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풍부한 돈을 소유하고 있으면 큰 만족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풍부한 돈을 가지게 된다면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 역설은 아래의 사진 한장으로 쉽게 설명이 가능하다.

오늘날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국가의 부유함은 그들이 소유한 부를 미국의 달러로 환산한 가치로 평가된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미국 달러가 세상의 모든 부를 평가하는 잣대가 된 것일까?
- 달러의 태동 -
현대적인 지폐는 미국(미국이 아니라 네덜란드인것 같군요,)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1690년 아메리카의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프랑스인들의 식민지인 퀘벡을 침략했다. 탐욕스러운 이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당초 병사들의 급료는 퀘벡에서 약탈된 전리품으로 지급될 예정이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급료를 지급받지 못한 병사들보다 위험한 존재는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매사추세츠에는 이들에게 지불할 돈이 없었다. 따라서 식민지는 병사들에게 향후 화폐를 지불하겠다는 약속이 적힌 쪼가리를 나눠주었다. 이것은 일종의 약속어음이었다.
병사들이 받은 지폐는 효과적으로 통용되었으며 아메리카의 다른 식민지들도 매사추세츠의 편법을 따라하게 되었다. 특히 로드아일랜드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대량의 지폐를 발행했다. 대륙의 양심이라고 불리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지폐제도의 가장 열렬한 숭배자였다. 물론 그것이 프랭클린의 양심에서 기인한 것인지, 자신의 인쇄기로 지폐를 발행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출발한 것인지는 아직 규명되지 못했다.
런던 정부는 식민지인들이 발명한 지폐를 치졸하며 저열한 물건으로 여겼다. 당시 영국인들에게 올바른 돈이란 그것이 가진 가치만큼의 귀금속을 정부가 보증하는 형태로 주조한 Coin 뿐이었다. 마침내 18세기 중엽 영국 의회는 평시에 지폐를 발행하는 것을 금지했다. 프랭클린은 이 조치를 철회하기 위해 런던까지 건너갔지만 결국 자신의 사업이 끝장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물론 식민지에도 방만한 지폐 발행에 반대하며 영국의회의 조치를 환영하는 건실한 사람들이 다수 존재했다.
영국 식민지에서 지폐가 만들어진 것과 같은 시기에 퀘벡의 프랑스 식민지에서도 비슷한 물건이 등장했다. 프랑스 본국에서 출발하는 보급선이 늦게 도착하게 되자 관리들은 매사추세츠의 불한당들을 막기 위해 증강된 군대에 급료를 지불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이들도 약속어음을 발행하였다.
관리들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수 있고 내구성도 좋은 트럼프 카드에 대충 서명을 하여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어음의 가치는 카드의 종류에 따라 구분되었다. 스페이드와 클로버가 가치가 높았으며 하트와 다이아몬드는 그 절반의 가치를 지녔다. 트럼프 지폐는 1759년 영국의 울프가 퀘벡을 정복함과 동시에 사라졌다.
한동안 사용되지 않던 지폐는 미국혁명과 함께 되살아났다.
영국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무법자들은 자신들이 모집한 군대에 적당히 인쇄된 종이조각을 대륙지폐(Continental currency)라고 이름붙여 급료로 지불했다. 독립전쟁중 총 5억달러 상당의 대륙지폐가 무질서하게 발행되었다. 사기꾼들도 부지런히 가짜돈을 찍어냈다.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화폐는 그 양이 풍족할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다. 사람들의 호주머니에 지폐가 풍족해지는 만큼 달러의 가치는 급격히 하락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버지니아에서 구두 한켤레의 가격은 5천달러, 옷 한벌은 백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의 명성은 '1 대륙지폐만큼의 가치도 없다(Not worth a Continental)'라는 속담으로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오고 있다.
새로운 발명품인 지폐는 미국의 독립에 기여했지만, 그 결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국민들에게 큰 고통을 남겼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두번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 헌법은 주정부에 의한 일체의 지폐 발행을 금지하였다. 연방정부에 의한 지폐발행조차 원칙상 금지되었다.
영국은 식민지인들이 자체은행을 설립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독립과 함께 은행업이 합법화되자 여기저기서 은행권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불평을 늘어놓게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상품은 영국에서 수입되고 있었는데, 영국의 무역업자들은 믿을수 없는 미국은행권보다는 공정한 가치를 지닌 귀금속으로 댓가를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일부 비양심적인 은행가들은 자신들이 발행한 은행권을 그것과 같은 가치를 지닌 귀금속으로 교환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은행이 망해서 교환이 아예 불가능한 사태까지 발생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언제나 귀금속으로 교환할 수 있으며 영국인들과 거래가 가능한 화폐를 요구했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영국은행과 비슷한 중앙은행을 설치하여 그곳에서 통화를 발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중앙은행의 설치가 극소수의 엘리트에게 국가경제의 통제권을 주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격렬히 반대했다. 소모적인 논쟁끝에 알렉산더 해밀튼(Alexander Hamilton)이 주도하는 중앙은행 옹호자들이 승리했고 미합중국 제1은행이 공식 화폐를 찍어내게 되었다.
1달러는 정확히 371.4그레인의 은과 같은 가치를 가져야만 했다. 
1792년의 1달러
그러나 중앙은행 반대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 중앙은행의 면허는 19세기에만 두번에 걸쳐 취소되었다. 중앙은행이 부패했으며 설립 자체가 위헌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20세기 초까지 중앙은행을 설립하려는 시도들은 헌법적 이유 때문에 연이어 거부되었다. 중앙은행 옹호파와 반대파의 싸움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시기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앤드류 잭슨은 테네시 출신으로 촌스러운 용모를 지닌 것으로 유명했다. 반면 당시 중앙은행장이던 니콜라스 비들은 세련되고 매너도 훌륭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신사였다. 물과 기름같던 두사람은 곧장 충돌을 일으켰다. 1832년 미국 의회는 중앙은행의 면허를 갱신했다. 그러나 잭슨 대통령은 이 조치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최초의 중앙은행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중앙은행이 없어지자 각지에 새로운 은행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에서는 7천 종류의 은행권이 유통되고 있었는데, 이에 더하여 5천 종류의 위조 지폐까지 통용되었다. 그러나 합법적인 은행권이건 위조된 것이건 구매력이 제로라는 면에서 그 가치는 같았다. 사태가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마침내 1865년 주정부의 면허를 받은 소규모 은행들의 은행권 발급 권한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은행은 설립되지 않았고 화폐는 연방정부에 의해 지정된 민간은행이 발행하고 있었다.
- 연방준비제도이사회(Board of Governors of Federal Reserve System) -
1907년 영국의 런던에서는 미국은행이 발행한 어음의 할인이 거부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것은 미국 전역에 신용위기를 불러왔다. 결국 존 록펠러와 JP 모건등의 주장에 따라 미국 의회는 Owen-Glass 연방 준비법을 1913년에 통과시켰다. 이 법령에 따라 연방준비국[Federal Reserve Board, 1935년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Board of Governors of Federal Reserve System)로 변경]이라는 일종의 은행 카르텔이 탄생했다.
이 조직은 의장이 미국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다는 점에서 정부기관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주식이 전량 회원 은행들에 의해 소유된다는 민간기업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연방준비국이 이렇게 기이한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은 미국의 헌법정신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중앙은행을 설립하기 위한 일종의 편법 때문이었다. 연방준비국은 국가가 보유한 금의 통제권을 넘겨받았으며, 금본위제하에 연방 준비 은행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FRB는 단순한 도구로 강력하게 경제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회원 은행들의 지급준비율과 재할인율을 규정한다. 연방정부에서 재정지출을 할 때는 그 자금을 FRB에서 빌려온다. 결과적으로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화폐제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신용까지 통제하게 되었다. FRB의 결정은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역사상 단 한번도 회계감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5년부터 오늘날까지의 모든 미국 달러는 연방중비은행권(지폐의 인쇄는 정부가 한다. 그러나 인쇄비만 받고 모든 달러는 FRB에 넘겨진다.)으로 이루어졌다.
1차세계대전 동안 미국에서는 농산물과 부동산에 대한 대규모 투기가 일어났다. 이때 FRB는 민간은행에 유동성을 넉넉히 공급했는데, 이 조치는 1919년부터 20년까지에 걸쳐 대규모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켰으며, 결국 1920년부터 21년까지 불경기를 가져왔다. FRB는 과도한 유동성 공급이 인플레이션을 부른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미친듯한 주식거품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거품은 1929년 10월을 기해 무서운 속도로 꺼지기 시작했다. FRB는 과거의 교훈을 거울삼아 유동성 공급을 옥죄었다. 그러자 도처에서 은행들이 자금 압박을 견디다못해 파산하기 시작했다. FRB가 이자율을 낮추고 유동성 공급을 늘리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모든것이 늦어 있었다. 은행에 돈은 풍성했졌지만 그 돈을 빌려쓸 사업가가 없었다. 결국 전세계에 대공황이 찾아왔다.
- 대공황 -
대공황은 1929년 10월 24일 갑자기 찾아왔다. 며칠간 주식시장은 계속 약세를 띠고 있었는데 이날 갑자기 주식시장이 자유낙하했다. 뉴욕주식거래소의 시세 표시기는 시장의 추락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거래소는 사람들의 고함으로 귀가 멀 정도였으며 월스트리트 도처에 망연자실한 표정의 사람들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날 낮 뉴욕의 주요 은행장들이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자본가들은 특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거래소의 부이사장이자 모건상회의 주식 중개인으로 유명했던 리처트 휘트니가 대표로서 시장에 공개적으로 주식을 매수할 것임을 천명했다. 휘트니가 매수한 주식은 대수롭지 않은 액수였지만 시장은 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휘트니는 영웅이 되었고 거래소의 이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횡령죄로 형무소에 수감되는 처지가 되었다. 등락을 거듭하던 주식은 다음주 화요일에 본격적인 폭락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은행가들도 시장에 개입하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은행가들은 목요일에 구입했던 주식을 미리 다 팔아버렸다고한다. 이날 이후 주식시장은 3년간 하락을 거듭했다. 주식시장의 붕괴는 소비자의 지출과 기업의 투자를 완전히 위축시켰다. 대불황이 찾아왔다. 1933년까지 미국 노동자 전체의 1/3이 실업자였다. GNP는 1/3가량 줄어들었으며, 9천개의 은행이 파산했다. 
예금을 찾기 위해 장사진을 친 사람들 - American Union 은행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부유하고 산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불황은 더욱 심했다. 대공황에 영향을 받지 않은 유일한 나라는 소련이었다. 미국 경제는 2차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이때의 충격을 회복하지 못했다.
계속..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