근의 독일군을 포위해 섬멸하고 수보키(Suwalki)를 점령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블라디미르-볼리나(Vladimir-Volynia)와 브로디(Brody) 방면의 독일군도 포위 섬멸하고, 심지어 같은 날 루블린(Lublin)까지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점령은커녕 목적지로 향한 행군 자체가 실패로 돌아가고, 대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붉은 군대는 독일 국방군(Wehrmacht)에게 격파되었다.

훗날 주코프는 이의를 제기했음에도 스탈린의 강요로 어쩔 수 없었다고 밝혔다. 회고록에 따르면 스탈린이 주코프의 주장을 듣지 않은 댓가로 소련은 큰 패배를 하였지만 1941년 7월 29일 주코프는 키에프를 포기하자고 한 죄목으로 참모부에서 축출되었다고 한다. 키에프에 대하여 주코프와 스탈린이 나눈 대화는 2000년에 출판된 주코프 원수 이야기(Reading Marshal Zhukov - P. Ya. Mezhiritzky)에 실려있다.

1941년 10월 독일이 모스크바로 진격해오자 주코프는 전선 중앙을 담당하던 티모셴코를 모스크바 방어에 투입하였다. 그는 또한 극동 방면의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켰다. 1941년 12월의 반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독일군은 모스크바로부터 멀리 밀려났다. 스탈린은 다시 주코프를 중용하였으며 그의 직언을 흘려듣지 않게 되었다.


1942년 주코프는 총사령관 대리(Deputy Commander-in-Chief) 자격으로 남서부 전선으로 파견되어 스탈린그라드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바실리에프스키의 총지휘 하에서 주코프는 1943년 백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6군을 역포위하여 항복시켰다.

작전 기간 동안 주코프는 르제프 궤멸 작전(Rzhev meat grinder)이라는 이름으로 르제프(Rzhev), 시체프스카(Sychevka), 브야즈마(Vyazma) 방면으로 소득없는 공격을 계속하여, 7만명의 사상자와 함께 1,336량의 탱크를 잃었다. 몇몇 역사가들은 소련이 주장한 르제프에서의 사상자 수가 너무 많다는데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르제프의 작전이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독일군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단 규모 병력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정황도 발견되고 있다.

1943년 1월 주코프는 레닌그라드(Leningrad)의 독일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그는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Battle of Kursk) 당시에는 소련군 최고 사령부 회의기구인 STAVKA의 조정자 역할을 담당하였고, 회고록에 따르면 전투 계획에서 중요 역할을 맡아 공세에서 상당한 규모의 승리를 얻었다고 한다. 쿠르스크 전투는 겨울이 아니라 여름에 벌어진 전투중, 독일의 첫 패전이 되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만큼 전체 전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중부전선 사령관(Commander of Central Front)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Konstantin Rokossovsky)는 쿠르스크 전투의 계획과 실행은 주코프 없이 이루어진 것이며, 주코프는 단지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도착해서 금방 떠났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클리멘트 보로시로프(Kliment Voroshilov)원수의 실패로 말미암에 1944년 1월의 공세는 주코프에게 넘겨졌다. 주코프는 일부 군사학자들이 2차 대전 최대의 군사 작전이라고 평하는 바그라티온 작전(Operation Bagration)을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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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을 걷는 주코프와 몽고메리


주코프는 1945년 독일 본토에 대한 최종 공격을 시행하여 4월 베를린을 점령하였다. 5월 8일 밤 그의 앞에서, 베를린의 독일 장성들은 항복문서에 조인하였다.


- 전쟁 이후 -

독일 패망 후 주코프는 독일내 소련 점령지역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그는 1945년 모스크바 붉은 광장(Red Square)에서 개최된 개선식에 최고의 소련 지휘관 자격으로 백마를 타고 참여하였다.

서방세계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D. D. Eisenhower)은 주코프를 대단히 존경하였으며 두 사람은 독일에서의 승리 이후 함께 소련을 여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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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광장 개선식 - 독일 군기를 내버리는 소련군들


독일 패망후 점령지의 최고 사령관이 된 주코프는 1945년 6월 10일 점령지의 군정장관(Military Governor)으로 임명되었다. 위대한 전쟁영웅으로 군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던 주코프는 스탈린의 리더쉽에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1946년 4월 10일 결국 주코프는 바실리 소코로프스키(Vasily Sokolovsky)로 교체되었다.

1947년 그는 전략상 중요성도 없고 큰 규모의 병력도 필요하지 않은데다가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지기까지한 오데사(Odessa) 지역 지휘관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다시 돌아온 주코프는 1953년 국방 차관을 거쳐 1955년 국방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53년 주코프는 내무성(MVD)의 수장이자 부총리이며, 스탈린의 측근으로 대숙청을 주도했던 라브렌티 베리아(Lavrenty Beria) 체포를 지원했다.

국방장관 주코프는 1956년 10월 헝가리를 침공했다. 최고 간부 회의(Presidium)의 동의를 얻은 그는 니키타 흐루시초프에게 헝가리로 군대를 진격시켜 헝가리 정부를 지원하고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수비할 것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주코프와 최고 간부 회의는 전면적인 개입을 바라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사태가 안정되기 시작한 이후에는 철군을 권유하였다. 최고 간부 회의의 이러한 분위기는 헝가리의 새 총리 너지(Imre Nagy)가 헝가리의 바르샤바 동맹(Warsaw Pact) 탈퇴의사를 밝히자 급변하였고, 소련은 너지 대신에 야노스 카다르(Janos Kadar)를 새 총리로 앉힌 후 혁명세력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957년 주코프는 브야체스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가 이끄는 파벌과 맞선 흐루시초프를 지원하였다. 공산당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에서 주코프는 "스탈린주의들이 스탈린의 범죄에 연루되었다"라고 연설하였다. 같은해 6월 주코프는 중앙위원회의 최고 간부 회원으로 임명됨으로서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군사 정책상에서 주코프는 흐루시초프와 많은 의견 대립을 벌였다. 흐루시초프는 육군과 해군력을 감축하고 전략핵무기를 일차 전쟁억지력으로 활용함으로써 얻어지는 인력과 자원을 민간 경제 방면으로 돌리고자 하였다.

주코프는 흐루시초프의 정책에 반대하였다. 흐루시초프는 군보다 당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1957년 10월 주코프를 장관직에서 해임하고 중앙위원회에서 축출하였다. 주코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흐루시초프는 주코프가 그에게 대항하는 일격을 계획중이라고 믿고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하였다고 한다.


흐루시초프가 1964년 10월 실각,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와 알렉세이 코시긴(Aleksei Kosygin)으로 교체된 이후 새 지도부는 주코프를 복권시켜주었지만 권력을 주지는 않았다. 브레즈네프는 대 조국 전쟁 20주년 기념식에서 주코프가 자신보다 더 많은 박수를 받자 화를 냈다고 한다. 주코프보다 젊었던 브레즈네프는 전쟁중 정치위원으로써 언제나 자신의 공을 부풀리는데 고심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주코프는 1974년 사망할때까지 소련 연방의 영웅으로 남았다. 사망후 그는 군인으로써 최고의 예우를 갖춘 장례식을 치르고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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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주코프 동상


- 주코프에 대한 평가 -

전후 소련 연방에선 선전 목적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는 것이 흔한 일이었고, 지휘관들이나 병사들의 의견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주코프의 경우에는 특이하게도 국내에서 그의 전술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물론 그가 크렘린(Kremlin)에서 정치적 활동에 몰두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코프는 정치 활동 일선에 있을 때는 '승리의 인도자 게오르기(Georgy the Victory-Bringer)'로 칭송되다가도, 제명되거나 좌천되기만 하면 '동족을 죽인 원수(cannibal marshal)'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대개 언제나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 측근들과 군사 역사학자, 그리고 휘하에 있던 병사들이나 지휘관들로부터 수많은 악평을 들었다.

이러한 악평들 중에는 근거가 있는 것도 있고, 반론의 여지가 있는 것들도 있다.

병사들의 생명을 경시했다고 비난받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있다. 주코프는 다른 지휘관들보다 병사들의 훈련과 전투 계획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다른 지휘관들에 비해 사상자 수를 감소시킬 수 있었다.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주코프는 그의 전력 13.6%인 139,586명의 병사를 잃었지만 코즈로프(Kozlov) 장군은 케르치(Kerch)에서 전병력의 40%인 15만에서 17만의 사상자를 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주코프의 사상자들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래도 다른 나라의 평균보다는 높았지만 소련 평균에 비교하면 상당히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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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an Stepanovich Konev

베를린 전투의 경우 주코프의 손실은 4.1%인데 반해 코네프(Konev)는 더 약한 적과 상대하였음에도 5%를 잃었으며 로디온 말리노프스키(Rodion Malinovsky)는 부다페스트 전투(Battle of Budapest)에서 8%를 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코프가 부하들의 생명을 아꼈던 것은 아니며, 그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스트라(Istra) 저수지 방어전은 주코프가 가장 흔히 비난받는 예이다. 주코프 지휘하의 로코소프스키는 1941년 11월 18일 보다더 유리한 위치로 철수 승인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한 뒤, 직접 참모부로 가서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원수의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주코프는 그의 상관이 승인한 내용을 거부하고 로코소프스키에게 위치를 사수하도록 강요하였고, 결국 독일군은 로코소프스키의 부대를 괴멸시킨 후 동부 연안의 요충지를 손에 넣게 되었다.


주코프를 변호하는 이들은 그의 이러한 무리한 결정들이 압박감 속에서 이루어진 어쩔 수 없는 것들이었다고 한다. 주코프의 결정은 언제나 자부심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그는 부하들의 생명을 경시한 것도, 공포에 짓눌렸던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전쟁 기간 동안 주코프는 다른 지휘관들에 비해 항상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 있었다. 그에게 처음 주어진 큰 임무는 1941년의 모스크바 방어전이었으며, 당시 모든 신문은 큰 사진과 함께 그의 소식을 보도하였는데, 이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언제나 결과만으로 사람을 평가한 스탈린 역시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주코프에게 주어진 임무들은 하나같이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것이었고, 그는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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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코프의 회고록(Воспоминания и размышления)은 1969년 처음 출판되었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자료들을 토대로 연구된 결과들은 이 회고록의 내용을 의심스럽게 한다.

수보로프가 지적했듯이, 주코프는 1941년 소련 전선에 배치된 독일 전차의 수가 3,712대, 항공기가 4,950대라고 하였지만(p.263, p.411) 실제 수는 그보다 5배에서 6배는 더 많았다고 하였다(p.411).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전쟁 발발 전에 주코프가 작성했다는 대책도 거짓임이 판명되었다. 또한 그는 1941년 1월에 1차례의 모의 전술 훈련이 있었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2회였다. 또한 다른 자료들을 참조하면 그나마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내용도 아니었으며, 그러한 내용은 논의조차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모의 전술 훈련은 프러시아 동부지역에서의 반격을 주제로 한 것이었으며, 두번째는 헝가리와 루마니아 지역으로의 공격을 상정한 것이었다. 두번째 것은 보다 스탈린의 흥미를 끈 것이었는데, 모스크바나 동 프러시아 부근은 충분히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어 첫번째의 경우 실제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코프는 마치 그가 독일의 진격로와 계획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회고록을 기술하였지만, 사실상 붉은 군대의 관심사는 독일 침공을 생각하고 있던 스탈린이 주목한 팔레샤(Polesye) 지역이었다고 한다.

일부 사학자들은 주코프를 빛나는 전술가로 묘사하며 뛰어난 군사적 업적 덕분에 그가 국민적 존경과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비록 다른 소련 지휘관들보다 전투 준비를 충실하게 하였다지만,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주코프는 승리밖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다른 소련 지휘관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아직도 많은 러시아 사학자들은 결과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 데이빗 글란츠(David Glantz)의 의견을 빌리자면, 주코프가 대규모 전면 공격을 너무 자주 사용한 것 때문에 그를 비난하는 러시아 역사학자는 일부이다.


그의 실패는 때로 은폐되기도 하였다. 르제프 전투같은 경우 명백히 그의 가장 큰 군사적 실패였지만, 이것은 1970년대까지 극비로 유지되어 언급조차 불가능하였다. 주코프는 스스로 단 번도 군사 작전이나 전술상의 이론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많은 역사학자들은 주코프를 뛰어난 전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인 믿음이나 일선 병사들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주코프에게는 병사들을 보살피는 아버지같이 자상한 면도 있었다. 그는 병사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러시아와 인민을 깊이 사랑하여 지켜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일화에 따르면 그는 일개 병사의 복장을 하고 지나가는 차들을 세워 전선까지 태워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차를 세우지 않았던 장교들은 나중에 전부 불려가 인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호된 질책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다. 1941년 9월 28일 주코프는 암호전문 4976호를 레닌그라드 전성과 발트해 연안 해군에게 보내어 독일에 포로로 잡힌 병사의 가족들과 되돌아온 포로들은 전부 총살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 명령은 1991년 러시아 잡지 '시작(Начало, Beginning)' 3호에 처음 공개되었다.

또한 1946년에는 그가 독일에서 소련으로 반입하려던 화차 7개 분량의 가구가 압류되기도 하였다. 1948년에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자택이 수색되었을때는 독일에서 약탈한 많은 사치품들이 발견되었다.


1954년 주코프는 오렌부르크(Orenburg)에서 130마일 떨어진 토스코이 지역에서 핵실험을 지휘하였다. 소련 Tu-4 폭격기는 2만 5천 피트 상공에서 40킬로톤 핵무기를 투하하였다. 그가 안전한 지하 핵벙커에서 관전하는 동안, 5천 명의 소련군이 그 지역에서 가상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또한 8마일 떨어진 곳에서는 4만 명의 병력이 주둔중이었다. 몇 명의 소련군이 죽거나 다치고 생식능력을 잃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은데, 이 일 자체가 극비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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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전승 기념식에서 백마를 탄 주코프


- 수상 이력 -

주코프는 많은 수상경력이 있다. 소련 연방 영웅 칭호를 네번 받았으며, 승리훈장(Order of Victory) 2개, 레닌 훈장 6개, 붉은기 훈장 3개 등 2차 대전중 총 41회의 훈장이 수여되었다.

소행성 2132번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995년 주코프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러시아 연방 정부는 러시아는 주코프 훈장(Zhukov Order)과 주코프 메달(Zhukov Medal)을 신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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