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해 해전(Battle of the Philippine Sea)은 태평양 전쟁중 1944년 6월 19일부터 6월 20일까지 마리아나 제도에서 벌어진 미국과 일본 기동 함대간의 결전이다. 미군의 작전명은 약탈자 작전(Operation Forager)

일본측에서는 이 전투를 마리아나 해전이라 부르고, 연합함대의 작전명은 아호작전(あ号作戦, Operation A)이다. 여기서 아는 America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전투 기간동안 특히 6월 19일에 벌어진 양군 항공기간의 대규모 공중전은 마리아나의 거대한 칠면조 사냥(The Great Marianas Turkey Shoot)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필리핀해 해전의 결과 일본은 마리아나 제도를 미국에게 빼앗기게 되었고, 이 섬들은 일본 본토를 향해 날아오르는 B-29의 거대한 기지가 되었다. 이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총사퇴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 도입 -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섬에서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6개월 간 벌어진 처절한 소모전을 견디다 못한 일본군은 결국 미군 몰래 도망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경우 솔로몬 제도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연합 함대 사령부가 위치한 트럭섬은 태평양의 중심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내야만 하는 방위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런데 뉴브리튼섬의 라바울 기지가 미군의 수중에 떨어지면 이 트럭섬이 위험해진다.

연합함대(連合艦隊) 사령장관(司令長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는 라바울에서 미군기가 날아올라 트럭섬을 폭격하는 사태를 염려하고 있었다.


山本五十六

솔로몬 제도는 바로 이 라바울을 지키기 위한 최전선이었던 것이다. 연합함대는 과달카날을 차지한 미군들이 중부 솔로몬 방향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가용한 항공력을 총동원하여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이호(い号) 작전이라 명명되었고, 1943년 4월 7일부터 14일까지 야마모토가 친히 지휘하는 가운데 맹공격을 가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분주히 이곳저곳을 떠돌며 전선을 격려하던 야마모토는 4월 18일 오전 9시 35분, 뉴기니의 라바울 기지를 떠나 솔로몬 제도의 부겐빌(Bougainville)섬으로 향하던 중 미군의 P-38 Lightning의 매복에 걸려 살해되었다.



- Z 계획 -

사령 장관 야마모토와 참모 대다수가 목숨을 잃어 연합함대 지휘부가 텅비게 되자 해군성은 서둘러 후임으로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横須賀鎮守府司令長官)이던 고가 미네이치(古賀峯一)를 임명했다.


古賀峯一

고가는 발령 즉시 비행정을 타고 사이판을 거쳐 트럭 섬으로 이동하여 기함 무사시(武藏)에 사령부를 차렸다. 참모장으로는 군령부 제 1부장으로 있었던 후쿠도메(福留繁·) 중장이 임명되었다.

사령부를 구성한 고가 사령장관은 첫 회의에서 "이제 우리에게는 3할의 승산도 없다."라고 비관적인 견해를 밝혔고, 미군의 기동함대와 마지막 결전을 벌인다는 이른바 Z계획을 내놓았다.

Z 계획은 마셜 제도를 최후 결전장으로 상정하고, 이곳에 미국 함대가 나타날 경우 연합 함대의 모든 전력을 총동원하여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Z란 황색, 흑색, 적색, 청색 등 4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일본 해군의 함대 결전 깃발로, 동해 해전, 진주만 기습, 미드웨이 해전 등..  일본의 국운을 걸고 싸운 해전에 사용된 깃발이다.


1943년 9월에 접어들자 유럽 전선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해버렸다. 이에 따라 여유가 생긴 영국 함대가 인도양으로부터 태평양으로 진출하여 일본을 협공할 것이 예상되었다. 대본영(大本營)은 우선 서쪽에서 영국 함대에 일격을 가하고 그 여세를 몰아 동쪽의 미국 함대를 격멸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고가 장관은 "해군의 주요 적은 어디까지나 미국 함대이다. 그 주력이 태평양에 버티고 있는 한, 당연히 이들과 대결하는 전략 태세를 갖춰야한다."라고 주장하고 인도양 방면은 수비 부대에 맡겨 두면 된다고 명령하였다.

그의 태도가 너무나 강경한 탓에 대본영도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미국 함대는 좀처럼 결전의 기회를 주지 않았고, 솔로몬 제도, 길버트 제도, 마샬 제도 등을 신출귀몰하며 일본군 기지를 강타하였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는 마샬 결전의 승산이 희박하다고 본 고가는 한발 물러서서 마리아나, 카로링, 서부 뉴기니 선으로 방어 라인을 축소시키고, 이 지역에서 최후 결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른바 마리아나 결전 라인이었다.

만약 마리아나 방면으로 미군이 쳐들어올 경우 연합함대 사령부는 사이판으로 진출하고, 서부 뉴기니로 올 경우에는 필리핀의 다바오 섬으로 사령부를 이전하여 결전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 무렵 미군의 공격은 피치를 올리기 시작하여 Z계획의 최종 준비가 끝나기 전에 본격적 공세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하여 우선 2월 하순 제 1 항공함대의 일부 전력을 마리아나로 진출시켜 시간을 벌기로 하고, 고가 장관은 사이판과 다바오의 중앙인 팔라우에 사령부를 옮겨 미군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게 되었다.

제 1 항공함대는 일본 본토에서 결전에 대비하여 애지중지 육성된 항공대였으나, 선발대가 마리아나에 도착하기 무섭게 스프루언스 기동 함대의 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전멸되고 말았다.


루즈벨트에게 태평양 방면의 전황을 브리핑하는 니미츠


- 니미츠 라인 -

태평양 방면의 전황이 한창 무르익던 1944년 1월, 맥아더는 워싱턴에 라바울을 점령할 경우, 이후 태평양에서의 전략은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육군을 주력으로 뉴기니를 경유하여 필리핀을 점령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이 주장은 일본에의 반격전에서 주역은 육군이며 해군은 어디까지나 지원에 그쳐야 한다는 의미였다.

해군은 당연히 이 의견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해군은 자신들 나름대로 중부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을 공격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으며, 이것이 대일공격의 주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기니를 거쳐 필리핀으로 향하는 경로는 막대한 병력을 요구할 뿐더러,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쓸데없는 노력이 요구되는 어리석은 작전이라는 것이었다.


양측의 이런 주장을 조율한 끝에 워싱턴의 통합참모본부는 중부 태평양 루트로 전력을 집중하고 뉴기니에서 필리핀으로 이르는 선은 지원 작전으로 명맥을 유지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맥아더의 로비로 인해 실제로는 두가지 작전이 동시에 병행하여 진행되었다.

1943년 11월, 마침내 미 중부 태평양 지구 사령관 스푸루언스 중장의 함대는 태평양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Raymond Ames Spruance

이와 발맞추어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는 아래와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군은 중부 태평양 해역에서 조만간 미국의 대공세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들은 마샬, 길버트 양 제도를 제압하기 위해 미군을 상륙시키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가고 생각하고 있다."

이 대담한 통첩과 함께, 11월 11일에서 20일까지 엄청난 함포 사격과 수백기에 이르는 함재기의 대공습을 퍼부은 미군은 21일 새벽, 마킨, 타라와 양 섬에 상륙을 개시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니미츠 공세(라인)의 시작이 되었다.


1944년 1월 30일, 스프루언스 기동 함대는 마샬 군도에 2일간에 걸쳐 압도적인 포격과 공습을 감행한 후 2월 1일, 퀘제린 섬과 루오트 섬을 점령하였다.


길버트 제도와 마샬 제도를 점령한 니미츠 공세의 다음 목표는 중부 태평양에서 일본 해군의 최대 기지이자 연합 함대의 사령부가 위치한 트럭 섬이었다.


B-24 Liberator

2월 4일, 미국 해군항공대 소속의 리버레이터 폭격기 2대가 트럭섬을 사전 정찰하였다. 트럭 섬에는 연합함대의 기함인 무사시와 주력 항공모함 2척, 순양함 10척, 구축함 20척, 잠수함 12척에 50척 이상의 수송선이 주둔해 있었다.

미군의 정찰을 알아차린 연합 함대 사령부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미 함대와 운명을 걸고 결전을 벌이느냐. 그렇지 않으면 향후의 결전에 대비하느냐?

고가 사령장관은 후자를 선택하였다. 2월 15일, 연합 함대의 주력은 팔라우로 후퇴하였고 무사시는 본토의 요코스카로 보내졌다. 함대의 주력은 이렇게 대공습을 간발의 차이로 비하게 되었지만 악천후 때문에 출발이 늦어진 50척의 함정들은 미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2월 17일, 미쳐 해군 소장이 지휘하는 9척의 항공모함, 전함 6척, 순양함 10척, 구축함 40척, 잠수함 9척의 대 함대는 스프루언스의 지휘아래 트럭섬의 북동부로부터 공격을 가해왔다.

17일 아침부터 시작된 공격으로 일본측은 항공기 325기, 순양함 3척, 구축함 4척, 유조선 6척, 기타 수송선 20여척 등 11만 4천톤의 함선을 잃고 막대한 연료와 식량, 기타 군수물자를 한꺼번에 상실해 버렸다.

이것은 일본측이 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가장 짧은 시간에 입은 가장 큰 피해였다.


Eniwetoko로 진격하는 상륙정

트럭 섬이 스프루언스 기동 함대의 맹공격을 받던 2월 20일, 마샬 제도 서쪽의 에니웨코토(Eniwekoto)라는 작은 섬이 미군에 점령되었다.

일본군 수비대는 물론 전멸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본영은 미군이 이 섬을 점령한 사실을 국내에 발표하지 않았다. 반면 미국은 이 작은 섬의 점령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일본의 태평양 지배는 종말을 맞았다고 선언하였다.

UP통신의 리처드 존스톤 이 섬의 점령에 대해 아래와 같이 논평하였다.

"에니웨코토 섬은 중국 대륙의 연안을 향한 거대한 활시위가 되었고, 이 육상기지로부터 날아오르는 리버레이터 폭격기는 날아오르는 불화살이 되어 일본군의 아시아 대륙 최후 방어선인 트럭섬, 마리아나 제도를 향해 쏟아질 것이다. 일본의 태평양 지배는 종말을 고하고, 우리들이 그 지배권을 넘겨받은 것이다. 에니웨코토 점령과 동시에 우리들은 알루샨 열도의 아루 섬으로부터 남쪽으로 뉴브리튼섬에 이르는 거대한 공군의 쇠사슬로 일본 제국을 포위하고 트럭섬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트럭섬을 공격한 기동 함대는 22일, 마리아나 제도의 동쪽 해상에 나타나고 23일에는 사이판, 티니안 방면에 350기의 함재기로 첫 공습을 가하여 일본군 1 기지함대 소속의 항공기 94기를 격파하였다.

스프루언스는 다시 3월 30일, 1,100대에 이르는 함재기를 동원하여 팔라우와 야프섬에 대공습을 감행했고, 일본은 다시 함선 20여척과 항공기 203기를 손실하였다.



- 고가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실종 -

사령부를 팔라우로 옮긴 고가 제독은 3월초, Z계획을 더 구체화히기 위하여  결전의 주력으로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는 제1기동 함대를 새로 편성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중부 태평양의 여러 기지에 흩어져 있는 기지항공대들을 티니안 섬을 중심으로 확장, 정비하여 제1항공 함대로 통합하도록 하였다.

연합 함대 사령부는 다시 사이판섬으로 이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944년 3월 27일, 연합함대의 주력은 팔라우를 빠져나와 이동을 개시했다. 따라서 연합 함대의 주력은 다시 한번 간발의 차이로 미 기동함대의 공격을 피하게 되었다.

한편 3월 29일, 대본영에서 연합 함대로 미군의 수송 선단이 아드미라르티 군도의 북방을 향하고 있다라는 정보를 보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미군은 어딘가에 상륙 작전을 감행할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나 방면으로는 적이 상륙해올 낌새가 없었으며, 초계기를 아무리 날려도 적의 수송함대는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군의 수송선들은 서부 뉴기니로 향하고 있다고 단정지어졌다.

고가 사령장관은 기존의 작전 계획에 따라 사령부를 필리핀의 다바오로 옮길 것을 명령하였다.

3월 30일 밤 9시 55분, 고가는 수송기를 타고 다바오로 향했다. 바로 참모들이 탄 2번기도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2번기에 탑승했던 후쿠도메 참모장 외에 몇명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일본군의 수색대에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1번기가 남태평양의 열대성 저기압을 통과하다 희생된 듯하다고 전했다.

고가 사령장관의 후임으로는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横須賀鎮守府司令長官)인 도요타 소에무(豊田副武) 대장이 임명되었다.



- 맥아더 라인 -

1944년에 접어들어 중부 태평양에서 니미츠 공세가 가열됨과 함께, 남태평양에서는 맥아더 공세가 피치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1944년 1월 2일, 미국 - 오스트레일리아 연합군은 비스마르크 제도와 마주하는 뉴기니 북동부에 상륙 작전을 개시하였다.


1944년 2월 29일 - 전선의 장병을 격려하는 맥아더

이 공세에 직면한 일본은 이미 라바울의 항공 전력도 유명무실해진 상태로 뉴기니 북동부가 미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단이 없는 상태였다.

대본영은 3월 25일, 제 9 항대를 남서 방면 함대로 편입시켜 호란디아, 이리안 방면의 주요 항구에 사령부를 두기로 하였다.

제 9 함대는 라바울에 사령부가 위치한 '동남 방면 함대' 소속의 제 8 근거지대로부터 뉴기니로 파견되어 있던 분견대와 제 8 군수부 병력을 긁어모아 만들어진 급조 부대였다.

4월 22일, 맥아더는 뉴기니 북부의 중앙에 위치한 호란디아에 상륙을 감행하였다.

"적함 발견, 적의 함포 사격을 받다." 이런 전문이 수신된지 얼마후 통신은 두절되었다. 편성된지 한달도 되지 않은 제 9 함대는 순식간에 전멸하고 말았다.

뉴기니 북부에 교두보를 쌓은 맥아더는 이제 호시탐탐 필리핀을 노리기 시작하였다.


맥아더의 진로


한편 일본은 사이판, 트럭, 팔라우의 삼각 지대와 호란디아를 잇는 선을 절대 수비선으로 상정하고 필사적으로 항공 기지를 신설하는 등의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미군의 공격은 너무나 강력하면서도 신속하였다.

1944년 4월 4일, 대본영은 부랴부랴 제 4 함대와 제 14 항공 함대를 중부 태평양 방면 함대로 편성하고, 나구모(南雲忠一) 중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사령부의 위치는 사이판섬으로 정해졌다.


- 아호작전(あ号作戦) -

새롭게 취임한 도요타 소에무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참모들은 소위 말하는 항공 제일주의자들이었다.

당시까지 일본 해군에서는 전함 지상주의가 판치고 있었다. 그러나 진보적인 연합함대 사령부는 전함 이세와 휴가를 항공모함으로 개장하고, 야마토와 무사시 두척의 거대 전함은 항공모함 기동 부대의 지휘하에 두도록 결정하였다.

연함함대 사령부는 1944년 5월 3일,  아호작전(あ号作戦)이라는 명칭의 새로운 작전안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마리아나 결전안을 구체화한 것으로 미군의 다음 공격 목표는 팔라우라는 판단 아래 항공 부대들을 팔라우의 펠리류 기지, 하르마헤라의 와시레 기지 등으로 배치하여 연합 함대 해상 부대와 기지 항공부대가 협공하여 미국의 기동 함대를 격멸한다는 구상이었다.

이 작전이 성공할 경우 니미츠와 맥아더의 양팔이 절단되어, 태평양에서 미국의 공세는 당분간 불가능해질 터였다.


맥아더와 니미츠

계획에 따라 연합함대는 가능한 5월 하순까지 중부 태평양 방면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 특히 뉴기니 북서부의 작전 준비를 서둘러 결전 태세를 확립하도록 하였다.


항공대로는 우선 스미다(角田覺治) 중장의 제 1 항공함대 사령부가 티니안 섬에 배치되었다. 제 1 항공 함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멸되어, 한때 일본 해군의 편성표에서 지워졌었지만 1943년 7월부터 기지 항공대로 개편된 부대였다. 

이 부대의 편성과 훈련은 극비리에 행해졌고, 일명 대동아 결전부대(大東亞 決戰部隊)라고 불리어졌다. 부대 명칭도 용(1식육공), 매(함폭), 호랑이, 사자, 번개(전투기), 꿩(수송기)으로 불리어졌으며 맹렬한 훈련을 받은 최정예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었다.

트럭섬에는 제 22항공전대, 팔라우에는 제 61 항공전대와 제 23 항공전대, 다바오에는 제 26항공전대 등의 기지 항공대가 있었으나 이들의 전력은 거의 소모되어 이름만 남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Ozawa.jpg

아호 작전을 수행할 해상 부대의 주력은 오자와 지사부로(小沢治三郎) 중장 지휘하의 제 1 기동함대였다.

함대는 갑호부대와 을호부대로 이루어진 본대(제 3함대)와, 구리다(栗田健男) 중장 지휘하의 제 2함대로 나뉘어졌다.

편성표는 아래와 같다.


편성표

사령장관(司令長官):오자와 지사부로(小沢治三郎) 중장
총참모:코무라(古村啓蔵) 소장
기함:항공모함 다이호(大鳳)


제3 함대(第三艦隊) 제1 기동함대(第一機動艦隊) - 정규 항공모함 5, 소형 항공모함 4, 제로 전투기 225기, 혜성함폭(彗星艦爆) 99기, 99함폭(艦爆) 27기, 텐잔함공(天山艦攻) 108기, 97식 함상공격기(艦上攻撃機)、2식 함상 정찰기(艦上偵察機) 498기


갑(甲)부대

 제1 항공전대(오자와 사령장관 직속) :항공모함 다이호(大鳳), 쇼가쿠(翔鶴), 즈이가쿠(瑞鶴)
 제5전대(戦隊) - 하시모토(橋本信太郎) 소장 :중순양함 묘오꼬(妙高), 하구로(羽黒)
 제 10 전대 - 키무라 스스무(木村進)소장 :중순양함 노다이(能代)
 제 10 구축대(駆逐隊):구축함 아사구모(朝雲), 가자구모(風雲)
 제 17 구축대:구축함 이소가제(磯風), 우라가제(浦風), 유키가제(雪風), 다니가제(谷風)
 제 61 구축대:구축함 하쓰쓰끼(初月), 와까쓰끼(若月), 아끼쓰끼(秋月), 시모쓰끼(霜月)


을(乙)부대 키지마(城島高次) 소장

 제 2 항공전대(航空戦隊) : 항공모함 하야다가(隼鷹), 히요오(飛鷹), 소형항모 류우호(龍鳳) 전함 나가토(長門), 중순양함:모가미(最上)
 제 4 구축대(第十戦隊):미찌시오(満潮), 노와께(野分), 이즈모(山雲)
 제 27 구축대(第二水雷戦隊):히쓰유(時雨), 사미다레(五月雨)
 제 2 구축대(第二水雷戦隊):아끼시모(秋霜), 하야시모(早霜)
 제 17구축대(第十戦隊):하마가제(浜風)

이상 갑, 을 부대로 본대인 제 3 함대를 편성하고 제 2 함대가 이를 호위한다.


Kurita.jpg

제 2 함대 구리다 다케오(栗田健男) 중장

 제1전대 우가키 마토이(宇垣纒) 중장 :전함 야마토(大和), 무사시(武蔵)
 제3전대 스즈키(鈴木義尾) 중장 : 전함 공고(金剛), 하루나(榛名)
 제3항공전대 :소형항모 호오쇼(瑞鳳), 치토세(千歳), 치요다(千代田)
 제4전대(구리다 중장 직할):중순양함 아타고(愛宕), 다까오(高雄), 도리우미(鳥海), 마야(摩耶)
 제7전대 시라이(白石萬隆)소장 :중순양함 구마노(熊野), 스즈야(鈴谷), 도네(利根), 찌구마(筑摩)
 제2수뢰전대(水雷戦隊) 하야카와(早川幹夫) 소장 :경순양함 노시로(矢矧)
 제31구축대 :오사나미(長波), 아사시모(朝霜), 기시나미(岸波), 오끼나미(沖波)
 제32구축대 :후지나미(藤波), 하마나미(浜波), 다마나미(玉波), 하야나미(早波), 시마가제(島風)

이밖에 제 1, 2, 3 보급 부대가 함대의 유류와 탄약을 추진하였다.


이밖에 오자와 함대와 협조하여 미 기동함대를 공격해야할 제 1 항공함대의 편성표는 아래와 같았다.

제1항공함대(第一航空艦隊) 제5기지항공부대(第五基地航空部隊) 츠노다(角田覚治) 중장

제 22 항공전대
제 23항공전대
제 26항공전대
제 61항공전대





제 1 기동함대는 싱가폴 남방의 해역에서 맹훈련에 열중하였다. 미드웨이 전투와 솔로몬 소모전의 결과 일본 해군에는 숙련된 함재기 조종사들이 부족해졌던 것이다.

1944년 5월 15일, 제 1 기동함대는 보르네오섬의 동북쪽에 근접한 필리핀의 타우이타우이로 전진하여, 전함 무사시를 비롯한 구리다 함대와 합류하였다.

 

- 곤(渾)작전 -

이 무렵 뉴기니 방면의 전투는 날로 치열해지고 있었다.

제 23 항공전대의 사령부는 뉴기니 서북단의 에프망이라는 조그마한 섬에 위치해 있었다. 이 항공대에는 제 153 전투기대와 제 732 육상 공격기대, 제 753 항공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제 753 항공대는 비아크 섬으로 전진 배치되어 있었다. 비아크는 비교적 큰 활주로를 갖춘 비행장을 10개는 만들만큼 큰 섬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이곳이 미군의 수중에 들어가면 보르네오의 유전지대에 폭격이 가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5월 4일부터 비아크의 공습이 갑자기 치열해졌다. 앞서 점령된 뉴기니 북부의 호란디아 비행장의 정비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킨케이드와 맥아더

5월 26일, 토마스 킨케이드(Thomas C. Kinkaid)중장의 제 7함대 호위하에 미육군 제 41사단이 비아크에 상륙하였다.

연합함대 사령부는 비아크야말로 맥아더 공세의 가장 선봉이라고 판단했다. 비아크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질 경우 필시 미군은 이곳에 병력을 쏟아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은 기동 함대를 출동할 것이고 이것을 단박에 격멸하자는 구상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곤(渾)작전이라고 불렀다.

육해군 양군 통수부 사이에는 비아크 방면에서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여도, 아호 작전에 집중하기 위해 항공 병력을 분산해서는 안된다는데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군은 이 방침을 갑자기 변경하여 곤 작전에 제 1 항공 함대의 항공기 480대를 항공력을 투입하였다. 또한 연합함대는 미군 기동 함대를 유인하기 위하여 해상기동 제 2여단을 비아크에 역상륙시키려 하였다. 이들은 곤(渾)부대라고 불리었는데 D데이는 6월 2일로 잡아 놓았다. 그러나 제 2여단의 준비가 늦어진 관계로 D데이는 4일로 연기되었고, 그사이 미군의 B24에 상륙부대가 발견되어 한때는 작전 중지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6월 7일, 일본군 호위 함대와 미군 함대가 비아크 인근에서 전투를 벌여 제 27 구축대 사령관 시라하마 대령이 전사했고, 시라쓰유, 사미다레, 시끼나미 등 3척의 구축함이 크게 부서졌다.

6월 10일, 연합 함대는 곤(渾)부대에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 제2 어뢰전대의 순양함 노시로와 구축함 2척을 보강하고, 지휘관에 제1함대 사령관 우가끼 중장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 미국 기동함대가 괌섬의 동북부에 나타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고, 이튿날에는 마리아나에 대공습이 퍼부어졌다. 결국 곤(渾)작전은 중지되고, 함대는 귀환 명령을 받았다.


한편 제 1 항공함대에서 파견된 480기의 전력은 탑승원들 대부분이 말라리아에 걸렸고, 기지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으로 반수의 비행기가 파손되는 등 엉망이 되었다. 이 부대 또한 11일 아침 비아크에 마지막 공격을 가한 후, 마리아나로 돌아갔다.

 


- 마리아나 기습 -

일본 지휘부가 비아크 섬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미국의 제 2, 3, 4 해병사단, 제 1해병여단, 육군 제 27사단 등 127,571명의 공격 부대와  535척의 대함대가 약탈자 작전(Operation Forager)이라 이름붙인 마리아나 침공 작전을 위해 진주만을 떠났다. 이들의 호위는 미쳐(Marc Mitscher)중장의 제 58 기동함대가 담당하였다.

5월 31일, 트럭에서 출발한 일본 정찰기는 마샬 제도에 수송선단을 포함한 대규모 기동함대가 정박중임을 발견하였는데, 연합함대 지휘부는 이 전력이 비아크에 증강될 병력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함대는 6월 10일,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로타, 티니안 섬의 일본군 기지에 공격을 퍼부어 150기의 항공기를 파괴하였다. 일본의 예상을 완벽히 벗어난 신출귀몰한 기습이었다.

티니안에 사령부를 둔 제 1 항공함대는 전력 태반을 비아크 지원을 위해 파견해둔 상태였다. 맹렬한 반복 공습으로 마리아나의 일본군 기지들은 순식간에 무력화되고 말았다.

자신만만한 미군 기동함대는 사이판에서 불과 80해리 떨어진 지점까지 전진하여 12일에는 사이판과 티니안에 함포 공격을 퍼부었다.

도쿄의 대본영과 연합함대 사령부는 대혼란에 빠졌다. 마리아나를 구원할 것인가? 비아크 작전을 계속할 것인가? 양자간의 의견 대립으로 부질없이 시간만 흐르고 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사이 사이판과 티니안에는 함포 사격으로 막대한 강철의 비가 내려, 섬 전체가 황토밭으로 변해갔다.


함포사격으로 폐허가 된 사이판의 CHARAN KANOA

사실 일본군 수뇌부는 미군이 언젠가 이 방면으로 진격해 올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방비가 단단하기 때문에 단기간내에 쳐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안이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1944년 5월 2일, 황궁에서 열린 작전 회의에서 시마다 군령부 총장은 일왕에게 아래와 같이 보고하였다.
"마리아나 제도 공략에 대해서는 미군측도 상당한 희생을 각오하고 있을 줄 압니다. 더구나 공략 후의 확보가 용이하지 않을 것이므로 먼저 우리측의 항공병력을 소모시킨 다음에 작전을 개시할 것으로 압니다."

이어 육군 참모차장 우시로꾸 또한 마리아나 방위에 대해 호언장담을 늘어놓았다.
"뉴기니와 트럭의 방비에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마리아나해역에는 이미 상당한 수비병력을 배치해 놓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특히 5월 중순 이후 수송할 예정인 제 34사단이 상륙하고 나면 적의 공략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도죠 히데키가 다시 장담하였다.
"사이판은 난공불락이다."

그러나 미국에게는 마리아나를 빨리 공격해야할 이유가 있었다.

첫째, 마샬 제도와 트럭섬, 마리아나를 공격해본 결과, 뜻밖에도 일본 항공대의 저항이 약하다는 점을 간파했다는 점이다.

둘째, 3만 피트 이상의 고공을 날아 일본 본토를 폭격할 잠재력이 있는 B-29 폭격기의 등장이었다. 미 육군 항공대 사령관인 아놀드 장군은 1943년 11월 일본 본토 공격 계획을 수립하고,  B-29로 일본 본토까지 폭격할 수 있는 행동반경 내의 태평양 기지 후보를 물색하였다. 그 결과 낙점된 것이 사이판 섬이다.

아놀드 장군이 사이판 공략을 제의하자 통합 참모 본부는 즉시 이 계획을 지지하고, 1944년 3월 11일, 니미츠에게 마리아나 제도의 공략(6월 15일)을 명령했다.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B-29가 출발한 기지도 마리아나의 티니안섬이었다.


6월 13일, 연합함대는 곤(渾)작전을 중지시키고, 전군에 대기명령을 내렸다.

6월 14일 오전 8시, 타우이타우이에 주둔해 있던 제 1 기동함대는 닻을 올려 일렬종대로 태평양으로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산 베르나디노 해협(San Bernardino Strait)을 감시하던 필리핀의 연합군 게릴라 정찰대원에게 발각되어 이 정보는 바로 연합군 사령부에 보고되었다.

오후 6시 22분에는 미 잠수함 Flying Fish가 일본군 함대를 발견했고, 7시 20분에는 또다른 미잠수함 Seahorse가 제1기동함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급히 북상 중이던 제 1 전대를 발견하였다.


6월 15일, 미군은 엄청난 수량의 상륙주정을 동원하여 사이판섬에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사이판 상륙 정보를 확인한 연합 함대는 오전 7시에 아호작전(あ号作戦)을 발동하였고, 오전 8시에는 제 1 기동함대의 기함 다이호의 마스트에 결전의 Z기가 게양되었다.

오후 4시에는 곤(渾)작전에 동원되었던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 등의 제 1 전대가 본대에 합류하였고, 이후 제 1 급유대의 유조선들이 전체 함대에 연료 보급을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군의 연료 사정은 극히 열악해진 관계로 제 1기동함대는 선박용 중유가 아닌 타라칸 연료유(Tarakan fuel oil)라고 불린 원유를 보급받았는데, 이 기름은 보르네오 섬 북동쪽의 타라칸 유전에서 채취하여 불순물만 제거한 상태의 원유였다.

이 때 제 2급유대가 후속 보급을 위해 북쪽으로부터 제1기동함대에게 접근하고 있었는데, 잠복중이던 미 잠수함 Cavalla가 이를 발견하고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좌로부터 5함대 사령관 Spruance, 해군 작전부장 Ernest King, 태평양 함대 사령관
Chester Nimitz

일본군 기동함대의 움직임을 손바닥보듯이 여러 경로를 통해 보고받은 스프루언스 제독은 일단 18일로 예정되었던 괌섬 공략을 연기하고, 사이판 앞바다에 몰려있던 함정들에 대피명령을 내렸다.

이제 스프루언스는 접근중인 일본 함대를 맞아 서쪽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마리아나 근해에서 일본 함대의 접근을 기다리느냐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신중한 성격의 스프루언스는 서쪽으로 일본 함대를 찾아 나설 경우, 혹시 일본측 함대가 크게 우회하여 사이판의 상륙 교두보를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질까 우려하여 후자를 선택하기로 하였다.


6월 17일, 미국의 제 58 기동부대는 전투 대형을 갖추어, 제 7 전함 전투단(TG 58.7)이 서쪽으로 전진 배치되었다.

저녁 9시, 일본군의 제 2급유대를 따라다니던 미 잠수함 카발라는 팔라우 북쪽에서 제 1기동함대의 본대를 발견했다. 카발라는 제 1기동함대의 위치를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타전하고 일본함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해역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Albacore를 비롯한 4척의 잠수함들은 일본함대가 통과할 것으로 예상되는 길목에 매복하였다.


마리아나 해역에 진출한 오자와 중장은 야마토, 무사시, 공고 등의 전함과 치토세, 지요다, 즈이호 등 3척의 항모를 중심으로 한 구리다 중장의 제 2 함대에게 주력 부대의 160km 전면에 진출하여 미 함재기의 공격에 대비한 방벽을 형성할 것을 명령하였다.

갑호부대와 을호부대는 서로 8km 떨어진 곳에서 각각 원형진을 구성하였다.


일대 결전을 앞둔 양측 함대의 전력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미합중국 제 5 함대

항공모함 7척
경항공모함 8척
전함 7척
기타 79척,
잠수함 28,
항공기 956기


일본제국 연합함대

항공모함 5,
경항공모함 4,
전함 5,
기타 43,
함재기 450기,
지상 기지 항공기 300기


전력면에서는 일본측이 상당히 열세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일본군의 항공기들은 항속거리가 전반적으로 미군기들보다 길었고 오자와 지사부로 사령장관은 상대 기동 함대의 사정거리 밖에서 공격하는 Out-range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1944년 6월 18일 아침 5시 32분, 미국의 정찰기들이 항공모함을 출발하기 시작하였다. 오전 6시에는 서쪽의 일본 연합 함대에서도 정찰기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8시 이후, 양측 정찰기들이 상공에서 조우하여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서로 상대방 함대의 위치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12시경, 연합 함대의 1차 정찰기들이 돌아오고 2차 정찰기들이 다시 동쪽으로 날아올랐다.
오후 3시 14분, 일본 정찰기에 미 제 4 항공모함 전투단이 발견되었다. 오후 4시에는 제 7 전함 전투단의 위치도 파악되었다.

오자와는 즉시 공격을 가해야한다는 일부 참모들의 의견을 거부하고, 다음날 일찍 공습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제 2 함대 소속의 3 항공전대 사령관 오바야시 소장은 오자와 사령장관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독단으로 휘하의 함재기들에게 출격명령을 내렸고, 오후 4시 37분 전투기와 뇌격기로 구성된 공격대가 출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직후 기함인 치토세에 오자와 제독의 명령이 하달되었고, 오바야시 제독은 공격명령을 철회하고 공격대를 다시 불러들였다.


Marc Andrew "Pete" Mitscher

한편 미국측에서는 제 58 기동함대 사령관 미쳐(Marc Mitscher) 중장이 제 5 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에게 접근중인 일본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스프루언스는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일본함대를 찾아서 사이판 섬의 교두보를 버려두고 이동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초조해진 미쳐 중장은 19일 새벽 2시 18분, 정찰팀들을 서쪽으로 다시 날려보냈다. 함재기들 외에도 장거리폭격기와 비행정들도 일본 함대를 찾아 필리핀해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이들 중 B-24 리버레이터 한대가 일본 함대를 발견하고 즉시 경고를 발했다. 그러나 이들의 보고는 어찌된 영문인지 제 5함대에 전달되지 않았다.

한편 일본측도 트럭 섬과 팔라우 섬 등지에서 정찰기들이 날아올라 밤사이 이동할지도 모르는 미 함대를 감시하고 있었다.

19일 새벽 4시 30분, 오자와는 제 3함대의 정찰기들을 동쪽으로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5시 15분에는 갑호 부대에서 다시 정찰기가 날아올랐고, 5시 25분에는 을호부대에서도 정찰기가 출격하였다.

오자와 지사부로는 미국 함대의 위치를 짐작하고 있었으며, 사이판 교두보를 쉽게 떠나려 하지 않으리라는 스프루언스의 속마음까지 짐작하고 있는 상태였다.

19일의 아침 5시 42분,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전 6시, 미군의 함재기들이 괌섬의 오로테 비행장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아침 6시 19분, 스프루언스는 제 58 기동부대에게 서쪽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바람의 방향이 동쪽에서 불어온 관계로, 함재기들이 출격할 때마다 항공모함들은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최고속도로 기동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아침 7시 30분, 연합함대 제 2 함대를 떠난 정찰기들이 미함대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58 기동 부대중 선두에 섰던 하릴 제독의 제4항공모함전투단(TG 58.4)과 리 제독의 제7전함전투단(TG 58.7)이었다.

이때 연합함대 제 2 함대와 미함대간의 거리는 대략 480km였다.

오자와는 즉시 전 함대에 출격 준비 명령을 내리고, 정찰기들이 미 함대의 나머지 그룹들을 모두 발견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 3 항공전대 사령관 오바야시 소장은 다시 독단으로 자신의 지휘아래 있는 제 653 비행대에 출격명령을 내렸습니다.

오전 8시, 폭격을 이끌 선도기 2대가 항공모함을 이륙했고 25분 후, 64기(제로센 14기, 제로센 폭탄 장비 43기、텐산(天山) 7기)의 일본군 1차 공격대가 미함대를 향해 출격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자와 사령장관은 격노했지만, 이미 출격한 공격대를 다시 불러들이도록 하지는 않았다. 대신 오자와는 정찰기의 추가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 갑호 부대에 소속된 제 1 항공전대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다.

오전 8시 57분, 128기(제로센 48기、혜성(彗星) 53기, 텐산 29기)의 2차 공격대가 항공모함을 날아올랐다.

그러나 오자와는 이때 제 1 항공전대의 모든 항공기를 일거에 출격시키지 않고, 기함 다이호와 즈이가꾸에 실려있던 함재기들만 출격시켰다. 쇼가꾸에서 대기중인 함재기들과 을호 부대에 소속된 제 2 항공전대 소속 함재기들은 제 3, 제 4의 순으로 출격할 예정이었다.

역사가들은 이때 오자와가 함재기들을 집중하여 단 한번에 날려보냈다면 더 나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지 않을까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물론 결과 자체가 뒤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쨌든 공중전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의 열쇠인 선제 집중의 기회는 일본이 먼저 쥐게 되었다. 출격 보고를 받은 연합함대 사령부는 쾌재를 부르며 기뻐했다. 이로써 미국 기동 함대를 완전히 포착 섬멸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출격 명령이 떨어지자 공격대의 사기는 충천했으며, 모든 승조원들이 갑판으로 나와 출진하는 승무원들을 전송했다. 일본군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한편 갑호부대가 함재기의 출격으로 여념이 없는 순간, 주변 해상에는 미 잠수함 한척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7일 저녁, 다른 3척의 잠수함과 함께 태평양 잠수함대 사령관 Lockwood 제독으로부터 일본함대의 예상 경로에 매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James W. Blanchard 중령 지휘하의 Albacore호였다.

거대한 먹이감에 조심스럽게 접근한 알바코어는 다이호와의 거리가 1,780m에 이르자 시속 50km로 항진 중인 적의 항공모함을 겨냥하여 어뢰를 발사하려고 했습니다.

2차 공격대가 날아오르는 사이 알바코어는 모두 6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이중 한발이 오자와의 기함 다이호의 항공유 탱크 부근에 명중했다. 이 공격으로 항공유 파이프 약간과 연료 파이프가 파괴되었고, 전방 엘리베이터가 파손되었지만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고 함정의 속도만 약간 느려졌다.

따라서 다이호는 공격대의 발진을 계속했고, 출동한 손상 관리반은 통로에 쏟아진 항공유와 함정용 연료를 제거하고 손상된 항공유 파이프와 함정연료 파이프를 보수했다. 그리고 우현 전방 항공유 탱크에 있던 항공유들을 다른 항공유 탱크에 완전히 이송시킨 후 피격 지점부근으로의 항공유 흐름을 완전히 차단했다.

문제는 함정연료용 파이프였는데 함정연료 시스템은 항공유 시스템과 달리 특정부분의 흐름을 차단할 수가 없었다. 손상관리반은 피격지점의 함정연료시스템에 대하여 꼼꼼하게 피해조사를 실시했는데 파괴된 부위 이외에는 연료가 새어나온 곳은 없었다.

문제는 피격시의 충격으로 인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이 생기거나 이음새가 느슨해져서 그 곳으로부터 연료에 포함된 휘발성 가스가 새어나오는 사태였는데 이것만은 손상관리반도 어떻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다이호의 손상관리반은 적어도 당장은 큰 위험이 없다고 판단하고 통풍장치를 가동했다. 하지만 피격지점 부근의 함정연료시스템에서는 어디선가 타라칸 연료유에 포함되어 있던 휘발성 가스가 계속 새어나오고 있었고 이 가스는 통풍장치를 통하여 함내 구석구석에 뿌려져서 점차 축적되기 시작했다.



- 거대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The Great Marianas Turkey Shoot) -


한편 갑호 부대에서 출격한 2차 공격대가 160km 전방에 있던 동방에 있던 제 2 함대의 상공을 통과하던 중 오인 사격을 받아 2기의 항공기가 격추되고 8대가 손상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오전 10시, 미 제 58 기동 부대 소속 제 7 전함 전투단(TG 58.7)의 전방 20km 지점에 위치한 2척의 레이더 경계용 구축함으로부터 '240km 거리에서 적기 발견'이라는 보고가 58 기동 함대에 도착했다.

제 2 함대를 떠난 일본의 1차 공격대였다.

오전 10시 5분, 미쳐 제독은 제 58 기동부대의 모든 전투기들에 이륙준비를 명령했고, 모든 폭격기와 뇌격기는 즉각 항공모함을 떠나 괌 섬의 일본군 비행장들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괌 섬의 오로테 비행장을 공격중이던 헬켓에게 즉시 귀환할 것을 명령했다.

오전 10시 19분, 항공모함 갑판에서 대기중이던 헬캣에게 이륙명령이 떨어졌다.
오전 10시 23분, 헬캣들이 항공모함에서 이륙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58 기동 함대는 함재기들의 이륙을 돕기 위해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같은 시각, 일본측의 3차 공격대가 출격했다.


10시 25분, 상공 경계 임무를 맡고 있던 11대의 헬캣이 일본 공격기들을 발견하고, 즉각 요격에 들어갔다.

위치는 제 58 기동부대의 전방 110km 지점이었다.

오전 10시 40분, 150대의 헬캣이 추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공중전은 미해군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공중전의 항적

전투기의 숫자와 성능, 조종사의 기량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일본군은 제로 전투기의 2/3가 함정 공격용으로 60kg 폭탄 2발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공중전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미군기들이 일본기들 속으로 뛰어들면 일본기들은 대항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제각기 흩어져서 도주하다가 차례로 격추되었다. 필사적으로 미함대의 상공까지 도달한 일본기들은 함정에서 날아오르는 막강한 대공포격에 대부분 격추되었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뇌격기 한대가 전함 사우스다코다에 한발의 폭탄을 명중시켜 27명의 전사자를 발생시켰다.

1차 공격대는 전체의 2/3인 41기(제로센 8기、제로센(폭탄장비)3기、텐잔(天山) 2기)를 잃었다. 반면 미군의 피해는 헬캣 1대의 격추가 전부였다.

오전 10시 57분, 일본기가 모두 물러나자 제 58 기동부대는 서둘러 전투기들의 재무장과 보급을 실시했다.

오전 11시 7분, 전방의 경계 구축함으로부터 새로운 적기들이 접근 중이라는 경보가 울렸다.

일본군의 제 2차 공격대였다.

11시 30분, 일본 함대는 최후로 83기의 제 4차 공격대가 발진시켰다.

오전 11시 39분, 일본의 제 2차 공격대와 핼켓이 교전에 들어갔다. 공중전의 양상은 1차 공격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11시 50분, 제 7 전함 전투단(TG 58.7)의 순양함 1척이 폭탄 1발에 명중되어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

12시에는 제 3 항공모함 전투단(TG 58.3)과 제 2 항공모함 전투단(TG 58.2)에 일본기가 접근하여 공격을 시작하였고, 항공모함 벙커힐에 2발의 폭탄이 명중하여 3명이 전사하였다.


공격받는 USS Bunker Hill

일본군 제 2차 공격대는 전체의 3/4에 해당하는 99기(제로센 17기, 폭탄 장비 제로센 25기, 텐잔7기)의 항공기가 격추되었다.


한편 12시 20분, 미 잠수함 카발라가 6발의 어뢰를 항공모함 쇼가꾸에 발사하여 그 중 4발이 명중했다. 항공유 탱크가 폭발하여 치명적인 화재가 발생했고, 오후 3시에 바다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오후 1시, 제 58 기동부대의 북방 90km 지점에서 다시 공중전이 벌어졌다. 일본군 제 3차 공격대였다.
이들은 방향을 잃고, 제 58 기동부대의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비행하다 하릴 제독의 제 4 항공모함 전투단을 발견하고 공격을 가하기 위하여 방향을 남동쪽으로 틀었다. 그러나 곧 40대의 헬캣에게 요격당해 순식간에 7대가 격추되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오후 2시 21분, 일본의 제 4차 공격대가 마지막으로 58 기동부대의 상공에 도착했다. 이들 또한 일방적으로 헬캣에 사냥당해 귀환한 항공기는 9대에 불과했다.
 
5시간에 걸친 4차례의 공중전에서 일본군은 221대의 항공기가 격추되었다. 반면 미국측의 공중전 손실은 29기 뿐이었다.


칠면조를 사냥중인 F6F Hellcat


대전과 보고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연합함대 사령부와 기동 함대 사령부는 할 말을 잃게 되었다. 불행은 여기에서 끝난게 아니었다.

오후 3시 28분, 다이호의 격납고 갑판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동안 새어나온 휘발성 가스가 폭발한 것이었다. 화재는 순식간에 함내로 퍼져나갔고, 오후 6시 28분에 두번째 대폭발이 발생했다. 4분후인 오후 6시 32분, 피격된 지 9시간만에 다이호는 침몰했다.

오자와 사령장관은 구축함 와까쓰끼로 옮겨탔고, 다시 중순양함 하구로에 승선했다.

오후 8시, 오자와는 서쪽으로 철수하였다.


- 미국 기동함대의 역습 -

미국의 58 기동부대는 제4항공모함 전투단(TG 58.4)를 사이판 교두보에 남겨두고 서쪽으로 전진하여 일본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자정 무렵 오자와 함대에 연합함대 사령부로부터 22일을 기해 다시 공세를 취하라는 명령이 도착했다.

이것은 일본의 전쟁 지휘부가 사이판섬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지만, 오자와는 이런 비현실적인 명령에 따라서 함대를 다시 죽음으로 밀어넣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또한 상부의 명령을 전혀 따르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따라서 오자와는 20일, 미함대로부터 충분히 떨어진 거리에서 함대에 급유를 실시하며 연합함대 사령부를 설득하기로 했다..

20일 새벽 5시 30분, 미국과 일본의 정찰기들이 날아올랐다. 그러나 양측 모두 상대방 함대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오후 1시 30분, 미국의 2차 정찰대가 함대를 떠났다.
오후 3시 40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소속 정찰팀이 58 기동부대로부터 480km 떨어진 지점에서 해상급유 중이던 일본제1기동함대를 발견했다.

일본 함대 발견 보고를 들은 미쳐 중장은 즉시 공격대를 발진시킬지 아닐지 여부를 판단해야만 했다. 일본 함대의 위치는 미군기 행동 반경의 한계에 가까운 거리였고, 귀환한 공격대는 야간에 착함을 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마침내 공격을 하기로 결단을 내린 미쳐는 함재기들에 발진 명령을 내렸다.

오후 4시 05분, 216기의 미군 공격대가 항공모함을 떠났다.

한편 오후 1시, 오자와 사령장관은 중순양함 하구로에서 항공모함 즈이가꾸로 기함을 옮긴다.
오후 3시 40분, 미국 정찰기 발견 보고를 받은 오자와는 금일중으로 미 기동함대의 공격이 있을 것을 확신하고 모든 함대에 즉시 급유를 중단하고 전속력으로 분산하여 도주하도록 명령했다.
갑호 부대는 북쪽으로 을호 부대는 북서쪽으로, 제 2 함대는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유조선으로 이루어진 제1, 제2 급유대는 느린 속도로 인해 뒤쪽으로 쳐지게 되었다.

오후 6시 40분, 미 기동부대의 공격대가 마침내 일본 함대의 상공에 도착하였다.
제로센들이 용감히 공격대에 도전해 왔으나 호위 헬캣 전투기들이 손쉽게 제압하였고, 미군 공격기들은 목표를 찾아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먼저 겐요마루와 센요마루 2척의 유조선이 격침되었다.

곧이어 기함 즈이가꾸가 폭탄을 얻어맞았고, 제 2 함대 소속 항공모함 치요다도 폭탄을 맞아 크게 부서졌다.

을호부대의 경항공모함 류호가 소파되고, 항공모함 준요가 대파되었으며 히요가 격침되었다.

6시 40분부터 7시까지 20분 동안 진행된 공격으로 정규 항공모함 1척과 유조선 2척이 격침되었고, 항공모함 1척과 경항모 1척이 대파되었으며, 정규항모 1척과 경항모, 전함 1척이 소파되었다. 요격에 나섰던 제로센들도 65대가 격추되었다.

미군측의 피해는 20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귀환 도중 연료가 떨어져서 추락하는 항공기들이 속출하여 총 216대중 귀환 기체는 116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귀환 도중 추락한 항공기 승무원 209명중 절반에 가까운 163명은 미함대에 의해 구조되었다.


미국 공격대가 물러난 오후 7시, 미함대가 접근해 있을 것으로 여긴 오자와 사령장관은 구리다 다께오 중장의 제 2 함대에 야간 역습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2시간 동안 전진하던 구리다는 결국 미함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연합 함대는 오키나와 방향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21일, 미국측 정찰팀이 다시 일본 함대를 발견했으나 이미 공격 거리를 벗어난 후였다. 그날 저녁 스프루언스의 명령에 따라 미쳐 중장은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극심힌 피해를 입은 연합 함대는 6월24일, 오끼나와를 거쳐 일본 본토로 도착했다.

미 제 58 기동부대는 마리아나에서 잠시 머물다 재정비를 위해 에니웨토코섬으로 향했다.



- 후기 -

필리핀해 해전은 이렇듯 완벽한 미국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미해군에서는 19일 일본군을 쫓아 서쪽으로 나아가지 않은 스프루언스의 지휘가 비판의 도마위에 올랐다.

미쳐는 전투보고서에서 간접적으로 스프루언스를 비판했다.
 
"적은 도망쳤다. 그들이 우리의 공격범위 안에 있을 때 단 한번만이라도 항공공격을 했다면 대단한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연합함대는 침몰하지 않았다."

스프루언스 자신도 결과에 실망을 표시하며 아래와 같이 썼다.

"전술적인 면에서 보면 나는 일본군을 쫓아가서 그들의 항공모함을 공격하는 것이 그들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만족스러웠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막 매우 중요한 대규모 상륙작전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것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미해군 작전부장 킹 제독은 스프루언스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 지역에서 미군부대의 최우선 임무는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는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사이판의 상륙작전부대를 적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했다. 필리핀해 해전으로 전개된 자신의 계획을 수행하면서 스프루언스는 이런 기본적 임무를 올바르게 지켰다."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참모들. 특히 항공 관계자들이 불만을 표시했다.

1944년 6월 태평양함대 사령부 전략개요

마리아나 제도 점령이라는 우리의 목적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지만, 우리가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고 예상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을 단축시킬 수 있었을 지 모르는 결정적 '해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마도 일본군이 전병력이든 일부 병력이든 우리의 제 58기동함대를 공격할 의도나, 사이판에 있는 우리의 함정을 공격할 의도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전제하에 항공모함 및 포함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주력부대가 상륙작전부대와 상관없이 서쪽으로 밀고나갔더라면 결정적인 함대 항공전이 발생하여 일본함대가 격멸되고 전쟁의 종말을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스프루언스가 100년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대해전의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것이었다. 항공관계자들은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는자에게 항공모함을 지휘하도록 맡긴데서 생긴 실수이다'라고 불평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난후 스프루언스의 결정이 합리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부대를 셋으로 나눠 전면에 강력한 전함군을 앞세운 오자와 지사부로의 함공모함을 공격하려면 두번에 걸쳐서 대공포화의 탄막을 헤쳐야만 했고, 아마도 많은 함공기의 손실을 보았을 것이다.


한편 전투가 끝난 시점에서 일본 기동 함대의 함재기 450기는 전투가 끝난 시점에는 35기로 비참하게 줄어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한편 사이판 결전에서 일익을 담당해줄 것으로 여겼던 제 1 항공 함대는 너무 빈번한 주둔지의 이동으로 상당수가 파손된 상태였고, 승무원들 또한 말라리아에 다수가 쓰러지는 등...  정작 19일 괌섬에 집결한 기체는 제로센 15기 등 합계 50대를 넘지 못하는 초라한 전력이었다.

이 한줌의 전력조차 미 기동함대의 공습으로 풍지박산이 나서, 대동아 결전부대라고 호기등등하던 기지 항공대는 필리핀해 해전에서 아무런 역할도 담당하지 못했다.


연합함대가 꼭 구원하러 올 것이라고 믿던 마리아나 수비대는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

사이판 수비대는 7월 7일 최후의 반자이 돌격을 끝으로 전멸했다.

7월18일, 사이판 실함의 책임을 지고 도죠 내각이 총사퇴하고 고이소 내각이 출범하였다.

7월21일, 미해병대는 괌섬에 상륙하였고 7월24일에는 티니안 섬에 상륙하여 마리아나 군도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마리아나는 일본 해군에 있어서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방위선이었다. 

이후 미국의 전략 폭격대는 마리아나에 기지를 건설했고, 이곳을 출발한 B-29들은 일본 본토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가이텐(回天) - 가미카제 어뢰


한편 사이판섬의 일본군이 전멸한지 얼마후 일본 해군 보도부장 구리하라(栗原)소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구리하라의 전황 설명은 극히 비관적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이대로 간다면 패전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군으로서는 전황을 만회할 수 있는 대책은 없는가?"

기자가 묻자 구리하라는 대답하였다.

"한가지 대책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장기로 비유하자면 졸(卒)이 장(將)으로 되는 것이다."

졸이 장이 된다는 것은 레이테 해전에서부터 등장한 고류(蛟龍), 가이류(海龍), 신요오(雲洋), 신까이(雲海), 가이텐(回天) 등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 병기를 말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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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사람 열명을 숙청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된다.


- 니콜라이 예조프 -