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 집권기에 소련과 중국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음은 상식이다.

심지어 이때 중국은 소련과의 핵전쟁을 대비해서 베이징 지하에 핵 방공호를 파기도 했으니, 그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렇다면 애당초 우호적이던 양국의 관계를 흐루시초프가 망쳐버린 것일까?


결코 그것은 아니다. 

스탈린과 모택동의 관계도 그다지 순탄하다고 말할 성질은 아니었다.

장개석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한 모택동은 1949년 12월  소련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성심성의껏 모택동을 맞이했다. 毛 일행의 모스크바 방문을 축하하기 위하여 메트로포르 호텔에 열린 만찬에는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부들이 총출동하였다. 겉으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해 보였다. 그러나 만찬석에 앉은 스탈린과 모택동은 통역을 통해 두어마디 교환하고는, 서로간에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주변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도와주려 했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양국은 수뇌는 성향상 물과 기름처럼 화학적으로 섞일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계속된 며칠간의 회담에서도 스탈린과 모택동간의 냉랭한 분위기는 그대로 이어졌다.

1950년 2월 14일 30년간의 우호조약이 조인되어 양국은 형식상 동맹 관계를 맺었다. 물론 이 조약은 유효기간이 지나기도 전에 휴지통에 쳐박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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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죽고 한참이 지난 1957년 11월, 모택동은 볼셰비키 혁명 40주년 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두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당시 미국은 대만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毛를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국무장관 덜레스는 "미국의 안전을 확보하고 대만과 기타 섬들에 대한 장개석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대통령은 시의적절하고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굳게 결심하고 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모택동이 대만을 위협할 경우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毛는 소련이 자신의 편을 들어 미국의 힘에 정면으로 맞서기를 바라며 아래와 같은 제의를 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전쟁을 도발할지 모른다. 중국은 이같은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며, 현재 준비를 하고 있다. 미국이 핵무기로 중국을 공격하면 우리 군은 국경지대로부터 나라안 깊숙히 퇴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을 내부 깊히 끌어들여 중국 안에서 협공해야만한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소련은 초기단계에서 미국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해서는 안된다. 당신들은 적들이 우리 영토 안에 깊숙히 침투하도록 해야한다. 미군이 국토의 중앙부에 다다랐을때 당신들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들을 덮쳐야한다.

어쨌든 소련인들은 이런 미치광이같은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러번에 걸친 회의에서 모택동은 스탈린 격하운동의 부당함과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이 시기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주장하였으나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중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모택동은 소련의 지원 없이 독자적인 산업화를 시도하기로 결심하였다.

毛의 결심은 1958년부터 66년까지 계속된 대약진 운동으로 현실화되나,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모택동이 소련에 본격적으로 화가난 것은 1956년 2월의 제 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 독재, 기타 폭압적인 행위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나서부터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모택동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자신도 스탈린 못지않은 개인숭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해 9월에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제8차 전인대에서는 등소평의 제안으로 모택동과 관련된 당 규약의 일부를 개정하였다. '모택동 사상을 당의 최고 방침으로 한다.'와 '모택동 사상을 학습하는 것은 당원의 의무다.'라는 두 조항의 삭제였다.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이끄는 소련공산당의 입장변화는 바로 중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조치가 모택동을 당장 실각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최고권력자 입장에서는 내심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모택동이라 할지라도 국제 공산주의의 대세를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주덕과 함께 소련 공산당 대회를 다녀온 등소평은 혁명을 지속하려면 지식인들을 많이 끌어들여야 한다고 보고했다. 모택동은 그 제안을 수락하며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일어난 폭동은 지식인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마음껏 떠들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소위 백화제방(百花齊放)과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구호였다. 온갖 의견과 견해를 자유롭게 발표하라는 것이다.

모든 영역에서 백 가지의 꽃들을 피게 해서 백 가지의 사상과 학파들이 서로 겨루게 하라! 인민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할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말하라. 남김없이 다 말하라. 말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듣는 사람에게 교훈을 줄 수 있으니까.
- 모택동 -

그러나 이것은 노련한 모택동이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치밀한 음모였다.

백가쟁명이 진행되면서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발언이 이어졌고, 결국에는 공산당과 공산주의 자체를 비방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사태가 진전되자 모택동이 칼을 뽑아들였다.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이 독초(毒草)와 독사(毒蛇)로 지목되어 숙청당했다. 우경(右傾)이나 반소(反蘇)혐의로 숙청당한 당사자와 가족들의 숫자는 수백만명에 이르렀다.


모택동이 교묘한 계략으로 위태롭던 자신의 지위를 추스르자, 소련과 중국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 6월 세계 공산당 회의가 열린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흐루시초프는 다른 국가의 대표단과 함께 중국 공산당을 맹공격했다. 중국 또한 알바니아 공산당과 함께 격렬하게 반격했다. 같은해 7월 16일에 소련은 중국내에 파견된 모든 전문가들을 철수시킨다고 결정했고, 상호간에 체결된 수백건의 협정과 계약이 파기되기에 이르렀다.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은 신문 지면을 통해 상대방을 맹렬하게 공격하였으며, 이 논쟁은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가 실각할 때까지 이어졌다. 논쟁의 주된 내용은 '전쟁에 대한 시각, 자본주의 진영과의 평화공존에 대한 문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법론, 스탈린 비판' 등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흐루시초프의 철학을 수정주의(修正主義)라고 공격하였으며, 흐루시초프는 모택동의 철학을 교조주의(敎條主義, dogmatism)로 몰아붙였다.


양국 공산당 지도부간의 불화는 국가 차원의 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념 투쟁으로 시작된 분쟁이 결국 국경선 문제를 놓고 다투는 현실적 문제로까지 확장되어간 것이다.


흐루시초프를 이은 브레즈네프 시절에도 두 공산국가간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국경 지대에서는 몇백만의 병력이 서로 대치하였으며, 수시로 충돌을 일으켰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하자 서로간의 분쟁은 완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놓고 다시 양국간의 대립에 불이 붙었다. 소련은 베트남을 지지하였고, 중국은 베트남을 비난했으며 결국 중월전쟁을 일으켜 실력행사를 하기도 했다. 소련은 중국의 침략을 비난하고 베트남에 의용군을 파견하겠다고 위협했다.

1979년 12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입하자 중국은 이를 격렬히 비난했다.

양국의 불화는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고르바초프가 취임하고나서야 서서히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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