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에서는 창백한 얼굴의 한 중년 사나이가 초조하게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무슨 불법적인 일이라도 있나? 중앙위원회 총회를 준비하는 것은 법령에 반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는 그 사람을 잘 몰라. 그는 우리 모두를 총살시켜 버릴 것이란 말일세!
그렇지만 우리의 행동에 반당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네. 지금은 다른 시대... 스탈린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라네.
결단력이 부족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던 브레즈네프로서는 일생일대의 대모험이었다. 그는 감히 자신의 보스인 흐루시초프에 맞서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10월초, 흐루시초프가 이 음모를 알아챈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브레즈네프는 극도로 의기소침해졌다. 그러나 예상했던 권력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흐루시초프는 모두를 위해 극단적인 충돌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소련 인민들은 1964년 10월 16일 아침, 레오니드 일리치 브레즈네프(Leonid Ilyich Brezhnev)가 당의 새로운 최고지도자가 되었다는 내용의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되었다.
제1서기가 된 브레즈네프는 한동안 정신없이 지냈다. 공산주의 국가 정상들에게 전화를 하고, 동지들을 위해 만찬을 준비하였다.
이때 前제1서기는 자신의 별장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향후 생활을 위해 연금과 크렘린 식당, 별장과 아파트 등에 대한 몇가지 요구사항을 새로운 제1서기에게 전달하였다.
브레즈네프는 단 한가지 요구사항만 수정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관대히 받아들여 주었다.흐루시초프는 예전처럼 총 100루블 상당의 건강식 보조금을 받기를 원했지만 제1서기가 배정한 금액은 70루블이었다.
흐루시초프와 브레즈네프 - 2차대전 중
- 권력으로 가는길 -
브레즈네프는 우크라이나의 카멘스코(Kamenskoe, 현재는 Dniprodzerzhyns'k)에서 금속 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1년 브레즈네프는 쿠르스크의 버터 제조공장에 노동자로 취업하였고 2년후에는 카멘스크로 가서 철 세공 기술자의 도제가 되었다. 이후 쿠르스크의 경지정리 기술학교를 졸업한 브레즈네프는 토지 측량사로 당분간 일했다.
1930년에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의 칼리닌 농업용 자동차 전문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33년부터 35년까지는 금속공업학교의 교장으로 일했다. 1935년에는 극동지방에 위치한 14메흐 군단 전차중대의 정치부 지도원으로 취임했으며 1937년에는 드네프로제르진스크시 소비에트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브레즈네프는 계속 순탄하게 직책이 상승하여 1939년에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지구당 위원회의 서기가 되었다.
1930년대는 스탈린이 무서운 대숙청을 벌이던 시기였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쫓겨났지만, 브레즈네프처럼 행운을 타고난 사나이는 마치 엘리베이터를 탄 것처럼 급속하게 승진할 수 있었다. 그는 1934년의 당 검열을 성공적으로 통과했으며, 어떠한 의심조차 받은 일이 없었다.
브레즈네프는 2차 대전이 터지자 붉은 군대의 정치 위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1943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우크라이나 전선의 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전쟁 기간 중에도 이 행운아는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으며, 실책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는 4개의 훈장을 받으며 무난하게 전쟁을 넘겼다.
전쟁이 끝날 즈음 브레즈네프는 제4 우크라이나 전선의 정치국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45년 6월 24일 붉은광장에서 열린 전승 기념식에 제4우크라이나 전선의 구성원으로 참가했는데, 이 일은 브레즈네프 평생의 자랑거리로 남았다.
브레즈네프 - 1942
전후 브레즈네프는 다시 맹렬한 승진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946년 8월에 그는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주 공산당 제1서기로 승진했고, 1947년 11월에는 드네프르페트로프스크주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의 이런 출세길 뒤에는 흐루시초프라는 후견인이 버티고 있었다.
1950년 7월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로 호출을 받았다. 흐루시초프가 그를 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추천한 것이다. 몰다비아는 경제력으로 볼때 그가 이전에 재임했던 드네프르페트로프스크주보다도 뒤떨어졌다. 그러나 공화국 제1서기의 직책은 주위원회 제1서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는 자리였다.
흐루시초프는 몰다비아에서 되도록 빨리 농업 집단화를 완수하고 부르조아 루마니아의 영향력을 없애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하였다. 몰다비이에 부임한 브레즈네프는 그해 가을 다음과 같은 특별사항을 당일꾼들에게 강조하였다.
브레즈네프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기가 된 것은 제19차 공산당 전당대회였다. 여기서 스탈린은 정치국을 대체할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멤버들을 직접 지명하였는데, 놀랍게도 브레즈네프가 후보간부로 지명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소련 권력의 핵심에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대회가 치뤄진지 5개월만에 스탈린이 사망했다. 그러자 권력자들은 즉각 간부회의 멤버들 중 절반을 해직시켜버렸다. 권력이라는 물에 발을 담궈보기도 전에 세수대야가 없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1954년 1월 흐루시초프는 브레즈네프를 카자흐스탄 공화국 공산당 제2서기로 임명하였다. 그의 임무는 황무지로 방치된 미개척지의 개간이었다.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임무를 부지런히 수행했다. 흐루시초프는 1955년 3월 그를 카자흐스탄 제1서기로 승진시켜주었다.
1956년 브레즈네프는 마침내 모스크바로 돌아와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후보이자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년 후 흐루시초프 축출을 꾀하던 이른바 몰로토프, 말렌코프 등이 모의한 이른바 반당분자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보스인 흐루시초프를 철저히 보위하였고, 1960년 5월 7일에는 최고 간부회의의 정회원 겸 명목상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인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이 되었다.
1964년 7월 15일, 브레즈네프는 소비에트 의장직을 사퇴하고 중앙위원회의 제2서기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후 그는 흐루시초프를 쫓아내고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자리에 올랐다. 명실상부한 소비에트 연방의 제 1인자가 된 것이다.
- 브레즈네프의 통치 -
새로운 제1서기는 이전의 소련 지도자들에 비해 평범한 사람이었다. 날카로운 두뇌도 탁월한 개성도.. 불꽃튀는 정치력이나 외교력도 없었다. 오로지 특유의 짙은 눈썹에서 풍기는 외모상의 카리스마만이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평범한 사람도 때로는 정치적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지지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브레즈네프를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인물로 생각했다. 제1서기를 쫓아내려는 음모자들에게는 얼굴마담을 해줄 꼭두각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실제로 브레즈네프는 말년에 공식 석상이나 식사 자리에서 아부나 듣는데 만족하는 허수아비가 되어버렸다. 수슬로프, 안드로포프, 우스티노프, 체르넨코, 그리신, 티호노프, 그로미코 등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브레즈네프를 좌지우지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권력은 브레즈네프의 손에서 술술 흘러나갔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했던 것은 스탈린 이래로 다듬어져온 고도의 관료조직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문제에 대해 결정하거나 토론해야 할 때면 서기장 앞으로 중앙위원회의 각 부서에서 미리 작성된 서류들. 미리 준비된 결정사항이나 결의문의 초안, 기타 정보들, 결론과 연설문들이 제출되었다. 서기장은 공산당 관료조직의 등에 업혀 실려가는 존재에 불과했다.
1973년 12월 27일 전년의 활동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서기장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동지들! 우리는 완전한 동의 속에서 그리고 레닌이 교시한 정신 안에서 활동을 합니다. 우리 당에는 완전한 일치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반대 정파도 존재하지 않으며 쉽게 문제들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브레즈네프와 그의 동료인 늙은이 정치국원들은 채택된 결정사항이나 방침의 안정성과 토론 과정에서의 획일성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서기장은 간혹 우리의 위대한 레닌당과 우리 인민들에 대한 헌신을 위해 가끔씩은 우리들 스스로 피곤함도 잊어야 한다고 자화자찬하곤 했다.
서기장은 항상 국가의 정세가 안정적이고 순탄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1972년 11월 20일, 사무국회의를 개최하며 말했다.
흐루시초프의 질풍같은 개혁 시대 이후, 브레즈네프의 안정적이며 데카당스한 긴 겨울이 찾아왔다.
공산당과 국가는 점차 노쇠해져갔다. 각 지역 당위원회는 봉건화되었고 외부의 지령없이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수동성으로 점차 나태해져갔다. 사회에서도 냉소적인 풍조가 만연했다. 모든 조직에서 뇌물과 매수가 극성을 부리며 계획과 조작, 거짓과 과시적인 정보의 유통이 일상적인 현상으로 변해갔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소비에트 연방은 정치와 경제, 그밖의 모든 사회적 토대의 부진과 부패로 점차 침체의 길로 빠져들었다. 국가의 공업 성장은 완전히 멈췄다. 정치국은 거대한 국가를 먹여살리기 위해 식량 수입용의 금을 분배하는 일을 매년 수행하게 되었다. 생활필수품은 갈수록 부족해졌고 이것은 매수를 비롯한 경제범죄를 더욱 촉진시키게 되었다.
사회주의가 안정되고 평온한 사회로 발전하자, 이는 스스로를 침체와 몰락으로 서서히 내몰았다.
국가가 침체에 빠지게 된데는 군사력의 과도한 증강도 한몫을 했다. 미국은 치열한 군비경쟁을 통해 경쟁국인 소련을 완전히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1969년 1월 모스크바에서는 귀환한 우주비행사들에 대한 환영행사가 열렸다. 크렘린으로 향하는 이들의 자동차 행렬에는 서기장도 함께 서있었다. 대열이 크렘린의 보로비츠키 문에 이르렀을 때 빅토르 이바노비치 일리인 소위가 선두 자동차를 향해 총을 쏘았다. 브레즈네프는 다른 차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일리인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두달후 암살자는 불치의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카잔의 특수 정신병원에서 18년을 보냈으며, 그후 2년간 레닌그라드에서 감금되었다. 강제치료 20년만에 일리인은 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었다.
- 프라하의 봄 -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여러가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사람들은 스탈린주의가 초래한 결과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신문과 잡지, TV를 통해 민주화의 필요성과 참된 의미에서의 다원주의의 발전, 그리고 소련과 동등한 관계를 정립하라는 견해들이 쏟아졌다.
이것은 후일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게된다.
1968년 알렉산더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선출되자 소련 지도자들은 그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자유와 독립. 민주주의는 크렘린에 반혁명과 기회주의, 마르크시즘에 대한 배반 혹은 자본주의로 이동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프라하의 모든 움직임과 두브체크의 모든 성명에서 소련 정치국은 일상적인 배신행위를 찾아낼 수 있었다.
두브체크
1968년 5월 6일 브레즈네프는 두브체크와 면담한 후 "공산당은 한사람의 지도자를 잃게 되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1968년 7월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이 연합 훈련을 시작했다. 이것은 프라하의 봄에 대한 군사적 협박이었다.
한편 체코 공산당의 강경파 지도자들은 자국내의 상황에 대해 우려하며 브레즈네프에게 여러차례 군사개입을 요청하였다.
- 1992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무부 제6국의 특별서류철에서 발견된 체코 공산당 지도자들의 편지 -
결국 브레즈네프는 군사개입을 결정했다. 작전 개시 시간이 임박할수록 수슬로프의 명령에 따라 신문과 잡지, TV들은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협한 것이 아니라, 이 작은 나라가 거인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작전은 매우 질서정연하고 전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공수부대와 기갑부대가 투입되어 교량과 주요지점, 비행장들을 장악하였다. 체코인들은 격렬히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반들을 환영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분노의 눈길과 격앙된 목소리로 이들을 맞이했다. 대통령인 루드빅 스바보다는 무력충돌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민들에게 지혜로움과 자제를 보여줄 것을 호소했다.
몰로토프 칵테일을 얻어맞은 소련 탱크
8월 21일 새벽 4시, 소련 대사관의 검은색 볼가 승용차가 체코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로 다가왔고, 그 뒤를 장갑차와 탱크들이 따랐다. 적갈색 베레모와 줄무늬 셔츠를 입고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주위에 쏟아졌다. 잠시후 두브체크 제1서기와 체코 공산당 지도부들이 체포되었으며, 이들은 곧장 자동차에 실려 비행장으로 운반된 후 소련 수송기에 밀어넣어졌다.
KGB는 소련군이 진입만 하면 체코의 친소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브레즈네프에게 보고했었다. 그러나 프라하에서 소련군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배반자들은 극히 소수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매우 불안해했다. 모스크바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소련의 침공으로 되살아난 체코의 건강한 세력들은 당의 지도하에 모든 반혁명분자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할 것이며, 수정주의자들의 범죄를 준엄히 심판하고 어긋난 국가를 레닌-스탈린의 길로 조속히 귀환시킬 터였다.
그러나 체코 인민들은 무례한 점령자들에게 어떠한 종류의 지지도 보내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 지도부의 낙담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인 스바보다는 즉각 두브체크와 그 동료들을 석방해 달라고 요청했다. 과거 전쟁에서 보여준 스바보다의 위대한 공적을 존경하던 브레즈네프는 대통령과 자신의 집무실에 나란히 앉아 그를 계속 달래야만 했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입니다. 잘 풀릴 것입니다. 두브체크와 체르니크는 이 일을 위해, 즉 반혁명을 심판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서기장은 결국 소련 공산당과 체코 공산당 대표단 사이에 회담을 열기로 결정했다. 포로와 노획자들 사이에 기묘한 회담이 시작되었다. 브레즈네프는 1시간 반에 걸쳐 체코인들을 비난했다.
그는 두브체크가 자신의 신임을 어겼으며, 크렘린의 지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 격분해 있었다.
"나는 자네를 믿었어. 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네를 보호해 주었어. 나는 우리의 사샤(두브체크의 애칭)는 훌륭한 동지라고 말했어. 그런데 자네는 우리 모두를 엄청난 곤경에 빠트렸단 말일세!" 브레즈네프의 목소리는 비애로 떨렸고, 눈에는 물이 글썽글썽하게 맺혔다. 그는 정말로 분노해 있었다.
체코인들도 결코 만만하지는 않았다. 회담장에서는 연신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몇시간에 걸친 회담의 결과 체코 대표단은 민주적 개혁을 끝낸다는 의정서에 서명하는데 동의하였다. 자정쯤에 모든 준비가 완료되고 서명의 순간이 되었다.
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수십명의 사진기사들이 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순간 소련 정치국 멤버들은 모두 일어나 책상위로 허리를 구부리며 반대편에 앉은 체코 대표단원들을 껴안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프라하에 잠시 찾아왔던 봄의 희극적 결말이었다.
1968년 11월 12일, 바르샤바에서 브레즈네프는 후일 '제한주권론'으로 불린 자신의 사상을 피력한다.
- 아프가니스탄 침공 -
1978년 4월 27일 누르 무하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가 이끄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원 수백명이 1개 비행기 중대와 1개 탱크대대를 앞세우고 왕궁을 점령하고 권력을 탈취했다. 대통령 무하마드 다우드는 살해당했다.
타라키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몽상가였다. 반면 초기 외무장관이던 아민(Hafizullah Amin)은 사회주의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교활하고 비밀스러운 모략가였다.

타라키
타라키는 혁명 직후 자신을 방문한 소련 대표단에게 자신들의 혁명을 보호하고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브레즈네프에게 전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타라키의 권력은 매우 허약하였고 그해 여름부터 이미 아민과 불화를 겪고 있었다. 9월에 타라키는 모스크바를 방문하였고 브레즈네프에게 아민을 비롯한 체제에 대한 위협을 이야기하며 소련군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서기장과 안드로포프 KGB 의장은 지도부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아민과 통합을 시도해보라는 조언을 했다.
카불로 돌아온 타라키는 아민을 대통령 관저로 초대했다. 아민은 이 초대를 의심스러워했지만 소련 대사 푸자노프의 안전보장을 받고 대통령궁으로 향했다.
아민이 타라키의 관저에 도착하자 건물 지붕에 숨어있던 타라키의 부하들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아민은 즉각 반격을 시작했다. 한달간의 싸움 끝에 아민이 타라키를 제압하게된다. 그러나 아민은 큰 실수를 범했다.

아민
1979년 10월 9일, 카불 라디오 방송은 인민민주당 전 서기장과 그의 부인이 불의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방송했다. 타라키는 침대에서 아민의 부하들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한 것이다.
브레즈네프는 이 소식에 경악했으며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는 불과 3주전에 자신의 집무실에서 타라키를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지지를 약속했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아민은 끊임없이 전보를 보내 브레즈네프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는 모든 일이 타라키가 분쟁을 일으킨 것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아민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소련 고문관인 자플라틴 장군을 통해 모스크바에 편지를 전달하며, 자신의 절대적인 충성심을 재차 확인시키길 갈망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1979년 12월 6일, 정치국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
12월 26일 (아민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던)소련 특수부대가 대통령궁을 공격하였다. 아민과 그의 가족들, 보좌관과 친인척. 하인들까지 모두 살해당했다. 끊임없이 모스크바에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려했던 아민은 특수부대가 공격하는 그 순간까지도 소련대사관과 연결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결국 팬티만 입은채 살해당했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궁 - 1987년 소련 육군 40군의 사령부로 사용될 때의 모습
다음날 소련군 병력이 국경선을 넘어 대대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했다. 1989년 2월 15일까지 13,826명이 죽고 19,985명이 부상당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시작이었다.
소련군들은 인민들을 포섭하기 위해 설탕과 차, 밀가루 등을 선물했다. 아이들에게는 사탕과 장난감을 줬다. 그러나 답례는 이슬람교도들의 신념에 넘치는 총알일 뿐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은 점점 수렁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1981년 2월 23일, 제 2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발언했다.
물론 남부 국경선에 대한 위협이나 아프간 혁명에 반대하는 일부 유럽국가의 간섭이라는 그의 발언은 매우 허황된 것이었다.

- 브레즈네프의 훈장 -
브레즈네프는 2차대전 동안 4개의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전쟁중 소장 계급까지 진급했고 중장으로 군생활을 끝냈다. 그러나 서기장이 된 후 그는 자신의 경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1976년 5월, 소련군은 소비에트 연방 중앙위원회에서 서기장에게 원수의 칭호를 부여하기 위한 추천을 했다. 그런데 원수의 제복에는 훈장이 필요하다. 그런 연유로 훈장이 뿌려지게 되었다.
원수의 제복에는 국가 최고훈장인 영웅의 별이 매달리게 되었다. 1966, 1976, 1978, 1981년에 서기장은 소비에트연방 영웅칭호를 수여받았었다. 흐루시초프 때 이미 사회주의 노동 영웅의 칭호를 받았다.
정치국원들은 앞다투어 서로 브레즈네프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하는 경쟁을 벌였다. 서기장은 황금으로 만든 메르쿠리오스 조각상과 레닌평화상, 평화의 금메달, 아프가니스탄 메달인 자유의 태양, 사회과학 분야의 최고 훈장인 마르크스 기념 금메달, 문학 분야에서의 레닌상, 당원증 2호(1호는 레닌을 위해 비워둠), 공산주의 청년동맹증 제1호, 소비에트 연방 거주 50주년 배지등을 수여받았으며 매번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후일 고르바초프는 정치국 회의에서 한 공산주의자의 편지를 공개했다.
- 노쇠한 서기장 -
말년에 이르자 서기장은 자신을 위해 잘 꾸며져 종이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문장들은 발음조차 힘겨워하기에 이르렀다. 노쇠한 지도자는 보좌관들의 메모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이 상황은 소련 특유의 농담으로 표현되고 있다.
"다정하고 존경하는 간디 여사님!" 서기장은 안경을 고쳐쓰며 다시 중얼거렸다. 낙담한 보좌관은 서기장의 실수를 정정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자 브레즈네프는 돌연 역정을 내며 말했다. "나는 도대체 마가렛 대처가 누구인지 모르겠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히 인디라 간디라고 써있단 말일세!"
또한 브레즈네프는 틀니 문제로 명확한 발음에 어려움을 겪었다. 때문에 그의 보좌관들은 몇가지 발음하기 힘든 단어들의 사용을 가능한 피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흐루시초프 시절에는 정치국원들이 평균적으로 하루에 10~12시간씩 근무를 했으며, 출장과 회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여러가지 위원회를 이끌어야만 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활동체계를 만들었다. 브레즈네프는 1966년 7월 28일, 정치국원들의 생활에 대하여 1년에 2개월 반의 휴가와 오전 9시부터 오후 17시까지를 업무시간으로 정할 것을 결정했다. 그나마 1970년대 중반 이후 자신이 쇠약해지면서부터는 거의 필요한 최소한의 활동만 했다. 집무실에 하루 2~3시간 들르기는 했지만 한주에 며칠식은 모스크바 근교의 자비도바에서 머물렀다. 중앙위원회는 중요한 서류들의 경우 서기장의 서명을 미리 받아두는 방법으로 업무를 진행했다.
서기장이 가는 곳에는 어디나 의료진이 탑승한 앰뷸런스가 동행하였으며, 그가 업무를 보는 장소에는 모두 전담 의료실이 설치되었다. 1978년부터 브레즈네프는 여름 휴가로만 2개월 반을 쉬게 되었다. 위대한 공산주의 초강대국의 지도자는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은 상태였던 것이다.

별장에서 전화중인 말년의 브레즈네프
외국 정상들을 만날때면 브레즈네프는 완전히 엉뚱한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대화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할 때면 그는 통역관의 통역에 질책을 하기도 했다. 말년의 서기장은 자신의 몸무게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를 자신의 체중을 재는 것으로 시작했다. 안정된 몸무게가 만병통치약이라 믿었던 서기장은 약간의 몸무게 변화에도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건강 때문에 어쩔수없이 금연을 하게된 브레즈네프는 담배연기가 없이는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끔 동료들에게 자신의 침대 주위에서 흡연을 하도록 요청했다.
1982년 브레즈네프는 간신히 여러곳의 국내 시찰을 마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대중들을 만난다는 명목으로 비행기 공장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조립대가 무너져 내려 서기장의 쇄골을 부러뜨렸다. 지도자의 허약한 몸은 이로써 더욱 힘겹게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11월 7일, 10월혁명 기념일 노쇠한 브레즈네프는 붉은광장의 소련군 퍼레이드를 간신히 지켜보았다.
사망하기 전날도 서기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보냈다. 그는 자비도바에서 사냥을 마치고 귀가했다. 물론 자신은 더이상 기력이 없었기 때문에 총은 보좌관들이 쐈다. 서기장은 이곳 저곳을 지적하며 발사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뿐이었다.
브레즈네프는 평소 습관대로 뉴스 프로그램인 시간을 시청한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9시쯤 서기장의 방에 들어간 보좌관 메드베제프와 사바첸코프는 한 늙은이의 싸늘한 시신을 발견하였다.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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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정적들의 이름을 올렸답니다.
미국인들이 반대로 생각했죠."이것들이 실세구나."
얼마후 모조리 숙청된 것을 보고 매우 후회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