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Luitpold Himmler, 1900.10.7~1945.5.23)는 친위대 제국 총통(Reichsfuhrer-SS)의 직책을 오랜기간 역임한 제3제국의 지도자중 한명이다.
소련의 스탈린은 얄타회담 석상에서 NKVD의 수장인 베리아를 처칠과 루즈벨트에게 "우리의 히믈러입니다."라고 소개하였다. 베리아가 어두운 소비에트의 루비엔카와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를 상징하듯이 악명높은 제3제국의 강제수용소와 인종청소를 거론할때 항상 첫머리에 언급되는 인물이 바로 히믈러이다.
강도높으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노동,
규칙적인 일과 극도로 청결을 강조하는 주거환경 그리고 위생적인 신체관리,
흠잡을데 없는 식사,
엄격하지만 공평한 대우,
노동을 다시 배우고 수공업 관련 지식을 갖도록 지도하는 것이 우리의 교육 방식이다.
이 수용소에 걸린 구호는 다음과 같다.
자유로 가는 길이 있다! 그 이정표는 복종, 근면, 성실, 질서, 청결, 객관적 행동 양식, 진실성, 조국에 대한 희생과 봉사이다.
- 어린 시절 -
히믈러는 독일 남동부 뮌헨(Munich)에서 비텔스바처 김나지움(Wittelsbacher Gymnasium)의 교장인 아버지 요세프 히믈러(Joseph Gebhard Himmler)와 상냥한 성품의 소유자인 어머니 안나 히믈러(Anna Maria Himmler)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하인리히는 국가에 충성스러웠고 도덕적이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하인리히 가족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데는 별 부족함이 없었다. 요세프는 바이에른의 왕자 하인리히의 가정교사였으며, 왕자는 히믈러의 세례식에 참여하여 대부가 되어주었다. 하인리히 왕자는 1916년 전선에서 사망하여 히믈러에게 1,000 라이히마르크의 유산까지 남겨주었다.
1907년의 히믈러
어린 시절의 히믈러는 허약하나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등학교때 담임은 그를 매우 정력적이고 성실하며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후일 역사학자가 된 동기 조지 홀가튼(George Hallgarten)은 히믈러를 '양과 같이 온순하여 파리 한마리 건드리지 못하는 학생'이었다고 회상한다.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히믈러는 바이에른 왕실과의 연줄을 이용하여 장교로 임관하게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요세프는 아들의 이 부탁이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수없이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해군에 지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 에른스트 군터 쉥크 -
그러나 제국 해군은 지독한 근시의 허약체질 히믈러를 받아주지 않았다. 어쩔수없이 히믈러는 육군으로 방향을 돌려 1918년 제 11 바바리아 연대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허약한 히믈러는 군사훈련을 제대로 수료하지 못했으며, 그해 1차 대전이 종료되고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군의 병력 상한이 제한되자 곧장 군대에서 쫓겨났다.
짧은 시간의 농장일과 병치레를 겪은 히믈러는 1919년부터 1922년까지 뮌헨 공대(Munich Technische Hochschule)에서 농업경제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 시기 히믈러는 삶은 평범했으며 단골 식당의 주인 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처음에는 그녀를 여동생처럼 느꼈지만 나중에 사랑을 느끼게되어 고백했다 거절당했다고 한다.
1919년 4월 히믈러는 바이에른 인민공화국에 맞서기 위한 의용군에 가담했다. 그는 란츠후트, 오버란트, 21 소총여단, 주민 자치대 등과 같은 다양한 무장 집단에 참가했는데, 이들은 모두 '치욕스러운 베르사이유 조약'과 '공산주의 독재'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뮌헨 공대생 히믈러는 가톨릭을 믿는 성실한 청년이었으나, 차츰 가톨릭 교리상의 평등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다. 프리메이슨, 예수이트 교단, 유대인들에 의한 세계지배를 다룬 여러 작품들을 즐겨 읽었던 그는 차츰 아리안 신비주의(Ariosophy)에 빠져들었다. 독일 민족의 우월함을 신봉하게된 히믈러 청년은 고대 북유럽의 종교와 신화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인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를 읽으며 하인리히는 '고귀하고 도덕적이며 순결하고 숭고했던 조상들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독일 민족은 타락하였고 도덕이 문란해졌다. 따라서 히믈러는 순수했던 옛 게르만 시절을 꿈꾸게 되었다. 향후 SS 지도자가 된 히믈러가 친위대를 '고귀한 게르만 영웅들과 같은 국가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이끌어내야할 엘리트'라고 열렬히 주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어쨌든 히믈러 청년은 차츰 가톨릭에 대한 믿음을 잃어갔으며 절대신은 아리안인에게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내렸다고 믿게되었다. 또한 그는 병사가 되고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만일 독일이 다시 전쟁에 휘말리지 않는다면 스스로 전쟁이 벌어지는 나라를 찾아가겠다고 결심하였다.
-1921년 11월 23일. 히믈러의 일기 -
실제로 히믈러는 1924년에 소련대사관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농장 관리인으로 이민을 갈 수 있는지 문의했다. 20년후에 우크라이나의 농장을 마구 불태웠던 이 사람은 젊은 시절 농업경제학을 전공한 청년으로서 우크라이나의 농업발전에 기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만약 이때 소련대사관이 히믈러의 요청을 받아들였더라면 그의 일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1922년 8월 1일 평점 1.7의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이 청년은 비료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 NSDAP와 히믈러 -
1923년 11월 히믈러는 에른스트 룀(Ernst Rohm)의 돌격대에 가입하여, 히틀러의 맥주홀 폭동(Hitler's Beer Hall Putsch)에 참여하게 되었다. 에른스트 룀과 히틀러는 실패로 끝난 폭동의 죄값으로 감옥에 들어갔으나 미미한 잔챙이 히믈러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그러한 현실을 무척 괴로워했다.
"허풍이나 치고 말만 많았으며 정력적이지 못했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25년봄 히믈러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1차대전의 영웅 루덴도르프가 주도하던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는 지도자 그레고르 슈트라서의 비서가 되어 120 라이히 마르크의 월급을 받으며 바이에른 전역을 왕성하게 휩쓸고 다녔다. 1925년 2월 27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재창당되어 혼란스러운 와중에 히믈러는 급속한 승진을 거듭하게 되었다.
1926년 히믈러는 피신중이던 호텔 로비에서 스스로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순수한 독일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프로이센 귀족의 딸인 7살 연상의 이혼녀 마르가리테 지그로트(Margarete Siegroth)였다. 그녀는 매력적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아리안인의 특징을 잘 가지고 있었다.이 둘은 1928년 7월 3일 결혼하여 1929년 8월 8일 딸 구드룬(Gudrun)을 낳았다.
히믈러는 딸을 애지중지하며 인형이라고 불렀다. 마르가리테는 나중에 아들 하나를 입양하였지만 히믈러는 이 아이에게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둘 사이의 결혼생활을 쉽지 않았으며 1940년부터는 별거에 들어갔다. 당시 히믈러는 군사적인 이상주의에 집착하여 남편으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후 히믈러는 비서였던 헤드위히 포트하스트(Hedwig Potthast)와 점점 친밀해졌으며, 그녀는 1941년 일을 그만두고 히믈러의 정부가 되었다. 둘 사이에서는 1942년 아들인 헬게(Helge), 1944년에는 딸인 나네테 도로테아(Nanette Dorothea)가 태어났다.

친위대 초기 제복을 입은 히믈러
- 친위대장 히믈러 -
1925년 친위대에 가입한 히믈러는 1927년에 친위대 부사령관겸 친위대장 대리로 승진하였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이 역할을 매우 신중하게 수행하였다. 그는 맹목적으로 1인자에게 복종했으며 히틀러는 조건없는 충성을 보이는 이 신하를 차츰 신임하게 되었다.
- 히믈러 -
히믈러는 자상한 가장, 딱부러지는 상관 그리고 동료 관계가 원만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무언가에 홀린듯한 광신자, 괴팍한 몽상가 그리고 히틀러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우유부단한 꼭두각시이기도했다. 그와 히틀러의 관계는 점점 더 커져가는 애증으로 엮여갔다.
-카를 볼프 -
당시 친위대는 200명 정도로 구성된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히틀러 또한 친위대가 허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1942년 총통의 회상 -
1929년 1월 에르하르트 하이덴(Erhard Heiden) 해임 이후 히믈러는 정식으로 친위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항상 많은 인원으로 압도하던 에른스트 룀의 돌격대(SA)에 비해 히믈러는 친위대를 소수의 엘리트조직으로 만들고자하였다.
- 히믈러 -
친위대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얼굴 윤곽만으로도 아리안 혈통임을 알 수 있어야 했다. 히믈러는 지원자들의 증명사진을 꼼꼼하게 살펴 독일인으로서 적합하지 않은 특징을 가진 사람을 가려내려 하였다. 가령 넓은 광대뼈를 가진 사람은 몽골이나 슬라브 계통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히믈러 자신조차 넓은 광대뼈와 둥근 얼굴을 가지고 있어 남유라시아 인종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곤했다.
완벽한 아리안 자매와 함께한 친위대원들
히믈러의 휘하에서 친위대는 급격히 발전하였다. 1929년말에 200여명이던 인원은 이듬해 1,000명으로 불어났다.1931년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의 지휘 아래 악명높은 IC 부대가 생겨났다.
1933년 NSDAP가 정권을 잡으면서 친위대의 조직원은 52,000 명으로 급격히 증가되었다. 조직원들은 아리아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제 돌격대 중장(SA-Gruppenfuhrer)이 된 히믈러는 그의 부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함께 무장친위대를 돌격대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어린 시절 로마 황제의 근위대에 푹 빠져 있던 히믈러는 해골이 장식된 검은 모자, 검은테를 두른 하켄크로이츠 완장과 "친위대원 여러분, 충성심은 그대의 명예이다."라고 새겨진 버클, 그리고 휴고 보스(Hugo Boss)가 디자인한 검은색 복장을 친위대의 유니폼으로 만들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배신하더라도 우리는 충성스러운 신하로 남을 것입니다. 지상에서 항상 그를 위해 깃발을 올릴 것입니다."
- 에른스트 귄터 쉥크 -
1933년 가을 히믈러는 친위대 대장(SS-Obergruppenfuhrer)으로 임명되었고 정식으로 친위대 제국총통(Reichsführer-SS)의 호칭을 받아 경쟁자인 돌격대 사령관과 명목상 동격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한편 돌격대 사령관인 에른스트 룀(Ernst Röhm)은 야심이 큰 사나이였다. 그는 돌격대를 독일의 정규군으로 만드려 하였으며, 제국 수상에 취임한 후 정권을 안정시키려던 히틀러에게 공공연히 맞섰다. 히틀러 수상에게는 더이상 길거리에서 곤봉을 휘두르는 무뢰한들이 필요없었다. 경제계와 군부, 정치분야의 보수세력은 돌격대의 거친 행위들에 불안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들을 안심시켜야만 했다.
룀은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하였으며 히틀러가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혁명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외쳤다. NSDAP 간부들은 그가 돌격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였다. 이에 히믈러는 제국의 2인자 자리를 놓고 룀과 다투던 헤르만 괴링(Hermann Goring), 군부를 대표하는 베르너 폰 블롬베르그(Werner von Blomberg)와 함께 룀을 제거할 계획을 모의하였다.
히믈러는 괴링과 함께 룀의 쿠데타 음모를 날조하여, '총통의 권력과 목숨이 거대한 음모에 의해 위험에 처해있다'라고 히틀러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룀 제거 작전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이 계획에 따라 살생부가 만들어졌는데, 거기에는 쿠데타 음모와는 무관한 히틀러의 정적 그레고르 슈트라세(Gregor Strasser),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백명에 달하는 살생부의 목록을 20명 이하로 줄였다.
긴 칼의 밤(The Night of the Long Knives)이라고 이름붙여진 1934년 6월 30일, 히믈러는 괴링,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쿠르트 달루에게(Kurt Daluege), 발터 쉴렌베르그(Walter Schellenberg) 등과 함께 룀과 돌격대 수뇌들을 체포하였다. 히틀러는 오랜 동지인 룀을 처형한다는 것을 몹시 망설였다. 그는 한때 룀을 사면해주려 했으나, 돌격대 대장을 반드시 죽여야만한다는 괴링과 히믈러의 설득에 결국 동의하였다.
자살하라는 요구를 거절한 룀은 친위대원 테오도르 아이케(Theodor Eicke)에 의해 살해되었다.
- 부총통 루돌프 헤스 -
다음날 친위대 제국총통(Reichsführer-SS)이라는 히믈러의 호칭은 그대로 계급이 되었다. 
히믈러와 히틀러
1934년 7월 20일 히틀러는 특별 지시를 통해 친위대를 NSDP의 독립 조직으로 승격시켜주었으며, 히믈러에게 자신을 언제나 원하는 때에 만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 히틀러 -
1933년 경찰국장 대리로서 뮌헨의 행정권을 차지한 히믈러는 1934년 1월에 프로이센을 제외한 모든 독일 지역의 경찰들을 지휘하게 되었다. 또한 총통의 생일인 4월 20일 그는 프로이센 비밀경찰의 대리 국장 및 감독관이 되었다. 형식상으로는 프로이센 수상인 괴링이 게슈타포를 관할하에 두고 있었으나 지휘권은 1934년 11월 20일에 히믈러로 넘어갔다.
1936년 10월 1일 게슈타포법이 새로운 성립되어 지금까지 연방주의 관할이던 정치경찰이 중앙으로 통합되었다. 독일의 모든 정복 경찰조직이 질서경찰(Ordnungspolizei)로 통합되어 히믈러가 그 수장이 되었으며 친위대의 하부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히믈러는 모든 경찰 조직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1943년 내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히믈러는 무장친위대 제국총통 겸 내무성 산하 경찰총감(RFSSuCdDPidMI)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되었다. 히믈러는 1934년부터 그의 관할인 경치 경찰조직을 게슈타포로 재조직하였지만 이후 수행 성과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1943년 친위경찰(Politische Staffeln)이 조직되어 게슈타포의 독점 영역을 분할하게 되었다.
히믈러는 또한 크리포(Kripo)라는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권한 밑에 둠으로써 독일 내의 전체 수사기관의 수장이 되었지만 실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 하인츠 구데리안 -

다하우 수용소를 방문한 히믈러_1936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SD(Sicherheitsdienst)에는 유태인, 집시, 주술사,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기타 NSDAP에 적으로 간주되는 자들을 찾아 수용시설에 가두는 임무가 주어졌다. 히믈러는 1933년 3월 22일 다하우(Dachau)에 첫 수용시설을 개장하였다.
- 히믈러 -
히믈러의 적은 독일적이지 않은 모든 집단이었다. 슬라브와 같은 열등 민족, 집시, 공산주의자, 반사회적인 인간들, 동성애자들이 여기에 속했다.
- 히믈러의 특이한 취미 -
어렸을 때 하인리히는 오래된 약국 근처에서 자랐다. 그 경험은 히믈러가 가루약과 약초, 환약과 약단지에 심취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개인적인 관심은 일생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친위대원들에게 아침 식사로 부추와 광천수를 먹도록 권유했으며, 노동현장의 여성들에게는 스태미너식으로 생마늘을 먹으라고 지시했다. 히믈러는 껍질채 삶은 감자 문제를 매우 상세하게 다루었으며 개인적으로 이 문제가 완전한 규칙으로 정해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1944년에 친위대는 독일내의 광천수 75%를 소비했다. 히믈러는 대학생 시절 술을 잘하지 못했는데, 친위대장이 된후 독일인들이 맥주를 끊게 만들려 했다. 맥주 대신 그는 고대 게르만족이 마셨던 생물학적으로 우수한 음료수인 꿀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의 특이한 취미중 하나가 오늘날 대안치료법이라 불리는 괴상한 의술이었다.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귀리짚을 삶은 물로 목욕을 하는 것은 그가 최고로 생각하던 치료법이었다. 히믈러는 강제 수용소에도 약초밭을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히믈러는 매년 자신의 대원들과 크베들린 성당의 지하 납골당에서 신비롭게 꾸며진 의식을 가졌으며, 그가 경멸한 카알 대제가 4,500명의 작센인을 살해한 베르덴 지역에 죽은 이들을 기념하여 작은 숲을 조성하였다. 해마다 동지와 하지때 그곳에서 히믈러는 게르만 나팔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선조들을 추모했다.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히믈러가 벌이는 야단법석과 거리를 두었다. 총통은 히믈러의 엉터리 치료 행위와 고대 게르만 전통 어쩌구하는 놀음을 조롱하고 있었다. 나의 투쟁에서 이미 그는 민족 신비주의가 보이는 거짓 엄숙에 대해 반대 의견을 표명한 바 있었다.
- 히틀러 - 게르만 예배당을 짓자는 요구에 대해서
- 2차 세계대전 -
1941년 러시아 침공 전에 히믈러는 공산주의자 척결기구를 조직하였다. 친위대장은 제3제국과 중세의 십자군을 비교하였으며 무장친위대(Waffen-SS)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인 지원자들, 그리고 러시아 침공 이후에는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인 지원자들도 받아 볼셰비키로부터 유럽을 수호하는 다국적 십자군이라고 불렀다.
특히 소련에서의 자원자들은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민족의 군과 경찰 출신자들이 많았으며, 스탈린 체제에 대한 적대감으로 열정적인 활동을 벌였다. 서방 연합군에 대항하여 조직된 대원들은 위기에 처하면 항복하는 경향을 보인 반면, 소련에 대항한 대원들은 끝까지 싸우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는 소련이 사로잡힌 이들을 살려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41년의 히믈러 - 왼쪽부터 제프 디트리히(Sepp Dietrich), 칼 볼프(Karl Wolff)
1942년 히믈러의 오른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인 특공대에 의하여 프라하(Prague)에서 암살되었다. 히믈러는 이에 즉각적인 보복 조치를 단행하여 리디체(Lidice) 마을의 모든 남자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히믈러는 민스크에서 200명의 유대인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명령이 이행되지 않자 가벼운 쇼크를 느끼고 "유대인에게 내리는 벌이니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라고 격려하였다. 한편으로 엄격한 도덕 기준을 지닌 그는 친위대원에게 유대인을 살해할 권리를 주었지만 재산을 약탈하는 행위에는 엄중한 벌을 내렸다. 또한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적인 동기에 의한 살인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 히믈러 -
히믈러는 자신이 생각한 이상의 순수성이 훼손될까 두려워했으며, 부정부패를 저지르다 붙잡힌 인간들은 혹독한 댓가를 치뤘다.
1943년 내무장관이 된 히믈러는 게슈타포 외 모든 경찰조직을 손에 넣는 오랜 숙원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 빅토르 클렘퍼러(유대인 라틴문학자) -
그러나 경찰을 완전히 손에 넣는다는 히믈러의 꿈은 히틀러의 비서인 마르틴 보르만(Martin Bormann)에 의해 좌절되었고, 일반 경찰 조직은 당의 영향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히틀러도 그의 움직임에 불쾌감을 나타냈다.
모든 경찰을 친위대로 흡수하려던 몇 가지 계획이 좌절된 이후 히믈러는 경찰과의 관계 악화라는 댓가를 얻게 되었다.
왼쪽부터 마르틴 보르만, 괴링, 히틀러, 히믈러_1944년 7월 20일
1944년 7월 20일, 독일군 정보부(Abwehr)의 수장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를 비롯한 일부 장교들이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다 실패하였다. 이에 히틀러는 독일군 정보부를 버리고 제국내의 모든 정보 임무를 히믈러의 SD에게 일임하였다. 또한 예비군 책임자 프리드리히 프롬(Friedrich Fromm)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축출되자 이 자리 역시 히믈러에게 주었다.
히믈러의 권력은 크게 증대되었으며 그는 무장친위대 전력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친위대 장교들도 일부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이것을 기회로 보르만은 계속 그의 행보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1944년 말 히믈러는 라인강 북부의 독일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미군 및 프랑스군과 맞서서 1945년 초까지 그럭저럭 버텨낼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독일군을 격파하며 동쪽에서 밀고 들어왔고, 히틀러는 히믈러를 새롭게 구성된 비스툴라(Vistula) 집단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야전 지휘 경험이 없었던 히믈러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며, 곧 고트하르트 하인리키(Gotthard Heinrici) 장군이 지휘관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 히믈러 -
- 제3제국과 히믈러의 동반 몰락 -
독일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히믈러가 히틀러의 지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전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히틀러는 결코 히믈러를 자신의 후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친위대의 수장이었던 히믈러의 여러 행위가 점차 히틀러의 반감을 산 것이었다.
1944년과 1945년 사이의 겨울 무렵 무장친위대 전력은 91만명을 헤아렸다. 여기에 알게마이네 친위대(Allgemeine-SS)를 합하면 그 수효는 2백만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1945년 봄, 히믈러는 독일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포기하였다. 그는 NSDAP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 및 영국과 강화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히믈러는 덴마크 국경지대 뤼벡(Lubeck)에서 항복을 위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히믈러는 미군과 영국군이 독일군과 힘을 합하여 소련군을 격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히믈러와의 평화 협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제의는 언론에 배포되었고 4얼 28일 런던 라디오는 "히믈러가 히틀러는 이미 죽었으며 자신이 그의 후계자라고 주장했다."라는 보도를 내보냈다.
베를린에서 궁지에 몰려 자살하기 하루전, 이 소식을 전해들은 히틀러는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뻔뻔스러운 배신 행위'에 대해서 격분했다. 그는 히믈러를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즉각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히믈러는 친위대 제국총통, 독일 경찰 총감, 독일 국민회(German Nationhood) 제국위원장, 제국 내무장관, 국민돌격대(Volkssturm) 사령관, 그리고 독일내 예비군의 사령관이었다.
- 아르투어 악스만, 히틀러 유겐트 지휘관 -
협상에 실패하고 모든 직책을 박탈당한 히믈러는 대제독 칼 되니츠(Karl Dönitz)에게로 향했다. 되니츠는 U보트 승무원들의 호위하에 책상위에 브라우닝 권총을 올려둔 상태로 히믈러를 맞아들였다. 되니츠는 히믈러를 모든 직책에서 쫓아내고 자신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임명한다는 히틀러의 명령문을 보여주었다. 
Karl Dönitz
히믈러는 되니츠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자신은 국가의 2인자로서 그를 위해 일하겠노라고 제안했다. 되니츠는 경찰조직을 장악한 히믈러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잠시 망설이게 되었다. 그러나 5월 6일 17시, 되니츠는 자신을 찾아온 히믈러에게 더이상 귀하와의 만남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되니츠의 사무실에서 쫓겨난 히믈러는 새로운 외무장관 폰 크로직 백작을 우연히 만나 자신의 웅장한 계획을 언급하였다.
그때까지는 일단 몸을 피할 것이다.
히믈러는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장군에게 전갈을 넣어 전범 기소를 피하게 해준다면 전 독일군을 이끌고 연합군에 항복하겠다고 전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히믈러는 전후 독일의 경찰장관직을 희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히믈러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연합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히믈러는 되니츠 정부가 위치한 덴마크 국경지대 플렌스부르크(Flensburg)를 수일동안 방황하였다. 그는 콧수염을 깎고 왼눈에 안대를 한 채 가짜 문서들을 가지고 하인리히 히친거(Heinrich Hitzinger)라는 가명을 쓰며 비밀경찰 선임상사를 자처하였다.
히믈러 일행은 바바리아로 돌아가려 했지만 1945년 5월 22일 브레멘(Bremen)을 지나던 도중 영국군 순찰대에 가로막혔다. 키가 작고 마른 몸을 지닌 한 사람이 자신을 하인리히 히친거 상사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완벽한 그의 신분증에 의심을 가진 영국군 병사들이 그들을 바름슈테트 근교의 031수용소로 보냈다.
아직 영국군은 자신들이 악명높은 친위대장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히친거 상사는 소장인 실베스타 대위와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는 눈가리개를 벗고 자신의 안경을 낀 후 지친 목소리로 스스로의 정체를 밝혔다. 히믈러는 자신의 지위에 맞는 특별대우를 기대하였지만, 실베스타 대위는 곧장 친위대장의 옷을 벗겨 자살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히믈러는 5월 23일 뤼네부르크(Luneburg)의 영국군 2군단 사령부로 호송되었다. 영국군 정보부의 머피대령이 다시 몸수색을 지시하였다. 의사가 히믈러의 입을 검사하려 하자, 그는 이가 빠진 자리에 소지하고 있었던 청산가리(potassium cyanide) 캡슐을 깨물었다.
영국인들은 구토제와 위 세척을 통해 독약성분을 제거하려 애썼으나, 12분후 제3제국의 전-친위대장은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하인리히 히믈러다(Ich bin Heinrich Himmler)!' 였다고 한다. 히믈러의 시체는 5월 26일 영국군에 의해 장례식도 없이 황야에 묻혔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위치가 알려지지 않고있다.
타임지의 표지모델 히믈러_1945
일부 사람들은 그날 자살한 것은 가짜이며 진짜 히믈러는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히틀러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Alois Hitler)의 출생지인 비엔나(Vienna) 북부 슈트로네스(Strones) 지역에 숨어지내며 친위대의 부활을 획책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세프 벨링어(Joseph Bellinger)나 마틴 알렌(Martin Allen) 등은 이들은 히믈러가 영국군에게 잡혀 고문끝에 맞아서 죽었다고 주장한다.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는 데이빗 어빙(David Irving)에 따르면 이 때 히믈러는 얻어맞아 코뼈가 주저앉았다고한다.
혈통을 보고 가장 뛰어난 자를 고르며 엄격한 심사를 해야한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같은 혈통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성실하게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하며,
신의를 지키고 동지애를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동성애자들의 씨를 완전히 말리고자 한다.
법률가들은 법적으로 승인된 강도들이고,
사기꾼들이며 약탈자들이다.
다른 민족들이 우리의 문화를 살찌우기 위해
노예처럼 일할 때만 나는 그들이 잘 살고 있는지,
아니면 굶어죽고 있는지 관심을 가질 것이다.
우리와 같은 좋은 혈통의 민족들에게 있는 것을 우리는 가져올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들의 자식들을 뺏아와 우리들이 키울 것이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정당했다.
우리를 해치려는 이 민족을 없애는 것은
우리 민족에 대한 의무였다.
언젠가 가난하게 생을 마치는 것,
그것이 나의 이상적인 마지막 모습이다.
- 히믈러 -

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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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점이 1.x... 나보다 공부안한 인간이다.독일인 중에도 저런 대학생이 있구나.
제 생각에는 이 분은 아무래도 30년 독일의 전형적인 오타쿠 같습니다.
신비주의에 몸 약하고 내성적이고 기타 둥둥...
그나마 다행인게 괴링처럼 살은 안쪄서 말입니다.
항간에는 동성애자로 히틀러와 4제국총통(자칭) 루돌프헤스와 삼각관계를 이루었다는데 셋다 오타쿠 같습니다.
만화가(만화작가님들 죄송,비하 아님)나 되었으면 잘 나갔을 것 같은데요.
어찌보면 오타쿠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차라리 뱅크나 회프너 같은 마이너 중에 용자로 알려진 장군들을 택하지 그러셨어요.
그래도 나치독일이 전후무후한 워게임을 유산으로 물려준 것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소위 문명국들이 이제 전쟁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다라고 여기고 지들끼리는 전면전 안하죠.
(대신 제3세계에는 전쟁을 부추김...유럽에서 분쟁만 나면 예민하게 대처하는 얍삽한 친구들)
에휴 어찌되었든 공포의 베를린공방전하면 게임상에서도 "지독한 전장"이라는 말 밖에 안나옵니다.
45년 2월 게임시작하자 마자 쌀국과 영길리 공군의 폭풍 러쉬에 오데르강 동쪽의 불곰국의 스팀롤러...
치명타가 패튼의 제3군...작센지방으로 너무 쉽게 밀고 들어옵니다.
문제는 그래도 이겼습니다.쿠쿠쿠.컴의 AI가 너무 약해서 북독일만으로 승리했다는...
게임시작하자마자 홀랜드 집단군 전멸하고 중앙집단군도 붉은 군대에 괴멸해서 군의 60%이상이 날아가고
대부분의 지역이 전략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었는데도...
갈란트의 서커스팀하고 코멧등으로 서부지역 제공권 회복하고 기갑부대 재건해서 붉은 군대도 물리쳤습니다.
88년산 인공지능이라 역시...ㅋㅋㅋ 그 이후로 20년동안 이만큼 재미를 준 게임은 안나오더군요.ㅜ.ㅜ
하지만 MD판 어드밴스드 대전략(1메가...덜덜덜 엄청난 히트작이죠.) 부터 어드밴스드 대전략5까지
전장 하나하나가 하루종일 해도 안깨진답니다.
10시간은 족히 해야 프랑스나 독소전의 한개 전장정도 클리어가 가능합니다.FM대로 하면요.
전 클로즈컴뱃부터 팬저제네럴까지 안해본 게 없지만 일본의 어드밴스드 대전략처럼 지긋지긋하면서도 쉽게 손을 못 떼는
게임은 첨 봤습니다.
우습게도 인공지능이 20년간 별로 진보하지를 못해서 초기 MD판하나 이번에 나온 버전하나 난이도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플레이시간이 점점 살인적으로 길어지던구요.우울...
게임룰의 변화와 무기의 고증이 점점 발달해서 독일의 최후 본토 방공전의 재미는 "기적의 승리에서 완벽한 몰락"으로 바뀌었습니다.
전 하도 플레이시간이 걸려서 45년 병기를 39년 부터 생산해서 밀고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폴란드나 유고에서는 다리들이 15톤 돌격교라 판터가 건너지를 못하고 장난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역시 45년 무기들이 화력하나는 끝내줘서 플레이시간이 1/3로 줄더군요.
특히 E-50으로 야간에 야시장비 켜고 마구 연합군 탱크를 박살내는 쾌감은...(적은 쏴도 안맞음.밤이라...이쪽은 적외선)
게임룰이 완전히 변해버린 2001버전부터는 역사를 바꾸겠다고 시나리오 모드로 베를린에서 저항하던 것도 완전히 중지했습니다.지금 가상모드로 미국공격중인데 지블롤터까지 공격하다가 중단한지 꽤 되었습니다.
난중에 다시 하고 미국 굴복시키면 시나리오 모드에 무기편성표 고쳐서 베를린공방전이나 포츠담 전투를 다시 해봐야죠.
캠페인 모드에서는 포츠다에서 독일군이 붉은 군대를 전멸시키고 미영의 참전전에 전쟁을 끝냈습니다.후후후
제가 나중에...어드밴스드 시리즈의 걸작 MD판으로 기괴한 플레이를 아주 재밌게 편집해서 자게판에 올리겠습니다.ㅋㅋㅋ
그럼 기대하십시오.
옛날 고전게임 중에 정말 재미있는게 많았죠. 요즘 게임들은 그래픽만 더 좋아졌다 뿐이지 게임성 자체는 그리 나아졌는지 잘 모르겠어요. 디스켓 한장 1메가안에 그 방대하고 재미있는 내용들이 담겼었는데 요즘은... 쩝.
전략겜에 레벨업,진화 개념을 채택해서 바로 판터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정말 어드밴스드 대전략계열만 그러는데 그렇게 해놓으니까 오히려 시대적 상황에 적합해져 버렸습니다.
독일은 45년 4월까지 4호전차만 생산가능해서 이걸 경험치 쌓아서 진화시키면 판터->티커2 이런 식으로 설정해 놔서
독일 무기가 좋기는 하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무스탕 생산하고 독일은 bf109부터 생산하니 제공권이 서방측이 우위입니다.
전차는 소련이 우위죠.이러니까 오히려 균형이 맞더라구요.
독일이 판터와 포켓볼프를 기본 생산하면 전황이 급변해버리거든요.
그래서 어드밴스드가 장수하기는 하는데 문제점은 이렇게 키우다가 전멸하면 머리에서 스팀이 돕니다.
특히 만들기 힘든 170미리 포 같은 경우 105미리부터 4단계나 진화시켜야 하므로...
보병은 5~6단계 거쳐서 팔슈름예거까지 키울수 있는데 평지에 야보에 몰살당하니 대략 좌절입니다.
암튼 AI나 게임성에서 오히려 20년전 게임이 발군입니다.재플레이가 무지 많죠.역사를 뒤집어 보겠다고
플레이시간도 최신판의 1/5정도로 적습니다.
MD판이라면 방장님도 가볍게 즐겨볼 만 하실 겁니다.시나리오 모드가 재밌거든요.
E-50에서 E-100까지도 나오고 전투기도 P시리즈인가 P1101까지 나옵니다.
최신판은 잠수함도 타입별로 다 나오는데 스노켈로 24시간 잠수에 잠항후에도 고속 기동이 가능하답니다.
(연합군 잠수함은 그런게 지원안됩니다.)
V2나오고 공대공 로켓 R4M인가 슈발베에 다는 것과 프리츠X도 등장합니다.
지대공 로켓 나비같은게 없어서 아쉽지만요.핵무기도 등장합니다.이거 사용하면 재미가 엄청 반감됩니다.
좀 심하지만 아라도 E555같은 모델까지 등장하는데 B29보다 더 강력한 전천후 기체입니다.
제트 폭격기인데(항속거리 5천킬로 이상...) 문제는 폭탄을 투하하면 웬만한 전투기보다 더 강력합니다.
무스탕이나 스핏파이어를 가볍게 격추시키는 황당함...
야간에 적진에 폭격하고 야시장비를 이용해서 대공야전을 벌입니다.고고도 폭격기라 탄이 바닥날때까지 적기를 잡고
독일로 귀환하는 가공할 기체입니다.
그외에 기간트2 최신모델로 16톤 수송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보다 더한 보급도 가능하답니다.푸후후후...(43년에 개발된 모델이지만서도)
자게판에 게임소개글을 잠깐만 올리고 자겠습니다.ㅎㅎㅎ


솔직히 그냥 베를린에서 모든게 끝장나는게 낫지 쌀국,영길리,불곰국의 지시하에 동이나 서로 진격하는 것은
딱 질색입니다.(그래서 고의로 양측 모두에 시비?를 걸고 두진영 다 박살을 내거나 처참하게 박살나고 막을 내립니다.)
히믈러나 괴링은 서방측과 계속 교섭을 하려고 했지만 아돌프는 그런게 헛된 짓이라는 것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돌프 최대 실수는 소련과 41년이나 43년 치타텔작전 이전에 일시적인 강화라도 맺지 않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랬다면 서방측에 대해 "핵폭탄"맞기 전에는 필사적으로 싸웠을 텐데요.(으음...그게 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